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54회 - http://hoyanet.new21.net/zero/view.php?id=gigaselender&no=54
[기가 슬렌더] -27- 세느카 아이리스(프레제톤타의 두 번째 인간 방문객) -세느카(프레제톤타의 두 번째 인간방문객.......)-어느덧 D.W 2001 년 10월도 거의 다 저물어가고 있었다.
죽음의 전쟁 이전의 시대의 10월은 무슨 계절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겨울이었다. 죽음의 전쟁이 계절변화마저 바꾸어버린 것이다. 그 마지막주 토요일. 이 날은 중앙지역구의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지금 시대엔 국가란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전세계가 하나로 통합된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거대한 국가. 아니,인류라는 거대한 그릇안에 인간들은 하나의 밥알갱이로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들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치기 위해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엄밀히 나누자면 인간,세이렌,헤켈 이라는 세 가지 국가로 구성된 세상에서 그들은 꽤 많은 영역을 확보한채 살고 있는 것이다.
그 거대한 인류의 세상은 관리하기 쉽도록 4가지의 지역으로 나뉘었다. 인류의 발이 닿지 않는 다른 종족의 땅에도 지역구라는 이름을 사용해 부르고 있었다.
그 첫 번째 땅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아크로나딘산맥을 거느리고 있는 4지역구였다. 그 아크로나딘 산맥 최고 봉우리인 로페하벤 봉우리에 헤켈의 은거지가 있는 것을 아는 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두 번째 금단의 땅인 제 5지역구는 빙하지대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일리아라는 섬에 세이렌의 문명을 탄생시켰다. 프레일리아의 프레제톤타 빙산의 지하세계 그 세계를 한 번 본 학자가 있다면 세이렌들의 위대한 과학력에 저절로 허릴 숙였을 것이다.
제 4,5 지역구는 처음부터 인정하려던 땅은 아니었다. 헤켈과 세이 렌들의 주요 활동영역이 확실한 경계선 형태를 띄며 나타난 이후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 전에는 빙하지대를 지나 한랭기후를 가진 중앙지역구가 좌우로 길게 뻗어진 형태였으며 그 밑에 왼쪽부터 차례대로 3,1,2 의 순서로 지역구가 매겨져 있었다. 1,2,3 지역구는 온난기후라 살기엔 더없이 좋았다.
불행히도 1지역구는 화산지형의 대 폭발로 인해 대부분 석회암으로 땅이 이루어져 있어 많은 붕괴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2,3 지역구는 살기 좋은 땅이었다.
특히 3지역구는 무엇이든 심기만 하면 알아서 자라주는 최고의 기후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인간들은 각자의 지역구 속에서 공동의 목적을 위해 만든 시라는 단위을 통해 삶을 영위하고 있던 것이다. 이런 시들은 서로의 유대관계를 존속시키기 위해 지역구의회라는 것을 창설했다.
그리고 지역구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전지역구의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각각의 시의 시장들은 지역구의회에서 자신의 발언권을 행사할수 있었으며 그중 파워가 막강한 의원들은 전지역구의회에서도 그런 능력을 발휘했다.
D.W. 2001년 10월 27일 토요일. 중앙지역구 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날 중앙지역구의 13개 시의 크고 작은 시의 시장들은 마테리온 쥬 고어 지역구의장의 발언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발언은 바로 이것이었다.
"오늘은 인류사에 있어 가장 진보적인 논제에 대해 토의할까 합니다. 우선 우리가 직면에 있는 현실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현재 우리는 북으로는 세이렌 남으로는 헤켈들에 둘러싸인채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 수백년간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 슬픈 현실입니다. 하지만 과거 우리에겐 그들을 막을 미비한 힘조차 없었던게 사실입니다.
