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화
23화 - 접촉
#1
문자를 보고 깜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디엔.
기억에 남는 사람들 중 하나로, 상당한 실력을 자랑하던 하이 엘프였다.
미소를 지으며 한번 떠보기로 했다.
진짜 답장을 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오랜만이야. 나는 엘프다.
짧게 한마디를 보내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톡을 보냈더니 순식간에 옆에 있었던 1이 사라졌다.
계속 화면을 바라봤지만 답장은 없었다.
뭐, 이로써 증명은 끝난 셈이다.
휴대폰을 놓고 물을 마셨다.
스트레칭도 꼼꼼히 하고 난 다음, 다시 캡슐에 누웠다.
‘4시간 정도 남았나.’
반이나 소비한 것이 좀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얻은 것이 많은 하루였다.
이제 이틀밖에 안 됐는데 이야기가 팍팍 진행되니 조금 좋긴 하네.
지금부터는 던전 공략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해야 한다.
그곳엔 꼭 필요한 아티팩트가 잠들어 있거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다시 시작해 볼까요?”
-와아!
-ㄲㄲ
-가즈아!
[‘아오야미’ 님 10,000코인 후원!]
[쓰앵님 준비됐습니다!]
“후원 감사합니다. 다들 준비된 것으로 판단하고, 출발하겠습니다.”
시청자들의 수는 약 2만 명.
방송 이틀 차라고는 절대 믿을 수 없는 숫자였다.
자잘한 후원 역시 계속해서 터지고 있는 상황.
진짜 방송인들이 돈 잘 버는 이유를 알겠다니까?
#2
하이디엔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짧은 한마디였다.
그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옥죄고 있었다.
강일을 보지 못했던 직원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말한다.
-로드는 그자를 너무 두려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엘프족을 이끌고 있는 그녀가 못마땅한 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보지 못해서 그렇지.’
제아무리 큰 상처를 입어도 힐링 마법 하나만 믿고 달려든 장면이 아직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마족의 대공을 찢어발긴 그 장면이 아직도 꿈에서 나온다.
엘프족이 멸망할 위기에 놓였을 때, 검 하나를 달랑 들고 드래곤과 맞섰던 장면이 환상처럼 아른거린다.
벌써 100년도 더 된 이야기였지만, 그만한 사람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기에 더욱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제가 돕겠습-.]
[……뒈지기 싫으면 꺼져.]
그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였다.
기억에 남는 것은 살벌했던 황금색 눈동자와 드래곤에게서도 느끼지 못했었던 살기.
극심한 공포감에 덜덜 떨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이었다.
일곱 영웅들도 어느 정도는 자신을 존중해 줬었는데, 강일이란 자는 가차 없었다.
그 기억이 계속 하이디엔을 괴롭혔다.
“후우…… 뭐라고 보내지.”
만나기로 한 이상 각오는 해 왔다.
그렇다고 부하들을 시키자니 회사 전체가 폭파될 것 같은 환상이 계속 그녀를 괴롭혔다.
그만큼 그녀에겐 커다란 트라우마였다.
존재 자체가 공포인 자가 강일이었던 것.
그래도 열심히 손을 놀려 답장을 보내기 위해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그래, 지금은 평범한 인간이잖아. 약점도 있잖아? 빚도 산더미잖아? 그러니까 그걸 내가 해결해 주면…….’
그녀는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되뇌며 답장을 보냈다.
목 뒤가 뻐근한 것을 느끼고 시간을 바라보자, 무려 20분이 지나 있었다.
강인한 엘프의 신체였기에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적인 부담이 상당하다고 느꼈다.
“으으, 한심하다 하이디엔.”
거리에만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이 시국에, 한 사람 때문에 벌벌 떨어야 한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그래도 어쩌랴, 지금 그들의 희망은 오직 강일뿐이었으니.
“……방송이나 보자.”
다시 시작한 드레젠의 방송은 엄청난 몰입감을 전해 주었다.
적을 알고 자신을 알면……. 이건 좀 너무 갔나?
어쨌든 드레젠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꼭 시청해 둬야 할 부분이었다.
오늘 방송이 끝난 후에는 어떻게든 방향이 나올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소파에 몸을 파묻고 강일의 방송을 보았다.
#3
서리의 구덩이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했다.
솔로 플레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아르겐의 체액.
그리고 특별한 기믹을 풀어내기 위한 ‘거미의 다리 집게’였다.
드레젠은 잡화점에서 해당 물품을 구입하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거미의 다리 집게는 생물체에서 무언가를 뽑아낼 때 씁니다.”
[거미의 다리 집게]
[영혼을 뽑아 먹는 거미 - 하루낙의 새끼들로 만들어 낸 집게.]
[무언가를 뽑아낼 수 있다.]
-옹, 참으로 징그럽게 생겼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잡화점에 흔하게 있네요?
-그러게, 뭔가 특별하게 얻어야 할 것처럼 생겼는데.
거미 다리를 두 개 겹쳐 놓은 것처럼 생긴 집게는 꽤 많이 보급되어 있는 물품이었다.
일종의 갈무리 도구.
생명체 안에 잠들어 있는 ‘정수’를 뽑아낼 수 있는 도구였다.
아무런 통증도 없으며 어떠한 신체적 손상도 입히지 않지만, 생명력을 깎아먹을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도구였다.
“이 도구는 몬스터 안에 있는 정수를 채집할 때 씁니다. 어떤 몬스터든 정수라는 것을 가지고 있죠. 정수는 음…… 몬스터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면 몬스터에게는 정수가 있다.
그들이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각인.
인간을 탐하고, 악에 찌들어 살아가게 하는 원인인 정수는, 이번 공략에 있어 꼭 필요했다.
