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화
22화 - 힐링인가 공략인가
#1
아이젠하트는 혀를 차며 드레젠에게 다가갔다.
어찌 되었든 그는 까라면 까야 하는 입장이었고, 성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품속에서 황금색 양피지를 꺼내, 드레젠에게 보여 줬다.
내키지 않는다는 모습과 표정으로 말하는 것은 덤이었다.
“성주님이 말씀하셔서 말이다. 내가 또 까라면 까야 하는 입장이거든.”
“그쪽에서는 뭘 원했습니까?”
“다른 것은 없고, 기한을 일주일로 줄이자는 것. 그것 외에는 딱히 없었네.”
드레젠은 피식 웃었다.
머리가 조금은 돌아갔지만, 절대로 응해 줄 수는 없었다.
아이젠하트 역시 뒷말을 삼켰다.
본래는 지명 수배를 내리라는 명령까지 했었지만, 이런 자를 수배해 봤자…….
‘다른 영지에서 두둔하면 우리만 불리해진다.’
이런 인재는 끌어들여야 할 대상이었다.
배척하면 언젠가는 적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것도 무시무시하고 위협적인 적으로.
아이젠하트는 자신이 성주에게 충성하는 개라는 사실이 참 원망스러웠다.
수배령까지는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받은 명령은 이것이지만, 솔직히 자네는 납득하지 못하겠지?”
“……그 조건을 수락한다면 전 얻는 게 뭡니까?”
-으니 여기서 또 딜을 한다고?
-또또또 파조동 나왔지 또
-엌ㅋㅋㅋ 여기서 딜을 해?
-자신감 무엇;;;
-저러다가 캐삭한다
채팅 창을 흘끔 보는 드레젠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 상응하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충분히 넉넉했다.
샤페론과 크리스가 문제였지만, 이 마을을 가꾸고 있으라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들어 보기로 했다.
어떤 제안을 할 것인지.
아이젠하트는 성주에게서 들었던 말을 상기하며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시작할 때, 병력을 지원해 준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구색은 맞춰 준다는 얘기지.”
“흠, 다음은요?”
“원하는 아티팩트 하나를 미리 준비해 준다고 얘기했다.”
드레젠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설마 했는데, 성주가 이렇게 협조적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 입장에서야 제법 머리를 쓴 티가 나지만, 이걸 어쩌나.
일주일이면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얻어 낼 수 있었고, 아티팩트 하나?
거기다 구색이지만 시너지까지 맞춰 준다고?
“다른 것은 또 없습니까?”
“만약 성주께서 승리한다면 노예가 아닌, 깔끔하게 목숨을 취하는 것으로 변경하셨다.”
“뭐…… 나쁘진 않군요.”
플레이어에게 죽음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일 뿐, 게임의 끝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무심코 그런 말을 흘렸다.
아이젠하트는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드레젠은 서약을 하기로 했다.
황금색 양피지는 곧 어길 수 없는 맹세를 뜻했다.
“보자…….”
드레젠은 양피지를 건네받아 조항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자신의 마나를 흘려 보냈다.
성주의 마나도 확실히 기억했다가 각인이 되어 있는 것도 확인했다.
마법의 글자가 새겨지는 광경은 아직도 신비했다.
“이걸로 됐겠죠. 이제 일주일 동안은 귀찮게 하지 맙시다. 서로.”
“……알겠다. 오후 2시에 행사가 시작된다. 늦지 않게 오도록. 그리고 저 사체들은…… 그때 정산해 주겠다.”
고개를 끄덕인 후, 드레젠은 떠나가고 있는 성의 병사들을 바라봤다.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누구도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역시 베스티안 백작령의 병사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밤잠 자기는 글렀고…… 나는 이만 떠나야겠군.”
“에?”
“떠난다니…….”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샤페론에게 던졌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금화를 받은 그가 눈빛으로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물었다.
방금 드레젠은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 명령을 받는 것이 맞는 방법일 것이다.
“크리스를 따듯하게 먹이고 입혀라. 아무래도 저들은 크리스가 도련님인 줄 모르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이곳은 이제부터 훈련장으로 쓰도록 하지. 나름대로 정리해 둬. 아침 운동으로 가볍게 달리면 딱 좋겠군.”
