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106회 - http://hoyanet.new21.net/zero/view.php?id=gigaselender&no=106
[기가 슬렌더] -61- 아크바레이(어머니와의 재회.) -아크바레이(어머니와의 재회.)
-
얀 일행의 호크가 1지역구의 쿼터드 시에 도착했다. 이미 수많은 호크들이 사람들을 구하고 돌아오는 터라 그들의 호크는 한 개의 점에 불과했다.
아마 구출해낸 사람들은 다른 지역구로 이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게들 믿고 있었다. 이미 클론 리모델링이라는 이주계획은 그걸 바탕으로 계획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바램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의인들이 사람들을 사지에서 빼내오는데는 성공하였을지 몰라도 그들의 남은 삶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구출되었던 사람들은 살았다는 환희도 잠시. 앞으로 살 걱정에 눈앞이 막막했던 것이다. 자신들에게 원조를 약속해주었던 의원들은 어디로 갔는지 전혀 보이지도 않았고 그나마 조금 잘 산다는 인간들도 자신의 집밖으론 나올 생각도 안 했다.
특히 쿼터드 시는 발카로스시의 시민들과 글랜시아시의 시민들을 모조리 이동시킨 상태라 그들을 수용할 시설마저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나마 천만 다행한 것은 쿼터드시의 시장은 1지역구 의장이었다는 것이다.
의장이란 책임의식이 있는지 쿼터드시의 시장 알 부민은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얀 일행들은 오랜만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 엄청난 전투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충분히 쉴 권리가 있었다.
부상당한 사람들은 판돌에게 응급치료를 받은 상태여서 병원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고 모두 퇴원 할 수 있었다.
상처가 다 낳은 카인은 아크바레이가 걱정이 되는 듯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실 병원에 올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아크바레이였던 것이다. 그 녀석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아마 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크바레이는 파인리히도 인정할 만큼 뛰어난 녀석이었으니까.
일행 모두의 긴장은 풀어질 대로 풀어져 있었다. 그들은 HDTV에서 방송되는 뉴스를 보고 그렇게 되었는데 여러 뉴스 중 헤켈들이 2지역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뉴스를 보고 난 후부터였다.
먼지층 바로 아래 위치한 소형 위성에서 도시를 찍은 사진을 분석한 결과 어느 도시에서도 헤켈족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외 뉴스 중 볼만한 사건은 전쟁기간 중 어린아이들의 실종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보도정도였다.
헤켈족이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동안 4지역구로 이동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그레이트 웜은 대부분 땅속을 이용해 빠르게 움직인다.)그들이 사라진 것만은 사실이어서 그렇게 긴장이 풀렸던 것이다.
일행들은 라케프의 시신을 화장하기로 했다. 그는 유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매장을 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라케프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그를 처음 만난 사람들도 고개를 떨구었다.
그들의 앞에서 한 명의 친구이자 스승인 그리고 유머리스트였던.
(유머리스트란 말을 뺀다면 그가 슬퍼할 것 같았다) 동료가 재로 흩뿌려졌다. 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도 잠시. 그들은 이성적인 사람들이었다. 언제까지고 슬퍼하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라케프를 마음속에다가 묻었다.
일행들은 에리네가 잘 아는 호텔에 투숙했는데 모든 경비를 에리네가 지불하기로 했다. 돈이 많았던 아크바레이가 없는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미얀의 미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에리네? 당신 범죄자라고 했죠? 눈감아 줄테니 돈 내요!"
아. 이건 미모가 아니라 협박이다. 어쨌든 미얀은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것을 적절히 이용해 먹기로 한 것이다. 스파이가 그런 것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누가 이용하랴.
호텔의 규모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는데 이 호텔 주인은 아마 전지역구에서 알아주는 부자일 것이다. 물론 몸만 부자고 마음은 가난하겠지만.
그들이 묵은 방도 정말 거대하기 짝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로얄 스위트 룸이었다. 미얀은 못 먹는 감 한번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그런 협박을 했는데 이건. 못 먹는 감이 아니라 잘 익은 낑깜?이었다.
방안에서 일행들의 행동은 제각각이었는데 모두들 서로를 신뢰해서인지 아니면 방이 얼마나 큰지 체험이라도 하려는 듯 모두 모여 있었다. 다만 판돌은 엑스트라답게 병원에 환자들을 돌보러 돌아갔다. 이렇게 외치며.
"쳇! 이런 식으로 독자를 웃기려는 처사는 독자들을 우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작가 나부랭이는 각성하라!!!".....;
한편, 미얀은 연신 미시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미시케의 순수한 감정을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지금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몰라 난감하기 이를데 없었다.
