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화
18화 - 협력과 이용 사이
#1
드레젠이 올려다보고 있는 성은 탁 트인 평야를 끼고 있었기에, 시야 확보에 용이했다.
언제 어디서 몬스터나 침입자가 올지 전부 멀리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도 취약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몬스터 방어를 상정하고 만든 성벽이기에, 단순 혜자만 있을 뿐, 성벽에 어떤 방어 체계도 없었다.
“하시스 성을 공략할 사람이 있으시다면, 성벽 곳곳에 나와 있는 돌을 잘 이용하세요. 넝쿨 역시 좋은 밧줄이 됩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
드레젠은 성벽을 기어서 올라가는 중이었다.
오늘은 구름도 꽤 짙었고, 달빛도 희미했다.
횃불과 타고난 감각, 마나로만 상대방을 감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드레젠은 본래 성안에 있었지만, 밤이 되자 몰래 빠져나왔다.
-뭐든 아는 남자는 공략을 위해 성벽을 기어 올라간다!
-공략 감사합니닼ㅋㅋㅋ
-와 난 무서워서 못한다ㅜㅜ
적어도 20미터 이상.
성벽을 쌓아 올린 높이였다.
떨어지면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높이였다.
물론 일반인인 시청자들이 보기엔 상당히 아슬아슬한 연출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드레젠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빠르게 올라가는 중이었다.
“이제부턴 집중해서 올라가겠습니다. 걸리면 골치가 좀 아파지니까.”
-지금부터 잠입물 간다
-완전 기대된닼ㅋㅋㅋㅋ
-과연 뭐든 아는 남자는 잠입을 성공할 것인가!
드레젠은 마나를 넓게 퍼뜨려서 기척을 감지했다.
마나 활용의 응용편이자, 훗날 플레이어들이 기본적으로 익혀야 하는 탐색이라는 스킬이었다.
기척을 감지하자마자 스킬 목록이 생신되었다.
[탐지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기술 포인트 1점 획득하셨습니다.]
“탐지 스킬은 마나 활용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입니다. 이 스킬은 길드에 가입하거나 용병 단체에 간다면 금방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작은 미니 맵이 눈앞에 떴고, 붉은색으로 적들의 위치가 표시되었다.
시청자들의 눈에도 그것이 보였는지, 온갖 채팅들이 마구 쏟아졌다.
척척 해내는 드레젠이 무척 신기했다.
역사부터 시작해서 자잘한 팁까지, 그는 진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와 미니 맵!
-미니 맵이라니 갓겜ㅋㅋㅋㅋ
-근데 저 탐지 스킬을 쓸 수 있어야 하는 듯?
미니 맵의 유무는 게임 진행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적들의 위치뿐만 아니라 게임을 어느 방향으로 진행할지 알려 주는 역할이 바로 미니 맵이었으니까.
당연히 세이브 더 브락시아의 처음에는 미니 맵이 없었다.
바랄 걸 바라야지.
“이제부턴 어둠 속으로만 다녀야 합니다.”
적들의 동선을 파악해서 교묘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잠입의 기본이었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
그리고 한번 시선이 닿았던 곳.
심리적으로 안심하고 지나칠 만한 곳을 밟아서 지나가는 중이었다.
“저기가 성주가 머무는 곳이겠군요.”
보안은 제법 삼엄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성주라고, 기사와 레인저들도 간간이 보였다.
저들은 마나를 감지할 수 있는 자들이므로, 필히 제거가 필요했다.
“레벨도 올리고, 암살 스킬도 얻을 겸 몇몇은 죽여야겠습니다.”
-역시 보는 사람이 없으면 암살이지!
-기대된다ㅋㅋㅋㅋㅋ
-가즈아으아!
시청자들의 기대에 힘입어, 드레젠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넓은 곳을 지날 때는 당연히 들키지 않는 곳으로 이동했고, 좁은 곳을 갈 때는 특이한 기술을 사용했다.
“후아아암-.”
“여기까지 들어오는 놈이 있을까?”
절그럭거리는 갑옷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일반 병사들이었지만 외길을 지키고 있었기에, 병사들 중에서도 경험이 많고 실력이 제법 있는 이들로 구성이 되었다.