그들 소수의 공격에도 치를 떨어야할정도로 약했습니다. 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여태껏 버텨왔고 무기의 진보도 가져왔습니다. 개발된지 10년 남짓 된 가오사이보그가 그 진보된 무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가오그가 등장한 이후로 적들의 침입으로부터 우릴 지킬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비록 많은 예산이 들어가고 탑승자 양성문제등 안고 있는 문제가 여러 가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결할수 있는 문제인것입니다. 즉,지금 당장의 문제로 인해 먼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사고를 해선 안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헤켈들과 세이렌들은 강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우리들에게 위협을 주었을때엔 우린 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겐 그들을 막아낼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그저 막는데에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들어 타 종족의 대규모 침공이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이것은 그들 역시 우리들의 힘이 날로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육감적으로 느낀다는것을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즉, 그들도 우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린 여전히 몇백여년전에 만들어놓은 타종족불가침 규약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미 시대를 지나간 규약입니다.
그 시대의 불안정한 사회환경속에 불필요한 혼란을 막고 방어에만 전념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일종의 궁여지책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효과적으로 이루어져 지금의 산업을 이루는데 기반이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변합니다.
시간이 계속 흐르듯이 상황도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규약이 필요합니다.
다른 종족들에게 언제까지고 당하고만 살수는 없는 노릇아니겠습니까? 더 이상 힘없는 노예가 되고저 하지 말고 낫과 호미를 들고 새땅을 정복해나가는 프런티어가 되자는 뜻입니다."
마테리온의 일장 연설이 끝나자 의원들은 모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당연한일이었다. 지금껏 의제들은 모두 산업,문화 등에 관한 것들이었지 이런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참 수군거리던 의원들은 제각기 서로 편을 나누기 시작했다.
물론 한쪽은 마테리온의 의견을 수용하는 쪽이었고 다른 쪽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방어적인 입장을 고수하자는 쪽이었다.
마테리온은 일이 이렇게 진행될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우둔한 시장들이 방어적인 입장을 고수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바로 카안드리아스 재단에서 압력을 행사하는 시의 시장들이었다. 특히 아리코시의 하일레노스 시장과 노스 메테르시의 서에칸트시장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마테리온은 예상했던 적들이 등장했음을 알았다. 그들의 영향력은 결코 에리네나 게류온같은 자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워낙 철저하게 재단에 연류되어있기 때문에 그들은 로비대상에서 제외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그들은 회의론적인 입장을 내세웠다.
50대 중반의 15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육중한 몸을 가진 아리코시 하일레노스 시장이 입을 열었다.
"의장님. 의장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선적으로 다른 종족의 침입으로부터 시민들의 안전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는 우리가 그런 본연의 임무를 저버리고 시를 비워둔채 타 종족을 공격한다는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설령 도시의 방어를 철저히 해놓는다손 치더라도 세이렌과 헤켈 두 종족에게 둘러싸여진 이상 어느 한쪽만을 공격할순 없는 노릇입니다. 한쪽을 노리고 쳐들어간다면 다른 한쪽이 가만있지 않을테니까요 물론 그건 나중에 생각하여야 할 일입니다.
시장님의 의견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내용이지만 아직 우리의 현실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다른 의원님들께서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마테리온은 속으로 하일레노스를 욕하고 있었다. 에이,능구렁이 늙은이 같으니. 라고 사실 욕할만도 했다.
하일레노스는 마테리온 발언의 약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것을 꼬집을 때 은근히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점을 부각시켜 마테리온의 체면도 세워주고 있었다.
이것은 다른 의원들에게 더욱 호감이 가는 발언방식임에 틀림없었다.
하일레노스의 발언에 크레타시의 시장 게류온이 응수를 펼쳤다.
"현실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전투력은 그 어느 세기를 들여다봐도 가장 우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일반인 수십여명의 능력을 가진 세이렌 한 개체를 가오사이보그 한 대가 충분히 막아낼수 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무기의 진보를 가져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가장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이것은 결코 다른 종족을 굴복시킬수 없다는 주장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광선형 돔 결계도 있습니다. 한 종족을 공격한다고 해서 나머지 한 종족이 빈집털이를 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광선형 돔 결계는 저번 헤켈대전에서도 볼수 있듯이 간단히 부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가오사이보그는 10년이란 세월을 통해 가변공정시스템(FMS:Flexible Manufacturing system)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즉,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는 말입니다.
물론 탑승자를 양성하는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건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동안 충분히 해결할수 있는 문제입니다. 더 이상 다른 종족의 눈치를 보며 살수는 없습니다. 이젠 우리도 우리의 힘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게류온의 말이 끝나자 의원들의 표정이 고무된 듯 변해있었다.
