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화
3화 - 익숙한 그것
#1
한 달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모든 언론과 게임에 관련된 곳에서는 연신 브락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댔다.
뛰어난 퀄리티와 완벽하게 구현된 하나의 세계.
무엇보다 이슈가 된 것은 게임 머니의 현금화였다.
기본은 싱글 패키지 게임임에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자-, 다 됐습니다. 설명서 읽어 보시고요.”
“감사합니다.”
땀을 뻘뻘 흘리는 기사 아저씨들이 활짝 웃으며 캡슐 설치를 완료했다.
멀뚱하게 보고 있으니 미안하긴 했지만, 다행히 창식이 형님이 도와주셔서 일이 빨리 끝났다.
본래 있었던 침대를 빼 버리고 넣은 터라, 이젠 이곳이 내 잠자리가 될지도 몰랐다.
“이게 전원 버튼이고요. 열리고 들어가셔서 누우면 자동으로 다 해 줍니다. 2년 동안 무상 수리 해 드리니까, 연락처는 떼지 마시고요.”
“예.”
짧게 답하자, 기사님들이 웃으며 부산스럽게 짐을 챙기셨다.
그들이 나간 후, 허름한 단칸방을 바라봤다.
흐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캡슐이 엄청난 부조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래도 뭐 어때, 이젠 이게 내 밥줄이 될 텐데.
“방송국 아이디는 만들어 놨냐?”
“네. 이미 다 해 놨죠.”
“그럼, 이참에 한번 용이 돼 봐라.”
어깨에 올라온 두툼한 손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이것밖에 없었다.
근사한 집에서 호의호식하는 것.
내가 꿈꾸던 평화로운 삶이었다.
“난 간다.”
“조심해서 가세요.”
“다음에 만났을 땐, 네가 밥 한번 사라.”
“노력해 보죠.”
씨익 웃자, 창식이 형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그 표정이었구나.
이렇게 웃을 때마다 한 놈씩 떨어져 나가곤 했었지.
결의를 다지는 표정이다.
이 표정을 본 이세계 놈들 중에 어디 하나 멀쩡하게 돌아간 놈이 없었다고.
‘그래 봐야 뭐 하나. 이젠 옛날 얘긴데.’
고물 컴퓨터.
그리고 초호화 캡슐.
모텔 방에서 볼 법한 냉장고와 자그마한 탁자와 옷장.
내가 가진 전부였다.
“그래. 이왕 시작하는 거, 밑바닥부터 시작해야지.”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다.
아직도 마나 결핍증에 허덕이는 몸뚱이지만, 게임 안에서는 다를걸?
시계를 쳐다보니 오전 11시 50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10분 정도 남았네.”
그동안 캡슐에 대한 것을 익히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시작하겠지.
처음 들어 보는 회사였고, 미심쩍은 일도 몇 가지 있었지만 괜찮았다.
이곳은 브락시아가 아니라 지구였고, 나는 귀환했으니까.
[게임 : ‘세이브 더 브락시아’가 설치되었습니다.]
[서버가 열렸습니다.]
“좋아. 가 볼까?”
큼지막하게 생긴 버튼을 누르자 유압이 작동되며 문이 열렸다.
새로운 세계로의 문이랄까.
지금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을 터다.
나도 수많은 방송인 중 한 명이 되겠지.
“하지만, 당신들과는 좀 다를 거야.”
내가 추구하는 방송은 박 터지게 싸우거나 하는 진취적인 것이 아니었으니까.
피식 웃으며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뇌파를 조정하는 헬멧을 착용하고, 눈을 감았다.
[풀 다이브, 실시합니다.]
스르륵, 잠에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왠지 익숙한…….
#2
[브락시아 대륙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아바타를 설정해 주십시오.]
눈을 뜨자, 청명한 소리가 들렸다.
내가 팬티 한 장만 입고 서 있는 검은 공간이었다.
거울이 있었고, 그 속에 내 모습이 비쳤다.
다양한 외형이 있었지만, 이런 건 취향에 맞지 않아서.
아니, 그래도 조금은 바꾸는 게 낫겠지.
“자, 됐다.”
[설정되었습니다.]
[닉네임을 설정해 주십시오.]
강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만 바꾸고, 설정을 완료했다.
“……드레젠.”
드레젠.
브락시아의 대륙의 언어로, ‘여유롭게 거니는 자’라는 뜻.
내가 최고로 좋아했던 단어였다.
항상 그렇게 다니고 싶었거든.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구원해 주세요, 용사여.]
