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화
37화 - 이 성은 이제 제 겁니다
#1
와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따스한 느낌에, 크리스는 눈을 슬며시 뜨고 주변을 바라봤다.
다시 한 번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최고다!”
“멋진 검술이었다!”
“제법 하는데, 꼬맹이!”
-엌ㅋㅋ지렸누
-천재는 천재넼ㅋㅋㅋ
-저 쉑 재능충이었어;;
드레젠은 치열한 공방을 나누면서 흘끔, 채팅 창을 쳐다봤다.
내용을 확인한 후, 슬쩍 웃을 수 있었다.
카이렌 역시 상황을 파악했는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비록 투구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맞붙어 있는 검을 강하게 밀어내는 동작에서 감정이 느껴졌다.
“이런이런, 믿었던 부하가 다 죽었네?”
“저 꼬마, 제법이군.”
카이렌은 드레젠이 파괴적인 검술을 사용했다고 보고를 받은 바 있었다.
그것이 아직 페베스 검술인지는 몰랐기에, 한순간 너무나 아름다운 일격을 꽂아 넣은 꼬마의 검술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크리스 님, 정신이 드십니까?”
“으으, 어떻게 된 거야?”
“……아주 훌륭한 일격이었습니다. 순간적인 탈진 현상으로 아웃 처리는 되었습니다만.”
어느새 빠르게 관객석 밑으로 다가온 샤페론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저 멀리, 카이렌 진영을 가리켰다.
아주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멋지게 상대를 처치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크리스는 멍하니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바라봤다.
자신이 상대했던 병사가 기절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입가가 서서히 올라갔다.
짜릿함이 온몸으로 전달되었다.
치유 마법을 걸어 주었던 마탑 소속의 마법사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주 대단했소이다. 멋진 승부였소.”
“아……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환호와 갈채를 보내 주었다.
크리스 역시 이따금 구경했던 장면이었다.
어렸을 때, 자신이 저 위에서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었던 기억이 났다.
이제는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된 사실이 기뻤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어.”
“그 마음가짐을 잃지 마십시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니 더 지켜보도록 하죠.”
샤페론은 내심 불안했다.
드레젠이 강력한 것은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마 또래에는 적수가 없을지도 몰랐다.
상대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다음 소드 마스터로 인정받고 있는 하시스 성주다. 이길 수 있을까?’
소드 마스터는 절대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실력과 지략, 그리고 군대 정도를 감당할 수 있는 마나 운용력이 있어야 했다.
다시 말해, 카이렌은 그 모든 것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자라는 뜻.
샤페론은 드레젠이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2
-와 근데 상대도 엄청 잘 싸우는데
-잘하면 질 수도 있겠다;;
-와 근데 이게 진짜 중세 시대 싸움이구나 개 멋있넼ㅋㅋㅋ
영화나 만화에서는 서로 검을 휘두르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피하고, 휘두르고, 다시 휘두르고.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검과 검이 떨어져 있는 것보다 붙어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스텝, 그리고 간격, 검날의 각도.
그 모든 것들이 순간적인 판단으로 이뤄졌다.
“이제부턴 난타전이다.”
“허세 부리지 마라.”
드레젠은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대검에는 대검에 맞는 검술이 있는 법.
무식한 마나 운용이 페베스 검술의 장점이라면, 한 방 한 방이 묵직하면서도 빠른 연타로 적의 진을 빼놓는 검술이 있었다.
드레젠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마 보면 반가워할 거야.”
“…….”
카이렌은 적이 또 무슨 짓을 하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꽤 많은 대련 상대를 만나 왔었고, 수많은 승리를 거뒀다.
승리에 깊게 관여하는 능력 중 하나가 바로 뛰어난 관찰력이었다.
상대방의 패턴, 주로 사용하는 동작.
일정한 루틴 속에 펼쳐지는 검의 각도 등등.
‘도통 예측할 수가 없군.’
드레젠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다.
동작을 예측할 수도 없었고, 특정한 패턴이 반복되는 것도 아니었다.
기형적으로 움직이는데, 까다롭게 연계해서 그를 몰아붙였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부터 대검의 진수를 보여 드리죠.”
드레젠은 작게 말하며, 이제부터 사용할 검술을 떠올렸다.
저 멀리 남쪽 지방에 살고 있는 민족은, 항상 재빠른 몬스터들을 사냥해야만 했다.
속도도 속도였지만, 남쪽 지방에 서식하는 동식물은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사방에서부터 달려드는 자그마한 몬스터들은, 방패로 막을 수 있는 것과는 성질이 달랐다.
“남부 검술의 진수를 느껴 봐라.”
그렇기에 고안한 검술이 바로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방법이었다.
단순히 막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한 점에서부터 뻗어 나가는 회전력을 이용한 검술이었다.
검이 튕겨 나가는 힘과 손목의 유연함, 하체와 허리까지 커버가 되는 기다란 검을 사용한 검술이 발달되었다.
-우리는 천 개의 화살이 날아와도 모조리 쳐 낼 수 있소.
-반대로, 우리를 상대하는 자들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을 상대하는 느낌이 들 것이오.
드레젠이 대검을 머리 위로 올리고 난타하기 시작했다.
쩡쩡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머리 위쪽뿐만 아니라 아래, 옆 할 것 없이 공격이 연신 들어왔다.
카이렌은 급변한 드레젠의 검술에 당황했다.
“크윽, 이 무슨!”
“생소할 거다.”
비옥한 브레이시스 제국에서는 전혀 본 적 없는 검술의 형태였다.
힘과 기술을 중시하고, 마나의 양을 중시하는 제국의 유행과는 전혀 달랐다.
엄청난 속도로 후려치는 공격에, 카이렌은 일순 당황했다.