사실 그들도 타 종족에게 억눌려왔던 감정이 뼛속깊이 박혀있었던 것이다. 그때 노스 메테르시의 서에칸트 시장이 일어섰다. 그는 2미터의 장신으로 하일레노스시장과는 반대로 빼빼 말라있었다.
키가 커서 그런지 더욱 가냘퍼보였다. 그런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거칠었다.
"게류온 시장님의 말씀은 다소 과장이 섞여있습니다. 광선형 돔 결계가 타 종족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것이 절대적이진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헤켈이나 세이렌중 한 종족이 총공세를 펼친다면 그 정도의 결계는 쉽게 부술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총공세를 펼치지 않는다하더라도 중소도시의 다소 약한 돔 결계는 쉽사리 파괴될것입니다. 타 종족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작은 도시들은 버리겠다는 뜻입니까?"
게류온은 서에칸트의 말에 다소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서에칸트는 인류애라는 커다란 명제를 놓고 싸움을 걸어오고 있었다. 이런 것은 자칫 한 번의 말실수로 돌이킬수 없는 지경에 이를수 있게 하는 무서운 말빨공격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게류온 대신에 에리네 반인테스 유그리스 시장이 일어서서 답변했다.
"어째서 더욱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린 결코 중소도시의 몰락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겁니다. 이미 서에칸트 시장님께서 한 발언에 대한 해답을 강구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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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훗 도대체 어떤 방법인지 대단히 궁금하오!"
서에칸트 시장은 자신보다 한참 아래 연배인 에리네를 깔보듯 말했다. 에리네는 전혀 동요되지 않는 눈빛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주계획입니다!!"
에리네의 입에서 이주계획이란 단어가 나오자 의원들은 제각기 말을 하느라 회의장은 소란스러워졌다. 마테리온은 득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조용히들 하십시오!!! 에리네 시장의 발언은 아직 끝난게 아닙니다."
마테리온이 손짓으로 말을 이어가라는 표시를 하자 에리네는 정중히 예를 표하는 시늉을 하고는 말했다.
"제 2지역구의 주민들을 다른 지역구로 이주시키는 것입니다."
에리네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하일레노스 시장이 반박했다.
그는 다소 노기를 띈 목소리로 흥분한 듯 외쳤다.
"그 무슨 망발이오!! 아무리 젊은 혈기로 그런 생각을 했다고는 하지만.. 2지역구의 주민들이 한두명 아니, 일이천명인줄 아시오?
그 많은 사람들을 다른 지역으로 무슨 수로 이주시킨단 말이오?"
- "하일레노스 시장님.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죠 분명 그 많은 사람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일겁니다.
하지만 지금 처해있는 상황을 전략적으로 분석해본다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을겁니다. 북쪽으로는 세이렌 남쪽으론 헤켈에게 둘러싸여져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포위된 형태입니다. 이래선 전력의 균등화를 이룰수 없습니다.
가운데 끼인 우리의 처지만 나빠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타 종족들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비대해진 살을 도려내는 것입니다."
에리네의 말에 누군가 일어서서 동조를 표했다. 그는, 아니 그녀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선을 고정시키게 만드는 마력적인 매력이 있었다. 바로 마르스시의 베아트리체 시장이었다.
"에리네 시장의 의견은 상당히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종족들과 2:1 의 싸움을 해왔던 그동안을 돌이켜보며 잘못된 점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2지역구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구에 있는 사람들보다 그 수가 훨씬 적습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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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지금 무슨 착각들을 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마치 회의가 전쟁을 하기로 결정지은 사람들이 전략을 짜는 자리로 바뀌고 만것같소!!"
서에칸트 시장이었다. 그의 얼굴엔 더 이상 평온함은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분위기가 서서히 전쟁을 해야한다는 쪽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서에칸트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사실 에리네의 말은 옳은 구석이 많았다. 헤켈과 세이렌들에게 둘러싸여진 지금 인류는 가장 불행한 종족이나 다름없었다.