“용사는 개뿔.”
더 이상 용사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었다.
곧이어 웅장한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스킵하고 싶었지만, 아주 작은 호기심이 지켜보자는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시작은 평화로운 브락시아의 마을이었다.
[당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세요.]
전투하는 이들, 그리고 영지를 다스리는 이들, 훈련장에 모여 기사들과 훈련하는 이들까지.
상당히 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종국에는 전쟁을 하고, 수많은 시체들을 넘어 진격하는 군대의 선봉장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이들은 바로 ‘이계’의 군대.
정체 모를 기계, 혹은 마족이라고 불렸던 것들이 브락시아 대륙을 습격하는 장면이었다.
[세상을 구해 주십시오.]
영웅들, 플레이어들이 한 줄로 도열해 있었다.
각자의 무구를 들고, 각자의 적을 노려보며.
그들은 함성을 지르고, 무기를 치켜들었다.
영웅들의 시선 너머에는 강력한 적들이 보였다.
함성을 지르는 모습으로, 오프닝이 끝났다.
“잘 만들긴 했네.”
이미 스트리밍이 시작됐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시작해야겠지.
육체에 감각이 돌아오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밝아졌다.
극도의 사실주의를 추구한다는 모토답게, 게임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눈을 뜨자, 낡은 군화가 보였다.
[지금부터 스트리밍 방송을 할 수 있습니다.]
“으…… 머리는 왜 이렇게 띵한 거야?”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사체 더미였다.
고블린, 그리고 오크, 트롤…….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나와 같은 군복을 입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건…….
“바스티안 백작가. 의복의 수준을 보니 제국력 50년에서 60년 사이겠고…….”
중얼거리며 연도를 추측해 본다.
가상 현실 게임이니까 혹시? 하는 마음에 상태 창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상태 창]
[HP : 100 / MP : 100]
[기술 포인트 : 0]
[숙련 포인트 : 0]
“단출하네.”
정말 보잘것없는 상태 창이었다.
이어서 기술 창을 불러왔다.
기술엔 덩그러니 몇 개의 기술만 나와 있을 뿐이었다.
[기술]
[행군 : 1]
[마나 적응력 : 1]
상태 창보다 더욱 보잘것없는 기술 창.
닫아 버리려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어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나 적응력.’
마나…… 그래 마나.
이 세상은 현실과는 다르게 마나가 있는 세상이었다.
“뛰어다닐 수는 있겠지?”
지독한 마나 결핍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있었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고통을 참고 편의점에서 일하던 날, 버스를 놓치면 목숨을 걸고 뛰어가야 했던 일.
대부분의 아르바이트에서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바로 잘렸던 일들.
어머니의 병원비조차 제대로 갚을 수 없다는 현실이 너무 비참하기만 했었다.
‘이젠 나도 평범하게, 그리고 잘 살고 싶다.’
열망이 일었다.
이 게임의 배경이 진짜 내가 알고 있는 ‘브락시아’라면, 이건 큰 기회였다.
천천히 첫 발을 내디뎠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그러고는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누군가 보면 미친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사체 더미에서, 빨빨거리며 뛰고 있는 사람이라니.
“허억…… 허억…….”
숨이 차오를 때까지 전력으로 내달렸다.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상쾌함이 몸을 지배했다.
짜릿한 감정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이 게임 속에서의 나는, ‘지극히 뛰어난’ 육체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비릿한 혈향과 썩은 내가 그제야 올라왔다.
쾌감에 비명을 지르려는 것을, 겨우 억제할 수 있었다.
“하하…… 이게 얼마 만이야?”
전력으로 달려 본 것이 얼마 만이었지?
마음껏 몸을 움직여 본 것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후우 내뱉으며, 전의를 다졌다.
“이렇게 훌륭한 육체라면, 못할 게 없지.”
지금 현실에서의 육체와 비교하면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천무지체’ 부럽지 않은 몸이었다.
초기 장비 역시 꽤 괜찮은 편이고…….
이제는 방송을 켜면 될 것 같은데?
“흠흠, 그럼.”
방송에 대해서는 꽤 알고 있었는데, 몸이 불편한 내가 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손목과 입담이 있으면 그럭저럭 먹고살 수는 있을 테니까.
방 제목은…… 그래.
[뭐든지 알고 있는 초보의 소소한 브락시아]
[실시간 스트리밍이 시작됩니다.]
뉴비인데 뭐든지 알고 있지.
이 브락시아에 대해서는 말이야.