파인리히와 아우로페가 서로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앉아있던 미시케가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얀은 그런 미시케를 보고 있는 형국이었는데 금방이라도 미시케가 폭발해버릴 것처럼 보였다. 시한폭탄이 따로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미 일행들은 타렌으로부터 연구소 폭발 이후의 상황에 대해 다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타렌과 아우로페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는데 사실 미얀은 타렌을 처음 본 순간 암기를 던질뻔 했었다.
연구소 폭파 작전 때 타렌은 완벽한 악인이었다. 그것도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를 서로 싸우게 만드는 악취미를 가진. 미얀은 그 타렌을 증오하고 또 증오했었다. 파인리히에게 상처를 주고 게다가 아우로페를 그 꼴로 만들고. 더더욱 미시케에게 간접적인 고통을 주었던 그를 말이다.
그가 개과천선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타렌의 눈에선 더 이상 살기를 느낄 수 없었다. 표정도 죄지은 사람처럼 늘 우울해 보였던 것이다. 그는 은연중에 일행들에게. 특히 파인리히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타렌으로부터 재단의 가상 생명체 프로젝트에 대해서 보다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일행들이 대부분 아는 것들이었지만 그가 그 정보를 누설하므로써 그를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얀은 위태위태한 미시케를 그냥 놔두고 귀여운 남자 에리네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의 변명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 에리네. 당신 범죄자죠? 무슨 죄를 저질렀나요? 살인? 강도?
아니면. 음. 강간?"
-
"으헥. 가. 강간이라뇨. 날 뭘로 보고요."
"흠. 그럼 미성년자 성윤락행위?"
-
"켁. 오해에요. 오해!!! 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구요."
미얀은 에리네가 당황하자 더욱 재밌다는 듯이 큭큭거리면서 말했다.
"그거 알아요?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말."
-
"우와. 정말. 아니래두요. 사실.어. 그. 흠."
"후훗. 거봐요. 말 못하는 걸 보니. 미성년자 성범죄군요?. 어휴.
저리가요. 난 미성년자 아니에요!"
미얀의 말에 에리네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 모습이 미얀에게는 너무 귀여워 보였다.
"전. 유그리스시 시장이라구요!! 시장이 그런 짓을 할 것 같아요?"
-
"네에??? 그게 정말이에요?"
"그럼 정말이구 말구요! 전 유그리스 시 시장을 맡고 있는 에리네 반인테스라구요!"
-
"그랬군요. 시장이란 막강권력을 휘둘러 미성년자 성매춘을 벌이다니."
"우씨. 말 안해."
에리네는 급기야 삐지고 말았다. 참. 한 도시의 시장이란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에리네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한심한지 모르고 있었다. 허기사. 그 자신이 그렇게 되리라고 꿈에서야 알았으랴. 미얀은 더 이상 가지고 놀기도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아. 좋아요. 아니라고 쳐요. 그럼 무슨 죄를 졌죠?"
미얀의 질문에 에리네가 대답하려 하는데 다른 일행들의 귀도 이미 이곳에 쏠려 있었다. 허기사. 팔팔한 나이들인데 <미성년자 성 어쩌구.>란 단어가 연신 등장했으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연륜이 되는 얀 만이 저쪽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다.
"난 유그리스 시의 시장으로 중앙지역구 의원입니다. 전지역구 의회에도 참가할 자격을 가진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에리네의 말에 미얀은 장난이 발동해서 <역시 그런 권력을 이용해서.>라고 말하려다가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간신히 참아냈다.
"이번 전쟁론이 선포된 것은 전적으로 제 힘이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되지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당신들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에리네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서 그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얀도 그의 말을 듣고 그가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찌감치 있던 얀마저 에리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전쟁론은 중앙지역구 티탄시의 시장이자 지역구의장이신 마테리온 쥬 고어님이 생각하시던 사안이었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늘 침략만 받는 우리는 이대로 간다면 우리 자손들까지도 불안 속에서 걱정하며 살게 될 것이라 느꼈고 더 이상 방어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좀더 능동적으로 대처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제 생각과 마테리온님의 생각은 일치했죠. 그때 크레타시의 시장인 게류온 아라고네와 마르스시의 시장인 베아트리체 테레지아가 한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
"흠. 중앙지역구에서 한다하는 사람들은 다 모인게로군. 그 마르스시의 시장을 제외하곤."
얀이었다. 사실 얀은 에리네의 얼굴만 몰랐지 유그리스 시의 시장이 <에리네 반인테스>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물론 에리네의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 그가 정말 동일인물일까 반신반의 했지만 말이다. 얀은 중앙지역구 사정을 잘 알았기에 크레타 시의 게류온과 유그리스시의 에리네의 권력을 잘 알았던 것이다.