두 종족들에게 같이 시달림을 당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쪽 길을 터주어 세이렌과 헤켈들이 서로 부딪히게 만든다면? 확실히 인류에겐 1:1:1 의 싸움이란 덜 부담스러운 형태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학자 들과 심지어 이 자리에 모인 시장들도 한 번쯤은 생각해본 복안이었다.
'헤켈과.. 세이렌이 서로 싸운다 허기야. 그런 일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지만. 견제하는 쪽이 한 군데 더 늘어난다면 섣부른 도발은 힘들겠지..'
심지어 서에칸트 시장도 그런 생각을 하며 약간의 긍정은 표시했다.
하지만 그건 전쟁을 하겠다고 한 연후에 생각할 문제지 지금 공론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을 그가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다.
다른 시장들도 마치 자신들이 전쟁을 해야겠다고 확정진 연후에 방법을 모색하는줄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마테리온은 서에칸트의 반박에 잠시 조용해진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서에칸트 시장의 말이 맞습니다. 방법론적인 문제로 귀결되었는데 그건 나중에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마테리온은 에리네를 바라보았다. 에리네는 더 이상 끌면 안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마테리온은 어쩔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에리네는 잘 알고 있었다.
"하일레노스 시장님. 그리고 서에칸트 시장님! 최근들어 카안드리아스 재단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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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게 무슨 뜻이오?"
"카안드리아스 재단은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집단으로 잘 알려져있습니다. 그 재단이 이 회의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그 규약은 그들의 모순된 모습을 증명할수 있는 가장 큰 증거입니다."
에리네의 말에 하일레노스와 서에칸트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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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카안드리아스 재단에서는 지금의 가오사이보그를 훨씬 능가할 가공할 전투무기를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들의 능력은 결코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우리 인류에겐 불필요하게 큰 능력이었습니다."
에리네의 말에 하일레노스와 서에칸트의 표정은 동시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그럴만한 증거를 에리네가 가지고 있을리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후훗. 소설을 한편 쓰시지 그러시오. 에리네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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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사태파악이 안되시는것같군요. 자아. 이것은 카안드리아스 재단에서 추진했던 프로젝트들입니다. 모두들 하나씩 받아서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도시의 건물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거대한 원형 돔 지붕에 거대한 원형탁자가 놓여져 있었다. 그 원형탁자에 둘러앉은 13인의 중앙지역구 시장들은 에리네가 나누어준 보고서를 하나씩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것을 읽어나가는 그들의 눈에는 경악의 눈빛과 조소의 눈빛이 어우러져 있었고 그것은 하일레노스 시장과 서에칸트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그 보고서는 마테리온이 재단에 심어둔 끄나풀들로 하여금 입수케 한 엄청난 정보를 가진 문서였다. 물론 ADIP 계획같은 고차원적인 비밀은 숨겨져 있지 않았지만 그것들의 표면적인 이름들은 공공연히 드러나있던 문서였다. 바로 쉐도우 프로젝트와 가상 생명체 프로젝트였다.
그 외에 과거에 진행되었던 로이안 리플 프로젝트,포스 스트렝스 플랜,기형생명체 유전자 변이 모듈 개발 계획등 여러 가지 연구주제들이 망라되어있었다.
시장들의 표정변화를 즐겁게 바라보던 에리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은 카안드리아스 재단에서 연구하던 연구 목록들입니다.
물론 세세한 사항들까지는 나와있지 않지만 그 연구들의 예상결과를 보면 상상을 불허합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쉐도우 프로젝트는 단지 인간 한명의 힘으로 가오그 한 대에 맞먹는 힘을 갖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실험이 성공했는지 여부는 아직 판가름 나지 않았지만 만약 그 실험이 성공한다면 세이렌족에 비해 월등히 숫자가 많은 우리 인류에겐 엄청나게 큰 힘이 될것입니다. 또 다른 한가지 예를 들면 포스 스트렝스 플랜을 들수 있습니다. 이 실험은 거의 성공직전에 실패했습니다.
만약 이 실험이 성공했다면 이 세상은 포스 오너들로 넘쳐나게 될것입니다. 물론 그들 개개인의 능력은 다른 종족들을 굴복시키는데 결코 부족함이 없습니다."