‘빈틈이 없다.’
방어에만 급급하게 만드는 검술.
정석을 바탕으로 하는 베스티안 검술과는 완벽하게 상성이었다.
사방에서 난타하는 검술에 위력까지 더해지니, 팔이 저릿했다.
“크윽-. 여기서 질 수는 없지 않은가!”
항상 나른한 표정이었던 카이렌의 몸에서, 마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미 뭐든지 귀찮아하던 표정은 날아갔다.
대신 필사적으로 자신의 터를 지키기 위한 성의 주인이 자리했다.
콰아아아아-!
신이 나서 난타하던 드레젠은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자, 이제 진짜 발악하는군요.”
-2페이즈 시작!
-근데 검술 진짴ㅋㅋㅋ 대검으로 저렇게 후려치면 어떻게 막앜ㅋㅋㅋ
-도끼질이 생각나는뎈ㅋㅋㅋㅋ
-엌ㅋㅋㅋㅋㅋ
[‘클로저’ 님 4,400코인 후원!]
[저거 좀 이상한데요?]
“역시…… 제 짐작이 맞았군요.”
-잉? 뭘 또 혼자 알았는가?
-누가 아는 체를 하였어
-뭐든지 아는 드레젠 ON!
드레젠은 벌레 강타를 준비하면서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한 힘이 느껴졌다.
구덩이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시너지 특유의 감각은 드레젠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폭발적으로 일렁이는 카이렌의 마나 안에, 진득한 흑마법의 잔재가 있었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마나는, 어두운 색이었다.
“아주 대놓고 광고를 해라.”
“베스티안은,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
“나 역시 질 생각은 없어.”
차세대 소드 마스터?
아니, 그는 대륙의 절반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밀어낸 악인일 뿐이었다.
그 이후로, 베스티안 백작령은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매년 범람이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래서, 드레젠은 절대 카이렌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 마나, 잘 알고 있지.”
찌릿찌릿한 마나.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
데스 나이트, 헤시라둔을 상대할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희열에 찬 웃음을 지었다.
오랜 시간 훈련받으며 깊게 각인된 전투 본능이 깨어난 것이었다.
-주인장 눈빛이 좀 위험한데?
-엌ㅋㅋㅋㅋ찐텐이닼ㅋㅋㅋㅋ
-하악하악! 더 비웃어 주세요!
드레젠의 시야가 좁아졌다.
오직 카이렌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춰 대응할 준비가 되었다.
용사 시절, 정처 없이 떠돌며 싸웠던 그때의 야수성이 깨어났다.
“제대로 놀아 보자고.”
콰아앙-!
흑마법으로 강화된 카이렌의 몸이 그대로 주르륵 밀려났다.
거대한 대검으로, 그것도 아무런 기교 없이 내려친 일격이었는데도.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
“조잘조잘, 아까부터 말이 많군!”
-맞말이누;;
-ㅋㅋㅋㅋㅋ개웃ㅋㅋㅋㅋ
-엌ㅋㅋㅋ근데 저 표정으로 말 많으니까 ㄱㅊ
-선생님은 원래 말 많아야 됨;;
-고거 ㅇㅈ
카이렌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검신에 피어오르는 마나의 검기가 올올이 모였다.
단단한 마나가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소드 마스터들의 상징이자, 마나 응용의 끝판왕.
“오러 블레이드다!”
“오오오오! 오러 블레이드라니!”
“이럴 수가! 역시 소드 마스터에 오르신 건가!”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가 다시 경기장을 울렸다.
인류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
바로 그 영광의 상징이 등장했다.
드레젠은 씨익 웃으며 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보나?”
“내가 왜 여태까지 살아 있을까?”
드레젠은 벌레 대검을 휘둘렀다.
카이렌은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오러 블레이드가 자르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벌레 대검 따위!
“멍청한 놈.”
콰아아아아앙-!
경기장이 반파되었다.
자욱한 먼지가 비산했다.
갑작스러운 모래 폭풍이 불어닥친 것처럼, 경기장 안쪽이 자욱해졌다.
순식간에 경기장이 조용해졌다.
[마, 마법사들. 먼지를 치우시게.]
사회자이자 심판이 명령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바람이 경기장의 민낯을 드러냈다.
한쪽 발을 쓰러진 이의 위에 올린 자가 있었다.
“하!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두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검푸른 오러 블레이드를 보았을 때만 해도 식겁했다.
오러 블레이드라니!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다.
“성주님이…….”
“오러 블레이드가 깨졌다고?”
“이럴…… 수가!”
가장 놀란 것은 아이젠하트를 비롯한 레인저 부대원들이었다.
카이렌 베스티안이 누군가!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할 수 있는 절대 강자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경기 종료-!]
심판이 선언했다.
지금 서 있는 자는 오직 드레젠뿐이었다.
그는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수정구를 바라봤다.
수정구는 아직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곳에서, 천천히 드레젠을 비추는 빛이 내려왔다.
[성좌들의 증명이 끝났습니다. 이 경기는 드레젠의 승리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드레젠에게 내리꽂혔다.
해일이 쏟아지듯, 함성의 물결을 뒤집어쓴 드레젠이 씨익 웃었다.
-와ㅏㅏㅏㅏㅏㅏ!!
-뭐야 근데 어케 한 거야!!
-아니 시밤 쾅! 하니까 끝났넼ㅋㅋㅋㅋ
후원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시청자들은 최고의 장면을 만들어 낸 드레젠에게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
드레젠은 거대한 대검을 치켜올리며 나직이 말했다.
“이제 이 성은 제 겁니다.”
하시스 성을 통째로 먹어 치운 업적!
전 세계의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위용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