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화
12화 - 날 좀 내버려 둬
#1
“미안하군. 솔직히 의심을 안 했던 건 아니다. 워낙 특이해서 말이야. 시기도 맞아떨어지고.”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시는군요.”
“설마 용병도 구하지 않고 그렇게 지원금을 꿀꺽할 줄 누가 알았겠나.”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확실히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지.
사람들은 보통 3인 정도, 많으면 5인 정도의 파티를 꾸려서 가거든.
그만큼 브락시아의 사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홀로 다니는 자들은 둘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그 건에 대한 것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리라 생각합니다. 받으시죠.”
마나가 담겨, 거멓게 죽어 버린 뼛조각과 로브 자락, 마나로 인해 변질되어 버린 나뭇잎을 내밀었다.
아이젠하트는 그걸 받아 들곤 5골드가 담긴 주머니를 건넸다.
짤랑이는 감촉이 꽤 맘에 들었다.
“전 그럼 이만.”
“잠깐. 조사를 더 진행해 줄 수 있나?”
“그건 불가합니다. 수상한 일에 더 이상 발을 들이고 싶진 않군요.”
“흠…… 성주의 부탁이어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성주가 뭐?
하시스 성을 나가면 성주의 영향력은 없다.
어디 연회에 가서야 인정받겠지.
하지만 성 밖에 펼쳐져 있는 야생에서는 그저 인간일 뿐.
“예. 권력과는 연을 만들어 두고 싶지 않습니다.”
-단호박
-아니 이걸 마다해?
-방금 드레젠이 귀족 되는 상상 함!
-하지만 어림도 없지;;
아이젠하트가 의외라는 듯이 날 쳐다봤다.
저 눈빛.
내가 처음으로 자진해서 사람을 죽였을 때, 그 빌어먹을 새끼들이 지었던 표정과 비슷했다.
‘어떻게 네가?’라는 저 표정.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이거 의외로군.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버려진 마을을 가꾸면서 살 겁니다. 근처에 뭐 어디 없습니까?”
용사로서 많은 지역을 다녔지만 이쪽은 한 번도 오지 못했다.
이미 멸망한 후에 한번 왔었나.
이 근처에 버려진 마을이 있을까?
대답 역시 쉽게 나왔다.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3km 정도 가면 작은 마을이 있다. 본래는 성주께서 관리하시던 곳이었지만 요 몇 년 사이에 상당히 귀찮아하시더군. 그래서 방치가 되었지.”
“병력들도 없습니까?”
“철수한 지 오래다.”
그렇다면 딱 좋았다.
수중에 있는 골드는 10골드 남짓.
이걸로 식량을 좀 사 가면 되겠네.
부족한 식량이나 마을을 가꾸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콘텐츠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몬스터와의 인카운터와 다양한 이벤트가 발생할 테니까.
“우리의 인연도 여기서 끝이군.”
“잠시나마 반가웠습니다.”
그는 손을 한번 휘젓고는 터덜터덜 병영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북동쪽이라.
아 참, 또 물어볼 것이 있었는데 깜빡했군.
그래서 지나가던 병사들에게 물었다.
“올해가 몇 년도였죠?”
“올해요? 제국력 57년입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소환된 해가 제국력 60년 7월 7일.
그리고 떠난 해가 제국력 75년 12월 22일이다.
고작 15년 동안 뭘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느냐고 말하겠지?
마법은 꽤 대단한 학문이어서, 드래곤볼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었다.
실제로 얼마나 오래 검을 휘둘렀는지, 얼마나 많은 지식을 탐독했는지 정확한 양은 미처 확인할 수 없더라니까.
‘15년이지만, 딱히 ‘나’라는 주체는 그다지 바뀐 것 같지도 않고.’
남자는 커서도 애라는 말이 생각났다.
내가 살아 보니까 맞는 것 같다.
아직도 가끔은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니까.
확인 삼아 동전 주머니를 열어 봤다.
“이거 경비대장 아저씨도 눈썰미가 보통은 아니군요.”
-왜요?
-Y?
-웨여?
궁금증이 쇄도했다.
캠을 내 손에 집중하도록 설정하고, 동전 주머니를 쏟아 냈다.
