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화
30화 - 하시스 성의 비밀
#1
드레젠은 던전의 반대편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방송 시작 1시간 30분 만에 던전을 공략하고 보상까지 챙긴 후였다.
본래는 서너 시간 정도 걸리게 설계한 던전이었지만, 그걸 반이나 줄여 버린 드레젠도 대단했다.
다시 숲 내음이 진한 곳으로 나오자, 깊게 숨을 들이마신 드레젠.
“이제 성으로 돌아가야겠군요. 말은 어디 보자…….”
구덩이는 출구와 가까운 곳에 속하는 던전이었다.
나무에 말을 묶어 둔 곳을 찾아간 후, 마을로 향했다.
한창 말을 타며 시청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메시지가 떴다.
[패치 내역이 배포되었습니다.]
[게임을 종료했다가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패치 내역은 홈페이지를 참조하세요.]
-읭?
-갑자기 패치?
-뭔데뭔데?
베타 테스트 때도 버그가 없기로 소문난 게임이었다.
갑자기 패치를 한다니 무슨 일일까?
또 하나의 후원이 터졌다.
[‘브락시아’ 님 10,000코인 후원!]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
-??
-이건 또 뭐옄ㅋㅋㅋ
-거봐! 맞잖아! 후원받고 있다니까!
‘얘네들 또 무슨 짓을…….’
드레젠은 멘트를 아꼈다.
대체 자신의 방송에 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계약이 있었다.
영혼끼리 맺어진 계약은 어길 시, 현생에 지장이 갈 정도로 페널티를 받는다.
하이디엔이 함부로 지시 사항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후원은 또 이어졌다.
[‘브락시아’ 님 10,000코인 후원!]
[드레젠 님의 소소한 공략 방송을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후원은 세이브 더 브락시아를 플레이하고 있는 모든 스트리머들에게 발송됐습니다.]
-뭐야
-다른 스트리머도 똑같은 후원 받네
-엌ㅋㅋㅋㅋ차원이 다른 공지;;
-?? : 방송 봐? 그럼 공지도 볼래?
드레젠은 그들의 재력이 얼마나 되는지 실감했다.
하꼬 스트리머, 대형 스트리머 할 것 없이 공평하게 후원을 쏟아부었으니까.
외국만 돼도 수많은 스트리머가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드레젠은 여전히 멘트를 아꼈다.
[‘브락시아’ 님 10,000코인 후원!]
[짤막하게 패치 내용을 공개합니다! 이제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은 10시간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조정했습니다.]
-와!
-10시간!
-와 갓겜!
-그렇다는 건 우리 드좌를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것!
-사랑해요 브락시아!
채팅 창 올라가는 속도가 동체 시력을 넘어서려고 하고 있었다.
시청자 수는 무려 2만 5천 명.
그마저도 계속해서 증가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주말에라도 게임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브락시아’ 님 10,000코인 후원!]
[많은 분들이 브락시아를 사랑해 주셔서 소소한 이벤트도 준비했습니다. 많이 참여해 주세요!]
[‘브락시아’ 님 10,000코인 후원!]
[아, 방송은 모두 보고 가세요!]
-ㅋㅋㅋㅋ귀엽누
-우리 드좌는 당연히 보고 가야지!
-난 VR로 보는 중임
-이 경치는 VR로 봐 줘야지.
“갑작스러운 소식이 들어왔으니, 마을에 들러서 잠시 쉬는 시간을 좀 가지겠습니다.”
-찬성찬성!
-팝콘 준비해야지
-이건 영화보다 훨씬 재밌는 거시여
-묻고 10시간으로 가!
텐션이 높은 방송은 언제나 스트리머에게 힘을 준다.
드레젠은 웃음기를 매달고 박차를 가했다.
아름다운 풍경과 싱그러운 바람이 방송을 축복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의 느낌대로, 오늘도 방송은 성공적이었다.
#2
어두컴컴한 지하.
보글보글 끓고 있는 시험관과 여러 생물이 잠들어 있는 거대한 수조들이 있는 곳.