마테리온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말이다.
"맞습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 그녀는 매우 총명한데다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그녀가 클론 리모델링을 제안했죠."
-
"쳇. 총명하면 총명했지 아름답기까지 하단 말은 왜 해요?
그 여잘 좋아하나 보죠?"
역시 미얀은 전혀 말을 돌릴 줄 모른다. 직설화법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에리네는 순간 자신이 미얀과 베아트리체를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에 미얀은 혀를 찼다.
"쳇. 저런 바람둥이를 귀엽다고 생각했다니. 나 참."
하지만 미얀도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은연중에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 아닌가. 에리네는 갑자기 썰렁해진 지금 이 순간 화제돌리기 신공이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전쟁론은 받아들여지기 힘든 사안이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가 카안드리아스 재단에서는 전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
"잠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재단이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구요?"
그건 카인의 질문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카인처럼 에리네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카인은 자신같은 괴물을 만들어낸 이유가 전쟁을 하기 위해서라 생각했는데 그들은 전쟁을 싫어한다니 앞뒤가 맞질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건 위장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재단에서 매수해놓은 의원들이 전쟁론을 반대하고 나설 것이란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그들은 무조건적인 반대를 하더군요.
여러 가지 타당한 이유를 대면서 말이죠. 하지만 우리도 준비를 안한것은 아니었습니다. 마테리온님께선 재단의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었는데 그 정보 속에는 재단에서 시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관한 것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
"프로젝트?"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로이안 리플 프로젝트, 포스 스트렝스 플랜,기형생명체 유전자 변이 모듈 개발 계획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것으론 가상생명체 프로젝트라던가 쉐도우 프로젝트등이 있었습니다. 예전 실험들이야 방어적인 입장에서 그 필요성이 이해가 되지만 최근에 행해진 프로젝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치 전쟁을 생각나게 만드는 놀라운 프로젝트였으니까요."
에리네의 말에 카인과 파인리히의 인상이 굳어졌다. 그건 얀도 마찬가지였고 타렌의 눈빛도 미묘하게 흔들렸다.
"설마. 마테리온이 그 세부적인 자료들을 모두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
"그랬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보는 심층적인 내용은 빈약했고 대충 어떤 실험이다 라는 것들만 나타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매수된 의원들을 묶어둘 수 있었습니다."
"아. 그렇군. 그 정도 정보라도 재단에서 매수한 의원들은 반박할 여지를 잃게 되겠지."
-
"얀 박사님 말씀대로입니다. 우선 중앙지역구 의회는 그 정보를 이용해서 무사 통과되었고 전지역구 의회도 비슷한 수순을 거쳐 마침내 전쟁론은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물론 전쟁론을 선포하기 전에 우리들은 따로 모여 이주계획을 계획했고 그때 마르스 시장인 베아트리체의 클론 리모델링이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그랬었군."
-
"아까 전에 재단이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위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까 말씀드린 바로 그 비밀 문건 때문입니다.
그 문건을 보면 전쟁을 싫어하는 재단이 그런 연구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갖게 되거든요."
에리네의 말에 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소. 우린 전쟁론이 선포되었을 때 재단의 뜻이라고 생각했었소.
우리 역시 그런 실험들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이미 우리들은 그 프로젝트의 중심에 서 있는 자들이오. 나는 포스 스트렝스 플랜과 쉐도우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팀장이었고 카인은."
얀은 차마 실험대상이란 말을 못하고 카인을 바라보았다. 카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그 실험대상이었죠. 그리고 이 옆에 있는 파인리히와 아우로페는 가상 생명체 프로젝트의 실험대상이었고 타렌씨는 그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핵심 간부였죠."
카인은 당당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엔 감정이 실려 있었다. 아무래도 분노인 듯 싶었다. 카인의 말에 파인리히와 아우로페는 미소로서 대답을 했고 타렌은 고개를 숙여 버렸다. 얀은 카인의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여인은 기형생명체 유전자 변이 모듈 프로젝트의 연구원이었소. 이미 우리들은 재단이 어떤 곳이란것을 다 알고 있소."
얀의 말에 에리네는 경이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리네는 지금껏 천재 과학자라는 소릴 듣고 자랄만큼 똑똑한 수재였다. 그런 그가 이들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분위기를 짐작하지 못하였겠는가. 하지만 설마 그런 실험들로 강해진 자들이라고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에리네는 그 점에 대해선 약간 놀랐지만 대충 짐작은 간다는 표정이었다.
"우린 그 실험의 파괴력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실험을 하는 재단에서 이번 전쟁론을 선포하도록 유도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오."
