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화
24화 - 드러나는 것들
#1
하시스 성주의 방.
본래는 변방이기 때문에 가문의 사람들 외에는 잘 오지 않는 곳에, 외부인이 들어왔다.
펑퍼짐한 로브에 두 명의 수행원을 달고 나타난 여인.
성주는 그녀를 흘끔 쳐다보더니 다시 업무에 열중했다.
여인은 로브를 벗어 던지고 접대용 소파에 털썩 앉더니 입을 열었다.
“된통 깨졌다며? 천하의 카이렌이 말이야.”
“너는 일을 그따위로밖에 못하나.”
나른한 표정에 약간 금이 갔다.
여인의 모습은 퇴폐적이었다.
짙은 다크서클과 새하얀 피부.
여우처럼 찢어진 눈매가 인상을 더욱 사납게 했고, 오뚝 솟은 코는 안 그래도 야윈 얼굴을 더욱 야위어 보이게 만들었다.
뼈가 보여 울퉁불퉁한 손가락으로 턱을 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나는 일 처리를 제대로 했는데.”
“제물 하나가 버젓이 살아 돌아와서 우리의 계획을 망치고 있는데, 제대로 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레인저가 내 스켈레톤을 부순 거 아니었어?”
“덜떨어진 것들이랑 일을 하다니…….”
여자의 인상이 조금씩 변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은 아닌데, 언제나 페이스가 휘말렸다.
과연 훗날 백작가를 책임져야 할 인재다웠다.
그녀는 호기심이 일었다.
방금 보고 온 광경과 더불어, 그녀를 자극하는 또 다른 요소였다.
“내 스켈레톤도 파괴할 줄 알고…… 꽤 괜찮은 용병이었나 보네. 그자 덕에 쓸 만한 재료들이 더 많이 생긴 거 아닌가?”
“다음에 할 말을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카이렌은 그림자 기사단의 기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썼던 용병을 떠올릴 때마다 예민해졌다.
왜인지 모를 불안감이 조금씩 그를 괴롭혔다.
‘아이젠하트는 임무를 잘 수행했다고 했지만…….’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고도 보고를 받았다.
병사들이 웬 사체들을 끌고 들어왔을 때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수레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많은 재료들이 수급되었다.
다가올 범람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좋은 일이었으나,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 정신 좀 봐, 그 말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닌데. 오늘 정~말 끝내주는 재료를 발견했다? 마치 어렸을 때의 너를 본 것 같다니까?”
“그게 뭐.”
“그러니까, 수배령 좀 내려 주면 안 돼?”
하시스 성주의 권한을 마음대로 쓰다니.
안 될 말이었다.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손을 휘저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진짜! 제대로 된 데스 나이트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니까!”
“꺼져라.”
“젠장! 그렇다면 내 방식대로 하겠어.”
그녀는 광기에 찬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일어섰다.
카이렌은 드레젠의 일로 잔뜩 신경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어쩌면 진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녀석을 추적해라.”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뭘 하려는 것인지는 몰랐으나 당연히 마음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멋대로 집무실에 찾아온 마법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내 신경을 꺼 버렸다.
적어도 사리분별을 못하는 자는 아니었기에.
‘설마 이상한 짓을 벌이진 않겠지.’
브레이시스 제국에서는 어린아이를 향한 모든 범법 행위를 강하게 처벌했다.
먼 옛날부터 있었던 문화였는데, 그만큼 어린아이들을 소중히 여기는 선주들의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이렌 역시 그런 교육 과정을 거쳤다.
당연히 어린아이들은 건들지 않는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못 배운 년이라고 막 나가진 않으리라 믿는다.”
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는 흐트러진 정신을 다잡았다.
아침부터 꽤 기분이 좋지 못했다.
#2
드레젠은 남은 시간을 모조리 이동에 쏟아부었다.
그 결과, 빠른 시간 안에 던전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몬스터를 만나도 피하거나 순식간에 처리하고 지나갔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도착했다.
