제 65화
65화 - 너희들은 아직, 준비가 안 됐다
#1
강화 병사.
그것도 기사들을 본격적으로 강화한 녀석들이었다.
마스터급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전력이었다.
이 시대에 마나를 능숙하게 다루는 기사는 중형 몬스터와 맞먹는 전력이었으니까.
특히 좁은 공간에서의 전투는 기사들에게 상당히 유리했다.
“이런, 함정에 걸렸군요.”
-?? : 그런데 웃고 있네요!
-뭔가 이 순간을 기다리신 것 같은뎈ㅋㅋㅋ
-아재요…….
그는 검을 꺼내며 씩 웃었다.
자작령의 수도, 그것도 보급고 안에 이런 함정을 파 놓았을 줄은 몰랐다.
간이 크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까?
‘이런 녀석들에게 휘둘렸다는 거지.’
문제는 대륙의 절반이 이런 녀석들에게 휘둘리고 있었다는 것.
평화.
안락함은 나태함을 만들었고, 결국 대륙을 나약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자신 같은 피해자가 나온 것이고.
“싹 다 정리를 해야겠군요.”
어깨를 한번 털어 내, 긴장감을 덜어 내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700을 넘어, 이젠 800에 가까운 마나가 들썩였다.
빼낼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원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에 뭔가가 있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했다.
“크아아악!”
“이렇게 이지를 상실한 녀석들은 폐품입니다. 완벽한 실험체는 이런 좀비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아요.”
진짜 완성체는 아무래도 헤시라둔 쪽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공을 들여 완성했으니 대륙을 휘젓고 다니는 희대의 악마가 되었겠지.
드레젠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그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지만.
달려드는 녀석들의 검을 흘리듯 피해 내고 흩뿌리는 검.
그는 어떠한 자세에서도 검에 힘을 담을 수 있는 경지까지 내디뎠다.
“크아악!”
그들은 황금색 피가 아닌, 황금 폴리곤 덩어리들을 바닥으로 뱉어 냈다.
검이 궤적을 그릴 때마다, 기사들은 하나도 피하지 못하고 난도질을 당했다.
언제 봐도 경이로운 검술이었다.
그렇게 몇 번.
결국, 두 다리와 두 팔이 모두 잘린 채 시체가 되어 버린 기사들.
“역시, 뭔가 있군요. 이래서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겠는데요.”
-어떻게 하싈?
-그나저나 얘네는 황금색 덩어리를 흘리네유
[‘검술명가’ 님 1,000코인 후원!]
[깽판 가즈아-!]
후원을 바라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꾸미고 있는 바가 까발려지는 것이었다.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있는데, 스포일러를 해 버리는 것만큼 열받는 상황이 있을까.
“이건…… 좋은 증거가 되겠군요. 여러분. 군노이스 자작령에는 마법사가 많습니다.”
군노이스 자작령은 마법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온 영지였다.
용병 출신이었던 초대 자작이 어려울 때 도와주었던 마법사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점을 좀 이용해 보기로 했다.
“이걸 마법사들에게 가져다주면? 둘 중 하나겠죠.”
-이분 정치하면 잘하실 듯ㅋㅋㅋㅋ
-엌ㅋㅋㅋㅋ 분탕질이다!
-여봐라, 사탄에게 좀 보고 배우라고 전해라~
둘 중 하나의 반응이 나오겠지.
드레젠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사람들이 ‘그 표정’이라고 이름 붙인 기묘한 웃음.
“그럼 재밌는 판을 만들러 가 보죠.”
그는 시체의 갑옷 부분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없는 보급고에 울려 퍼지는 군화 소리가 폭풍 전야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2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남자.
제국력 57년에 ‘군노이스’라는 이름을 잇고 있는 사람.
향년 33세.
다시없을 재능으로 자작령을 이끌고 있는 ‘포베튼 군노이스’였다.
“지금 수도 한복판에서 그따위 일이 벌어지게 놔둬?”