에리네는 다소 과장을 섞어 말했다. 사실 포스 스트렝스 플랜은 어느 정도 매너 포스를 감지하고 사용하는 자들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프로젝트였지 일반 사람들을 포스 오너로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의 설명은 그가 나눠 준 보고서의 내용과 일치하여 시장들에게 어필되고 있었다.
"그.. 그렇다면 재단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중앙지역구에서 작은 도시에 속하는 할파이드 시의 시장 레빈의 질문이었다. 레빈의 질문에 원형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일제히 에리네를 바라보았다. 에리네는 하일레노스와 서에칸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승리에 도취된 웃음을 지었다.
"바로 전쟁입니다!!"
에리네의 말에 회의장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일레노스 시장과 서에칸트 시장은 에리네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다른 시의 시장들은 점차 에리네의 의견에 수긍하는 눈치였다.
재단과 연류된 시장들은 중앙지역구의 하일레노스나 서에칸트말고도 많이 있었다. 이미 그들은 재단의 요청대로 계속 방어적인 입장을 고수해왔었다.
앞으로도 카안드리아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한 그 입장은 계속 될 것이었다. 다른 시의 시장들도 현재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는 것을 더욱 바라는 소인배들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그들의 편에 서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그런 그들의 가슴속을 뜨겁게 달구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테리온은 자신의 생각대로 에리네가 잘 처리해주자 기분이 좋은 듯 속으로 미소짓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냉철한 사고를 하는 인물이었기에 절대 겉으로 좋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지 않아 종족차별주의자들의 세상이 도래할것이라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재단에서 그런 힘을 비축하고 있으면서도 방어적인 입장을 고수한다는 것은 납득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의 의도가 뭔지는 알수 없지만 더 이상 그들의 생각대로만 움직여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겐 힘이 있고 그 힘을 사용해야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안락한 의자에 안주하려들지 말고 앞으로 한걸음 내딛을때가 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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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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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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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피해를 감수하며 산다는 것은 후손에 대한 불성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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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도 동의하겠습니다."
여러 시장들이 동정의 뜻을 표하자 끝내 하일레노스 시장도 졌다는 듯 에리네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것은 다른 시장들의 어떠한 의견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지닌 말이었다. 그러자 서에칸트 시장도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동의하고야말았다.
이로서 마테리온의 타종족불가침 규약 폐지론은 의회를 통과하였다. 지역구의회에서 상정된 안건은 전지역구의회로 넘어갈수 있었다.
아마 전지역구의회에서도 이런식이라면 승리할수 있을 것이란 게 마테리온의 생각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좋습니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아 그 전에 오늘 보았던 재단에 대한 보고서는 언론에 일체 발언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재단에 나쁜 소문이 나돈다면 혼란만 가중될뿐이니까요.. 다음 회의는 두달 뒤인 12월에 개최할 예정입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마테리온이 회의를 마치는 말과 함께 일어서자 다른 시장들도 각자의 길을 가기위해 일어섰다. 하일레노스와 서에칸트의 표정은 가장 침통해보였고 그외 그를 따르던 시장들도 다소 심각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다른 시장들은 다른 종족들을 무찔러 본때를 보여줄수 있을거란 생각에 다들 다소 상기된 표정이었다.
마테리온은 천천히 에리네를 향해 다가갔다. 에리네는 회의장에서는 다소 딱딱하게 굴었던 표정과 말투를 바꿔 부드럽게 말했다.
"성공입니다. 마테리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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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훗 네 도움이 크다. 물론 게류온과 베아트리체도 한몫을 했지만 역시 너만한 이가 없구나."
"과찬입니다. 하지만 전쟁을 치르기 위해선 아까 말했던 이주계획을 저들에게 납득시켜야만 합니다. 이대로 전쟁을 한다면 그건 세상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멍청한 짓이 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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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이주계획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지.
우선은 전 지역구 의회에서 이 안건을 통과시키는게 우선이니까.."
"게류온 시장과 베아트리체 시장이 도와준다면 전지역구 의회에서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타날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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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훗. 알겠어. 오늘은 푹 쉬도록 하게.."