그것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여인이 히죽 웃었다.
마지막 한 칸.
제일 거대하고 중요한 수조에 채워 넣을 컬렉션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고민을 좀 해 봤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히히히.’
가늘고 울퉁불퉁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던 그녀가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마침 제물이 되었을 실험체 중 하나가 빠져나갔다고 했다.
게다가 그 실험체와 결전을 벌이기로 했다지?
“흐흥~ 좋아좋아. 그걸 도와서…… 이렇게……. 흐히히히, 좋아! 그렇다면 성주도 버티지 못하겠지?”
방정맞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지하의 골방을 나섰다.
오늘도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성주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등장은 항상 은밀했다.
애초에 성내에서 그녀의 존재를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으니.
“이봐~ 오늘도 열심히 노가다 중이시네?”
“…….”
성주, 카이렌은 그녀를 흘끔 보기만 했을 뿐, 별다른 말도 건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른한 표정에 귀찮음을 더해, 상당히 짜증스러운 표정을 만들었다.
흑마법사,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네크로맨서인 탈리야가 성큼성큼 그에게 걸어갔다.
“이봐, 성주님. 내가 왔다니까? 그것도 기막힌 소식을 들고서!”
카이렌은 느긋하게 읽고 있던 서류에 사인을 하고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것들을 정리했다.
탈리야의 눈썹이 꿈틀거릴 때쯤, 카이렌이 고개를 올려 그녀를 바라봤다.
“뭔데?”
“하…… 내가 실험체 때문에 참는다. 이번에 내가 봤다던 애 있지? 걔 나 줘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가 도와줄게! 팀 파이트.”
카이렌은 지금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고 쳐다봤다.
그의 존재감이 점점 커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긴장하고 식은땀을 흘려야 할 정도.
하지만 눈칫밥으로 먹고산 탈리야는 훌쩍 몸을 뒤로 빼며 범위에서 벗어났다.
“네가? 뭘 도와줄 수 있지?”
“실험체들. 이제 곧 완성되거든.”
“중요한 데 쓴다고 하지 않았나.”
탈리야는 히죽 웃었다.
“시험 삼아 하는 거지 뭐. 얘기를 들어 보니…… 그림자 기사단인 것 같다며?”
“중간에 때려치우고 나온 놈 같지만, 기술은 진짜였다.”
그림자 기사단을 때려치우고 나올 수 있나?
탈리야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 세상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였다.
그림자 기사단이 대단하다곤 하지만, 팀 파이트에선 예외였다.
“어차피 10초만 버티면 되는 거 아니야?”
“10초라…… 그게 내 목을 노릴 시간은 충분하다고 보는데.”
“어음…… 그건 그렇지? 그래도! 벽을 세워 줄 테니까.”
카이렌은 곰곰이 생각했다.
탈리야는 이쪽 계열에서도 나름의 인정을 받는 흑마법사였다.
특히 언데드 제조, 생체 개조에 특화되어 있는 기술자였다.
그녀가 만들어 낸 강화 인간은 티도 나지 않으며, 성능도 뛰어났다.
‘어차피 인재도 별로 없으니.’
하시스 성은 요충지에 있었지만 최전방은 아니었다.
백작가에 충성하고 있는 많은 무인들이 최전방에 나가서 국경을 지키는 중이었다.
사사로운 일에 그들을 부를 수는 없는 일.
명분에 어긋나기도 했고, 백작령의 명예와 직결된 일이었다.
“한번 믿어 보도록 하지.”
“좋아! 그럼 그 애는 내 거야? 응?”
“마음대로 해라. 그리고 아이젠하트를 부르도록.”
탈리야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경쾌한 발걸음을 보니, 기분이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었다.
이쯤 되니 카이렌 역시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
흥미라기보단 호기심에 가까웠지만.
“누굴 봤기에…….”
하지만 굳이 움직여서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가 말 한마디만 한다면 온 병사들이 나서서 꼬마를 찾을 테니까.
그래도 부산 떨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그런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본가에 가서 얼터 경을 호출하도록.”
