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가슬렌더-102화 (102/120)

제 목: 107회 - http://hoyanet.new21.net/zero/view.php?id=gigaselender&no=107

[주석] -7- 어머니와 아들(리니아의 슬픔.) 주석 7. 어머니와 아들(리니아의 슬픔.)-리니아 시센느(그녀의 슬픔.)-

D.W. 1903년.

원자력 천공위성의 한 거대한 비밀 실험실. Think Tank 라는 거대한 두뇌들이 모인 이 조직은 위성 안에서 수많은 연구를 했다. 거대한 위성 안의 수많은 실험실들은 그런 T.T 연구원들이 사용하는 비밀 장소였다.

이 비밀 실험실 안에는 두 명의 연구원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앞에는 한 명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하필이면 100살이나 된 녀석을 실험대상으로 삼은거야?"

-

"몰라. 젠장. 돈이라도 많은가보지."

"미쳤어? 돈이 있다면 이런 짓은 절대 안 하지."

-

"하핫. 그건 그렇군."

두 명의 연구원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실험대상을 바라보았다.

실험대상은 올해로 정확히 100살이 되는 남자였는데 이때만 해도 평균연령은 120여세에 불과했다. 그 연구원들은 다 늙은 그런 자를 실험대상으로 쓰는 박사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거 가능하기나 한 거야? 사람의 초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거 아니냐구?"

-

"멍청하긴. 그러니까 개발하려는거 아냐."

"그러니까 가능하긴 하냐구?"

-

"우린 시키는대로 하면 되는거야. 박사님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지금까지 다른 실험대상들은 몇 일 실험실에서 보이다가 안보였잖아. 그들은 모두 틀림없이 죽었을거라구!"

-

"쉿!!! 누가 듣겠어!"

한 연구원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그렇게 말하자 다른 연구원이 다급히 입을 막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실험대상들이 모두 죽어나가는데.

성공할리 없지 않느냐 이거야."

-

"쳇. 그러게 말야. 이곳은 정말 무서운 곳이야. 하지만 아무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텐데 뭐. 어때?"

"에구. 그래. 우린 일이나 하고 돈이나 받으면 돼지."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들의 일에 몰두했다. 잠시 후 한 명의 박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한 연구원이 허릴 직각으로 숙이며 인사했다.

"이제 오십니까? 로드니암 박사님!"

로드니암. 아마 이 소설에서 성을 외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허기사 작가조차도 지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 성을 못 외우는 이 판국에(판돌 로드리게스. 이 녀석은 외웠어유--;) 독자들보고 그걸 알아주길 바란다는것은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게 아닌가? 아. 아닌가?

아니다. 어쨌든. 로드니암. 이것은 지크프리드의 성이었다.

지크프리드 로드니암 박사.

지크프리드는 연구원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실험대상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소리 없는 괴소를 흘렸다.

두 명의 연구원들은 로드니암 박사의 그런 모습에 몸이 전율함을 느꼈다. 그의 음산한 모습은 너무도 공포스러웠던 것이다.

지크프리드는 실험대상을 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흠. 위대하신분께서 직접 콕 찝어 준 녀석이니. 이번엔 틀림없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연구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연구원들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지크프리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험을 시작합시다. 이번엔 예감이 좋으니 성공할거요. 후후훗."

지크프리드의 말에 모두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될 것이라고 연신 아부했다. 지크는 연구원들을 지시하여 실험 준비를 모두 마쳤다.

브레인 디벨롭 프로젝트(Brain Develop Project:일명 B.D 연구라고 했다.)는 말 그대로 두뇌를 계발시키는 연구였다.

여기서 두뇌를 발달시키는 것은 뇌의 크기를 크게 만든다던가 주름을 많이 만들어 용적을 크게 만든다던가 하는것은 아니다. 바로 뇌를 사용할 수 있는 양을 늘이는 연구였다.

즉 보통 사람들이 뇌의 10~15%를 사용하는데 그 사용량을 증가시키는 연구였던 것이다. 후세에 포스 오너라고 불릴 정도의 사람이라면 뇌의 30% 이상을 사용할 줄 알아야 했고 그랜드 포스 오너는 40% 이상을 사용할 줄 알아야 했다.

어쨌든 매너 포스. 이 당시만 해도 그냥 초감각적 능력이라해서 초능력이라 불리던 이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선 뇌의 사용량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물론 뇌를 그만큼 사용해도 초능력을 쓸 줄 모르는 자들도 더러 있었지만.

이미 지크프리드는 리니아라는 초능력자로부터 두뇌의 구조와 사용하는 부위를 각성하는 방법까지 모두 알아낸 상태였다. 그녀는 순수한 초능력자(Esper:이때는 포스 오너란 말이 없었다)였는데 그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여자였다.

지크는 그녀를 연구한 결과를 이번 B.D 프로젝트에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해서 실험은 실패했고 실험대상들은 하나같이 모두 죽어버렸다. 그러던 중 위대하신 분께서 실험대상 하나를 직접 알려주었던 것이다.

위대하신 분은 최근 들어 다른 종족들의 침략이 심해지고 있고 그에 대응할 방어수단이 없음을 한탄했는데 초능력자들은 충분히 그 역할을 수행할 인재들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숫자가 매우 적다는데 있었다. 게다가 초능력자들도 대부분이 약한 자들뿐이어서 개발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지크는 B.D 프로젝트를 지시 받았고 끝내는 실험대상까지 위대하신 분으로부터 알게 된 것이다. 지크는 이번엔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었다. 위대하신 분은 그에게 있어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기가 슬렌더. 지크는 잘 알았다. 그 분이 바로 인간들을 구원할 구세주란 사실을.

어쨌든 그런 존재가 직접 알려준 이번 실험대상은 절대로 실패할리 없었다. 물론 그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실험 대상.그는 바로 라케프 한 푸조였던 것이다.

라케프는 B.D 프로젝트 처음으로 살아남은 실험대상이었고 그는 First Force Owner로 명명되었다. 그의 초능력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강력한 것이어서 처음 모델로 삼았던 리니아의 능력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

지크프리드로서는 정말 만족스런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곧 난관에 봉착했다. 그 실험의 성공은 단 한 번이었던 것이다. 위대하신 분께서 알려준 실험대상, 즉 라케프를 제외한 다른 실험대상들은 모두 실험도중 죽어버렸던 것이다.

지크는 위대하신 분께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 분은 더 이상 다른 실험대상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택한것이 바로 두 명의 유전자를 서로 묶는 것이었다. 라케프와 리니아. 그 둘의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만드는 더러운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비록 반인륜적이고 패륜적인 생각이지만 생각만큼은 기발했다. 지크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아서 라케프의 정자와 리니아의 난자로 배양된 아기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초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Second Force Owner 들이었다.

그런 아기들을 인간복사기로 찍어내듯 수없이 많이 만들어내려던 지크프리드는 어느날 위대하신 분께 불려갔다. 위대하신 분께서는 그들의 수를 딱 몇 명으로 제한하라고 명했다.

지크의 생각으론 그렇게 강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좋을 것 같았는데 위대하신 분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위대하신 분은 묻지 말고 명령에 따를 것을 권고했다. 지크프리드는 다소 찜찜했지만 신이나 다름없는 그분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지크프리드는 생각했다.

'뛰어난 초능력자들이 많이 생기게 된다면 분명 다른 종족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될텐데. 이상한 노릇이다. 아무래도 그분의 깊은 뜻은 이해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난 그분의 종.

명령에 따르는 수밖에.'

그렇게 해서 지크는 세컨드 포스 오너의 수를 15명으로 제한했다. 물론 100년도 안 되는 시간동안 그들의 대부분이 전쟁으로 죽고 말았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아크타리안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B.D 프로젝트는 <라케프 혈통 이어가기>라는 어처구니없는 계획으로 바뀌고 말았지만 대 성공이었다. 그들은 후에 있을 전쟁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였던 것이다.

위대하신 분의 말씀대로 더 이상 그들을 국화빵 찍어내듯 만들지 않았던 지크는 라케프를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라케프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리니아 역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리니아는 1지역구 남동쪽에 위치한 중소도시들이 밀집된 곳에 살았다. 현재 로레인시가 위치한 곳이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작은 도시들이 군집을 이루고 살았던 것이다.

실험이 성공한 이후 그녀에겐 재단으로부터 많은 혜택이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호버크레프트나 집 그 외 금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을 재단이 해결해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곳에서 새 삶을 꾸려갔던 것이다.