-
"흠. 그렇군요. 역시 뭔가 이상하군요."
"뭐가 말이오?"
-
"처음 그 비밀문건을 보여주지 않았을 때 매수된 의원들은 철저히 전쟁론을 반대했었습니다. 물론 그 비밀 문건을 보여준 후에도 그들은 벌레 씹은 표정이었고 말입니다. 이건 충분히 겉으로 보기에는 전쟁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리네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모두의 얼굴을 한번씩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이건 저 혼자 생각해왔던 겁니다만. 전 재단의 그 이중성에 대해서 많은 의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조사해봤죠.
그랬더니 지난번 티탄시 헤켈대전으로 인한 피해를 이용해 각 도시들의 방어력을 강화하도록 조치했더군요. 물론 재단의 입김이 가해져서 말입니다. 당연히 큰 전쟁을 한번 치렀으니 그들의 요구는 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크게 의심할것이 못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재단에서 지금껏 시행해온 연구들과 그 톱니바퀴가 너무도 잘 맞물린다는 생각이 드는겁니다."
-
"그래서. 요점은?"
"아무래도 재단에선 전쟁을 해서는 안 되는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뒤로는 전쟁을 준비한 것 같습니다. 뭔가에 얽매여서 외부적으론 아니. 실제로도 전쟁에 대해선 비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쟁을 준비했고 전쟁론도 선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
"선포하도록 만들다뇨?"
에리네의 말은 흥미진진했다. 이건 그들 모두가 공감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처음 듣는 킴이나 미얀들도 이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전 상상력이 풍부한 편입니다. 그래서 이런 가정을 해보았죠.
재단에서 일부러 마테리온에게 비밀 문건의 정보를 흘렸다고 말이죠."
-
"아!!! 그럼!!"
역시 얀도 똑똑한 사람답게 에리네의 말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를 못했는지 뭐마려운 표정으로 뒷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에리네가 냉소를 띄며 말했다.
"아마 재단에서 전쟁을 준비한 자가 있었을 겁니다. 원래 재단은 전쟁을 반대했으므로 전쟁을 하기 위해선 그 나름대로 뭔가 확실한 것이 필요했겠죠. 그게 바로 전지역구 의회입니다.
이미 전지역구 의회는 재단의 힘에 통제 당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해진 상태입니다. 과거의 카안드리아스 재단이라면 그들이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도 되었습니다.
이건 그들이 우리 인류의 방어력의 전부를 책임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가오그가 등장하면서 재단의 힘은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그 가오그 역시 재단이 만든 것이긴 하지만 말이죠.
쉽게 말해 재단의 파워가 약해진 것을 도리어 역이용했다는 겁니다. 일부러 마테리온에게 재단의 비밀스런 정보를 그것도 전부가 아닌 어느 정도만 흘리는 것이죠. 마테리온 시장은 야망이 있는 사람이기에 전쟁론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었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죠. 그래서 그 자는 마테리온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 정도 미끼라면 충분히 해낼 것이란 생각에서 말이죠. 그리고 그 미끼를 문 마테리온은 그의 예상대로 해내고 말았습니다.
정말 전쟁론을 선포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론 마테리온이 해낸 업적이겠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자가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 것이 됩니다.
물론 제가 추측해본 것이지만 이게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에리네의 말에 모두들 놀란 표정이었다. 특히나 얀과 파인리히는 에리네의 명석함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에리네는 단지 몇가지 상황설정만 가지고 그런 엄청난 진상을 유추해 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추측은 정말 타당한 것이었다. 미얀은 귀엽기만 한 줄 알았던 에리네가 저렇게 똑똑한 사람인줄 미처 몰랐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기까지 했다.
아마 다신 에리네를 무시하지 못하리라.
에리네의 예상은 정확한 것이었다. 마테리온은 자신의 첩자가 재단의 비밀을 캐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지오가 일부러 흘린 정보였던 것이다.
얀은 에리네의 말을 듣고 나서 들릴까 말까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 자는 지오겠군."
얀의 예상도 정확했다.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론이 선포되도록 유도한 자는 바로 지오였던 것이다. 얀의 심각한 표정을 잠시 바라보던 에리네는 미얀을 보면서 말했다.
"왜 재단이 전쟁을 반대했는지 그리고 그 자는 왜 전쟁을 원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전쟁론은 선포되었고 클론 리모델링이란 이주계획에 따라 사람들은 이주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여러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일 것입니다."
-
"네. 그래요."
"하지만 그들은 배부른 돼지들이었습니다. 이미 매스컴을 장악하고 있던 지역구 의원들은 클론 리모델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주했다고 떠들었습니다.
