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화
53화 - 영입
#1
엄청난 관심을 받는 환수.
영광과 명예를 얻고 있는 하얀빛 와이번을 바라보며, 이졸데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날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기에, 더더욱 한숨이 짙어졌다.
저 영광이 나에게로 왔다면.
‘나도…….’
나도 성공할 수 있었으면.
특별한 힘을 가질 수 있었으면!
지금 저 자리에서 칭송받고 있는 자는 바로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 이상 이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젠장.”
이졸데는 시야가 뿌옇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마탑에 왔지만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무시했고, 엄청난 숫자의 업무량이 그녀를 죽일 기세로 덮쳤다.
“어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일 남지 않았어?”
“……얼른 처리하겠습니다.”
“아주 빠져 가지고……. 저런 거 구경할 시간에 빨리 일이나 더 해.”
“예.”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어가는 이졸데.
눈물 대신 흘러내리는 한숨을 참지 않으며 마탑의 지하로 향했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쿨레드 역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막내의 신분.
몰락 귀족이라는 타이틀.
그가 더벅머리에, 퀭한 눈동자를 한 것도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저런 게 뭐가 좋다고…….”
“야, 괜히 부러워하지 말고 일이나 더 해라.”
“알겠슴다~.”
의욕이 전혀 없는 목소리였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는 이가 없었다.
그가 처리하는 일은 확실했으니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도구들.
“후…….”
이걸 언제쯤 처리할까.
왜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걸까.
더벅머리를 긁적인 그가 다시 서류 더미로 파묻혔다.
쿵-.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서류의 산이 도착했다.
“이것도 부탁한다.”
“예~.”
그는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조용히 펜을 움직였다.
마탑에서 엄청난 양의 서류를 처리할 수 있는 까닭은 마법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절로 움직이는 필기구들, 여기저기서 통신하는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오직 한 테이블.
가장 많은 작업을 하고 있는 쿨레드의 탁자에서만 마법 도구가 움직이지 않았다.
“후…… 빌어먹을 세상 같으니.”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는 마음과 생각을 비우고 멍하니 작업에 몰두했다.
#2
드레젠은 남은 시간을 체크했다.
아직 제법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합방을 한 것은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
이것저것 이동한 시간까지 합치면 약 두 시간 정도가 걸렸다.
“자, 여기 있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그나저나…… 누굴 그렇게 찾는 겐가?”
등록증을 건네주며 아시르가 물었다.
드레젠은 마탑에서 일하고 있는 두 사람을 떠올렸다.
쓸쓸하고, 우울함이 가득 묻어나는 걸음걸이.
절망 속에서 다시 기계처럼 일해야 한다는 운명이, 그들을 세차게 짓누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장 말단 두 명이죠. 제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명심하게. 저들을 꼭 지켜야 하네.
과거의 아시르는 이졸데와 쿨레드를 끔찍이도 아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한 그때의 자신을 한탄하면서.
그렇기에 드레젠은 지옥에서 그들을 미리 빼내 주기로 했다.
“지금 아주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는 두 사람이기도 하죠.”
“그런가? 마탑에는 그런 자들이 많이 있겠지. 모두 보살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한이네.”
“제가 두 명만 미리 구제해도 되겠지요?”
아시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은 수많은 사람들이 나가고, 들어오는 곳이었다.
두 사람이 없다고 마탑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시르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렉스, 조금 더 쉬고 있어.”
[알았다.]
드레젠은 다시 사람들 틈바구니로 사라졌다.
지옥에서 구원을 기다릴 두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와씨 마탑이라고 다른 건 아니었구만;;
-진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ㅜㅜ
-짠하누ㅜㅜ
드레젠은 손님, 그것도 귀빈의 신분으로 마탑의 지하로 향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미 마탑주가 모두에게 언질을 줘 두었기 때문.
그야말로 신위에 다다른 마법 응용법이었다.
“귀빈이시군요.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지하에는 마탑의 연구소가 있었다.
연금술사들이 연구를 진행하는 곳.
다양한 피조물들을 만들고, 인류를 지킬 병기들을 만드는 곳이었다.
뚱한 표정으로 실험을 바라보고 있는 이졸데.
드레젠은 그녀를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 골렘이라는 것은 말이야, 정말 섬세한 친구들이야. 애완동물 다루듯 사랑스럽게 대해 줘야 한다고.
-멍청한 공학자 놈들은 이 골렘을 도구 취급하지. 그러니 감응이 제대로 나올 리가 있나.
적어도 골렘에 한에서는, 그녀는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지식과 활용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제작하는 골렘들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어딘가를 지키거나, 아니면 파괴하거나.
골렘은 든든한 방호벽이었으며 적을 분쇄하는 공성 병기였다.
“이봐.”
“음? 당신 뭐죠?”
-와우;; 눈빛 보소
-독기에 찌들었네 그냥ㅋㅋㅋ
-일단 참교육 각인디;;
시청자들의 말처럼, 그녀의 눈빛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매사에 경계 어린 시선을 보내는 그녀.
항상 불만이 많아 보이는 표정은 덤이었다.
드레젠은 그녀의 옆에 서며 골렘 제작 현장을 바라봤다.
수많은 용액들이 연구원의 손에 들려,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스톤 골렘. 강철 주괴 100kg과 자수정 가루 10스쿱, 다이아몬드 하나…….”
“…….”
스톤 골렘.
양산형으로 제작할 수 있는 골렘이었다.