이때가 D.W 1904 년이었다.

리니아는 평범한 삶을 살길 원했다. 그녀는 초능력이 굉장했지만 그 사실을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약간 다르거나 특출난 사람들을 볼 때면 시기 하거나 따돌리기 마련이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던 리니아였기 때문에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지낸지 5년이 흘렀을 때였다. D.W 1909년. 이 해는 인류에게 잊혀지지 않는 참담한 해로 기억되고 있다. 바로 제 2차 헤켈 대전이 일어났던 해인 것이다.

헤켈 대전은 D.W 2001년에 일어난 티탄시 헤켈 대전처럼 (이것을 후세 사람들은 제 5차 헤켈 대전이라 일컬었다.) 대부분 한 도시만 침략을 했다.

D.W 1980년에 일어난 제 4차 헤켈 대전에서 3개 도시가 공격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의 도시만 침략을 당했던 것이다.

그렇게 제 2차 헤켈대전은 리니아가 살고 있던 곳 서북쪽에 위치한 세지르 시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으로 리니아의 운명이 바뀌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세지르 시는 리니아가 살고 있는 곳보다는 훨씬 규모가 작은 도시였지만 중요성은 훨씬 컸다. 이 도시에는 카안드리아스 재단의 실질적인 이윤을 낚는 공장들이 엄청나게 많이 존재했던 것이다.

카안드리아스 재단은 누가 뭐라 해도 인류 최고의 기관이었다. 그 재단에서 고용한 인력만해도 몇백만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니 재단의 필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이 당시 세지르 시는 그런 면에서 1지역구에서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도시로 꼽혔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았던 것일까? 헤켈들이 공격 목표로 선점한 곳이 바로 세지르 시였다. 특히나 세지르시에는 군수품을 납품하는 무기공장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은 당연한 것이었다.

카안드리아스 재단에서도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헤켈들을 막을 병력을 세지르 시로 급파했다. 물론 이 당시야 가오사이보그는커녕 로이안 리플조차 없었기 때문에 구식 무기만 가지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지대지 박격포라던가 구식 건 (Gun:탄환을 사용하는 장총)등만으로 헤켈 30개체를 막아야 했던 것이다.

헤켈 30개체. 지금이야 한 검단의 규모가 100개체지만 그 당시만해도 30개체였다. 한마디로 말해 그 당시의 헤켈 30개체는 한 도시정도는 우습게 쓸어버릴 정도의 엄청난 병력이란 뜻이다.

그 정도의 숫자가 세지르시를 공격했으니 재단에선 자신들의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것이란 것을 예상했다. 이때 재단에서 생각해 낸 사람이 바로 라케프와 리니아였다. 아직 세컨드 포스 오너들은 성장이 덜 된 상태였기에 그들을 싸움터로 내몰 수는 없었다. 5살 된 어린애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퍼스트 포스 오너인 라케프와 오리지널 포스 오너 중 최강자인 리니아는 인류 최후의 보루라고도 할 수 있었다.

지크프리드는 라케프를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라케프는 재단에서 실험을 받은 이후 자신의 능력을 좋은 일에 많이 사용할 수 있었다. 이번 일 역시 전쟁에서 사람들을 돕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재단에서 많은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리니아는 달랐다. 그녀는 초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을 때부터 그 능력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자신의 신기한 능력으로 인해 지금껏 평범한 삶을 절대 살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은 친구가 되고 싶어 다가가는데 그들은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웃사이더. 심하게 말해 왕따를 당하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였기에 재단에서 빠져나온 후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지금 사는 곳에 정착한 후 5년 동안 그녀는 한 남자를 알게 되었고 그 남자의 아이들을 갖게 되었다.

한 살인 아들과 세 살인 딸. 그녀에게 그 아이들은 너무나도 소중한 자신의 분신이었다. 남편과 결혼할 때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철저히 숨겼다. 아니, 영원히 숨길 것이라 맹세했다.

다행히 남편은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지크프리드가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바로 그녀가 다신 사용하지 않기로 했던 그 능력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녀는 요청을 받는 즉시 거절했다. 다신 그곳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남편과 아이들이 알게 된다면.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또 혼자가 될 것이다. 아니, 절대 그럴 순 없었다. 지금의 이 행복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죽는 한이 있어도 돕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지크프리드는 그녀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헤켈들이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온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앞으로 이삼일 안에 세지르 시는 도탄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전에 리니아를 끌어들여야 했다.

지크프리드의 제안을 거절한 다음날.

리니아는 평소처럼 집안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일 나간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아이들은 조용히 자고 있었으며 너무도 평화로웠다. 그때 난데없는 괴한들이 집안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리니아는 너무도 당황해서 자신이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끝내 괴한들은 두 아이를 납치해갔으며 때마침 집으로 돌아오던 남편과 마주쳤다.

"안돼!!!!!!"

괴한들은 가차없이 남편의 몸을 향해 총을 갈겼다. 남편은 그대로 즉사했으며 괴한들은 아이들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리니아는 남편을 마구 흔들며 깨웠다. 자신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남편의 얼굴을 때려도 그는 꿈쩍 하지 않았다.

남편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리니아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원한 이졌길래 아이들을 납치하고 자신의 남편마저 죽인단 말인가.

왜 잠시동안의 행복을 가만두지 않는단 말인가.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뭔가가 있었다. 지크프리드!!

그밖에 없었다. 이런 짓을 벌일 사람은 오로지 그 사람밖에 없었다.

리니아는 지크프리드에 대해 그다지 많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재단에서 알아주는 실력자이며 성격이 냉혹,냉철, 냉정이란 3냉을 두루 갖춘 차가운 사람이란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재단이라면 이런 짓을 서슴없이 벌여도 상관없을 정도로 막강한 집단이 아닌가.

그 누가. 재단을 견제한단 말인가. 현재 시대야 지역구 의회라는 것이 창설되어 재단을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지만 이때만 해도 재단은 대지 위에 홀로 우뚝 선 기둥이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한다해도 아무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리니아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날 지크프리드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유치하긴 하지만 두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목숨을 걸고 세지르 시를 도우라는 것이었다. 리니아의 맹세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자식들보다 소중한 것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비록 남편은 잃었지만 아이들만이라도 살려서 행복한 미래를 안겨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리니아는 제 2차 헤켈대전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역사상 가장 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죽었던 참담한 전쟁. 단 30개체를 상대로 150여명에 이르는 구식 건으로 무장한 군인들과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러 나온 민간인들 200여명이 몰살당한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라케프와 리니아의 도움이 있었지만 헤켈 대전은 헤켈들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재단의 중추였던 세지르시가 괴멸 당하고 재단은 큰 타격을 입었다.

리니아는 최선을 다했지만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헤켈들의 신체는 놀라울 정도로 단단해서 구식 건은 아예 통하지 않았고 민간인들의 공격은 더더군다나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리니아와 라케프. 그리고 몇 명 안 되는 검을 다룰 줄 아는 무인들만이 헤켈들과 간신히 평형을 이루며 싸울 수 있었지 다른 사람들은 헤켈들의 일초지적도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리니아와 라케프는 간신히 그곳에서 탈출하였다. 비록 살아남긴 했지만 그녀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크프리드에게 뭐라 변명한단 말인가.

그녀는 죽은 남편과 살았던 곳으로 돌아왔다. 처참한 꼴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아이들이 돌아왔을까 하는 마음에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두 아이가 모두 목 졸려 죽어 있는게 아닌가. 그 아이들에겐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었는데 죽은지 몇 분 안 되는 것 같았다.

리니아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도대체. 왜!!!!"

그때였다. 아이들의 시체를 붙잡고 울고 있는 리니아의 뒤에서 누군가 총을 쐈다. 리니아는 총성이 들리는 그 순간 뒤를 돌아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는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런 그녀에게 날아오던 총알은 공중에서 그대로 멈춰서서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총을 쏜 괴한은 그녀의 능력이 굉장함을 알고는 급히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리니아는 풀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가 시킨 짓이냐?"

-

"......."

"지크프리드겠지. 죽어."

리니아는 두 번 묻지도 않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총알을 그 녀석에게 되돌려보냈다. 녀석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미간에 총알을 맞고 즉사해버렸다.

리니아는 주저앉았다. 그리곤 울음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릴 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흑흑흐하하. 지크프리드. 당신 짓이었어. 하핫. 후흑.

흑. 그래. 당신이야. 당신. 하핫. 흑흑."

리니아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남편도 없고 아이들도 없었다. 더 이상 그곳은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곳이었다.