“……그 전투 때문입니까?”
카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보험 하나는 들어 둬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젠하트는 군례를 올리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나섰다.
“영광의 전당에선 제아무리 그림자 기사단이라고 해도, 얼터 경을 이길 수는 없지.”
이제 막 그림자 기사단이 된 애송이와 숱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누가 더 승산이 높은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3
패치를 다운로드하고, 다시 접속했다.
여관에서 출발한 드레젠.
검지에 숨겨 둔 반지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는 지금 시청자들과 잡담 중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이기실 거임?
-내가 볼 때는 리겜 각인데ㅋㅋㅋㅋ
-이기면 성 먹는 거?
-ㅇㅇ 근데 이길 가능성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상대는 거대한 백작 가문.
그것도 변방을 지키는 무력 집단이었다.
그 속에 실력자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레벨도 꽤 올랐고, 기술 포인트도 다시 좀 모았으니 할 만합니다.”
무엇보다 쓸 만한 대검을 얻었다는 것과 크리스를 발견한 것이 컸다.
벌레 강타는 도트 대미지를 주는 스킬이었다.
힐러의 시야를 빼앗을 수 있는 장점도 있었으며 적의 마나를 지속적으로 소모시킨다는 이점도 있었다.
문제는 단발성 스킬이 아니라 계속해서 쓸 수 있다는 것.
“다만 베스티안 백작령에서 어떤 조커 카드를 내놓을지가 궁금하네요.”
-새로운 캐릭터!
-잘생긴 여자였으면 좋겠다!
-보통 이런 데서 역경을 이겨 낸 존예 여자 기사가 클리셰 아닌감?
-엌ㅋㅋㅋㅋㅋ맞다!
[‘웨포닝’ 님 10,000코인 후원!]
[부하 2호는 여자로 해 주세오.]
“부하 2호라…… 생각나는 자가 있긴 합니다.”
여자의 몸으로 검을 휘두르는 자는 많이 있었지만, 빛을 보는 자는 거의 없었다.
대신 여성은 남자보다 마나 적응력이 높았다.
그래서 마법사의 비중이 높았다.
-누구!
-ㄴㄱㄴㄱ?
-누구인가!
-칙칙한 판타지 세상에 여캐 하나쯤은 있어야제!
드레젠이 기억하기로 게임이나 소설에서 나오는 절세 미녀는 아니었다.
오히려 안경을 끼고 범생이처럼 생긴 스타일이었다.
절세의 미녀를 찾기 위해서는 인간보다 엘프를 영입하는 것이 나았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눈앞에 있는 결투를 생각합시다. 혹시 가다가 이벤트라도……. 음?”
“으아아아아악-!”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저 멀리서 인카운터가 발생했다.
진득한 마나의 향기가 풍겨 왔다.
걸걸한 남자의 비명과 우당탕탕! 하는 소리.
이 뻔한 클리셰는, 브락시아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애초에 대한민국이나 현대 사회와 같은 치안을 바라면 안 되는 곳이었으니.
“제법 실력이 있어 보이는 여자네요. 일단 가 보도록 할까요?”
-오예!
-영입하라!
-너! 내 동료가 대라!
드레젠은 말을 몰아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2시간을 더 벌었으니 이 정도 여유는 괜찮겠지.
그가 잠시 떠올린 여잔가? 하고 봤지만 아니었다.
‘어디서 많이 본 갑옷이군.’
전쟁 중에 수도 없이 봤던 갑옷이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천천히 소란스러운 곳으로 다가갔다.
벌벌 떨고 있던 허름한 이들이 그를 발견했고, 헐레벌떡 그의 뒤로 숨었다.
단단하고 새하얀 갑옷을 입고 메이스를 든 여인.
“성기사?”
“무례하다! 감히 스텔라 교단의 성기사를 향해 예를 취하지 않고 뭣 하느냐!”
드레젠의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죽일까?
그 생각이 들 만큼 무례한 자였다.
왜 상황은 자신을 향해 웃어 주지 않는 것인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