절도 있는 걸음걸이, 여유로워 보이지만 모든 곳을 샅샅이 살피고 있는 눈동자.
-여유롭게 걷고 있는 거 보소.
-다들 죽이죠!
시청자들은 그들을 죽이라고 아우성이었지만, 이곳은 사방에서 볼 수 있는 요충지였다.
성의 심층부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그렇기에 어느 곳에서도 다리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곳을 관찰할 수 있었다.
문제가 생기면 성 전체가 비상 체제로 돌입하게 된다.
“저들은 지나칩니다. 이곳은 유일한 퇴로이자 진입로입니다. 이곳에 문제가 생긴다면 성 전체가 봉쇄되어 버릴 겁니다.”
-앗 아아;;
-우리는 잘 모른다ㅜㅜ
-라떼는 말이야! 꼬챙이 하나 들고 쳐들어가서 다 죽여 버렸어!
뒤에 어떤 놈들이 하시스 성주를 움직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런 증거를 가져다줬는데 도리어 자신을 노린다?
명백하게 문제가 있는 처사였다.
문제는 아직 드레젠이 성주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건 그거고, 이젠 돌입해야지.’
그는 마나를 움직였다.
혹독한 시절, 그중에서도 가장 절망적이던 시기가 있었다.
몬스터의 소굴에 홀로 떨어졌을 때.
도저히 정면 승부로는 답을 찾기 어려운 곳을 나뒹굴고 있었던 시기였다.
바로 그때, 그를 구원해 준 것은 ‘그림자 기사’의 후예가 익힌 은신술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대 홀로 남겨져 있을 때, 우리가 가르쳐 준 기술들은 그대에게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올 겁니다.
그 한마디가, 지옥 속에서 드레젠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마나의 잔재까지 모두 감춰 주는 은신술.
세상의 심판자라고 불렸던 그림자 기사들만의 전유물.
어둠이 있다면, 능히 홀로 기사 백 명을 상대할 수 있다던 젤다르의 화신들.
그들의 고유 기술이 오롯하게 드레젠에게서 재현되었다.
[‘그림자 장막’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어둠 밟기’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은신’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기술 포인트 10점 획득하셨습니다.]
스르륵-.
알림과 함께 한 줄기 마나가 어둠과 동화되었다.
마치 투명 망토처럼 길게, 그리고 넓게 뻗어 나가는 그림자의 장막.
선택받은 자만이 쓸 수 있다던 그 기술의 발현과 함께, 장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드레젠의 기척, 마나의 잔재, 그리고 그의 소리와 심장의 떨림까지.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드레젠은 캠을 1인칭으로 바꾼 후에 천천히 성주의 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청자들은 긴박함을 더한 드레젠의 연출에 감탄했다.
밖이 보이는 커튼을 뒤집어쓴 것처럼 일렁이는 시야.
바로 옆으로 병사들이 지나갈 때에 형성되는 쫄깃한 긴장감.
-으아 쫄깃하누;;
-대박 진짜 모르넼ㅋㅋㅋ
-않이;; 저런 기술은 어케 한 거임ㅋㅋㅋㅋ
-진짜 모르는 것이 없자너
이미 공식 후원 채널이라고 정평이 나 있는 드레젠의 방송이었다.
때문인지 출처를 의심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도 하드코어한 난이도 때문에 시원한 공략을 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다.
매운맛도 적당히 먹어야 맛있는 법.
많이 먹다간 속만 버릴 뿐이지 않은가.
“성주의 궁이 저기 있군요. 그림자 장막은 마나를 많이 잡아먹습니다. 꼭 중요한 순간에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어디서 배우는지는 나중에 설명해 드리죠.”
콘텐츠를 그냥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드레젠은 살금살금 성주의 궁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림자 장막이 걷히고, 아무것도 없는 내성에 드레젠의 모습이 드러났다.
꽤 높은 내성이었지만 드레젠이 있는 곳, 1층까지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지금의 성주는 강한 사람인가 봅니다. 마나의 파동이 여기까지 느껴지는군요. 이걸 추적 스킬로 바라보면…….”