아니, 도리어 그녀를 슬프게 만들뿐이었다. 리니아는 더 이상 인간이란 존재를 믿지 않게 되었다. 아니, 인간들을 증오하고 저주했다. 그녀가 처음부터 악인이었다면 살인마로 돌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워낙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기에 사람들을 미워하는데서 그쳤다.

그렇게. 그녀는 조용히 사라졌다. 여기서 잠깐, 라케프는 그녀가 암살 당한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녀의 집과 아이들이 불에 타버렸던 것이다. 물론 그곳에서 한 괴한의 사체도 나왔기 때문에 재단에서 무슨 짓을 꾸몄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녀가 다시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제 4차 헤켈 대전이었다.

될 수 있으면 인간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그녀였다.

다시 썩을 놈의 인간들을 만나게 되면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 4차 헤켈 대전은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전쟁이다. 왜냐하면 한 도시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던 헤켈들이 3개의 도시에 시간차를 두고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그 중 한 도시에 리니아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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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아크바레이가 태어나던 해인 1980년. 제 4차 헤켈 대전이 일어났다. 3지역구에 있던 러플프루시에 살고 있던 리니아는 헤켈 대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귀가 솔깃했다. 아니, 전쟁을 반겼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에 헤켈 대전이 일어났고 그렇다면 혹시 평생의 원수인 지크프리드를 볼 수 있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르플프루 시에는 아크타리안과 더불어 전지역구적으로 유명한 그랜드 포스 오너가 한 명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고페니 제로원이었다. 고페니는 헤켈들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람들을 모으고 방어준비를 했다.

그 역시 아크타리안처럼 세컨드 포스 오너였는데 공격계 포스 오너 중 최강이란 명성을 지닐 정도로 고강한 사람이었고 <메이딩 바쿰>이란 기술을 창시한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가오사이보그가 개발되려면 10년이나 남아 있던 시기였다. 전보다 검을 사용할 줄 아는 무인들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가오그만큼의 파워를 발휘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페니는 자신의 공격계 매너 포스와 그들의 검술실력만 있으면 헤켈 30개체는 충분히 제압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헤켈들은 그런 고페니의 생각을 깨기 위해 쳐들어 온 것인지 그의 예상을 초과한 50개체가 공격해 왔다. 고페니와 무인들은 헤켈들을 상대로 열심히 싸웠다.

(참고로, 고페니는 2일간의 전쟁에서 그 당시 최고의 기술로 평가받았던 <메이딩 바쿰>으로 헤켈들을 20개체나 죽이는 전공을 쌓았다.)첫날의 전투는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고페니를 비롯한 100명이 넘는 군인들과 50여명의 무인들, 그리고 전투 머신(카인의 쉐도우 프로젝트때 평가용으로 사용했던 그 기계:

원통 모양의 거대한 사이보그로 직경이 2미터나 되고 높이가 1미터 50센치인 살인무기이다. 구식건으로 무장을 하고 있고 드릴이나 전기톱을 달기도 했다)30여대가 투입된 가공할 전투였다.

고페니는 헤켈들의 수가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는 것을 알았지만 당황하지 않고 소리쳤다.

"우리에겐 패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전투 머신도 지원된 상태이고 또 제가 있습니다. 제 명성이 허명이 아니란 것을 입증하겠습니다! 모두 따라주십시오!!"

고페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헤켈들을 바라보았다. 이때 공격해 온 헤켈들의 수장은 잘난 척 뻐기기 좋아하는 르부뤽이었다.

이때도 그는 켄으로 그의 백호단을 이끌고 있었는데 인간들의 군세가 상당히 뛰어났다. 하지만!

"에게게. 겨우 저만큼 마중 나온거야? 이 지존 르부뤽님에게 너무 대접이 소홀한 것 같은데? 쳇. 이래선 쟈칼 녀석하고 마타 륭 녀석이 더 쏠쏠할 것 같군.하지만 뭐. 난 워낙 마음씨가 넓으니까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지. 후훗. 공격!!!"

르부뤽은 자신의 잘난 모습을 일부러 부하들에게 보여주려는 듯 현란한 제스쳐를 한 후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공격명령을 내렸다. 백호단 50개체가 쏜살같이 공격해 나가기 시작했다.

고페니는 한 녀석이 갑자기 앞으로 나와서 이상한 몸짓으로 발광하며 뭐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녀석은 신기하게도 온 몸에 화려한 문신을 새겼는데 그것도 삼원색을 사용해서 눈에 확 튀는 모습이었다. 설치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녀석이 대장이란것을 알게 해주었다.

"저 녀석인가."

고페니는 문신을 한 헤켈 녀석의 외침과 동시에 헤켈들이 공격해 들어옴을 알았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모든 힘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그의 몸 주위로 밝은 기운들이 뿜어지는게 아닌가.

르부뤽은 이상한 광채를 뿜는 녀석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런 인간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초능력자들은 몇 번 싸워봤지만 저 자는 그런 녀석들과는 뭔가 달랐다.

르부뤽은 처음으로 긴장된 모습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너의 그 광채로도 나의 아름다움을 잠재울 수는 없을게다.

호호홋. 겉으로 뿜어지는 그런 빛깔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겠지만 나처럼 스스로 뿜어져 나오는 미(美)는 쉽게 만들어지는게 아니거든. 하하하핫."

르부뤽은 자신의 잘난척을 부하들이 보고 아부해주길 기대했는데 녀석들은 모두 싸우러 달려나간 상태였다. 그는 아쉬워하며 광채를 뿜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 녀석이 앞으로 손을 뻗으며 뭐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달려가던 한 부하녀석이 그 자리에서 엄청난 폭발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는게 아닌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르부뤽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고는 다시 한번 고페니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인간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깨달았다.

고페니는 선제공격으로 한 헤켈 녀석을 그대로 없애버렸다.

그가 공격을 시작하자 군인들과 무인들도 공격하기 위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절대 무모하지 않았다. 우선 전투 머신으로 하여금 앞쪽에 배치하여 헤켈들의 공격에 대항하도록 만들었고 뒤에서 구식건을 가진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공격을 하는 식이었다.

물론 검을 들고 있던 뛰어난 무인들은 전투 머신과 함께 최전선에서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르부뤽은 인간들의 하는 꼴이 정말 우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들의 총이라 해봐야 눈을 제외하곤 자신들에겐 따끔한 정도이고 전투 머신이란 것도 결국 총으로 공격하는 기계덩어리에 불과한데 그걸 믿고 대드는 것이다.

"견제할 녀석들은 오로지 검을 든 녀석들과 저 이상한 광채를 뿜는 녀석이로군."

르부뤽은 모처럼 자신의 잘난척이 섞이지 않은 대사를 내뱉고는 곧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실패했음을 깨닫고 한탄했다.

"아. 르부뤽아. 르부뤽아. 네 아무리 멋지고 지존이지만 방금 전 그 대사는 형편없었구나. 반성하고 또 뉘우치거라.

난 믿는다. 네 녀석이 스스로 최고가 될 때까지 늘 자신감있는 말들만 내뱉을거란 것을. 지존 르부뤽 파이팅!"

헉! 과연 잘난척이 자신감과 동의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르부뤽은 인간들의 무모한 공격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사실 그의 신경은 온통 고페니에 쏠려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별볼일 없었더라면 자신의 대사에 잘난척을 빼먹는 짓은 안 했겠지.

고페니는 헤켈들이 무인들과 전투 머신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뒤편에서 또 다시 힘을 집중했다. 그가 양손을 벌려 손바닥이 땅을 향하게 하자 바닥에 있던 흙들이 공중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공중에 뜬 흙가루들은 용트림을 하듯 부들부들 떨렸다.

고페니는 흙가루를 헤켈 2개체를 향하게 했다. 전투 머신을 박살내고 있던 두 녀석은 갑자기 흙이 자신에게 덮쳐옴을 알고 비웃었다. 총알도 퉁겨내는 몸뚱아리에다가 그깟 흙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오산이었다. 흙가루들은 그들의 몸에 달라붙더니 이내 각피 안으로 스며드는게 아닌가. 두 헤켈은 깜짝 놀라 발버둥을 쳐봤지만 놀랍게도 흙가루들은 몸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마침내 흙가루들은 몸 속으로 다 스며들어버렸고 잠시 후 사방으로 흙가루가 튀었다.

그 흙가루들은 그 두 헤켈의 몸 속으로 들어갔던 흙가루들이었다.