물론 거짓이었죠. 잘 사는 자들은 그들의 권리에 따라 이주하였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뭔지도 모르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구출해주었던 바로 그 사람들 말입니다."
에리네의 말에 모두들 크게 와 닿는 것이 있었다. 그들 역시 이주 못한 사람들의 참상을 똑똑히 봤던 것이다. 갑자기 울화가 치민 미얀이 욕을 했다.
"나쁜 자식들.(이것도 욕인가?) 그랬던 거로군. 역시 매스컴은 거짓 정보를 전달했던 거야."
-
"미얀의 말대로 그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정신이 팔려 못 가진자들을 도외시했습니다. 전 그 점을 마테리온님께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그렇고 그런 소인배였습니다. 다른 종족으로부터 해방되어 우리의 권리를 찾자는 전쟁론에는 같은 생각이었을지 모르지만 못 가진자들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난 그와 크레타 시장인 게류온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이주 못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나섰던 것입니다."
에리네의 말에 모두들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얀은 자신이 범죄자라고 그를 놀렸던 것이 얼마나 실례되는 일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에리네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그때 카인이 질문했다.
"그럼. 우리말고 사람들을 구하러 왔던 그 의인들은 모두."
-
"그렇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제가 유그리스 시에서 직접 모은 사람들입니다. 호크는 모두 제가 지원했구요."
"우와."
일행들은 모두 에리네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아마 에리네가 처음부터 이런 진지한 모습을 보였더라면. 아니, 미얀이란 여자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모두 그의 위대함을 진작에 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에리네는 미얀에게 생명을 구원 받으므로써 코껴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멍청하고 아둔하고 허둥대는 머저리?같은 모습으로.
"다행히 당신들 같은 좋은 사람들이 있어 수월하게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
"아. 그럼 어째서 범죄자가 된 것이죠?"
미얀이었다. 그녀의 말투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는데 그런 모습에 에리네는 도리어 당황하여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 그. 그. 그건."
-
"아이. 진정하고 천천히 말씀하세요. 에리네."
우웩. 라케프가 미얀의 저런 가공할 내숭을 보지 못하고 죽다니.
분명 저승에서 땅을 치고 통곡하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 에리네는 그녀의 왕내숭 모습에도 간신히 진정하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마테리온은 저와 생각이 많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전 단지 사람들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뿐인데 배신자 취급을 하더군요. 흠. 저 미얀."
-
"네?"
"당신이 날 구해주었을 때 날 공격했던 그들은 마테리온이 보낸 부하들이었습니다. 아마 더 이상 쓸모 없던 날 조용히 죽이려 했겠죠. 그래서 전쟁론의 공을 혼자 독차지하고 비밀이 세는 것을 막으려고 했겠죠. 하지만 미얀 당신 덕분에 그의 생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어요. 정말 고마워요."
-
"고. 고맙기는요. 아. 그래서 그들이 정부 소속 요원이라고 하면서 당신을 데려가려 했던 것이군요. 당신을 범죄자라고 칭하면서."
"그래요."
-
"정말 미안해요. 당신을 오해해서."
미얀은 홍조를 띄며 미소를 지었는데 그녀에게서 볼 수 없었던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물씬 풍기는 장면이었다. 에리네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그리곤 웃으면서 말했다.
"아뇨. 생명의 은인인데. 미안할게 뭐 있겠어요."
에리네와 미얀의 끈적끈적한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중요한 이야기가 모두 끝났음을 알고 모두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에리네의 말대로 이미 정부는 피난민들을 포기하고 니네들 될대로 되라 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들을 구해준 사람들은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거나 하는 자들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에리네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들 중 분노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한때 악하기 그지없었던 타렌마저도 생면부지의 마테리온을 속으로 욕할 정도였으니 실로 그들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피난민들의 문제는 난처하기만 했다. 그들을 돌봐줄 여력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자신의 몸도 하나 추리기 힘든 판국에. 누가 뭐래도 지금은 전시였다.
하지만 에리네가 있었다. 그는 그 피난민들을 유그리스시의 수용시설로 옮겨 돌봐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의 성품에 깊이 감동했다. 시쳇말로 미얀은 그야말로 뻑 갔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 잠시간의 여유가 찾아왔다. 헤켈 전쟁은 잠시나마 휴전상태가 되었고 그들에겐 힘을 비축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더욱 다행한 것은 폐허가 된 2지역구를 제외한 다른 지역구의 방어력은 무척 강하다는 것이었다. 헤켈이 공격해 온다고 해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만큼 말이다.
일행들은 모두 쉬기로 했다. 하지만 에리네는 한시도 쉴 수 없었다. 피난민들을 보살펴야 했던 것이다. 에리네는 일행들 몰래 빠져나와 피난민들을 데리고 유그리스 시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스파이의 눈에선 벗어날 수 없었다.