캠은 상황에 맞춰서 적절하게 유지되도록 만들었다.
일단은…… 가까운 영지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는데.
“셋 중 하나였나.”
브락시아는 대규모 공성전도 공성전이었지만, ‘신성한 결투’라는 콘텐츠를 내세웠다.
자신의 동료, 혹은 영지의 가신들을 이용해 팀을 꾸리고, 각각의 시너지를 받아 싸우는 것.
PC 게임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체스 장르와 꽤 유사하다고 한다.
영지를 가지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첫째는, 영주 밑으로 들어가서 공을 세우는 것. 둘째는…….”
각지에 있는 동료들을 영입해, 영주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것.
안정적인 루트로는 첫 번째가 좋겠고, 모험을 좋아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면 두 번째가 나을 거다.
하지만 나는 세 번째 루트로 갈 생각이었다.
[‘뉴비환영해!’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ㅎㅇ!
“어서 오세요. 첫 시청자시네요.”
-방제 실화임? 진짜 뭐든 알고 있어요?
“적어도 답답한 건 없을 겁니다. 나중에 써먹을 소소한 팁도 알려 드려요.”
-ㅋㅋㅋㅋ 함 볼게여.
첫 번째 시청자였다.
자, 그럼 저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해 줄지 모르겠지만 시작해 볼까?
그럼…… 일단 주변에 있는 무기들부터 챙겨 가자.
“이곳이 시작 장소인가 보더라고요. 처음부터 이렇게 널널하게 파밍 재료를 줄 줄은 몰랐습니다.”
-아, 무기들 말씀하시는?
[‘kos1121’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ㅎㅇㅎㅇ! 여기가 그 뭐든지 잘 아는데 소소한 방송인가요? ㅋㅋㅋㅋ
-방제가 끌려서 와 봄. 대형 BJ들은 너무 채팅이 묻혀서 소-똥이 안 된다~ 이 말이야.
유쾌한 시청자들.
심심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널려 있는 사체들.
사람이 아닌, 몬스터들의 사체들에게 눈을 돌렸다.
이 시청자들이 궁금해할 것이다.
“방제 보고 좀 궁금하셨죠?”
-궁금할 게 뭐 있음, 어그로잖아여 ㅋㅋㅋㅋ
-진짜 뭐든 알면 이건 킹리적 갓심 들어갑니다?
“자아…… 제가 아까 전에 한 말이 있었습니다. 초반에 널널하게 파밍 재료를 줬다고. 그게 왜 그럴까요?”
-무기랑 갑옷 때문 아니에요?
-맞-다!
“그건 부수적인 거고, 몬스터를 이렇게 싱싱하게 두다니, 이거 다 팔면 적어도 5골드는 나옵니다.”
-엥?
-??
고블린이랑 오크는 그렇다 쳐도, 트롤의 피는 정말 귀중한 연금술 재료다.
다들 한 번씩은 읽어 봤잖아?
허리춤에 매여 있는 검갑을 매만졌다.
익숙한 철의 향이 코를 간질였다.
본래는 나지 않겠지만……. 옛 기억들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 가져갈 수는 없으니 알짜배기만 빼 가야겠죠. 그래도 1골드는 나올 겁니다. 그런데 검이 좀 기네요. 보통 이럴 땐 궁수들의 사체를 뒤져 보면 됩니다. 지루한 작업일 수도 있으니까, 얘기하면서 진행할게요.”
-뭐야, 이런 자연스러운 진행, 칭찬해.
[‘뉴비환영해!’ 님이 100코인을 후원하셨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이건 제가 따로 영상을 만들어 올릴 건데요, 초반부에 부유하게 시작할 방법입니다.”
아마 초반에 얻지 못하고 지나간 스트리머들이나 BJ들, 그리고 수많은 플레이어들은 꽤 후회할 거다.
그래도 기반 시설을 먼저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죽어 버린 궁수의 사체를 뒤지자, 낡은 단검이 들어 있었다.
바스티안 백작령은 궁수들에게 호신용이자 자결용 단검을 하나씩 지급했지.
‘그나저나 도축할 때는 황금색 폴리곤이 없으려나?’
그게 아니라면 조금 곤란할지도 몰랐다.
기껏 뭘 보여 준다고 했는데, 허무하게 황금색 폴리곤 덩어리만 날리면 좀 그렇잖아?
-단검이네?
-어, 도축하려고요?
“맞습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칼을 들고, 가장 부패가 빠른 오크에게 다가가자, 메시지가 떴다.
그리고 씨익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