그 흙가루들이 사방으로 튀었다는 것은 으.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르부뤽은 자신의 부하 둘을 순식간에 해치운 인간 녀석의 실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그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흉켈리스님께서 말씀하신 기술이 바로 저것인 것 같군. 과거 초능력자라 불리던 그런 녀석들보다 훨씬 강한 존재. 아. 뭐라고 그랬더라. 포스 매니저? 포스 오너? 흠. 어쨌든. 흉켈리스님은 도대체 어떻게 저런 녀석들이 세상에 나타났는지 알고 계신걸까?

후훗. 그러니까 대신관이 되었겠지. 뭐. 나같은 뛰어난 지존 미전사야 대신관이 아니더라도 그 가치를 인정받겠지만. "

르부뤽은 그렇게 말하고는 연신 웃었다. 그의 말대로 흉켈리스는 3개의 도시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 그 도시마다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는 녀석들이 있을테니 조심하라고 했던 것이다.

르부뤽은 흉켈리스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 신기해했지만 결국 그 사실을 알더라도 자신의 뛰어난 점에 도움될게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한편, 리니아는 고페니와 사람들이 헤켈들과 싸우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적은 오로지 지크프리드였다.

이런 전쟁에서 인간들이 죽든 말든 그건 그녀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아니, 도리어 인간들이 헤켈들에게 몰살당하는 장면을 보게 되면 얼마나 재밌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지크프리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금새 깨달았다. 사실 그 전에도 지크프리드는 직접 나타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늘 누군가를 시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런 위험한 곳에 직접 나타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리니아는 그 사실을 깨닫자 너무나 허탈해졌다.

지금껏 자신이 왜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던 그녀였다.

굳이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지크프리드를 편안하게 보내주기 위해서."

어쩌면 그 일념 하나로 지금껏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즐거움이 없는 인생. 남편과 아이들을 잃은 순간부터 모든게 허무해져버린 삶. 그녀에게 일상은 너무도 재미없고 허무한 것들뿐이었다.

지금 이렇게 밖에 나와 지크프리드의 흔적을 찾는것도 정말 오랜만의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지루하리만치 나태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리어 지금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다는 싸움구경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피식 웃었다. 자신이 지금 이곳에 무얼 하러 나왔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진 지크프리드의 흔적을 찾으러 나왔다고 생각하던 그녀가 이젠 왜 그곳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재밌었다. 저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분수처럼 튀기는 핏방울. 광채를 뿜어내는 한 사람. 그 사람을 죽이려고 혈안인 괴물들. 하지만 그 괴물들은 그 사람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모두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리니아는 그 광채를 뿜는 사람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광채. 흠. 어디서 봤더라. 그녀는 생각했다. 어디선가 본듯한 광채.

아주 친근한. 자신에게 아주 잘 대해줬던 사람의 냄새가 났던 것이다. 아! 생각났다.

"푸조."

라케프 한 푸조. 그는 자신보다 70여살이나 많은 노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활발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다. 항상 자신에게 잘 대해주고 재밌게 해주려 애썼다.

리니아는 문득 오랜 기억이 떠올랐다. 벌써. 80년정도 지났구나.

그때 라케프는 퍼스트 포스 오너로 주변의 시선을 독차지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늘 겸손해 했고 리니아에게 잘 대해주었다.

라케프의 그녀에 대한 마음이 사랑인지 우정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니아는 그런 그를 친구로. 아버지로. 연인으로 사랑하고 믿고 따랐다.

"그분을 못 본지도. 70년이 지났구나."

리니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얼마 만에 웃는 것인가. 그녀는 자신이 최근 몇 년동안 한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런 그녀가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 짓게 해준 사람. 라케프.

라케프는 퍼스트 포스 오너로서 엄청난 매너 포스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능력을 사용할 때면 온 몸에서 광채가 발했었다.

그의 머리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정도였고 그에게 다가 가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질 정도였다. 그 광채.

리니아는 상념에서 깨어나 광채를 내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사내의 모습은 라케프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고페니.

리니아는 그 광채를 내는 사람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걸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다만 그 아름다운 광채.

그 광채 안으로 들어가 따스하게 몸을 녹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때였다. 멋진 문신을 한 헤켈이 엄청난 속도로 그 남자에게 달려갔다. 그 헤켈을 막는 무인들은 하나같이 단칼에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솜씨였다.

리니아는 순간적으로 그 남자의 위험을 직감했다. 아니, 그걸 느낀 것보다 몸이 더 빨리 반응했다. 그녀 역시 전쟁을 치러본 경험이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몸은 이미 전쟁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르부뤽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벌써 자신의 부하 10여개체가 한 녀석의 이상한 기술에 죽어버린 것이다. 르부뤽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녀석의 이상한 기술에 대한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덤빌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 녀석이 약간 지친 틈을 타 공격을 시도한 것이었다.

고페니는 전투 머신을 파괴하는 한 녀석을 메이딩 바쿰으로 산산조각 내버리고는 옆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까까지만 해도 저쪽에서 팔짱 끼고 구경만 하던 그 녀석이 갑자기 달려드는게 아닌가. 벌서 이만큼 다가와 있었다. 그것도 다른 헤켈들과는 엄청난 수준차이를 보이는 놀라운 스피드로 말이다.

고페니는 최대한 빠르게 매너 포스를 집중했다. 순간적인 매너 포스 집중은 생명력을 앗아가기 때문에 자칫하면 수명까지 줄어들 수 있는 위험한 짓이었다. 고페니가 순간적으로 매너 포스를 집중하자 그의 머리에서 김이 나기 시작했다.

르부뤽은 장애물 하나를 순식간에 베어버리고 고페니를 바라보았다. 고페니의 머리에서 김이 나는게 심상치 않았다. 르부뤽은 뛰어난 감각을 가진 전사였다. 상대방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한 검단의 지휘자가 될 수 없었겠지.

르부뤽은 순간적으로 몸을 옆으로 던지며 땅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그가 있던 공간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메이딩 바쿰이었다. 한 공간을 진공으로 만들어 블랙홀의 효과를 내는 엄청난 기술. 이 기술의 단점이 몇가지 있다면 시술자의 엄청난 매너 포스를 빼앗아 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범위를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기술을 창시한 고페니 마저도 어느 정도 감각적으로 때려서 상대를 공격했는데 자칫 잘못하면 같은 편도 그 공간에 휘말려 죽을 수도 있었다. 사실 그 후에 이 기술로 그런 피해자가 속출하자 학계에서 금지시켰던 것이다.

고페니의 표정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순간적으로 힘을 끌어 올려 선제공격을 가했는데 상대가 단지 직감으로 그것을 피해버렸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다시 그 기술을 사용하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아니, 벌써 르부뤽의 검은 고페니을 가르고 있었던 것이다.

고페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지금 죽어버린다면 다른 사람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괴멸 당할 것이 분명했다.

"크억."

고페니는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다. 자신의 허리까지 서늘하게 만들었던 상대의 검은 보이질 않았다. 그는 다급히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 문신을 한 녀석이 땅바닥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 녀석의 시선은 자신의 왼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페니는 즉시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여성이 서 있었다.

그 여성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분명 머리는 희끗희끗한데 얼굴은 굉장히 젊어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바로 리니아 시센느였다.

"쳇. 인간을 구하게 될 줄이야."

리니아는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는 자신의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 버린 헤켈을 보았다. 녀석은 다른 헤켈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어서 언뜻 보아도 녀석의 개성이 특출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니아는 오른쪽 고페니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쳇. 당신 죽고 싶어 환장했어? 그렇게 기술을 남발하면 어떻게 해?"

-

"네?"

리니아의 말에 고페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정녕 저 여자가 자신을 구해준 것이란 말인가. 저 여자의 말과 르부뤽의 표정을 봐서는 그게 사실인 듯 싶었다. 고페니는 그녀가 쌀쌀맞게 대하는 것을 알았지만 생명의 은인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가. 감사합니다."

-

"쳇. 고맙다는 인사는 집어 치워. 저 녀석은 이 정도 공격에 끄떡도 없을걸?"

리니아의 말에 고페니는 르부뤽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 일어섰는지도 모르게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숫자가 두 명이 되어 그런지 섣불리 공격하지는 않고 있었다. 리니아는 르부뤽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에이!! 재미 없어!! 역시 구경하는게 낳아. 나 간다."

-

"?????"

리니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가는게 아닌가.

고페니는 정녕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뭐. 저런게 다있누?

리니아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지만 왠지 서글퍼졌다.