"혼자 어딜 가는거죠?"
-
"아. 미얀! 어. 유그리스 시로 돌아가려구요."
"왜요. 좀 더 쉬지 않고."
-
"난 쉴 수 있는 시간이겠지만 그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에요.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줘야죠. 쿼터드 시보단 우리 유그리스 시가 더 잘 살거든요. 피난민을 전부 데리고 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알 부민 시장의 부담은 덜어 줄 수 있겠죠."
"당신 정말 착하군요. 결심했어요."
-
"네에?"
"나.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
"네? 저를요?"
미얀의 말에 에리네는 이상하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 역시 미얀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이 있었던가. 하지만 자신은 위험한 처지였다. 언제고 마테리온이 죽이려고 할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전 위험해요. 암살자들이 노리고 있을거에요."
-
"후훗. 제가 바로 어쌔씬이에요. 걱정 말아요. 지금 갈 건가요?
전 준비 됐어요. 어차피 준비 할 것도 없지만."
"네? 하아. 후훗. 좋아요. 같이 가죠. 다른 사람들에겐 조용히 편지를 남겨두고 가죠. 그들에게 불편을 주고 싶진 않아요."
-
"그렇게 하도록 해요."
에리네와 미얀은 미시케 앞으로 편지를 한 통 써놓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곧바로 피난민들을 유그리스 시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나중에 미시케가 그 편지를 발견했을 때 편지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미안해요. 미시케. 이렇게 떠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에리네는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난 그 사람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었어요.
피난민들을 자신의 도시인 유그리스 시로 이주시킨대요. 미력하지만 그를 도우려구요. 다른 사람들에겐 잘 말해줘요. 그리고 미시케. 흠.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지만. 힘내요. 그리고 자신이 믿는것을 믿고 따르세요. 그 믿음으로 인한 결과가 비록 좋지 않다하더라도 후회하지는 말아요. 알겠죠? 그리고 라케프 할아버지의 호크는 잠시 빌려줄게요. 유용하게 쓰길 바래요. 그럼.
-미얀 가레즈- >
미시케는 그 편지를 읽고 나서 미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다 표가 나기 마련인 것이다. 어쨌든 미시케는 미얀과 에리네가 떠났음을 모두에게 말해주었고 모두 많이 아쉬워했다.
글랜시아 시.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도시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 황량함과 적막함. 그나마 철저하게 파괴된 다른 도시들과는 다르게 건물들은 대부분 멀쩡했다.
아크바레이. 그는 현재 의식불명상태였다. 펜 타고니를 따라 인적이 드문. 아니.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쓰러져버렸다. 그의 상처는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었다. 단지 자신의 친모가 헤켈이라는 믿지 못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놀라운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며 그녀를 따라 왔던 것이다.
펜 타고니.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방법을 이용해 아크바레이의 상처를 치료했다. 다행히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 갔으며 그는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의식을 되찾은 아크바레이는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정성껏 치료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크바레이는 약간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는 펜 타고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둘의 침묵게임에서 패배를 한 것은 아크바레이였다.
"당신의 이름은 펜 타고니. 맞죠?"
아크바레이의 질문은 마치 아직 그녀를 엄마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이는 듯 느껴졌다. 펜 타고니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라케프 할아버지께서 죽기 전에 말씀하신게 사실인가요?"
단도직입적이었다. 엄마라는 단어만 안 들어갔지 <당신 내 엄마 맞아?>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닌가.? 펜 타고니는 고개를 숙였다. 헤켈의 모습. 고개를 숙인 모습이 무척 가냘파 보였다. 보통 헤켈보다는 덩치가 작았던 것이다.
"왜 말을 못하죠? 질문의 뜻을 이해 못했나요?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해볼까요?"
-
"아니. 안 그래도 돼."
"그럼. 할아버지가 말씀하신게 맞다는 말인가요?"
아크바레이의 질문에 펜 타고니는 잠시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리곤 아크바레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분이 말한 것은 아마 사실일거야."
-
"아마라뇨? 할아버지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설마 거짓말을 했다는 뜻인가요?"
"아니. 그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펜타고니의 말투는 마치 라케프의 말은 사실인데 자신이 아크바레이의 엄마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르겠다는 투였다.
"그럼. 당신은 날 전혀 모르나요?"
-
"그분이 나보고 그랬어. 지금 넌 네 손으로 아들을 죽였다고.
처음엔 물론 믿을 수 없었지. 왜냐하면 내 아들은 오래..... 아주 오래전에 죽었으니까. 하지만 그분이 거짓을 말할리 없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당신도 확실히 모른다는 거군요. 내가 당신의 아들인지 아닌지."