논산 훈련소에서 무지막지하게 행군을 했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단어들이었다.
샤페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한순간에 고분고분해진 것이 웃겼지만, 그것이 또 기사들의 매력이기도 했다.
드레젠은 그 말을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본래는 이곳을 가꾸려고 했지만 더 큰 물고기가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러면 당연히 더 크고! 더 좋은 보상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젠 어디 감?
-갑자기 방치플이라니
-ㅋㅋㅋㅋ어디 가요?
-궁금하다, 어딜 갈지!
[‘뉴비환영해!’ 님 10,000코인 후원!]
[쓰앵님, 다음 과목은 뭡니까?]
드레젠은 밤길을 걸으며 말했다.
다음 목적지에 대해서.
“이번엔 던전 공략을 해 볼 겁니다.”
그에 채팅 창이 다시 한 번 난리가 났다.
던전!
모든 이가 꿈꾸고 있었지만 아직은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미치지 못했다.
고블린과의 전투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수준의 유저들.
그들은 가뭄 속에서 콩 한쪽을 찾아다니는 농부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 콩을 뿌려 대고 있는 자가 바로 드레젠이었다.
“던전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다양한 기믹이 있는 던전도 있고, 특정 아이템을 가지고 가야 하는 던전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무쌍을 찍기 위한 던전도 분명히 존재하죠.”
-지금 무쌍은 좀 그래.
-몬스터가 무쌍을 찍기 위해 던전을 만들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 아니었나ㅋㅋㅋㅋ
-난죽택 할 거임ㅋㅋㅋ
[‘나는엘프다’ 님 500,000코인 후원!]
[어느 던전을 가시죠?]
“후원 감사합니다. 이번에 갈 던전은 여러분들의 눈이 즐거울 던전입니다. 스트레스가 펑펑 풀리는 웨이브식 던전입니다.”
드레젠이 임의로 분류해 놓은 던전 중에서도 난도가 꽤 높은 던전.
보통 4인 파티나 6인 파티, 안전을 생각하면 8인 파티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던전이었다.
하지만 드레젠은 홀로, 그것도 레벨 55에 클리어를 도전할 생각이었다.
일주일이라면 시간이 넉넉했으나, 중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그렇기에 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웨이브식 던전은 제가 임의로 분류한 것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단순하지만 짜증 나는 던전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몬스터는 얼마나 나오는지?
-웨이브라고 했으니 꽤 많이 나오나?
-학학! 드디어 고통받는 드레젠 짱을 볼 수 있는 건가!
중간에 헛소리가 지나간 것 같은 건 착각일까?
드레젠은 채팅을 보며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통칭 ‘서리의 구덩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입장 전에 퍼즐 요소가 있고 안쪽에는 약 백이 넘는 몬스터가 있습니다. 방은 총 세 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머리를 잘 써야 하는 곳도 있어요.”
-구덩이!
-크으 기대되구연!
-뭔가 개미굴 같을 삘인데?
중간에 개미굴 같은 맵이 있었지만, 아직은 밝히지 않았다.
시청자들이 쫄깃한 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최대한 스포일러를 줄이는 것이 좋았다.
드레젠은 미소를 매달며 다음 마을로 향했다.
흐린 날씨였지만, 서서히 달빛이 맑아지는 것이 보였다.
“횃불이 없어도 걸을 수 있겠군요. 서두릅시다.”
-혼자 하려면 조금 심심하겠는데?
-탈것도 있겠죠?
-와 진짜 말 같은 거 타고 다니면 꿀잼일 듯!
-크으, 빨리 돈 모아서 지른다!
“당연히 말도 구입할 수 있습니다. 하시스 성과 가까운 곳에서 말을 구입해 보도록 하죠.”
전투마가 아니라면 그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충분히 살 수 있으니, 앞으로의 여정을 생각하면 꼭 구입해야 할 목록이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 했다.
구덩이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몬스터들이 나오니까.
지금 가지고 있는 무기로는 많이, 아주 많이 부족했다.
“걷다 보니까 동이 트네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와중, 슬그머니 햇빛이 어둠의 장막을 거뒀다.