마테리온은 웃으면서 자릴 비켜주었다. 에리네도 다소 피곤한 기색을 띄며 건물 밖으로 나갔다. 하늘에서는 붉은 태양이 뜨거운 직사광선을 토해내고 있었다. 에리네는 눈이 부신지 한손으로 해를 가리고 자신의 플라잉 머신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누군가 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거는게 아닌가.
"에리네! 오늘 솔직히 놀랬어요 그런 능구렁이 할배들을 구스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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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베아트리체 시장.. 과찬입니다. 저는 마테리온님이 시키는데로 했을뿐.."
"후훗 지나친 겸손은 교만이에요,에리네 어쨌든 오늘 성공했으니..
다음번에도 활약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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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베아트리체 시장님은 이주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짜내보도록 하십시오 그게 우리의 목적을 달성한 후에 할 가장 급한 일입니다."
"후훗. 그 시장이란 단어는 좀 빼면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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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 무슨??"
"후훗 난 에리네. 당신을 에리네라고 부르는데 당신은 왜 게속 시장이란 수식어를 붙이나요? 전 우리 사이가 그렇게 벽에 가로 막히는 것을 원치 않아요!"
베아트리체의 말에 에리네는 다소 당황한 기색이었다. 친해지고 싶다는 뜻을 빙 돌려말한것이지만 사실 직접적으로 말한것보다 효과가 더 컸다. 에리네는 살며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베아트리체 나도 당신과 벽이 생기는건 원치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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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중에 뵈요 전 할 일이 많아서. 호호홋.."
"그래요. 조심해서 들어가도록 해요"
에리네는 멀어져가는 베아트리체를 한참 바라본후 플라잉 머신에 탑승했다. 그리곤 전용 호버크레프트 주차장을 향해 내달렸다.
금속. 주변의 극저온의 온도속에서도 그 색이 바래지 않는 기적의 신소재. 훌러렌(C60)이라 불리는 이 금속은 그 금속이 지닌 특유의 색상보다는 주변환경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엄청난 한기를 분자 하나하나가 고통스레 받듯 그것들의 색깔은 짙은 푸른색이었다.
보기 만해도 온몸이 얼어붙을만큼 진저리나게 짙은 푸른색이었다.
그 푸른색의 금속으로 이뤄진 거대한 건물 안에는 하나의 통로를 따라 몇 개의 방이 달려있었다. 가장 구석진 방. 그 방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방안에는 한때 굉장한 추위에 떨었던 듯 보이는 한 여성이 온몸을 번데기처럼 웅크려 누워있었다. 감기에 걸린것인지 아니면 원래 얼굴이 하얀것인지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창백해보였다.
갑자기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다. 마치 악몽을 꾼 사람처럼..
상체를 일으켜세운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녀의 미(美)는 미인대회에 참가하는 여성들의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었다.
뭐랄까. 가슴속을 파고드는 지적인 아름다움? 그것도 아니라면 사람의 가슴을 옥죄게 만드는 설레임이란 선물을 안겨다주는 그런 아름다움? 사람 느끼기 나름이겠지만 그녀의 그런 내면적 아름다움은 그녀의 머리색과 눈동자의 색 때문에 약간은 퇴색되어버릴수도 있었다.
검은색 검은색 머리결과 눈동자는 이 시대에 존재할수 없는 인간의 유전자였다. 물론 자신의 모습을 과장되게 또는 튀게.. 쉽게 말해 엽기적인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들이 그런 색으로 염색을 하거나 렌즈를 끼고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순수한 내적 아름다움은 결코 그런 엽기적인 인간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세느카 아이리스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그녀의 처참한 운명이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다. 바로 프레일리아섬 프레제톤타빙산 지하세계에.
세느카는 정신이 드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안에는 자신밖에 없었다. 다른 물건들도 전혀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빈방이었다.
그녀는 벽의 색상을 보고 다소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째서 벽 색상이 푸른색일까.."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 전율을 느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얼핏 기억이 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당연했다. 이곳은 세이렌들이 살고 있다는 제 5지역구가 틀림없을 것이다.