아크바레이의 말투는 전혀 공손하지 못했다. 마치 뭔가를 따지는 듯 날카로웠다.
사실 그는 라케프가 라케프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할 때부터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과 관련되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더 황당한 것은 라케프의 말이었다.
아크바레이 그는 First Force Owner인 라케프와는 다른 Original Force Owner였던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도 라케프 혈통이고 할아버지였던 아크타리안도 라케프 혈통인데 어째서 자신만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아크바레이는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그는 <설마. 설마.> 했던 것이다.
자신의 부모가 친부모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라케프는 자신의 비밀에 대해 나중에 얀에게 물어보라 하지 않았는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아크바레이었다. 자신의 부모가 친부모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는 당당하게 난 그분들을 친부모 이상으로 생각했다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친모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헤켈의 모습으로.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그 친모는 자신을 버렸다는 것인가?
아니면 양부모에게 입양을 보낸 것이란 말인가. 어찌되었건 그는 화가날 수밖에 없었다.
펜 타고니는 아크바레이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나의 아들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펜 타고니는 슬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지독하게도 인간들을 증오했던 그녀였다.
헤켈들의 사회에서도 그 증오심만은 남달라서 다른 헤켈들의 존경까지 받던 그녀였다. 원래 헤켈들은 어릴적부터 다른 종족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가긴 하지만 전이 헤켈이었던 그녀는 그런 교육도 필요 없이 아예 처음부터 인간들을 저주하고 미워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실력도 좋았다. 비록 전이 헤켈에다가 여성이란 점 때문에 높은 신분까지는 오르지 못했지만 락켄신의 눈에 띄어 현무 음영대의 수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현무단은 엄청난 전과를 올렸었다.
게다가 그녀는 인간들을 죽이는데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전이 헤켈들의 문제점 중 하나가 바로 그 죄책감이었는데 인간의 몸으로 전이했을 경우 그런 경우가 왕왕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죄책감은커녕 인간들을 죽이면서 도리어 희열을 느꼈다.
그런 그녀 앞에 인간이 앉아 있었다. 그토록 미워하던 인간이란 존재가. 그녀 앞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유일한 혈육. 그녀의 아들이었다. 펜 타고니는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던 것이다. 그때 아크바레이가 말했다.
"내가 당신을 따라 온 것은 당신이 내 어머니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에요."
-
"!!!"
"당신이 내 어머니든 아니든 난 동료들의 곁으로 돌아갈 겁니다."
-
"저기."
아크바레이의 말에 펜 타고니는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아들의 이름도 모르지 않는가. 하지만 그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당신을 따라온 이유는 당신이 만약 내 어머니라면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물어보기 위해섭니다. 그리고 만약 내 어머니가 아니라면 라케프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섭니다!"
아크바레이는 단호했다. 그의 말에는 살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펜 타고니는 상대방이 살기를 풍기고 있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그녀는 무척이나 마음이 심란했다. 다만 그건 아크바레이의 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따라온 목적이 너무도 가슴을 에이는 것이라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너무도 마음 아파서.
아크바레이의 질문에 펜 타고니는 어쩔 수 없이 과거를 들려주기로 결심했다. 그에게 다른 말은 변명밖에 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네 이름이 뭐지?"
-
"그건 알 필요 없습니다!"
"너. 너무. 매정하구나."
펜 타고니의 말에 아크바레이는 마음이 흔들렸다.
"아크바레이."
아크바레이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펜 타고니는 그의 이름을 몇 번 되뇌이고는 말했다.
"이름이 좋구나. 네게 모든걸 말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너에겐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고 거짓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맹세하마.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거짓은 아니라는 것을."
펜 타고니는 진실된 눈으로 아크바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른 곳을 바라보던 아크바레이도 그녀를 쳐다보았다. 둘은 시선이 마주쳤지만 외면하지 않고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인간과 헤켈. 그들은 서로 다른 종족이란 사실도 망각해버렸다.
주석 7. 어머니와 아들(리니아의 슬픔.)
리니아는 자신이 왜 전이 헤켈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해주었다. 전이 헤켈이 되면서 아크바레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그녀의 숨겨진 과거를 모두 말하며 용서를 빌었다.
리니아의 말을 다 들은 아크바레이는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이젠 모든 것이 확연해졌던 것이다. 자신의 부모가 양부모였단 사실이. 단 하룻동안 알게된 사실치고는 너무 당황스럽고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그는 짧은 울음으로 그 모든 것을 털어버렸다.