하지만 던전 바로 앞에서 참 안타까운 소리가 들렸다.
[강제 종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장하고 종료해 주십시오.]
-아니 실화야?!
-안 돼ㅐㅐㅐㅐㅐ
-벌써 끝이라고?!
“어…… 벌써 시간이 이만큼 지났군요. 나중에 조금 더 배율을 높인 버전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게임은 이만 종료하겠습니다.”
[‘뉴비환영해!’ 님 10,000코인 후원!]
[행님 얘기 좀 더 하실 거지예?]
드레젠은 미소를 지었다.
방송을 많이 할수록 돈이 많이 벌린다.
후원이 이렇게 돈이 많이 될 줄 생각도 못 했었다.
이제 브튜브까지 올리게 된다면?
“조금 더 잡담하고 방종하겠습니다. 자, 그럼 던전 공략은 내일 하도록 하고, 여러분들도 빠르게 진행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세이브 더 브락시아의 진행 상황을 저장합니다.]
[드레젠 / Lv.56 / 15 : 57 : 43]
[베스티안 백작령, 파베론 산맥]
게임이 종료되었다.
라디오 모드로 전환하고 나서 잔잔한 음악을 틀었다.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오늘 있었던 일화 등을 말하기도 했다.
“2만 명이 넘게 모여 주셨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채팅 창은 미친 듯이 올라갔다.
드레젠은 빠른 동체 시력으로 거의 모든 채팅을 읽어 내고 있었다.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재밌었다.
역시 같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 때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일은 뭐 하실 겁니까?
-공략은 얼마나 걸리려나.
-와 진짜 여덟 시간을 안 쉬고 본 내가 진짜 레전드네;;
-ㅋㅋ퇴근하고 나서부터 쭉 켜 놨다 뿌듯.
“내일은 던전 공략을 마무리하고, 가는 길에 쓸 만한 아이템 하나를 파밍할 겁니다. 초보자분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오오오오!
-초보자 좋구연!
-크으, 이런 방송을 원했다.
[‘옥냥’ 님 100,000코인 후원!]
[항상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공략 많이 해 주세요!]
한참 이야기를 하던 도중,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이 있었다.
다시 한 번 채팅 창이 미친 듯이 올라갔다.
아니, 형이 여기서 왜 나와?
드레젠은 자신도 아는 유명인의 등장에 진심으로 놀랐다.
“아니, 형님이 여기서 왜……. 안녕하십니까.”
-아니 형이?
-여기서 왜 나왘ㅋㅋㅋㅋ
-엌ㅋㅋㅋ찐이네
-ㄹㅇ 옥냥 님?
-미쳤닼ㅋㅋㅋㅋ
그것이 시작이었음을, 강일은 알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도네가 왔다.
채팅 창이 더욱 결렬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강아지!’ 님 10,000코인 후원!]
[안녕하세오 스승님]
-엌ㅋㅋㅋㅋㅋ
-아니 미친ㅋㅋㅋㅋㅋ
-실화야?ㅋㅋㅋㅋ
-지렸닼ㅋㅋㅋ
강일은 강아지의 동영상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막 방송을 시작했을 때, 영상을 한두 번 편집해 보기도 했다.
지금이야, 구독자 50만을 훌쩍 넘긴 중견 브튜버이자, 스트리머이기도 한 그녀.
꽤나 유명한 BJ의 등장에, 시청자들이 열광했다.
“유명한 분들이 많이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혹시 더 있으신 건……?”
이때다 싶어서 후원들이 마구 터졌다.
하꼬 스트리머부터 시작해서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법한 스트리머까지.
지금 방송을 하고 있는 자들조차 콘텐츠로서 드레젠을 소비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그의 인지도는 달나라를 가는 로켓처럼 수직 상승했다.
-미쳤엌ㅋㅋㅋㅋㅋ
-여기 무슨 정모 하나?