거미 집게는 마탑이 발명한 것으로, 그런 정수를 강제로 끄집어내는 도구였다.
“하루낙은 정말 전설적인 몬스터입니다. 아직도 대륙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르죠. 우리가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거미들, 브락시아 내에서는 전부가 하루낙의 피를 타고났습니다.”
-오오, 거미들의 시초인가!
-재밌는 역사 시간 조아연
-난 거미 싫어;;
“마탑은 영혼을 먹는 하루낙의 특성을 역이용해서 몬스터들의 정수를 뽑아내는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그게 바로 이 집게죠.”
거미 집게를 한번 흔들어 준 다음,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공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마지막 준비를 하고, 곧바로 던전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만큼, 더욱 화려하고 섬뜩한 던전 탐방기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드레젠은 공방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쇼.”
“쇠사슬도 있습니까?”
“당연하지요. 어디 포획 의뢰라도 받으셨나 봅니다.”
공방의 주인은 푸근한 마을의 인상처럼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에는 꽤 여러 가지의 물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드레젠이 찾았던 물품도 몇 가지 있었다.
쇠사슬은 꽤상당히 많은 양의 철이 들어가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격이 나가는 편이었다.
“흠, 이게 적당하겠군요.”
“이걸로 하시겠습니까? 하시스 성에서 들여온 것이라 품질은 보증할 수 있습니다.”
품질을 확인한 드레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45실버라는 거금을 준 드레젠은, 공방에서 몇 가지 작업을 했다.
그는 뛰어난 대장장이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작업은 모두 할 수 있었다.
야금술로 먹고살기에 부족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마지막 준비물은 끝에 추가 달린 쇠사슬입니다. 가까운 공방에서 구입해도 되고, 직접 만드셔도 좋습니다.”
-네 주문하겠습니다.
-저걸 우리가 어떻게 만들엌ㅋㅋㅋ
-평소 철물점 하시는 아조시들이면 만들 수 있겠네
[‘뉴비환영해!’ 님 10,000코인 후원!]
[이번엔 닌자읍쎄신 보여 주십니까?]
“그런 용도로 쓰려는 것은 아니지만, 쇠사슬 액션이 한번 들어가긴 할 겁니다.”
거대한 무언가를 묶기 위해서는 쇠사슬이 반드시 필요했다.
혹시 몰라 하나를 더 구입한 후, 마구간이 있는지 물어봤다.
“이 근처에 마구간이 있습니까?”
“암, 있다마다. 북쪽 끝으로 가시면 있을 게요. 베스티안 백작령의 말은 아주 좋은 품질을 자랑하지.”
공방장의 안내를 받아, 드레젠은 마지막으로 말을 샀다.
말은 아주 귀한 자원이었다.
그렇기에 기본 1골드부터 거래가 시작되었다.
대륙 전체에서 시세를 조정했기에 1골드 미만으로는 절대 살 수가 없었다.
“말을 사려면 북쪽, 사라미스 지역으로 가거나, 베스티안 백작령 쪽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꽤 저렴하고 품질이 좋습니다.”
-꿀팁 메모 ㄱㅅㄱㅅ
-그런데 우리는 1골드가 없지!
-ㅋㅋㅋㅋㅋ그건 마따
-이 게임도 나중에 핵이나 치트 풀리려나?
“아마 힘들 겁니다. 아직 가상 현실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곳도 없는데, 그 프로그램을 뚫고 핵을 만들기란 쉽지 않겠죠?”
-ㅇㅇ 그럴 듯
-핵 쓰느니 차라리 개발을 하고 말지
-ㅋㅋㅋㅋㅋ인정이구연
가상 현실 기술이라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기술도 있을 텐데, 핵이나 치트를 만든다?
나온다면 분명 그것은 내부에서 제작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마구간에 도착한 드레젠은 마지막으로 말을 구입했다.
[평범한 짐말]
[나이 : 2세]
[기력 : 300 체력 : 500]
정말 평범한 짐말이었지만, 꽤 준수한 스텟을 가지고 있었다.
기력이 높을수록 더 멀리, 오래 달릴 수 있었으며 체력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버틸 수 있는 수치를 의미했다.
드레젠 기준으로는 가성비가 좋은 말 정도였다.
“자, 그럼 가 봅시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공략에 들어갑니다.”
길 안내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인 던전 공략까지.
드레젠의 주가는 더더욱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랴!”
말을 타는 것 또한 능숙하기 그지없었기에, 사람들은 그야말로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서리 구덩이.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그 던전은 베스티안 백작령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부 끝자락에 있는 베스티안 백작령은 당연히 ‘춥지 않은 지형’이었다.
#4
하시스 성.
금화를 가지고 새 단장을 한 샤페론과 크리스는 여관방에 머무는 중이었다.
그들은 창밖을 바라보며 돌아다니는 병사들을 눈여겨봤다.
자신을 드레젠이라고 밝힌 자가 성의 병사들이 아무도 모른다고 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금방 돌아오시겠지?”
“그럴 겁니다. 그 실력이라면 어디 가서 죽진 않겠죠.”
샤페론은 아련한 눈빛으로 그때를 회상했다.
엄청난 실력으로 몬스터를 도륙하던 어젯밤.
그의 검술 실력은 가문을 충분히 일으켜 세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여관은 아늑했고, 그들은 푹 잘 수 있었다.
오랜만에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정말 행복한 순간을 만끽했다.
“이제 슬슬 우리도 훈련을 시작하도록 하죠.”
“훈련이라…… 그래. 그래야겠지.”
크리스는 잠시 우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처연하고 비참해 보여서, 샤페론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두 사람은 주변을 꼼꼼히 확인하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흐음, 저런 꼬맹이가 이 근처에 있었나?”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
호기심과 약간의 욕심이 들어간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