세느카는 자신이 고위도 지방으로 향하면서 엄청난 추위에 떨었던것을 기억해냈다. 체온이 급격히 저하하여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방 안은 따뜻했다. 짙은 푸른색의 벽색깔과는 대비되었지만 정말 따뜻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창문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문 하나가 덩그라니 놓여있었다. 직접 만져보지 않아도 그것은 잠겨 있을 것이다. 세느카는 그게 당연할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에 다가섰지만 문을 어떻게 여는지 알수가 없었다. 도어 핸들이 있는것도 아니고 지문인식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닫이 문도 아니고 한마디로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세느카가 포기를 하려고 돌아설 때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소리가 너무 리얼해서 마치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것같았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문을 여닫는 소리였다.
세느카는 들어오는 세이렌을 보고 다소 겁먹은 듯 뒤로 물러섰다.
뒷걸음질 치는 그녀를 본 세이렌이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도 한발 뒤로 물러선 후에 말을 걸었다. 그는 꽤나 높은 신분이었는지 인간어를 할줄 알았다.
"세느카 아이리스 맞습니까?"
-
"어.. 어떻게."
세느카는 떨려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세이렌들이 인간어를 할줄 안다는 것은 자신이 납치되면서 안 사실이었지만 새삼 그들에게서 인간어를 듣자 놀란 것이다.
그러자 세이렌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세느카가 맞습니까?"
- "그 그래요"
"당신의 안전을 책임질 세이타르라고 합니다.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 "아"
세느카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원래 인간끼리는 한 번 스쳐 지나가도 그 생긴 모습을 기억하는 법이지만 인간이 다른 종족을 볼때는 그놈이 그놈같은 법이다. 세느카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세이 타르를 보고도 자신을 납치한 범인의 얼굴인지 분간을 못했던 것이다.
세느카는 기억을 더듬어 그의 기억을 복구해내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엄청난 두통이 그녀를 휘감았다. 왼쪽 무릎이 꺽이며 그녀가 자리에 주저앉자 세이타르는 적이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예의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괜찮습니까? 혹시 온도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일부러 이 방의 온도를 영상 20도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
"괘.. 괜찮아요. 최근에 생긴 병이에요. 편두통이죠. 전에는.
잃어버린 기억을.되......!!!"
세느카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때만 그랬다는 말을 하려했다.
하지만 그 말을 다하지 못하고 불현 듯 어떤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생각의 요지는 그랬다.
세이타르를 만난 것은 분명 몇일전 일이었다. 라케프를 만나기 이전 기억을 되새길때만 두통이 왔었는데 몇일전 만난 세이타르의 기억을 되살리려했을때도 두통이 왔다. 그렇다면!! 세느카는 삼단 논법에 의해 결론을 도출하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그를.. 그를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에도 만난적이 있다는 것인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기억속에 그도 포함되어있다는 것인가.. 도대체 그는 내 기억속에서 나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세느카의 머리속에서 수많은 상념들이 오고갔다. 그녀의 표정은 뭔가를 생각하는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세이타르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세느카는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수 없는 기억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세이타르를 바라봤다. 그러자 세이타르가 말했다.
"당신에게 우리의 세상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만날때까진 무척 지루할겁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이타르는 상당히 공손한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세느카는 그의 말에 어떠한 악의도 담겨 있지 않음을 느꼈다. 그의 말대로 이 방안에만 계속 있다면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가지만 물어봐도 되요?"
-
"물어보십시오."
"그분을 만나다니 그 분이 누군가요?"
- "우리 종족을 이끌고 계신 분입니다. 더 이상은 묻지 말아주십시오"
"좋아요. 당신들의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던건 사실이니까 따라가겠어요 신나는군요. 세이렌의 세상을 방문한 첫 번째 인간이라"
-
"두번째입니다.."
세이타르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치 세느카의 기대를 저버리게 만든 것이 기쁜 일인양 웃으면서 말이다. 세느카는 그런 세이타르의 태도에 다소 기분나쁠법도 했지만 정말 두 번째인지 궁금해서 다소곳하게 물었다.
"나 말고도 이곳에 왔던 인간이 있었나요?"
-
"후훗. 언젠가 그 인간하고도 만날 수 있을겁니다."
"저.. 그 인.."