-엌ㅋㅋㅋ형들 누나들 다 있넼ㅋㅋㅋ
-갑자기 분위기 사랑방 보소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기쁜 마음이 훨씬 더 컸다.
누가 언제 저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는가.
또 어떻게 유명인들의 시선을 받고, 동경의 대상이 되어 보겠는가.
강일은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다들 정말 반갑습니다. 제 방송을 시청해 주셔서 영광이네요.”
자신의 채팅이 묻히지 않게 1,000원씩 후원하면서 스트리머들은 강일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덕분에 신난 것은 방송을 보고 있던 시청자들이었다.
방송 막판에 2만 명이었던 시청자 수가 2만 5천 명까지 증가하는 기염을 토했다.
강일은 스트리머들에게 물어봤다.
“지금 공략은 어떤가요?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옥냥’ 님 1,000코인 후원!]
[아주 좋습니닷]
[‘강아지’ 님 1,000코인 후원!]
[쪼아유]
[‘한손에칼들고’ 님 100,000코인 후원!]
[영상도 올려 주세요]
구독자 300만 명에 이르는 초거대 기업 스트리머까지 등장한 상황.
강일은 한순간에 아마존 TV에서 슈퍼스타가 되어 있었다.
방송을 마무리하고 영상을 편집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다른 스트리머들은 자신과 합방을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합방이라…… 일단 빠른 시일 내에 멀티플레이를 주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게임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시면 좋겠네요.”
-합방!
-나는 이 합방 찬성일세!
-ㅋㅋㅋㅋ과연 합방일까 교육 방송일깤ㅋㅋㅋ
-그런데 이 게임은 멀티플레이 어떻게 하는 거임?
“멀티는 서로의 세션에 들어가거나, 만남의 광장까지 진행하시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서로 협력해서 퀘스트도 깰 수 있고, 그때부터 PvP콘텐츠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죠.”
세이브 더 브락시아는 조금 특이한 멀티플레이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게임을 숙지한 다음 멀티플레이를 할 수 있는 방식이었는데, 따로 서버를 만들어서 새로운 월드를 플레이할 수 있었고, 싱글 플레이를 하는 와중에 다른 유저를 초대할 수도 있었다.
게임 전반적인 스토리에는 절대로 관여할 수 없었지만, 해당 유저가 고전하는 퀘스트를 함께 해결해 주는 것은 가능했다.
“자, 그럼 저는 오늘 올릴 영상을 편집하기 위해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또 뵙도록 할게요.”
-안 돼 ㅜㅜ
-오늘도 끝났다!
-드바!
-드바!
이틀 차 방송도 무사히 종료!
강일은 한순간에 고요해진 주변을 만끽하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3
방송을 종료한 뒤, 기지개를 켜고 몸 상태를 확인했다.
이틀 동안 정말 많이 좋아졌다.
이제 일반인보다 조금 못한 수준까지 체력이 올라왔다.
현실에서 검을 휘두르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적어도 마나가 없어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은 없어졌으니.
“어디, 어떻게 답장을 했는지 볼까?”
충전해 두었던 휴대폰을 들었다.
연락이 하나도 없었던 휴대폰에 톡이 와 있었다.
하이디엔, 어떻게 나올 거지?
-오랜만입니다. 강일 님.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예상보다 더 고분고분하게 나오시겠다?”
어차피 한 번쯤은 만나 봐야 할 사람이었다.
내 몸을 고치는 단서와 어머니를 위한 재료들이 좀 필요하니까.
그리고 내 기억에 하이디엔은 자신의 동족들을 위해서 고군분투한 사람일 뿐, 나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좋아.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으니까 연락처나 내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송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계속 어영부영 넘어갈 수는 없었다.
노트북과 컴퓨터를 세팅한 후에 동영상 편집을 준비했다.
우웅-.
막 마우스에 손을 올리려고 할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본능적으로 이 번호가 하이디엔이 가지고 있는 번호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어딘가에서 들어 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왜 이렇게 떨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