광석 따위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상위 단계인 아이언 골렘보다 훨씬 무른 몸체를 가졌다.
양산형으로 취급되어 온 만큼, 취급이 별로 좋지 못한 골렘이었다.
“하지만 저 방법은 틀렸어. 그렇지 않나?”
“뭐?”
이졸데의 표정이 변했다.
처음에는 적개심, 다음에는 귀찮음, 이제는 놀라움이었다.
스톤 골렘의 레시피는 이미 정석과 왕도가 있었다.
이런저런 실험을 많이 거쳤지만, 더 이상 성능 개선은 없는 것으로 여겨졌으니.
하지만 이졸데의 생각은 달랐다.
“저 스톤 골렘은 미완성이야. 훨씬 깊고 넓은 가능성을 품고 있지.”
“당신 대체 정체가 뭐, 뭡니까?”
드레젠은 피식 웃었다.
이 공식은 바로 이졸데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멍청한 공학자들은 재료의 가능성을 멋대로 정해 버린다면서, 항상 재료들의 숨겨진 가능성을 찾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왜 무기물끼리만 섞으려 하는지……. 안 그래?”
“마, 맞아요. 조금 더 개선할 수 있을 텐데…….”
이졸데는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그녀는 드레젠과 쉽게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왜?
조금 전까지 그를 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욕한 상대가 눈앞에서 친한 척을 한다면, 언짢지 않은 자가 어디 있을까.
“내가 성 하나를 인수했는데 말이야, 같이 일할 사람들이 필요해.”
“혹시 저를 데려가시려는 건가요?”
“맞아.”
간단한 말에 이졸데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보통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다니고 있는 마탑이었다.
일개 성주가 마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저는…… 아직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난 자네가 꼭 필요한데. 내 성에는 병력이 부족하니까, 골렘이 좀 많이 필요하거든.”
“전 골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요.”
드레젠은 피식 웃었다.
이런 상태였구나, 새삼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졸데는 자신감 넘치고 무능한 자들을 매몰차게 다루던 여인이었다.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으니, 지금 상태가 영 어색했다.
“스톤 골렘이 미완성인 걸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어. 적어도 마탑 내에서는 자네 한 명일 테고.”
“……그래요, 만약 저를 인정하셨다고 쳐요. 그런데 어떻게 빼내실 거예요?”
“짐 싸라.”
-쿨한 거 보솤ㅋㅋㅋㅋ
-하긴 마탑주가 허락했는뎈ㅋㅋㅋ
-시원시원하누
-마! 짐 싸라!
이졸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드레젠을 쳐다봤다.
드레젠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마탑주가 허락했다. 자넬 데려가는 데 걸릴 것은 아무것도 없어.”
“…….”
입술을 뻐끔거리며 무어라 할 말을 찾았다.
그 멍청한 표정이, 과거의 일을 생각나게 해 주었다.
그녀의 빛은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드레젠의 생각은 확고했다.
“가서 짐 싸라. 한 명 더 데려갈 거니까.”
“아, 아니! 잠깐만요!”
그녀의 큰 목소리에 실험하고 있던 자들이 모두 쳐다봤다.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이졸데의 현 위치를 잘 알게 해 주는 것들이었다.
“야! 거기서 뭐 하고 있냐? 어?”
“하, 이 새끼가 또 빠져 가지고……. 또 처맞고 싶냐?”
이졸데의 어깨가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강한 압박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드레젠은 손을 한번 휘저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이 친구는 내가 고용해서 말이야. 인사 발령이다.”
“넌 또 뭐야?”
“드레젠. 하시스 성의 성주. 마탑주의 손님. 그리고…… 이졸데 스테틱의 새 주군.”
마나를 실어 강하게 압박했다.
고작 연구나 하는 자들은, 실전에서 벼려지고 단련된 드레젠의 기백을 이길 수 없었다.
전혀 현실성이 없는 내용들이 귓가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드레젠…… 당신이, 그 드레젠?”
“빨리 짐 싸러 가라.”
모두가 멍하니 그들을 쳐다봤다.
드레젠은 태연하게 걸어서 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이졸데에게 우악스럽게 달려들었을 선배 연구원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드레젠.
그 석 자가 주는 영향력은 마탑주와 동일했으니까.
‘뭐야, 진짜 가도 되는 거야?’
이졸데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슬쩍슬쩍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뭐 하고 있어, 빨리 움직여!”
결국, 선배 연구원 한 명이 멈춰 있던 작업을 재촉했다.
그들 처지에서는 허드렛일을 하는 소모품 한 명이 없어질 뿐이었으니까.
당장 바쁜 분위기와 드레젠의 이름, 마지막으로 마탑주의 귀빈이라는 무게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와앀ㅋㅋㅋ드레젠 개 멋있누
-나도 저런 상사가 데려갔으며누ㅜ
-진짜 지려 버렸닼ㅋㅋㅋ
시청자들 역시 드레젠의 거침없는 행보에 감탄을 내뱉었다.
이졸데는 터벅터벅 자신의 숙소로 걸어가며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드레젠은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곳으로 향했다.
“여기 쿨레드라고 하는 자가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드레젠은 대답을 듣곤 행정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종이와 필기구,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드레젠을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업무를 위해 다시 바삐 움직였다.
“무슨 용무……입니까?”
퀭한 눈.
더벅머리.
구부정한 허리.
축 처진 어깨와 깡마른 체격.
쿨레드였다.
드레젠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 내 동료가 돼라.”
“네?”
다소 무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