그녀는 다시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가는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 남자를 도왔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려 하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적이 등을 보인 기회를 놓칠 르부뤽이 아니었다.

르부뤽은 그대로 달려들어 리니아의 등을 찔렀다. 고페니는 자신을 구해준 여인이 그대로 당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헉.!!"

쿵! 리니아는 바닥에 넘어졌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밀치는 것을 느꼈는데 그 사람의 손이 미묘하게 떨렸음을 알았다. 그녀는 넘어진 상태에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 광채를 뿜던 남자가 헤켈의 검에 등을 찔린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남자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일부러?

리니아는 갑자기 너무나 서글퍼졌다. 아니, 자기 자신이 너무나 미워졌다. 인간을 저주하고 증오하던 그녀를 한 남자가 구해준 것이었다.

리니아는 매너 포스를 사용해 르부뤽을 공격했다. 르부뤽은 공기의 소용돌이가 자신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아까는 불의의 기습인지라 소용돌이에 맞고 날아가 버렸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바람의 소용돌이가 르부뤽을 휘감아 돌아도 그는 땅에 못 박힌 듯 버티고 있었다.

리니아는 상대가 잠시 움직일 수 없는 틈을 타 고페니를 구해냈다. 고페니는 등을 찔렸지만 심한 상처는 아닌지 웃으면서 말했다.

"하아. 하아. 밀어서 미안해요. 안 다쳤어요? 하악."

-

"다친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구요!!!"

리니아는 자신이 몇십년만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인간을 위해 다신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가 아니던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이 남자. 이 남자를 위해서 자신이 울고 있는 것인가?

르부뤽은 공기의 소용돌이가 사라지자마자 양검을 휘두르며 리니아를 공격했다. 고페니는 멀쩡한 척 했지만 부상이 심했는지 점점 숨이 가빠졌다. 하지만 숨이 가쁜 상태에서도 리니아에게 말을 건넸다.

"메이딩 바쿰은. 한 공간의 범위를 잡은. 후. 하아. 그 무게중심을정. 하아. 정한다음. 하아. 무게중심으로부터 모든 방위로. 하. 아.

공기입자를 밀어내는. 기술이에요. 하지만. 순간적으로. 해야지.

버스트 효과가 나타나죠."

-

"왜. 그걸."

"당신도 할 수 있으니까요."

고페니는 그렇게 말한 후 정신을 잃었다. 설명은 간단했지만 실제로 하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아무리 포스 오너라 해도 한 가지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선 엄청난 연습과 숙달이 필요한 것이다. 하물며 초고급 기술이라면 더더욱 사용하기 힘든 것이다.

굳이 더 설명하자면 타렌같은 그랜드 포스 오너가 공기 입자를 분해해서 공격하는 몇 안되는 기술만 사용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다른 기술은 배우지 못했거나 아니면 배웠어도 사용할만큼 연습을 하지 못한 것이다.

리니아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들었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무게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공기를 밀어내라니 그래 갖고 진공을 만들 수 있을까? 순간! 리니아는 뭔가 깨달았다. 그리곤 모았던 매너 포스를 사용해 외쳤다.

"메이딩 바쿰!!!"

르부뤽은 갑자기 숨이 막힐 듯 전신이 옥죄어 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있던 주변이 진공이 되었던 것이다. 르부뤽은 4검 중 한 명이다(아직 카켄은 전이 헤켈이 되지 못한 상태였다) 4검의 직위는 잘난척을 아무리 잘한다고 거저 주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르부뤽은 순간적으로 몸을 빼내어 그 곳에서 피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폭발에 휩싸여 저만치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폭발의 충격으로 입은 그의 상처는 붉은 피 때문에 온통 붉은 색으로 문신을 한 듯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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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부뤽은 자신의 부상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는 급히 후퇴를 명령했다. 그가 후퇴를 외쳤을 때는 전투 머신이 모두 박살나고 무인들도 반 수 이상이 죽은 상태라 헤켈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점이었다. 르부뤽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땅을 치고 후회했다.

리니아는 헤켈들이 도망치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메이딩 바쿰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고페니의 힌트 덕분이었다.

메이딩 바쿰은 무게중심에서 공기를 분산시키는 방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정한 범위내에 존재하는 공기를 무게중심의 한 점으로 집중시키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무게중심은 진공상태가 아니지만 그 범위 안은 진공상태가 되어버린다. 동시에 압력차로 한 점에 집중된 공기가 밖으로 분산되고 또 범위를 둘러싼 바깥공기들도 무게중심방향으로 집중되기 때문에 두 공기의 충돌로 폭발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리니아가 순간적으로 그 이치를 깨달은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사용할 줄 알았던 최고의 기술 <디센트 템퍼레이쳐(To Descent Temperature)>와 구동 방식이 거의 같았던 것이다. 다행히 헤켈들이 모두 돌아가자 사람들은 부상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리니아는 뛰어난 매너 포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치료하는 기술은 없었다. 그녀는 고페니가 죽을까봐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고페니의 상처는 죽을 정도는 아니어서 치료를 받고선 깨어날 수 있었다.

러플프루시 한 병원.

리니아는 고페니의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고페니는 얼마 안 있어 의식을 회복했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웃으면서 말했다.

"하핫. 당신이 날 두 번 구해주었군요."

-

"전."

"전. 고페니 제로원이라고 해요. 당신은요?"

-

"아. 난. 리니아 시센느."

"와. 좋은 이름이군요."

고페니는 넉살좋게도 계속해서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리니아의 첫인상을 보고 그녀가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그녀를 재밌게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농담을 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꺼내어도 리니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고페니는 그녀가 자신이 다가갈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리니아는 자신에게 잘해주는 고페니에게 약간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인간이란 족속들을 믿지 못하는 그녀에게 도리어 잘해주는 고페니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점점 그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음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다행이에요. 고페니."

-

"어? 리니아. 웃었군요. 거봐요. 웃으니까 얼마나 예뻐요?"

리니아는 순간 자신이 미소짓고 있음을 알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나이가 벌써 103세였다.

의학의 발달로 노화가 천천히 진행되어 평균수명 150세에 이르렀다. 103세라하면 장년기이긴 해도 외모로는 그다지 늙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부분 130세 이후를 노인으로 생각했으니 100살에도 충분히 결혼하고 애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리니아는 수줍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금껏 죽었던 남편 한 남자만을 알아 왔을뿐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물론 라케프도 사랑했지만 라케프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있음을 알고 나서는 좋은 친구 사이로만 지냈을 뿐이다.

리니아는 오늘 처음 만난 남자에게 자신이 이런 감정을 갖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에게 있어 행복이란 전혀 있을 수 없는 불가능의 단어였다. 그런 그녀에게. 다신 인생에 즐거움을 느낄 수 없을 것 같던 그녀에게 한 남자가 다가온 것이었다.

고페니의 상처는 그래도 심해서 그 다음날 있었던 전투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 그런 고페니를 두고 리니아는 홀로 전투에 참가했다.

르부뤽은 하루면 공략할 수 있었던 도시를 이틀동안 공격하는것이 자존심 상했다. 쟈칼이나 마타 륭은 벌써 맡은 도시를 다 접수했다는데 자신은 이게 뭐란 말인가.

"아. 하늘조차도 나를 시기하는구나. 아무리 내 잘난 것이 하늘을 찌른다지만 이렇게 나에게 큰 상처를 안겨 주는구나.

하늘아. 난 네가 원망스럽지만 널 이해하겠다. 내 어찌 바다같은 마음으로 너를 욕하겠느냐. 다만 오늘은 네가 양보하길 바란다. 후훗. 싫으면 말고. 양보 안 한다고 나 지존 르부뤽이 그냥 당할까보냐? 웃기지마!! 나 천상천하 유아독종 지존파 광세무적 천하제일검 르부뤽이 질리 없다! 우하하핫"

르부뤽은 그렇게 말하고는 부하들을 쓱 둘러보았다. 그러자 부하들이 일제히 이렇게 외치는게 아닌가.

"멋지십니다!! 켄!!"

참. 잘난척 하는 녀석이나 맞장구 쳐주는 녀석이나. 허기사 그 부하들이 맞장구 쳐주고 싶어서 쳐줬겠냐만은.

어쨌든 르부뤽의 군세는 많이 줄어서 반 정도밖에 남질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인간들의 상태는 더 형편없었던 것이다. 전투 머신은 어제 싸움에서 모두 소비했고 뛰어난 검술실력을 자랑하는 무인들도 많이 죽었다.