좌르륵 쏟아지는 찬란한 금화.
본래 5골드가 보상이었지만 쏟아진 골드는 10개.
인심 두둑이 썼군.
아니면…….
#2
시청자들은 시원시원한 진행에 불만이 없었다.
돈까지 많이 버는 모습을 보이다니, 정말 뭐든지 안다는 취지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다른 방송인들의 답답함을 견디다 못해 들어온 자들까지 아주 편안하게 눌러앉을 수 있었다.
-와! 10골드!
-않이 초반에 이렇게 빵빵하게 시작해도 되는 거임?
-ㅋㅋㅋㅋㅋㅋ이거 보삼ㅋㅋㅋㅋ
-다른 스트리머들 진짜 답답해서 못 봄ㅜㅜ
[‘나는빡빡이다’ 님 50,000코인 후원!]
[드레젠 영상 보고 나도 부자가 되는 상상 함!]
영상 클립이 하나 들어왔다.
드레젠은 걸음을 옮기며 영상을 감상했다.
가상 현실이라는 것이 이럴 때 참 좋았다.
“가는 길에 심심하지 않겠네요. 후원 감사드립니다.”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고, 채팅 창이 궁금증으로 물들었다.
영상은 가볍게 시작되었다.
어느 한 여자 캐릭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드레젠의 짧은 공략 클립을 봤는지, 하시스 성의 입구까지 잘 도착했다.
하지만.
“아니! 왜 다들 바가지만 씌우는 거야! 이렇게 한가득 가져왔는데 1골드도 못 받는 게 말이 돼?!”
-ㅋㅋㅋㅋㅋㅋ
-골드라고 생각했던 것.
-무슨 새가 무슨 새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했죠.
어버버거리는 자들에겐 상인들이 가차 없지.
드레젠은 피식 웃었다.
그 밖에도 성벽 앞에서 한참 실랑이를 벌인 일이라든가, 여관에서 시비가 붙어서 벌금을 낸 일이라든가.
고작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이었지만 정말 부조리한 일들이 많았다.
-ㅋㅋㅋㅋ고통받는 거 보솤ㅋㅋㅋ
-얼른 쓰앵님에게 와서 교육받아야 합니다.
-절.대.교.육.해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니까 진짜 드레젠 님이 엄청 잘하시는 걸 느낌ㅋㅋㅋ
비교 대상이 워낙 많으니 바로바로 칭찬이 들어온다.
오늘 오픈한 게임이었지만 이렇게 공략을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언제 오픈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엄청난 지식과 실력으로 찍어 누르는, 시청자들의 가슴에 사이다를 퍼부어 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드레젠은 어딘가에서 목소리를 많이 들어 봤다 생각하며 소소한 감상평을 내놓았다.
“지금 대부분은 게임에 적응하느라 어려우실 겁니다. 제가 소소한 팁 같은 걸 많이 올려 드릴 테니까 편안하게 보고 가세요.”
-브하 각인가?
-브-하!
-브튜브도 하시는구나! 바로 구독 박습니다.
“이제 개설해서 영상을 올리려고 합니다.”
드레젠은 하시스 성을 나오기 전, 몇 개의 물품을 추가로 구입했다.
별건 아니었고, 활과 화살이었다.
활은 보레아스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동네인 ‘아라미스’라는 곳에서 잘 만들었다.
드레젠 역시 그곳에서 제작한 활을 꽤 많이 써 봤다.
“활과 화살은 꼭 구입하시고, 쓰는 방법을 익혀 두세요. 아주 유용합니다.”
활을 무시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경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자들이나 하급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는 매우 유용한 무기였다.
거기다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다면 꽤나 위협적인 무기로 바뀌게 되지.
화살 한 통과 활을 등에 맨 드레젠이 성을 막 빠져나왔다.
‘북동쪽이라고 했나?’
그는 하시스 성을 바라봤다.
크고 웅장한 성이 우뚝 서 있었다.
베스티안 백작령을 대표하는 성인데, 주변 마을을 내버려 둔다라…….
정말 미심쩍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에 어디서부터 의심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일단 초반에 돈을 벌었다면 새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귀족들과의 연을 만들어서 권력에 다가가든가, 아니면 저처럼 독립을 해서 본격적으로 영지물로 전향하는 겁니다.”
