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화
19화 - PvP 콘텐츠
#1
성주의 방은 화려했다.
재벌들이 사는 방을 구경해 보진 못했지만, 드레젠 역시 이보다 훨씬 좋은 방에서 지낸 기억이 떠올랐다.
악바리처럼 기어올라, 일곱 영웅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그때가 아마도 제일 행복했었던 시기였을 것이다.
성주의 방 안에서 백금발의 머리칼을 하고 앉아 있는 남자.
“기다리고 있었네. 몇이나 목숨을 취했지?”
“방해되는 이들은 모두 치웠지.”
백금발의 남자, 카이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산과도 같은 위압감이 드레젠을 덮쳤다.
마나와 전혀 다른 성질의 기운, ‘기세’라고도 하는 무형의 힘이었다.
사람이 전장을 거치거나, 무수히 많은 경험을 쌓으면 자연스럽게 축적되는 힘이기도 했다.
말로 형용할 수는 없지만, 상위 차원의 힘이라는 것이 그를 깊게 압박했다.
“인정사정없군. 그래서…… 한밤중에 성주의 궁에 침입한 것은 중범죄라는 것은 알고 있는가?”
“중범죄라…… 요새 귀족들은 먼저 시비를 걸고 범죄를 운운하나 보지? 브레이시스 초대 황제가 그렇게 가르쳐 놓지는 않았을 텐데.”
꿈틀.
카이렌의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당장에라도 머리를 쳐 날려 버릴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본능과 경험이 그에게 미친 듯이 경고하는 중이었다.
절대 먼저 공격하지 말라고.
‘문 앞에 다가올 때까지 기척을 읽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수많은 암살자와의 싸움을 이어 나갔다.
카이렌의 방에 들어온 자들은 있었으나, 그가 대비하지 못했던 이들은 없었다.
모두 문을 열자마자 죽여 버렸으니까.
“참 이상하군. 그림자 기사들은 사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닌데.”
“그림자 기사단…… 그런 거창한 사람은 아니야.”
성주는 생각했다.
이미 기사들과 병사들을 제법 잃었다.
하나씩 기척이 지워질 때마다 그는 남모르게 전율했으니까.
마나의 흔적도,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 일격을 받아 낼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네놈도 자만심이 온몸을 잠식했구나.’
오크 세 마리를 일격에 죽이고, 강화된 스켈레톤을 때려죽였다.
삼엄한 성의 경비를 뚫고 결국 이곳까지 도달했다.
죽이기보단 자신의 휘하로 들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뻔뻔하게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
“네가 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겠지?”
“결투하려고. 팀 파이트로.”
“신성한 결투를 하자고? 하핫, 하하하하하하-!”
연신 나른한 표정이었던 카이렌이 처음으로 유쾌하게 웃었다.
신성한 결투, 혹자는 팀 파이트라고 부르는 이 결투는, 세이브 더 브락시아의 주된 PvP 콘텐츠였다.
‘오토 체스’라는 장르와 비슷한 방식이었지만, 실제로 플레이어가 참전한다는 것과 3판 2선승으로 끝난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제정신인가? 공정한 결투라고 보나?”
“그만큼 이기면 내가 얻는 것이 크겠지.”
드레젠은 당당하게 말했다.
아직 PvP 콘텐츠는 활성화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첫째는 동료들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속성과 직업을 가지고 있는 동료들이 모여 하나의 시너지를 만드는 시스템.
그 시너지가 적용된 캐릭터는 적게는 30%, 많게는 두 배가량 강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간덩이가 부었군. 오랜만에 재밌겠어. 그래, 내기엔 뭘 걸 생각이지?”
“이 성이 가진 전부.”
“내가 이기면?”
얻는 것이 크다면 그만큼 잃는 것도 크다.
그것은 브락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통하는 법칙이었다.
나른한 표정을 푼 그는 제왕의 모습, 그 자체였다.
카이렌의 진지한 모습을 본 순간, 드레젠은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떡밥을 던졌다.
브레이시스 제국뿐 아니라 전 대륙을 죽음으로 몰고 갈 뻔했던 데스 나이트.
흑마법사들을 수하로 부렸던 ‘이블 소드’ 헤시라둔.
투구를 벗고 얼굴을 마주했을 때의 이목구비가 지금 눈앞에 있는 카이렌과 똑같았다.
