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화
27화 - 던전 공략
#1
황금색 양피지가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절대 어길 수 없는 계약을 하겠다는 것.
하이디엔이 정말 사활을 걸고 이곳에 왔다는 증거였다.
엘프들이 이렇게 헌신적인 성격이었나?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그거 진짜 계약서야?”
“그럼요. 계약은 확실하게 해야죠.”
어느 정도 관계가 개선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당장이라도 혀 깨물고 죽을 것 같았던 표정은 없어졌다.
대신 그곳에 자리한 것은 자신의 미래를 그리는 한 명의 소녀였다.
“각자가 원하는 조항을 적어서 보여 주도록 해요. 괜찮죠?”
“어…… 그래.”
이렇게 자청해서 계약서를 작성하겠다니 나야 좋지 뭐.
감정 기복이 심한 건 아닐까, 하고 계약서를 작성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간단했다.
방송을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과 귀찮게 하지 않는 것.
워낙 포괄적이라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원래 계약이란 것이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이 정도면 되겠지.”
“정말 이 정도로 괜찮겠습니까? 생각보다…….”
“왜.”
“소박하셔서요.”
원래 소소한 걸 잃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한 법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고.
제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풍족한 삶을 살아도 주변에서 귀찮게 하면 그건 또 싫단 말이지.
하이디엔이 내민 조건은 빽빽했다.
뭘 이렇게 신경을 써 주고 그런 건지……. 얘도 인생 참 힘들게 사네.
“매달 계약금 1천만 원에…… 미리 업데이트 내용을 알려 주고, 이벤트 상품은 무조건 1등으로 따로 지급?”
“용사님의 수업료로 딱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뭐, 마음대로 해. 계약할 건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빛 양피지에 마나로 된 글자가 생겨났다.
내 영혼과 하이디엔의 영혼이 계약서에 묶이는 것을 느꼈다.
이제부터 서로는 서로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
“저는 그럼 회사로 가 보겠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명함?”
“문제 처리 전담반입니다. 하이 엘프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자들로만 꾸렸습니다.”
이렇게 퍼 주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명함을 받아 들고 그녀를 배웅했다.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든 미녀가 떠나갔다.
“흠…… 잘된 일이겠지?”
마지막 조항에 끼워 넣은 것이 있었다.
일곱 영웅들.
그들은 나에게 어떠한 선처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벌써 오후 3시가 넘었다.
오늘은 주말이니까…… 조금 길게 방송을 해 볼까?
“얼른 분량이나 뽑아야지.”
기지개를 한번 켜고 캡슐에 들어갔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던전 공략을 하는 시간.
스피디한 진행으로 크리스와의 연결 고리를 확실히 만들어 줘야 한다.
흠…… 지금쯤이면 크리스를 노리는 녀석들도 있긴 있을 테니까.
[세이브 더 브락시아에 접속합니다.]
[방송 송출이 시작됩니다.]
이제는 강일이 아니라 드레젠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오늘도 알차게 공략을 뽑아 봅시다.
#2
-드하!
-오늘 주말이니까 일찍 켜셨네!
-드하아아아아!
-오늘도 즐거운 힐링(물리) 방송 갑니까?
방송을 시작하자마자 시청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드레젠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는 세계를 바라보며 멘트를 날렸다.
“오늘은 날씨가 꽤 좋더군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갓미션’ 님 50,000코인 후원!]
[오늘 던전 노데스 클리어 가능합니까?]
“죽으면 두 시간 동안 게임을 못한다고 들었는데, 여러분의 두 시간을 빼앗을 용기가 없네요.”
울창한 수풀 안에서 다양한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저 멀리 산짐승이 오순도순 지나가며 우는 소리.
숲 내음을 한껏 들이마신 드레젠이 불길한 마나를 풀풀 풍기는 구덩이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공략, 시작하겠습니다.”
한 손에는 검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쇠사슬을 지닌 채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구덩이는 깊었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발을 헛디디는 순간 실족사할 높이였다.
드레젠의 육체는 현재 초인에 가까웠기 때문에 충분히 충격을 버텨 낼 수 있었다.
마나를 이용해 가볍게 착지한 드레젠은 곧바로 추적술과 탐색을 사용했다.
“추적술과 탐색을 사용하면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메모!
-이 부분 시험에 나온다.
-추적술 만능이눜ㅋㅋㅋ
드레젠은 동시에 모아 두었던 기술 포인트를 투자했다.
사라미스 검술 10.