그들에겐 이제 쓸모 없는 총잡이들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르부뤽의 뇌리속을 누군가가 파고들었다. 바로 광채를 내뿜던 사내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죽음직전까지 몰아넣었던 한 여인. 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찔러 거의 죽은 상태였고 여자도 방심만 하지 않으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르부뤽의 명령과 동시에 헤켈들이 인간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그나마 진세를 구축해 적절하게 후퇴하면서 총질을 해서 피해가 없었지만 민간인들로 이루어진 민병대는 그야말로 몰살을 당했던 것이다.

리니아는 더 이상 참지 않고 헤켈들을 향해 메이딩 바쿰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한번 익힌 기술이므로 쉽사리 구사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녀의 체력이었다.

고페니보다 그녀는 훨씬 체력이 약했던 것이다. 그런 상태로 메이딩 바쿰 같은 초고급 기술을 연속적으로 사용한다면 매너 포스를 모두 소모해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로지 고페니의 은혜에 보답하겠단 생각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미 남편과 아이들이 죽었을 때 자신의 목숨도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단지 지금 살아 있는건 지크프리드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자신최면을 걸어 그걸 위안삼으며 여태껏 버텨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미련도 없고 그럴 자신도 없었다. 다만 잠시라도 행복했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며 이대로 죽어버릴 수만 있다면 너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르부뤽은 어제 자신을 공격했던 그 여자가 힘을 남발하고 있음을 알고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된다면 저 여자마저도 쉽사리 죽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미 군인들과 민병대는 혼란에 빠져 그들을 처리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르부뤽은 부하들을 시켜 리니아를 동시에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리니아는 자신을 향해 헤켈 4개체가 동시에 공격함을 알고 다급해졌다.

매너 포스를 집중해 두 개체를 동시에 공격해 죽였지만 그 뒤에 공격하는 두 녀석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그 두 개체 역시 메이딩 바쿰으로 산산조각 나는게 아닌가.

리니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고페니가 상처를 붙잡고 미소짓고 있는게 아닌가. 그는 리니아가 걱정되어 심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전쟁터에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등장했어도 상황은 달라질게 없었다. 아니, 도리어 고페니는 리니아에게 욕만 먹었다.

"그런 몸으로 뭘 하겠다고 나온거에요? 어서 돌아가요!!"

-

"후훗. 걱정 말아요.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구요."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다면서. 그게 뭐에요?"

리니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 때문에 부상을 당한 고페니에게 그렇게 말하다니.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하지만 고페니는 신경 쓰지 않고 헤켈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붕대에 감긴 상처는 다시 터져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리니아는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는 자신도 헤켈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병대와 군인들은 끝내 무너져 버렸다. 고페니는 상처를 붙잡고 리니아에게 외쳤다.

"도망쳐요!!! 어서!!"

-

"네?"

"당신만이라도 도망치라구!!!"

고페니는 자신이 도망치더라도 상처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리니아는 아직 괜찮았다.

충분히 도망칠 힘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리니아는 그를 놔두고 혼자 도망칠 사람도 아니었다.

리니아는 더 이상 버틸 상황이 아님을 깨닫고 고페니를 부축해서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군인들과 민병대도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는 상태여서 전장은 완전히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르부뤽은 도망치는 인간들을 마구 도륙하며 외쳤다.

"이 지존 르부뤽에 대항하는자 모두 이렇게 되리니. 우하하핫.

역시 나는 천하제일검이야!!! 나 지존 르부뤽 오늘도 한 건 했수다!!!"

그때 르부뤽은 뭔가 빼먹은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두 년놈이 어디론가 도망쳐 버린 것이다. 르부뤽은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인간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말살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따로 몇 놈을 시켜 그 두년놈들을 찾아내라고 시켰다.

리니아와 고페니는 러플프루 시 구석에 있는 한 창고에 들어갔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던 것이다.

창고는 물건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어서 둘은 물건들 뒤편에 숨었다.

리니아는 고페니의 상처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상처가 터져서 피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리니아가 안쓰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고페니는 애써 웃음 지으며 말했다.

"후. 내 운명도 다 했나보군요. 하아.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앞에 두고 죽게 되다니.후훗."

-

"그런 말하지 말아요. 살아서 도망칠 수 있을거에요."

리니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헤켈들은 아마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창고에 있는 그들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나. 인간을 저주했어요. 그들은 내게 엄청난 고통만을 안겨주었죠. 다신 인간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

"그런데요?"

리니아는 고페니가 되묻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런데. 다시 사랑하고 말았군요."

-

"아뇨. 날 사랑하지 말아요. 내가 죽으면 슬퍼하게 될 테니까. 날 미워해요. 그리고 어서 혼자서라도 도망쳐요."

고페니의 표정은 사뭇 심각했다. 아니. 그의 그런 표정은 도리어 그 역시 리니아에게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리니아는 고페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죽는다 말하지 말아요. 나 이제 희망을 얻었는데. 다시.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순간 고페니는 자신의 입술로 리니아의 입술을 덮어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둘은 그렇게 길고 긴 키스를 했다. 고페니 생애 마지막 사랑을 그렇게 나누었던 것이다.

리니아는 이상한 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 이상한 소리란 다름 아닌 고페니의 숨소리였다. 숨이 가쁜지 연신 학학 거리고 있었다.

리니아는 고페니를 끌어 자신의 품에 안고는 말했다.

"제발 죽지 말아요. 제발."

고페니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알고는 리니아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하아. 리니아. 하나만 용서해줘요."

-

"네?"

"난 당신과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에요."

-

"그게 무슨 소린가요?"

고페니는 리니아가 자신을 바라보자 시선을 외면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내 감정을. 감정을 속일수가 없었어요. 나. 난."

고페니는 갑자기 술을 헐떡이더니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리니아는 그런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고페니는 간신히 숨을 고르고는 말했다.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알았어요. 하지만 믿을 수 없었지.

아니. 믿지 않으려 애썼다는게 옳을거에요. 난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런 내 생각이 틀리고 말았죠."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거죠?"

리니아는 고페니가 계속해서 말을 돌리고 있음을 알았다.

고페니는 더 이상 말을 돌리는 것이 소용없음을 알고 외면했던 시선을 그녀에게 보내며 말했다.

"난. 당신 아들입니다."

-

"!!!!!!"

리니아는 순간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었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들? 무슨 소리지?

"당신의 난자와 퍼스트 포스 오너의 정자가 결합되어 탄생한 세컨드 포스 오너. 그중 하나입니다."

고페니는 가쁜 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하고 나니 마음 속은 후련했다. 사실 고페니는 리니아를 처음 본 순간 바로 B.D 프로젝트의 두 포스 오너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 프로젝트에서 탄생한 아이들 중 극히 일부는 재단 연구소에서 경과를 살펴보기 위해 직접 길렀던 것이다.

아크타리안이나 그 외 다른 세컨드 포스 오너들은 양부모에게 입양시키는 식으로 해서 키운 것이고 고페니와 그 외 소수의 몇명은 재단에서 직접 길렀던 것이다. 재단에서 길러진 그 아이들은 자신들의 비밀을 알고 자란 것이다.

고페니는 리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충격으로 멍해져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너무나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처음부터 만나서는 안 되는 사이였다. 아무리 극박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사랑이라도 그녀를 혼자 도망치도록 했어야 옳았다. 고페니는 고개를 떨구며 후회했다.

"미안해요. 당신을 도망치도록 했어야 하는건데."

-

"고페니. 상관없어요. 난 난. 아무 상관없어요. 당신이 내 아들이건 아니건 난 신경쓰지 않을래요. 난."

리니아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목이 메여왔다. 왜 눈물이 나려 하는건지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도. 이것도. 지크프리드가 안배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녀는 흐느끼며 미소지었다. 이제 새로 찾은 행복인가 싶었더니. 하지만 참을 수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가 아들이면 어떠한가. 자신의 몸으로 직접 낳은 아들도 아니고 유전자 배양을 통해 시험관 아기로 태어난 아들이 아닌가.

자신의 피가 좀 섞여 있다면 어떤가. 짧은 순간이지만 정열을 다 바쳐 사랑하지 않았는가.

고페니는 그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말아요. 이제. 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약속해줘요.

내가 죽어도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요."

-

"고페니. 흑흑. 약속. 할게요."

"그럼 됐어요. 나도 당신과 사랑을 나눈 그 순간을 죽어서도 영원히 간직하고 기억하겠어요. 당신도 그래줄래요?"