-마지막은 역시 모험이겠쥬?
-동료들을 모으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깽판을 치는 거지!
-ㅇㅈㅇㅈ 모험이 짱이지
-쓰앵님 보물찾기는 안 합니까?
“보물찾기라…… 힐링 방송이니까 그것도 가끔 하면 좋겠네요.”
저기, 아르게논 대륙엔 수많은 아티팩트들이 잠들어 있었다.
후반부 5년 정도는 아르게논 대륙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건 나중 이야기니까, 지금은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돈을 벌고 유유자적하게 사는 데는 역시 영지만 한 것이 없거든.’
영지는 기본적으로 세금을 걷을 권리가 주어진다.
그렇다고 전부 다 영주를 시켜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차차 해결될 문제니까 괜찮았다.
게임 시간으로 3년.
그동안 최대한 많은 준비를 끝내 놔야 했다.
“인재를 모으고 영지를 꾸리고 소소한 일상을 사는 것이 제 게임 목표입니다. 언제든지 힐링할 수 있는 방송으로 꾸려 갈 생각입니다.”
-그거 조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치맥에 방송 크으
-편-안한 힐링 뱅송
-다른 곳에서 매운맛 잔뜩 보고 여기서 힐링해야짘ㅋㅋ
3km는 제법 가까운 거리였다.
걸어서 30분 정도만 걸어가니, 아이젠하트의 말대로 작은 마을이 보였다.
문제는 작아도 너무 작다는 것.
집은 열 채가 안 되었고, 기본적인 숙박 시설도 보이지 않았다.
“음…… 이 정도면 화전민 수준인데요?”
-어…… 저게 마을?
-마을(같아 보이는 것)
-버릴 만하네ㅋㅋㅋㅋ
-여기 다시 살릴 수 있겠어요?ㅋㅋㅋㅋ
마을을 재건하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드레젠은 뒤를 쳐다봤다.
“일단은 잠잠하군요. 마을에 들어가 보죠.”
-킹단은?
-일단은? 그렇다는 건?
-또 뭔가가 있나 봉가
“궁금하면 500…… 이건 그만하고,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상대방의 호의를 그냥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브락시아는 그런 세계였으니까.
얻는 것이 있다면 상대방도 요구하는 것이 있다.
간혹 터무니없을 정도로 수지가 남는다면 그건 노림수가 있는 것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가 겪은 브락시아는 그랬으니까.
“누, 누구시오?”
“음…… 여기 정착하려고 온 사람입니다만.”
“이 사람,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어서 지금 당장 돌아가시오!”
-이 아조시도 급발진하시네;;
-다짜고짜 저런 사람들 틀니 압수해야 됨;;
-저건 틀니 생각도 들어 봐야 된돸ㅋㅋㅋ
갑자기 버럭 화를 내는 중년 아저씨.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고, 꾀죄죄한 몰골이 이 마을의 실체를 알게 해 주었다.
옷차림에 비해 하체가 튼튼하게 발달되어 있었고, 온몸에 잔근육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차 있었다.
등에는 허름한 활을 매고 있는 것을 보아 사냥꾼들이 살고 있는 마을 같았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이곳에 정착을 하겠다고? 차라리 하시스 성에 가지 그러나. 이곳은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있을 곳이 아니야. 위험한 녀석들이 나타난단 말일세.”
“위험한 녀석들이라면…….”
“도적, 그리고 몬스터지. 그러니 얼른 떠나게.”
드레젠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씨익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섬뜩하게 변했다.
시청자들은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보고 경기를 일으켰다.
-또또또.
-저 얼굴 무서웤ㅋㅋㅋ
-쓰앵님, 또 누굴 참교육하시려고 그러십니까ㅜㅜ
“재밌게 됐군요. 제가 해결해 드리면 이곳에 눌러앉아도 되는 겁니까?”
“무, 뭐라고?”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을 짓는 사냥꾼 아저씨.
드레젠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똑똑히 말했다.
“제가 이 마을을 접수하겠습니다.”
이제 이 마을은 자신의 것이라고.
경험치도 올리고 마을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기회였다.
그 순간, 알림 창이 새로운 정보를 갱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