추적 스킬을 활성화하자, 시야가 변했다.
푸른색 마나의 파동이 일정 간격으로 퍼지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신기한 광경에 시청자들이 반응했다.
-신기하다.
-와, 게임 진짜 갓겜이넼ㅋㅋㅋ
-ㄹㅇ 이건 과외비 줘야 된다.
[‘청일’ 님 30,000코인 후원!]
[언제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후원 감사합니다. 지금부터는 완벽한 적의 소굴이니, 레벨 업에 신경 써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전투!
-가자 학살! 학살!
-팝콘 가져와야지!
드레젠이 주변에 있는 마나를 감지하고 있을 때, 채팅 창에는 모조리 몰살하라는 채팅이 올라오고 있었다.
드레젠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만약 이게 진짜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때도 그렇게 죽이라는 말만 반복할 수 있을까?
‘그거야 겪어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평범한 계단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벽면이었다.
눈을 들어, 꼭대기까지 갈 루트를 계산해 봤다.
생각보다 장식물이 많아 여기저기 잡을 곳이 많았다.
“파쿠르, 클라이밍은 이곳에서도 꽤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전문적인 용어는 어려우니까 넘기고, 간단히 말해서 루트를 확인하고 그에 맞게 움직이는 것을 뜻합니다.”
이름은 달랐지만 파쿠르는 브락시아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스포츠였다.
실제로 암살자들은 그 어떤 장애물이라도 극복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파쿠르 훈련을 받았다.
드레젠은 가볍고 재빠른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않이, 이것도 공략인가?
-저걸 우리가 어떻게 하냐곸ㅋㅋㅋ
?? : 어때요, 정말 쉽죠?
드레젠이 움직이는 모습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움직임이었다.
발을 딛자마자 바로 다음 타깃을 찾아 움직이는 모습은, 영화에서 나오는 닌자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거침없이 올라가다 보니, 성주의 궁을 지키고 있는 병력이 보였다.
그는 다시 한 번, 게임이기에 할 수 있는 짓을 하기로 했다.
“자신보다 레벨이 높고, 적이 많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단 적을 일격에 죽여야 가능한 방법입니다.”
마나를 기본적으로 다룰 줄 알고, 급소를 노릴 수 있다면 갑옷을 입은 자들도 한 번에 죽일 수 있었다.
잘 벼려진 숏 소드는 사람의 숨통을 빠르게 끊을 수 있었다.
드레젠은 다시 한 번 그림자 장막을 펼쳤다.
“갑니다.”
적의 동선을 파악한 후, 드레젠은 한 번에 움직였다.
그림자 장막이 있는 한,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멍하니 순찰을 돌고 있던 기사가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서걱-.
푸른 빛이 기사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예상치 못한 일격을 받았기에, 그의 표정은 그야말로 평온 그 자체였다.
“……하나.”
섬뜩하게 울리는 드레젠의 목소리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드레젠은 멈추지 않았다.
마나로 인해 혈관이 타 버려 피조차 나지 않는 기사를 뒤로한 채, 그는 한 명의 사신이 되어 성주의 궁을 돌아다녔다.
번쩍-, 한 줄기 섬광이 성안을 휘저을 때마다 기사 한 명이 시체로 변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암살 스킬 랭크 업!]
[그림자 장막 스킬 랭크 업!]
-아니, 저걸 어떻게 하라곸ㅋㅋㅋㅋ
-진짜 미쳤네;;
-캠도 못 잡는 거 실화야?
-드래곤볼이여? 안 보이는 매력으로 보는 건가?
[‘스펀지’ 님 10,000코인 후원!]
[초고속 카메라로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후원 감사합니다. 전부 정리됐네요. 레벨은…… 33이고요.”
지금 그를 제외한 모든 자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아직 성주의 궁 안은 고요했다.
드레젠은 피식 웃고 제일 화려해 보이는 방문 앞에 섰다.
마치 던전의 보스 룸과 비슷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충만한 마나가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상당히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부드럽게 문이 열렸고, 그곳엔 예상했던 인물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