“죄송합니다. 하지만…… 상대는 그 ‘드레젠’입니다.”
드레젠.
그 이름을 왜 모르겠는가.
자작은 빠르게 검을 챙기고 드레젠이 활보하고 있다던 거리로 나갔다.
수행원들과 기사들이 우르르 따라서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감히 내 영지에서 소란을 일으킨다?’
얼마나 잘났는지 그 면상을 한번 보고 싶었다.
마스터에 근접했던 카이렌을 이긴 작자였으니, 실력이야 상당하겠지.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조금 과장된 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곳엔 마탑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본래의 실력은 마스터급이 아니라는 거죠.”
항상 그렇게 말했고, 혜성처럼 등장한 강자에 대한 현실을 외면해 왔다.
하지만 포베튼은 달랐다.
그는 용병 출신이었던 조부를 떠올렸다.
거인 같은 체구와 엄청난 완력으로 전장을 지배했던 사나이.
-강자는, 언제나 근처에 숨어 있단다.
-그러니 항상 정진을 멈추지 말거라. 가장 평범해 보이는 이가, 가장 위험한 자들이란다.
드레젠은 이전까지 행적이 묘연한 용병이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틀리면 정면 승부까지도 생각해야 했으니까.
#3
“당장 무기를 내려놓고 멈춰라! 자작님의 행차이시다!”
거리의 한복판.
황금색 폴리곤 덩어리가 뚝뚝 떨어지는 시체를 들고 있는 드레젠의 주변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있었다.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경계 어린 눈빛. 몇몇은 소름이 끼치는지 눈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오셨구만.”
“하시스 성의 성주가 이렇게 무례하다는 얘기는 들어 보질 못했는데 말이오.”
인파를 헤치고 나오는 자는 드레젠보다 머리 하나는 큰 거구였다.
카이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마나가 느껴지기도 했다.
상당한 실력의 가사들이 그를 호위하고 나섰다.
드레젠은 말하지 않아도 그가 군노이스 자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연히 이런 걸 발견했는데 말이지. 무례하다기보단 고마워해야 할 거야.”
텅-! 소리와 함께 팔다리가 없는 시체가 데굴데굴 굴렀다.
바람에 벼려진 고드름처럼 시린 눈동자를 한 군노이스 자작.
시체를 바라보자 이상한 점을 바로 알아챘다.
“흑마법? 아니…… 실험체로군.”
“수상한 점을 쫓아오다 보니, 이런 게 나오더라고.”
“아니, 그렇게 속단할 문제가 아닌 듯하오만. 하시스 성의 성주께서 꾸민 일이라면 얘기는 달라질 것 아니오?”
드레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정치적인 상황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드레젠의 말주변은 어디 가서 밀릴 수준이 아니었다.
‘편의점 진상도 말로 참회시킨 나라고.’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자부심을 느끼며, 그가 말했다.
“그럼 내가 왜 카이렌을 토벌했을까? 마탑에 의뢰까지 맡기면서.”
“……그렇다는 말은, 본인의 영지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까?”
포베튼 자작의 인상이 가히 좋지 않았다.
당연했다.
노골적으로 자신의 영지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기분 좋을 주인이 어디 있겠는가.
자존심은 자존심이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문제였다.
당장 부족한 점이야 개선될 여지가 충분히 있었으니까.
“그렇지. 이참에 마탑 지부에 조사를 맡겨 보는 건 어떤가? 나도 참관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옆에 있던 마법사 한 명이 자작에게 물었다.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물러서자니 영지민들의 민심이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드레젠의 말대로 하자니 군노이스 자작령의 체면이 서지 않았다.
“나는 보고만 받겠소. 우리 영지에서 불경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명백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본 영주는 다른 업무에 힘을 쓰겠소.”
-교묘하게 빠져나가누
-영주 말 잘하네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 증거만 있으면 되는 건가?”