게임 시간으로는 하루가 꼬박 지났지만, 현실 시간으로는 고작 몇 시간이 지나갔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뇌는 강인해서, 그 괴리감을 잘 이겨 낼 수 있었다.
어쨌든 느끼기에는 현실에서나 게임에서나 똑같은 1분이었으니까.
한쪽 끄트머리부터 점점 환하게 변하는 자연 경관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여러분, 이게 가상 현실의 자연입니다. 진짜 아름답지 않습니까?”
-ㄹㅇ 힐링이다
-힐링 방송 ㅇㅈ합니다
-진짜 @(%[email protected]예쁘네
-크 지렸구연
시청자들이 잘 볼 수 있게 캠을 조작한 드레젠.
마치 드론처럼 멀리 떨어져서 밝아 오는 정경을 찍었다.
시청자들은 좋다고 코인들을 후원했다.
지금은 차를 타고 멀리 가야만 볼 수 있는 경관이었지만, 브락시아에서는 눈을 돌리면 보이는 것이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이제 던전 들어가면 칙칙한 어둠만 봐야 하니까, 많이들 봐 주세요. 던전 공략은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하게 되겠네요.”
-그놈의 제한 시간!
-그거라도 없으면 캡슐 안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 많을 듯;;
-인정이구연
-나 같아도 나오기 싫겠다.
-현실에선 백수인 내가 게임 속에서는 먼치킨이다! 뿌슝빠슝!
실제로 국민 청원까지 올라갈 정도로 세이브 더 브락시아의 열기는 엄청났다.
하루 여덟 시간이 아니라 열두 시간으로 늘려 달라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하루 여덟 시간.
그 외에는 현실에서 가족들, 혹은 친구들, 그것도 아니라면 자기 계발에 힘쓰라는 공지를 올렸다.
‘기술력은 충분할 텐데.’
드레젠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무래도 조만간 접촉해 올 것이 분명하니, 그때 자세하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노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동이 트고, 새가 지저귈 때쯤, 하시스 성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레젠도 이름만 들어 봤을 뿐, 한 번도 와 본 적은 없었다.
“자, 도착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루에르바 마을입니다. 작은 쉼터라는 뜻입니다.”
하시스 성이 딱딱하고 군사적인 분위기를 풍겼다면, 루에르바 마을은 정겹고 활기찬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주민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떠드는 소리가 멀찍이 들렸고, 정겨운 애완동물 소리가 멀리 울려 퍼졌다.
번화가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공방의 수는 하나밖에 없었지만, 대신 식료품, 생필품 등을 파는 가게들이 많았다.
“여기는 또 분위기가 다르죠? 성과 마을의 차이입니다.”
성은 군사 시설이었다.
그곳에 사는 시민들은 병력의 가족이 대부분이었다.
공방, 혹은 상점의 가족들도 있었다.
하지만 마을은 그야말로 주거 시설이었다.
대부분 민간인이었으며 넓은 토지를 바탕으로 농사나 목축업을 하며 살아가는 곳이었다.
“어느 곳이 살기 좋은지는 여러분이 판단하세요. 이곳에서 잠깐 휴식하고 정비한 뒤에 다음 마을로 출발하겠습니다.”
-크으, 쉬는 시간 좋구연!
-다른 게임은 정비하는 시간은 지루한데, 이건 그럴 틈이 없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언제나 신기함투성이였다.
드레젠은 마을 안으로 스며들어 가, 가까운 여관을 잡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캐릭터가 잠시 잠을 자는 사이, 강일은 캡슐에서 나와 몸을 풀었다.
여전히 조금 늘어난 마나를 느끼며, 연락이 쌓인 휴대폰을 확인했다.
[안녕하십니까. (주)브락시아 기획 팀의 ‘하이디엔 왓슨’이라고 합니다. 귀하의 방송은 잘 찾아보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의 판단처럼, 드레젠 님의 방송은 저희 회사에서도 인정할 만한 공략 방송입니다. 그래서 소정의 상품과 함께 제휴 계약을 맺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이 번호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깜찍하네.”
강일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휴대폰 액정을 두들기며 나직이 읊조렸다.
한때 영웅들마저 꺼림칙하다고 뭐라 했던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보겠군.”
그의 손이 전송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