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화
26화 - 과거에 있었던 일
#1
강일을 노렸던 남성들은 모두 마법으로 귀를 가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절세의 미남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지만,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더구나 총기류까지 소지하고 있었으니, 말은 다 했지.
강일은 저들 앞에 꽂힌 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언제 너희들더러 나서라고 했지?”
서리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무릎까지 오는 가죽 부츠에 검정 스타킹.
마찬가지로 검은 반바지에 몸매를 부각하는 회색 니트.
그 위로 천만 원은 넘을 법한 명품 코트를 입은 여인이 천천히 걸어오는 중이었다.
“로, 로드.”
“저자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맨 뒤에 있던 남자 엘프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만약 일반 사람이라면 홀라당 넘어갔을 것이다.
일류 배우보다 훨씬 억울한 표정 연기를 잘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잔뼈가 굵은 엘프의 로드였다.
그것도 일반 엘프가 아니라 ‘하이 엘프’라는 종족이었다.
“그런 놈들치고는 버르장머리가 없더군. 하이디엔.”
“……제 부주의입니다. 부디 용서를.”
“로드-!”
하이디엔의 치렁한 금발이 축 늘어졌다.
강일의 앞에서 90도가 넘는 각도로 인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 다른 엘프들이 경악했다.
자존심에 심각한 스크래치를 남기는 장면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생각이 조금 깊은 엘프들은 벌써부터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다.
“……어째서.”
남자 엘프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어떤 인간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던 자였다.
그런데 다 죽어 가는 하찮은 인간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일단 저것들부터 치워. 그리고 얘기 좀 하자.”
“그러죠.”
하이디엔은 고개를 들고 남자 엘프들을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살짝 망설이는 찰나, 차가운 목소리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아니, 저 새끼만 끌고 와. 저게 주동자인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하이디엔은 서슬 퍼런 강일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손짓하자, 맨 뒤에 있던 엘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고향을 위해서-!”
“고향을 위한다는 놈이 사리 분별도 못 하고 있느냐!”
난생처음 그녀가 고함을 질렀다.
그것도 같은 동족들을 향해서.
마나까지 실린 음성에, 엘프들의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많이 강해졌는데.’
강일은 기억에 남아 있던 그녀의 모습과 이질감이 느껴져 어색했다.
그러면 뭐 어떤가.
지금은 확실하게 뜯어낼 타이밍이었다.
“읍읍-!”
손짓 한 번에 끌려온 남자 엘프.
강하게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강일은 입맛을 다셨다.
“살려는 드릴게.”
“…….”
하이디엔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 역시 악명 높은 강일의 주특기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적에게는 자비가 없었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엘프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었던 레드 드래곤, 네브릭스의 최후도 저랬다.
“읍-! 으으으으읍-!”
목을 틀어쥐고, 그대로 마나를 흡수했다.
본래는 적에게만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적으로 규명한 자에겐 악마보다 더한 자로 바뀌었던 강일.
그는 엘프의 마나를 쭉 빨아들였다.
“하아…….”
하이디엔은 속박 마법을 유지하며 눈을 감았다.
저 한 놈으로 끝내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저주받은 자신들의 운명을 탓해야 하는 것인지.
“끄어…… 끄으윽…….”
“데려가서 치료해라.”
남은 이들이 공포에 젖은 얼굴로 후다닥 움직였다.
훤칠한 사내놈들이 뭘 그렇게 벌벌 떠는 걸까.
하이디엔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모두가 떠나간 후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강일은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가자.”
“근처에 카페가 있는데…….”
“나 돈 없어. 우리 집에서 커피나 타 줄게.”
동경하고 두려워했던 용사에게서 나올 법한 얘기는 아니었다.
아아, 결국 이자도 현실에선 벗어날 수가 없구나.
그녀는 복잡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고 걸음을 옮겼다.
#2
반지하.
하이디엔은 인간 중에서도 하층민이 살고 있다는 곳에 발을 들였다.
실제로 조사는 해 봤지만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예상보다 훨씬 끔찍했다.
“공기가 별로 좋지 않군요.”
“여기서 문 열면 더 안 좋아.”
바닥에 붙어 있는 먼지며 쓰레기며 몽땅 들이마시고 싶진 않았다.
그가 하는 환기라고는 저녁에 잠깐 문을 열어 놓는 것이 다였다.
하이디엔은 눈매를 늘어뜨리며 손을 휘저었다.
청량한 마나가 허름한 방을 감쌌고, 곰팡이들과 습한 공기가 싹 다 사라졌다.
강일은 작게 웃으며 작은 머그잔 두 개를 가져왔다.
“고맙네. 그 성격도 여전하고.”
“절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엘프들을 위해서 고군분투했던 장면은 아직도 인상에 남거든.”
후룩, 커피를 마셔 보니 제법 달달하니 맛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엄청난 현대에 적응한 자신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브락시아보다 이곳, 지구가 훨씬 편안하다고 느껴진 적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언제 여기에 온 거야? 내가 떠나고 얼마나 지났지?”
“강일 님이 떠나시고 정확히 10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영웅들과 강자들이 애썼지만…….”
거기까지만 들어도 상황이 예상되었다.
녀석들은 강일을 변수로 만들고자 했고, 뭐든지 최고급으로 다 때려 넣었다.
검술, 마법적 지식, 연금술, 야금술 등등.
비록 강일의 재능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지만.
“더 넘어온 자들은 있고?”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저희가 다였습니다.”
“그래서, 날 찾은 이유는?”
이제부턴 본론이었다.
아직 뜨거운 커피를 꿀꺽꿀꺽 넘겨 버린 하이디엔이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놨다.