페베스 검술 10.
마나 적응력 20.
“음…… 기술 포인트는 투자할 때마다 요구치가 점점 늘어 가는군요.”
1, 1, 2, 3, 4, 4, 5.
투자를 할 때마다 점점 코스트가 늘어 갔다.
본래 63이었던 기술 포인트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 정도였으니, 나중을 위해 아껴 두기로 했다.
‘그나저나 활로 썼던 스킬은 아직 숙련도가 부족한가 보네.’
지난번에 습격자를 처리했을 때 분명 활을 썼는데, 아직 스킬로 등록이 안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조금 더 써야 할 듯하다.
스킬로 등록되는 기준을 명확하게 안다면 조금 더 쉬운 공략을 만들 수 있을 텐데.
드레젠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안쪽으로 진입했다.
“서리의 구덩이는 총 세 단계로 나뉩니다. 각각의 단계를 네임드로 명명하겠습니다.”
1네임드는 영혼 뽑아내기.
2네임드는 영혼 가두기.
3네임드는 영혼 소멸하기였다.
“첫 번째는 이거, 하루낙의 집게를 써야 합니다. 이곳에서 돌아다니는 강력한 몬스터의 영혼을 추출해야 하거든요.”
기본적으로 약간의 퍼즐과 수많은 몬스터가 등장하는 던전이었기에 홀로 공략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드레젠을 제외한다면.
“이곳에 오실 때에는 동료를 구해서 오시기 바랍니다. 짐꾼으로라도 쓰시는 것이 좋아요. 탐지 마법은 필수입니다.”
-않이 근데 슨생님은 혼자네?
-ㅋㅋㅋㅋ나는 혼자지만 너희는 안 돼.
-또 혼자 깨는 고인물들이 있을 거야 ㅇㅇ
저 앞에서 몬스터의 기척이 잔뜩 느껴졌다.
미니맵을 확인하니, 역시나.
이곳엔 강화된 오크와 오우거가 서식하고 있다.
몬스터를 도륙하는 데 특화된 검술이 있어야만 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럼 1네임드, 공략 들어갑니다.”
드레젠은 빠르게 달렸다.
마나가 충만한 것이 느껴졌다.
역시 이렇게 충만한 몸뚱이를 움직이는 것이 정말 좋았다.
눈앞에 우글거리는 몬스터가 드레젠을 발견했다.
[쿠어어어어-!]
고함과 괴성은 적의 사기를 꺾어 놓는다.
찌릿찌릿한 살기가 온몸을 훑었다.
하지만 드레젠이 누구인가.
단신으로 드래곤도 때려잡았던 인간이었다.
고작 오크들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오크도 계급이 있습니다. 노예부터 시작해서 군주까지. 그중에서도 이번 공략에 필요한 놈은 대전사입니다.”
기사 계급과 마찬가지인 대전사.
일반 오크보다 덩치도 크고, 검술도 훨씬 뛰어났다.
지난번 드레젠이 잡았던 오크는 시종 등급이었다.
거의 모든 오크가 시종 등급에 속하며, 그들은 하나의 대전사를 보좌하기 위해 대량으로 움직였다.
“대전사 오크의 특징으로는 갈색 피부와 거대한 방패를 들 수 있습니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황금빛 폴리곤이 주변을 밝혔다.
오크들이 드레젠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돌격했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다수의 몬스터와 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퇴로의 확보입니다.”
제아무리 기감이 발달되어 있어도 사람의 손과 발은 각각 한 쌍이었다.
정말 운이 나빠서 눈먼 공격에 맞기라도 한다면 극심한 손해였다.
“둘러싸이기 시작하면 공격이 걷잡을 수 없이 많이 날아듭니다. 광역 스킬이 없다면 정말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죠.”
-ㅇㅇ 그거 인정
-그냥 게임할 때도 둘러싸이면 끔살인데
-실제로 주변에 막 몬스터 있고 막 어우
-ㅇㅈㅇㅈ 진짜 포위는 절대 안 됨;;
드레젠이 오크들 틈으로 파고들어 검으로 원을 그렸다.
마나의 파장이 360도를 점하며 날아갔다.
페베스 검법 중에서 모든 방향을 커버할 수 있는 초식 중 하나였다.
실제로 드레젠이 잔챙이들을 잡을 때 애용하기도 했었다.
“주변 정리는 끝났네요. 저놈이 바로 대전사입니다.”
[크어어어어-!]