검을 맞대고 싸워 봤으니 더더욱 기억이 선명해졌다.
“당신이 뭘 하든 평생 노예가 되어 주지.”
-으아니 여기서 노예빵을?
-엌ㅋㅋㅋㅋㅋ이거 거의 캐삭빵이나 다름없는데?
-이거 지면 처음부터 다시 키워야쥬?
-성 걸고 내기하는 클라스 보솤ㅋㅋㅋ
“……뭔가 좀 알고 있었군. 역시.”
“난 어제 여기 처음 왔다고. 알 게 뭐가 있겠어? 지금 댁이 하는 행동이 수상하단 증거지.”
카이렌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여기서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자랄 때쯤, 어둠이 드레젠을 집어삼켰다.
순간적으로 기척을 놓쳤지만, 마나를 끌어 올려 탐지를 시작했다.
압도적으로 쌓인 마나가 주변을 훑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한 달 후에 찾아오지. 그때까지 안 들키게 잘 간수하라고.]
“거기냐!”
서걱-.
카이렌이 힘차게 손을 휘두르자, 마나로 이뤄진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종이로 된 배경을 자르듯, 걸리는 모든 것을 날카롭게 찢어 버렸지만, 드레젠은 이미 자리를 피한 뒤였다.
카이렌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그림자 기사단……. 녀석들이 눈치챈 건 아니겠지.”
그림자 기사단은 세상의 중심을 지키는 자들이었다.
그 누구도 그들의 본거지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 누구도 그들을 잡아내지 못했다.
말 그대로, 그들은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었으니까.
만약 이번 일을 계기로 그들이 다시 세상에 나온다면?
“아니, 아니지…… 안 될 말이지.”
다행히도 저 녀석은 아직 다 여물지 않은 느낌이 강했다.
믿는 것은 은신술 하나뿐.
육체의 완성도도, 마나의 양도 현저하게 밀렸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많이 줄 수 없겠군. 어디 보자…….”
그는 다시 나른한 얼굴로 돌아왔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아이젠하트를 불렀다.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그의 부름에 답하지 않을 자는 없었다.
#2
“빠져나왔네요. 그림자 장막은 반드시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사태를 해결하고 나면 바로 공략해 드릴게요.”
[‘뉴비환영해!’ 님 100,000코인 후원!]
[으니 쓰앵님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던졌네 던졌어
-팀 파이트를 어떻게 이기려고ㅋㅋㅋㅋ
-리겜하시려고요?
-장난 아닌데 이거;;
-이건 좀 뇌절 각이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시청자들과 소통했다.
다들 위기를 직감했지만 드레젠은 홀로 여유로웠다.
몇 개의 아티팩트와 동료 몇 명만 얻는다면, 숫자 따위는 무시할 수 있었으니까.
첫째가 크리스였고, 두 번째는 특별한 아티팩트였다.
“속성은 다들 알고 계신가요? 화염, 물, 나무, 금속, 대지, 어둠, 빛이 있죠.”
-ㅇㅇ 홈페이지에서 봤음
-엄청 복잡하던데
-거기에 직업까지 있다!
“직업도 직업이지만, 가장 중요한 속성이 있습니다. 바로 빛 속성과 어둠 속성이죠.”
각각의 속성은 같은 속성에서만 시너지를 발휘한다.
화염은 화염끼리, 나무는 나무끼리, 물은 물끼리.
무리를 짓듯, 같은 속성끼리만 더욱 강해지게 설계를 해 두었다.
하지만.
“같은 속성끼리만 시너지가 발휘되는 것이 상식이지만, 유일하게 상반되는 속성이 시너지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치가 빠른 시청자들은 벌써 짐작하기 시작했다.
드레젠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왜 크리스를 키우기 위해서 집착했을까요? 단순히 훗날 엄청난 검사가 되니까? 그것도 있지만 당장 필요하진 않죠.”
-웨지!
-뭔가 있다!
-아 진짜 나도 브락시아 마렵다;;
후원이 빵빵 터지기 시작했다.
많게는 10만 원.
적게는 천 원 단위까지.
궁금증을 참지 못한 시청자들의 항의는 엄청났다.
드레젠은 피식 웃으며 진실을 얘기해 주었다.