-

"물론이에요. 흑흑."

"그럼. 편하게 눈감을 수 있어요. 반드시 살아요."

고페니는 그렇게 말하곤 웃었다. 동시에 두 눈이 감겼다.

"고페니. 고페니. 고페니!!!!"

리니아는 그의 감긴 눈이 다신 떠지지 않을 것을 알았다.

슬픔에 미칠 것 같은데. 가슴속이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토록 사랑했는데.

리니아는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자신에게 말했다.

"울지마. 울면 안돼. 약속했잖아. 울지 말자. 난 살아야해.

그래서 그를 생각하며 죽는날까지 그를 기억해야해."

리니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연신 눈물을 훔쳤다. 그때였다.

창고 입구 쪽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이 창고는 입구가 하나뿐이어서 그곳에서 누군가가 들어온다면 도망칠 곳은 없었다.

리니아는 당황하며 급히 몸을 숨겼다. 헤켈 2개체가 창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녀석들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인간들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리니아는 최대한 숨죽여 그들이 그냥 돌아가기만을 바랬다.

그런데 녀석들 중 한 녀석이 자신이 숨은 곳으로 다가오는게 아닌가. 그 녀석은 고페니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동료녀석을 불렀다.

두 녀석은 고페니의 시체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르부뤽이 찾으라고 시킨 두 년놈 중 한 놈을 찾아낸 것이었다. 한 헤켈이 고페니의 시체를 들었다.

아무래도 르부뤽에게 가져다 주려는 듯 보였다.

리니아는 고페니의 사체를 헤켈들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 두녀석정도라면 지금 상태로 충분히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리니아는 정신을 집중하여 매너 포스를 모았다.

그때였다. 쿵! 하면서 그녀가 숨어 있는 곳 앞의 상자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었다. 동시에 헤켈 한 녀석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검날을 번뜩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고페니는 두 녀석을 동시에 공격했어야 했는데 한 녀석만 먼저 공격하게 되어 당황했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다른 한 녀석은 죽일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재빠르게 범위 계산을 마치고 모은 힘으로 메이딩 바쿰을 사용했다. 그와 동시에 달려오던 그 녀석의 상체 1/3 가량이 폭발해 날아가 버렸다. 녀석은 충격으로 상자들이 쌓여 있는 벽에 부딪혀 땅에 쓰러졌다.

리니아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른 한 녀석이 쇄도 해오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그 헤켈에게 가장 쉬운 매너 포스 기술인 물건 부양 기술을 사용했다.

주변에 있는 상자들을 공중에 들어 녀석에게 마구잡이로 던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녀석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상자들을 쳐내며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리니아는 살기 위한 최후의 발악으로 모든 힘을 끌어내 외쳤다.

"디센트 템퍼레이쳐(To Descent Temperature)!!"

이 기술 역시 메이딩 바쿰처럼 일정한 범위를 잡은 후에 그 무게중심으로 열을 집중시키는 방식이었다. 물론 그 열은 그 공간 안에 있는 입자들의 것이고 순간적으로 열을 빼앗긴 그 범위 안의 모든 입자들은 순식간에 얼어붙고 마는 기술이었다.

리니아는 자신이 아는 최고의 기술을 사용했다. 달려오던 헤켈 한 녀석은 그 자리에서 주변의 공기와 함께 얼어붙어 버렸고 달려오던 관성으로 인해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면서 얼음조각으로 산산 조각나 버렸다.

리니아는 순간적으로 너무 많은 힘을 소비한 나머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미 많은 체력을 낭비한 그녀였는데 무리하여 초고급 기술을 사용한 것이었다. 이때 자칫 잘못하면 피를 토하고 죽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녀가 가쁜 숨을 내쉬고 있을때였다.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가 꽉 움켜 잡는게 아닌가. 리니아는 깜짝 놀라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깨 한쪽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 헤켈이 남은 한 팔로 자신을 붙잡고 있는게 아닌가. 녀석의 눈동자는 묘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리니아는 발버둥 쳐봤지만 녀석의 손아귀 힘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녀석은 칼로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다.

잠시 바라보던 헤켈 녀석은 상처의 고통이 심할텐데도 불구하고 씩 웃었다.

리니아는 녀석의 그 모습을 보고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 녀석은 다짜고짜 리니아의 목을 물어뜯었다. 마치 무슨 흡혈귀 영화라도 보듯 녀석은 혼신의 힘을 다해 리니아의 목을 물고 늘어졌다.

리니아는 녀석을 때리고 걷어차고 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녀석이 허물어졌다. 리니아는 자신이 때린 것이 소용이 있었나 싶어 쓰러진 녀석을 계속 걷어찼다. 녀석은 죽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목을 만져 보았다. 다행히 살점이 뜯기지는 않은것 같았다. 그래도 고통은 있어서 그녀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많은 힘을 쏟아 부어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 목을 물어뜯기는 바람에 도리어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다.

리니아는 이곳에 들어온 헤켈 두 녀석을 자신이 죽였기 때문에 곧 또 다른 녀석들이 죽은 녀석들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올 것이란것을 알았다. 그녀는 고페니의 시체를 한번 더 바라본 후에 그 창고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그녀는 러플프루 시에서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4개월 후.

리니아는 자신의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헤켈에게 목을 물린 이후로 그녀의 신체기관들이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뭔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헤켈의 미소. 분명 미소였다.

죽을 때가 다 된 녀석이 미소를 짓다니. 여자 인간의 목을 물어 뜯는게 죽기 전에 할 기분 좋은 짓이란 말인가?

변태같은 눔.

그때였다. 리니아의 마음속으로부터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목소리는 분명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후훗. 난 너이지만 넌 내가 아니다.'

리니아는 자신이 상념에 잠겨 있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그 목소리는 반박을 가했다.

'아니!! 넌 환청을 들은게 아니야! 내 목소리를 들은거지.'

-

"도. 도대체 누구냐?"

리니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렇게 외쳤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때 또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몸은 역시 불편하군. 나? 내가 누구냐구? 후훗. 한번 맞춰 보시지. 흠. 내가 인간어를 구사하니까 못 알아듣는 모양이군.'

그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이상한 겔겔대는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듣고는 솜털이 쭈뼛 서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소리는 헤켈들이 의사소통 할 때 내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후훗. 바로 맞췄어. 이거 아주 좋은데? 네 생각이 곧 내 생각이니까 넌 생각만 해도 나와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

"그럼. 넌 헤켈이란 말이냐?"

'그래. 기억나나? 네 목을 물어뜯었던 그 헤켈.'

리니아는 기억해볼 것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이상해지고 있음을 느꼈고 그 원인이 그 드라큘라 헤켈녀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오던 차였던 것이다.

'그래. 난 펜 타고니. 네가 죽였던 그 헤켈이지. 하지만 넌 실수를 하나했어. 무슨 실수냐구? 나를 확실히 죽이지 않았다는 거지. 우리 헤켈들은 죽기 직전에 다른 생명체의 몸으로 전이 (轉移)를 할 수 있거든? 넌 바로 내 전이의 숙주가 되는 셈이야.

후후후하핫.'

-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펜 타고니는 계속해서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녀석의 발음은 분명한 인간어였는데 억양이 아직 익숙치 않은지 약간 어색했다. 하지만 의사소통을 하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리니아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단지 목을 한번 물어뜯긴 것뿐인데 헤켈의 숙주가 되어버리다니. 그녀는 순간 자살을 결심했다. 그러자 펜 타고니가 소리쳤다.

'아!! 안돼!!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앙? 네가 지금 죽으면나 또한 죽게 된단 말이야. 절대 그렇게 될 수는 없지. 잘 생각해봐. 이대로 죽을거야? 지크프리드의 원수도 갚지 않고?'

-

"아니. 네가 어떻게. 그걸?"

'이봐. 난 너고 넌 나야. 우린 하나라고. 네가 아는건 내가 아는거고 내가 아는 것도 내가 아는거지. 우하핫. 어쨌든 잘 생각해봐. 넌 인간들을 증오하잖아. 그들을 미워하잖아. 그 녀석들은 언제나 너에게 슬픔만 안겨주었잖아. 잘 생각해보라구. 그런 녀석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거야? 넌 충분히 능력도 있고 그럴 자격도 있어. 그런데 참을거야? 다른 인간들을 언제나 널 무시하고 널 시기하고 미워했는데. 그리고 그 지크프리드란 녀석은 네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는데.

그런데도 그냥 넋 놓고 자살해 버릴거야? 그렇게 되면 고페니란 남자가 슬퍼하지 않을까?'