동굴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확실히 일반 오크보다는 훨씬 크고 근육도 단단해 보였다.
드레젠은 재미있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검 한 자루만으로도 몬스터를 도륙할 수 있었으나 그의 취지는 공략 방송.
이번엔 오래간만에 방패를 사용하기로 했다.
“오늘은 방패를 사용해서 몬스터를 잡는 방법에 대해 알려 드리죠.”
-여윽시 뭐든 다 아는 방송
-이번엔 킹패다!
-나는 실드 칠 거야! 실드로 칠 거야!
방패는 정말 훌륭한 방어 수단이자 공격용 무구였다.
나비처럼 움직여 벌처럼 쏘라는 말이 있듯, 드레젠은 엄청난 빠르기로 사라미스 검술을 펼쳤다.
“쿠아악!”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오크 대전사가 들고 있던 방패가 떨어졌다.
한 줄기 섬광이 녀석의 손목을 정확히 가르고 지나간 것.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대전사의 팔에 일격을 날린 솜씨는 역시 명장면이었다.
-않이;;
-즈기요 방패는요?
-ㅋㅋㅋㅋㅋ않잌ㅋㅋㅋ방패를 이렇게 구하는 게 어딨엌ㅋㅋㅋㅋ
-?? : 없으면 구한다! (물리)
“왜 그러시죠? 적들이 가지고 있던 방패나 검은 대충 주워서 휘두르기 좋은 물건이랍니다.”
싱긋 웃는 그의 모습이 더욱 사악해 보였다.
실제로 자신과 맞지 않는 검이니 뭐니 하는 말이 있는데, 실제 전투엔 그딴 게 없었다.
살기 위해서 집어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무기라는 것이 그 형태가 다른 것이지 쓰임새는 비슷했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다 다룰 수 있었다.
“쿠억, 쿠어어어억-!”
“저런, 많이 화났나 보군요. 그럼 지금부터 방패 쓰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오크들의 방패는 조악했지만 절대 허접하지 않았다.
동물의 뼈와 사냥한 것들의 가죽을 덧대어 만드는 방패는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했고, 그들의 업적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오크 사회의 귀족들만이 방패를 들 수가 있었던 것.
“쿠워어어어-!”
방패는 하나의 문양이고 상징이었다.
방패를 빼앗긴 오크들은 곧 자신의 명예와 상징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콰아앙-!
가지고 있던 도끼로 분노의 일격을 내리찍는 오크.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오크의 도끼가 방패에 푹 들어갔다.
-오메 ;;
-방패 부서지겄다
-그도 방패는 못 쓰는 건가?
-방패 부서져욧!
“방패에 무기가 박힌 경우는 아주 좋은 공격 찬스에 해당합니다.”
드레젠은 방패를 오크 쪽으로 밀었다.
어떤 물체를 들거나 빼기 위해선 힘을 가하기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 힘은 자신보다 가까울수록 줄어드는 특성이 있었다.
방패에 무기가 박혔을 때, 가장 기본적으로 행하는 전술이 바로 무기를 상대방 쪽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이렇게 무기를 밀어 넣으면, 상대방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해 무기를 빼지 못합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드레젠은 그 상태로 검을 한번 휘둘렀다.
그가 가장 존경했었던 자 중 한 명의 검술이자, 항상 굳건히 자리를 지켰던 제국 기사단장의 검술.
-우리는 상대방을 죽이는 것보다, 뒤에 있는 아군을 보호하는 데 주력한다.
-우리는! 제국의 또 다른 성벽이요, 적들을 막아 내는 요새다!
항상 눈 밑으로 방패를 들고 적들을 분쇄해 나갔던 실드 마스터.
평범한 검과 굳건한 방패로 오우거의 일격까지 막아 냈던 무적의 요새.
“방패는, 절대로 시야를 가려선 안 됩니다. 그리고 몬스터도 급소는 비슷해요.”
“크어어억!”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시야를 확보함과 동시에 머리를 보호했다.
그가 훑고 지나간 곳은 적의 중요 부위.
오크 대전사는 순식간에 자손 번식을 할 수 없는 불우한 몸이 되고 말았다.
-엌;;;;;
-순간 내 손도 가렸다
-사탄도 자손 번식은 하게 해 준다고!!
-앗…… 아아;;
-본격_오크가_불쌍한_게임 ㅜ
불쌍한 오크를 애도하는 물결이 넘쳐흘렀다.
몬스터나 인간이나 그곳을 맞으면 동정의 눈길을 피할 순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