“빛과 어둠은 서로가 서로에게 시너지를 줄 수 있다고 했죠? 크리스 스카이워커가 바로 빛 속성 NPC입니다. 이 브락시아에 얼마 없는 귀중한 속성이죠. 초반에 반드시 회유하세요.”
빛과 어둠은 상반된 위치에서 세상을 밝히는 속성.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어야 빛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법.
그렇기에 빛과 어둠은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줄 수 있었다.
드레젠은 다시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제 크리스와 함께 여행을 떠날 겁니다. 그들이 잘 있을까요?”
-?
-이걸 설마 사냥꾼이?
-진짜 사냥꾼이 크리스 데리고 갔으면 죽여야 됨;;
-몬스터 밥 가즈아ㅏ!
드레젠도 동의하는 바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크리스가 각성하는 계기로서는 부족하다.
그는 20대 초중반부터 두각을 드러냈으니까.
구름이 걷혀 희미하게 밤하늘을 비추고 있는 달빛 아래, 연기가 나고 있는 마을이 보였다.
“다행히 떠나진 않은 것 같군요.”
크리스의 마나가 저 멀리서 느껴졌다.
위험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 먼 거리에서도 마나의 향이 짙게 느껴지다니.
날 습격해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드레젠은 희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밤은 볼거리가 많겠군요. 레벨 업을 많이 하겠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판을 한번 짜 볼까요?”
-?
-또?!
-아니 뭐든 아는 남자라 그런지 오늘 밤에 일어날 일도 안다 이 말이야
-ㅋㅋㅋㅋㅋ엌ㅋㅋㅋㅋ우리야 좋지
-고통받아라 휴먼
시청자들만 신났다.
그들에게 있어 해프닝은 좋은 볼거리였으니까.
드레젠은 마을이 아닌, 산속으로 방향을 틀었다.
스카이워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약간의 장난질을 칠 생각이었다.
잘하면 방해되는 것들을 모두 치울 수 있으리라.
‘크리스에게 마침 좋은 스승이 필요하긴 하지.’
“이번 기회에 크리스에게 호감을 단단히 심어 놓도록 하죠.”
그가 웃었고, 시청자들은 다시 한 번 경기를 일으켰다.
비열한 웃음은 이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버렸다.
#3
온화한 열기가 크리스의 얼굴을 데워 주었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밖에 나와 있는 것은, 그의 수호 기사였던 샤페론이 사냥감을 잡아 왔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겠군요.”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그런 무뢰한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금 하시스 성주를 건들고 살아남을 자는 별로 없습니다.”
샤페론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 역시 하시스 성주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스티안 백작령은 이미 제국 내에서도 독립적인 왕국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
변경을 지키는 백작의 힘은 제국 내에서도 꽤 강력했다.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완벽하게 독립할 수 있었다.
“이곳은 그들이 함부로 설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만 생각하시죠.”
“그래야겠지. 하지만…… 왠지 그 사람이 우릴 도와줄 수 있을 거라 믿어.”
“공자님. 우리는 누구도 믿어선 안 됩니다.”
샤페론은 이 어린 군주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지금까지 그들이 믿어 왔던,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자는 전부 죽었다.
만나는 사람은 모두 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혹독한 세상뿐,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막 식사 준비를 마쳤을 때, 어둠 속에서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래, 너는 날 믿을 수 없지만…… 크리스는 그러면 안 되지.”
“당신…… 살아 있었군.”
실루엣의 정체를 알아본 샤페론이 인상을 썼다.
마침 공복이 몰려오고 있었던 드레젠은 모닥불 앞에 털썩 앉아 말했다.
“그래, 성주 하나 만나고 온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 그나저나…… 당신도 생각이란 것이 없군.”
“뭐?”
“이렇게 마나를 풀풀 풍기는 도련님을 이따위로 방치하다니.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이 단순히 운이 아니길 바라지.”
“……이런 젠장.”
샤페론은 드레젠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 역시 나름대로 몬스터에 대한 경험이 있는 자였으니까.
그가 벌떡 일어나 활과 화살을 챙겼다.
드레젠 역시 큼지막한 고기가 꿰여 있는 꼬치 하나를 집어 들고는 일어섰다.
“사냥감이 되고 싶지 않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것이 좋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