양부모님이야말로 자신을 키워주신 진짜 부모님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앞에 있는.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펜 타고니는 모든 이야기를 마치고나서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고페니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유언대로 그를 영원히 기억하고 사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펜 타고니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리니아의 의식을 살려두려고 갖은 수를 썼는데. 그 둘의 의식을 분리해서 한 뇌에 보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바로 의식의 융화였다. 둘의 의식은 비록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이질체였지만 끝내 하나로 융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로의 성격이 닮게 되고 서로의 특징을 가지게 되었으며 동시에 하나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그녀는 펜 타고니이면서도 리니아였던 것이다. 아크바레이는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었어요. '그래. 날 버린 엄마라면 어디 변명이라도 들어보자. 그래. 어디 한번 어떤 변명이라도 해봐라.'
하는. 하지만. 이제 깨달았어요. 날 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
"그 친척분네 집에 나중에 한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내 몰골은 보기 흉할정도로 변이가 되어 있어서 문앞에서 네 소식을 묻는 것으로 만족해야했지. 그때 그분께서 그러셨어. 네가 죽었다고.
병들어 죽었다고. 널 살릴 능력이 없으셨다고. 난 그분의 말을 믿고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단다. 네가. 설마 다른 곳으로 입양된 줄은 꿈에도 몰랐던거야."
리니아의 말대로 그 친척들은 아크타리안에게 그 아이를 맡긴 사실을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들을 믿고 맡겼는데 다른 집에다가 아이를 입양시켰으니. 그녀를 볼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궁색한 변명으로 아이가 병들어 죽었다고 했으며 그것을 리니아는 믿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아크타리안이 그렇게 우려하던. 아크바레이의 슬픔. 즉, 입양되었단 사실을 드디어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크타리안이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크바레이가 그 사실을 알게되면 분노로 마음을 다스리게 될거라 믿었다.
그는 분노로 인해 아크바레이가 자신의 잠재력을 발산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던 것이다. 아크바레이의 능력은 오리지널 포스 오너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 한계를 추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뛰어난 아크바레이가 만약 나쁜 생각으로 또는 분노와 슬픔으로 힘을 사용하게 된다면 그 아이는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게 될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죽으면서도 얀에게 아크바레이를 맡기며 신신당부했던 것이었다.
아크바레이는 이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앞으로였다. 펜 타고니. 그녀를 엄마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라케프 할아버지의 원수로 그녀를 죽여야 할 것인가.
처음에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오랜 과거를 회상하며 슬퍼하고 있지 않은가.
아크바레이는 지크프리드라는 녀석을 본 적도 없는데 그에게 굉장한 분노를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펜 타고니가 그에게 말했다.
"이젠. 돌아가렴. 너의 동료들 곁으로. 널 붙잡지 않으마."
그녀는 분명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인데 아크바레이는 왠지 그 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렸다.
"왜요? 또 날 버리려는 건가요? '그냥 넌 가라. 난 나 갈대로 가련다!' 그건가요?"
-
"......"
"아니. 나도 라케프 할아버지처럼 그냥 죽여버리지 그래요? 네?"
-
"나. 내가. 그분을 죽인게 아니야. 그. 그분은."
펜 타고니는 라케프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다가오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었다. 도저히 그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를 이겨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락켄신이 그분을 뒤에서 찔러 죽였던 것이다.
"미안하구나. 미안해. 내가 죽어 그분의 죽음에 대한 원한이 풀린다면 날. 죽이거라."
펜 타고니는 그렇게 말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아크바레이가 주먹을 말아 쥐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천천히 펜 타고니에게 다가갔다. 펜 타고니는 슬픔을 억누르며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크바레이가 무너지듯 쓰러져 그녀를 껴안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당신은 제 어머니인데. 당신은. 제 유일한 혈육인데.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오로지 당신뿐인데. 미안해요.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그렇게 말하려던게 아닌데.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만.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펜 타고니는 그녀의 거칠은 손으로 아크바레이의 등을 쓸어 내리며 말했다.
"고맙구나. 정말 고맙구나. 이제 난 죽어도 여한이 없다."
-
"아뇨. 죽다뇨.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이제라도. 이제라도 같이 살면 돼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서 살면 되요. 그냥 둘이서 살아요. 이젠. 다신 헤어지지 말아요."
"사랑한다. 아가야."
-
"어머니."
아크바레이는 헤켈인 펜 타고니를 꼭 껴안으며 말을 이었다.
"사랑해요."
-----------------------------------------------------------
중간에 마지막 주석 7. 이 있었는데요. 마지막 주석편에서는 펜 타고니의 과거에 대해 나옵니다. 기가 슬렌더도 거의 후반부네요...... 에구 얼렁 얼렁올려야지...... 모두 행복한 나날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