그러고는 비장한 얼굴로 강일을 쳐다봤다.
“저희 고향을 멸망으로부터 구해 주십시오.”
“이미 멸망했다며?”
“저희는 한 가지 마법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이디엔의 말이 이어졌다.
현재 브락시아는 게임이되 게임이 아니라는 말.
수백, 수천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치는 것과 같다는 것.
단 하나의 결과를 도출해서 브락시아를 복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꼭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계산을 해 봤더니 내가 제일 높게 나왔다?”
하이디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현대 문물의 위대함을 알아 버렸다.
마법과 단순한 공학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계산을 척척 해내는 문물에 감탄했다.
강일은 촉촉이 젖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답했다.
“싫어.”
“왜!”
콰앙-!
그녀의 고함이 방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간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강일은 테이블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말했다.
“이거 나름 큰맘 먹고 산 거거든? 부수지 마라?”
“이딴 테이블, 백 개라도 사 드리겠습니다. 아니, 집도, 차도 드리겠습니다. 병원비도, 빚도 모두 갚아 드리겠습니다. 제발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그녀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하이 엘프의 로드로서 수많은 수행을 거쳤다.
정신 수행도 그 일환이었다.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하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지금 살아남은 자들은 오직 강일 하나만을 보고 달려왔다.
그녀는 흐느끼며 다시 한 번 애원했다.
“제발……. 제 몸이라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만 묻자. 하이디엔.”
차분한 음성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예전, 엘프의 전당에서 대책 회의를 진행했었던 강일이 그대로 있었다.
“내가 브락시아에 끌려가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너도 알지?”
“……그렇습니다.”
“그래. 뭐 좋은 나날도 있었어. 그래서 그나마 버텼던 거야. 내가 처음 겪었던 일이 뭔 줄 아냐?”
하이디엔이 고개를 저었다.
딱딱한, 그리고 덤덤한 목소리가 그날의 참상을 토해냈다.
“내 몸을 조각조각 내고, 다시 이어 붙였지. 그게 시작이었어.”
끔찍했던 기억이 하나씩 풀어져 나왔다.
애써 잊고 살았던 악몽이 다시금 머리를 들이밀었다.
“제대로 거동도 못하는 날 데리고 뭘 했는지 알아? 마정석을 있는 대로 쑤셔 넣었어. 그러고는 무기술부터 연마하게 했지.”
그것이 대가라며, 너는 우리들에게 큰 빚을 졌다며.
그렇게 5년을 굴렀다.
보기 좋게 만들어진 몸은 귀족, 왕족들의 홍보용이나 접대용으로 쓰였다.
“……그런.”
“너도 지나가는 말로 듣긴 했을 거야. 그때 그 새끼들이 나한테 지껄였던 말이 뭔 줄 알아?”
하이디엔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강일은 한 자 한 자 씹어뱉듯이 말했다.
눈동자에서 마나의 잔재가 꿈틀거렸다.
“자신들만 믿고 도와준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게 해 준다고 했지. 난 멍청하게 그걸 믿었고.”
“제가 어떻게 하면…….”
강일은 그녀의 심리를 읽고 차분히 말했다.
사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앞길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고맙게도 하이디엔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도 보답은 해야겠지.
“나도 방송으로 먹고살 수는 있어. 그런데 너희들이 내 계정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내가 곤란해지겠지?”
강일은 채찍과 당근을 적절하게 섞기로 했다.
홀로서기를 선언했으니 현실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법.
그러니까 적당히 타협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물론 그들이 주는 돈을 받으면 당장 생계는 물론이고 어마어마한 빚더미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빚은 안 진다.’
편한 길을 놔두고 돌아간다고, 호구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인생에는 타협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는 법이다.
어느새 하이디엔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러니까 거래를 하자.”
“무슨…… 거래죠?”
“내가 공략 방송 하는 걸 빵빵하게 후원해. 진짜 정식으로 제휴를 맺어서 밀어라.”
하이디엔은 잠시 고민했다.
가장 혹독한 수련을 받은 용사가 다른 제자들을 육성한다라…….
어느 정도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늬들이 그렇게 원하는 고향을 되찾도록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도록 하지. 나는 거기까지만 할 거야.”
하이디엔이 물었다.
“그렇다면 사실상 강일 님의 세션이 진도가 제일 빠를 텐데…….”
강일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공략대로만 살아간다면, 어떤 재미가 있을까.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 개의 다른 생각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백 명이 게임을 한다면 백 가지의 플레이 방식이 나온다.
“그들은 기초를 다진 뒤에 홀로 성장해 나갈 거야. 지금 가입자만 몇억 명일 텐데?”
“그렇습니다.”
“그들은 내 방송과 영상을 보고 브락시아라는 세계를 이해할 거다. 그러고는 홀로 성장하겠지.”
강일은 스스로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을 구한다?
그럴 생각도 없을뿐더러 재능도 모자란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유유자적하게 방송을 하면서 지식을 풀어 주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싱글 게임이고, 이게 시뮬레이션의 일부라면 가능성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하이디엔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이뤄졌다.
가능성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녀를 옥죄고 있던 무언가가 탁 풀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맞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도와 드릴 수 있는 것은 전부 도와 드리겠습니다.”
하이디엔은 새하얗게 웃었다.
금으로 짜 내린 실을 엮어 만든 것 같은 머리칼에, 새하얀 피부.
큼직한 이목구비와 조화를 이룬 배치까지.
강일은 그녀의 미소가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다.
‘부럽군.’
하이디엔은 허겁지겁 품에서 황금빛 양피지를 꺼냈다.
강일은 허, 하고 어이없는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도 좀 호구기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호구는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