“그렇소.”
그렇게 하기로 했다.
시체는 마법사들이 수습했다.
군노이스 자작은 나름 적절한 대안을 내놓았다.
드레젠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럼, 당분간 신세 좀 지겠소이다.”
“그러도록 하시오.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으면 좋겠구려.”
“걱정하지 마시길.”
그가 과장된 예를 취하고 걸음을 옮겼다.
포베튼 자작은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내 성으로 돌아갔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자, 몰렸던 인파가 사라졌다.
그들 중에서는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었다.
“지금 몇 명을 관찰했는데, 상당히 다급해 보이더군요.”
-?
-??
-롸?
-옣?
당연히 시청자들은 그걸 알아보지 못했다.
엄청난 인파였다.
빽빽하게 들어찬 인파는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걸 다 파악했다고?
“저도 다 파악한 건 아닌데, 몇몇 방향을 봐 뒀습니다. 오늘 밤에 한번 추적해 보죠.”
-이분은 인간이 아닐 거임
-설마 우리가 게임을 안 해서 못 알아채는 걸까?
-ㄴㄴ 게임이랑 현실이랑 별반 다르지 않던뎈ㅋㅋㅋ
“뭐, 어쨌든 개입은 최대한 없는 것이 좋겠죠. 지금 제가 바라는 상황까지는 잘 왔습니다. 그나저나 하시스 성이 조금 걱정되는군요.”
적들의 선택지가 몇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은 알아채고 있었다.
문제는 적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선택지는 보이는데, 답을 모르는 상황이랄까.
그가 우려하는 일은 한 가지였다.
“녀석들이 범람을 미리 일으킨다면, 조사는 조금 늦어질 수밖에 없겠죠.”
지금 범람을 막을 수 있는 인재는 많았지만, 그들은 나중을 위해 아껴 둬야 했다.
부디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길 바라는 중이었다.
“그럼, 마법사들을 따라가 봅시다.”
#4
마법사들은 신속하게 일을 처리했다.
제일 먼저 시체를 옮기기 쉽게 천으로 감싼 다음, 마법을 이용해서 둥둥 띄웠다.
마법사들이 연구에 미친 족속들이라고 한들, 시체를 보는 것은 꺼려 했다.
“인계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머진 마법부에서 조사하겠습니다.”
마탑 지부와 협력하고 있는 또 하나의 집단.
그것은 군노이스 자작령의 마법부였다.
서로서로 지부에 수행원들을 파견한 채, 정보 교류를 하는 사이였다.
그들은 시체를 연구실에 옮겨 둔 후, 조용히 천을 거뒀다.
“실종됐던 기사…… 맞군요.”
“멍청한 녀석.”
이번 일을 총괄하게 된 마법사 한 명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데릭.
그리고 숨겨 놓았던 기사들.
이것들은 모두 명백한 증거들이었다.
“영주님이 잘 대처하셨지.”
“하지만 그는…… 드레젠입니다.”
“마탑주의 후광을 등에 업은 자일 뿐이다. 그에 관한 자료들을 맹신하지 마라.”
적에 대한 파악은 상당히 중요했지만, 그렇다고 과잉 해석할 필요는 없었다.
부풀려진 소문이 만들어 내는 공포감은 사기만 잔뜩 떨어뜨릴 테니까.
마법부의 남자가 시체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다.
‘위에서 보면 난리가 나겠구만.’
지금 그가 따르고 있는 자들은 위험한 집단이었다.
큰 그림을 위해서 사소한 티끌 하나도 놓치지 않는 집단.
이번 사태는 상당히 큰 획이 될 것이다.
마법사는 마법을 이용해 흑마법의 잔재를 깨끗이 지워 내려고 했다.
하지만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하마터면 간이 저승으로 처박힐 뻔했다.
“공정하게 처리하는 거, 맞지?”
천장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
그곳에는 박쥐처럼 매달려 있는 드레젠이 히죽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