-

"고. 고페니."

리니아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펜 타고니의 말이 맞았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지금껏 인생을 오직 지크프리드에 대한 원한으로 버텨왔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살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암. 지크프리드를 죽이기 전에는 절대 죽을 수 없었다.

'잘 생각했어. 그럼. 그래야지.'

-

"하지만 조건이 있다."

'잉? 무슨 조건?'

-

"난 자살하지 않겠어."

'그래. 그런데?'

-

"넌 분명 나를 너의 숙주라고 말했다. 그렇다는 말은 곧 네가 내 몸을 지배하게 될 거란 말인데."

'호오. 이해가 빠르시군.'

-

"네 녀석이 내 몸을 지배하게 되면 난 원수를 갚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리니아의 말에 펜 타고니는 숨을 죽였다. 물론 느낌상.

"따라서. 난 너와 공유를 원한다."

- '공유?'

"그래. 내 몸은 네 녀석이 지배하지만 내 의식은 죽거나 사라지지 않는거다. 이렇게 할 수 있는건가?"

- '그러니까. 몸은 내 맘대로 가지고 다만 네 의식을 죽이지 말고 내버려달라? 흠. 어려운 조건이로군.'

"들어주지 않는다면 난 자살하겠다."

리니아의 엄포에 펜 타고니는 당황한 듯 보였다. 물론. 이것도 느낌상. 하지만 펜 타고니는 금방 수락을 하며 말했다.

'좋아. 내 이름 넉자를 걸고 약속하지. 하지만 너도 한가지 조건을 들어줘야 해.'

-

"뭐지?"

'사실. 내가 너에게 말을 건 것은 이유가 있었다. 6개월 뒤면 너와 나 둘 다 죽게 된다. 그걸 막고 너와 나 둘 다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너에게 말을 건 것이지.'

-

"죽는다니? 우리가?"

'그래. 넌 아직도 모르는거냐?'

-

"뭘?"

'네 몸 속엔 너와 나만 있는게 아니란 걸.'

-

"그게 무슨 소리지?"

리니아가 이해를 못하자 펜 타고니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런. 이런. 네 몸 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단 말이다!! 그 고페니란 녀석의 아이가!!'

-

"뭐????"

리니아는 펜 타고니의 말에 놀라며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약간 튀어나온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최근 몸이 이상해진 것도 설마. 리니아는 그제서야 이해를 할 수가 있었다. 바로 그녀는 임신을 했던 것이다. 고페니와의 마지막 사랑의 결정체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무슨 상관이라고 둘 다 죽게 된단 말인가.

"도대체 죽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 '설명하기 힘든데. 흠. 그러니까. 전이 헤켈은 다른 어떤 종족으로도 전이가 가능하다. 그 생명체가 여성이면 여성개체로 전이되고 남성이면 남성개체로 전이되지. 그런데 그 생명체가 임신 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에구. 뭐라 설명해야하지?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전이한 내 유전자는 7개월간의 잠복기를 거쳐 8개월째 되는 순간부터 각성되기 시작하지. 물론 완벽하게 환골탈태하기까진 몇 년이 걸린다. 문제는 바로 그 각성되는 순간이야. 각성되는 순간 숙주의 상태가 변이의 영원한 모델로 자리잡는데 만약 그 순간 숙주의 몸에 아이가 자라고 있다면 내 유전자는 그 아이까지 숙주로 판단하고서 변이를 시작한단 말이지. 결국 그 아이까지 몸 속에서 변이 되어 또 하나의 기관이 되어버리는 거야.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되는거지. 하나의 생명이 몸 속의 내장기관으로 둔갑 할 수 있겠어? 이건 곧 그 아이의 죽음을 뜻하는거고 그 아이가 죽으면서 생기는 세포는 모두 암세포로 바뀌게 되어 결국 숙주인 너를 죽이게 되지. 네가 죽으면 물론 나도 죽는 것이고.

결국 네 몸 속에 자라고 있는 그 아이가 우리 모두를 죽게 만드는거야.'

리니아는 펜 타고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 아이는 고페니의 아기가 아닌가. 자신을 짧은 시간동안이지만 아끼고 사랑해주었던 바로 그의.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건데?"

- '당연히 그 아이를 죽여버리면 돼지. 낙태수술이라고 하나? 그거 받아!'

"안돼!!! 절대 그렇겐 안돼!!"

- '이봐!! 정신차려! 미쳤어? 그 아이는 어차피 죽는다고!

우리도 죽고!!'

펜 타고니는 리니아의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기에 대한 이상야릇한 감정. 분명 그녀의 감정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리니아 역시 자신의 생각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고페니의 아이였다. 그 아이를. 죽인다니. 그 무슨 천인공로 할 짓인가. 하지만 그 아이를 죽이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게 된다.

자신이 살기 위해 아이를 죽일 것인가? 문제는 아이를 죽이지 않더라도 그 아이는 죽게 된다는 것이었다.

"난. 난. 할 수 없어. 그 아이를. 죽일 수 없어."

- '이런. 미친!! 정신차려!! 그 아이는 어차피 죽는다니까!!!'

"잠복기가 7개월이라고 했지?"

- '엉? 어. 그래. 7개월이야. 8개월째 되는 그 첫날부터 각성이 시작 된다구!!'

"나. 7개월동안 그 아이를 키우겠어."

- '뭐? 그런 미친 짓을? 그건 쓸데없는 짓이라구!! 너도 잘 알잖아. 7개월동안 키운 애를 어따가 써먹을라구 그래? 그건 태어나자마자 죽을 확률도 높은 미숙아라구!! 게다가 넌 나중에 환골탈태를 거쳐 헤켈로 변하게 될거야!! 그런 널 엄마라고 불러줄것 같아?'

펜 타고니의 말은 그야말로 신랄했다. 아니, 구구절절이 옳은 말들이었다. 리니아도 그의 말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헤켈로 변한 자신을 본다면 그 아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괴물아!! 어서 사라져!!> 라고 소리치며 돌을 던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아이를 고페니의 아이를 절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그래. 7개월동안 아이를 기르고 나서 중절수술을 받겠어!

그리고나서."

- '그리곤?'

"한가지만 물어볼게. 그 아이는 분명 인간이지?"

- '그래. 각성되기 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살아 갈거야.'

"어차피 난 그 아이를 키울 수 없으니. 버리는 수밖에."

리니아의 마지막 말은 너무도 힘없이 느껴졌다. 펜 타고니는 어쨌든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7개월만 키운다면 그도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리니아가 마음만 바꿔먹지 않는다면 모두가 사는 길이 되는 것이다. 펜 타고니는 리니아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네 약속을 모두 지키겠어. 난 네 몸을 가지게 되겠지만 너의 의식은 살아 있을거야. 네 의식이 시키는 일이 정당하다고 판단되면 네 의식대로 몸을 움직여 줄거야. 하지만 그 대신 너도 약속해. 그 아이를 8개월이 되기 전에 꼭 네 몸에서 떼어낸다고.'

-

"그래. 나도 약속하겠어."

그렇게 해서 리니아는 그 아이를 키웠던 것이다. 7개월동안.

미숙아로 자란 그 아이는 중절수술로 태어났으며 동시에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리니아는 펜 타고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아이를 자신의 친척분들게 맡겼다. 아니. 그분들의 집 앞에 버려두고 도망쳤다고 표현하는게 좀 더 사실적일 것이다.

그녀는 몇 년간의 잠복기를 거쳐 완벽한 전이 헤켈로 환골탈태하게 되었다. 헤켈이 된 그녀는 펜 타고니의 생각대로 아크로나딘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근 20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펜 타고니의 영향으로 인간을 끝없이 증오하고 미워하게 되었고 그 증오심으로 락켄신의 눈에 들게 되었다. 그래서 현무단 음영대의 수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친척집에 맡겨졌던 그 아이는 키울 능력이 없던 그 농부들이 아크타리안에게 입양시키므로써 그의 손자가 되었다. 아크타리안의 아들이었던 르카도는 입양한 사실을 숨기고 아크바레이의 친아버지 노릇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아크바레이의 숨겨진 배경이었던 것이다.

-주석편 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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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구... 힘들다..... 원래는 3편으루 나눠서 올리려구 했는데 주석편이다 보니 그냥 한꺼번에 올립니당. 너무 길다구요? --;;

죄송...... 어쨌든 바로 본편으루 들어가겠습니당.......

열심히~~~ 해야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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