-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가시죠.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신기한것들이 몇가지 있습니다."
세이타르는 천천히 방을 나섰다. 세느카가 방 밖으로 나서자 엄청난 한기가 그녀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방문앞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세느카의 모습을 세이타르가 바라보았다. 그녀는 덜덜 떨고 있던 것이다. 세이타르는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옷이었다. 인간들이 직접 만든것과 비슷하게 생긴 모양의 옷이었다. 아무래도 방한옷같았다. 하지만 너무도 얇은 옷이었다. 세느카가 입고 있던 옷보다도 더 얇은것같았다. 세느카는 세이 타르를 불신의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세이타르는 묵묵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첫 번째 방문자가 만든 옷입니다. 자기 말고도 이곳에 올 인간이 있을줄 미리 예상한건지 여벌의 옷을 만들어두었더군요.. 그걸 입으면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할겁니다."
-
"고마워요."
세느카는 마치 긴 바바리 코트를 걸치듯 얇은 옷으로 몸을 덮었다.
그러자 따뜻한 열기가 몸속으로 전해져오는 것이다. 세느카는 감탄의 말을 잊지 않았다.
"와.. 나보다 먼저 온 그 사람은 굉장히 똑똑했나보군요 원리가 뭐죠?"
-
"글쎄요. 전 전사출신이지 과학자 출신이 아니라서 답변을 못해드리겠군요."
"싸움도 머리가 좋아야하는거 아닌가요 피이.."
세느카가 입술을 불쑥 내밀며 놀렸다. 세이타르는 개의치 않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세느카는 그런 세이타르를 뒤쫓느라 꽤 고생하고 있었다. 세이타르는 2미터 50에 달하는 장신이었는데 반해 세느카는 170을 조금 넘는 인간여자였던 것이다.
숏다리가 롱다리를 쫓아가려니 가랭이가 찢어질법도 했지만 세느카는 의외로 잘 쫓아가고 있었다. 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나마 의지할만한 세이타르를 열심히 따라갔던 것이다.
프레제톤타 빙산의 꼭대기. 렘노스 탑에서 최상층으로 이어진 수직이동방 스티지에서 한 세이렌이 튀어나왔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2미터 80 거구의 세이렌을 보고는 다가갔다.
다른 세이렌들보다 30센치는 더 커보이는 그 세이렌은 얼음으로 된 창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뒷모습은 확실한 형태를 가진 날개덕분에 더욱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어서 와라.. 파리나타. 역시 임무를 잘 수행해 냈더구나."
근엄한 목소리로 파리나타를 칭찬하자 파리나타가 급히 부복하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세이타르의 공이 컸습니다. 분명 공과 사를 구분할줄 아는 뛰어난 인재라 생각됩니다."
- "후후훗. 내가 아직 보는 눈이 있나보군 그래"
거구의 세이렌이 아름다운 날개를 뒤쪽으로 가져가며 몸을 돌렸다. 기솔라벨카 호우겐!! 바로 세이렌들을 이끌고 있는 최고의 수장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파리나타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파리나타.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
"세이타르에게 맡겨 이 세상을 구경시켜주고 있습니다."
"후후훗. 취미도 고상하구나. 첫 번째 방문객에게도 그렇게 하더니.."
-
"첫번째 때는 기솔라벨카님께서 직접.."
"음화하하. 그랬던가. 맞아. 그때는 내가 시켰더랬지. 어쨌든 불멸의 존재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수 없으니. 그것으로서 시간을 벌수 있겠지. 어쨌든 잘 감시하도록 하여라"
-
"알겠습니다."
"흠.. 너도 말했듯이 세이타르는 뛰어난 전사다. 그에겐 그만한 역량도 갖추고 있다. 난 그를 7대사제에 끼워넣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
"그의 실력과 재략으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광전사단계를 거치지 않고 7대사제에 맞는 신분을 내린다는 것은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킬수도 있습니다. 일단 광전사로 신분을 상승시킨후에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흠. 그 생각을 못했군. 허기야. 광전사신분을 얻은 자들이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을것같군. 좋다. 네 의견대로 세이타르의 신분을 광전사로 특진시킨다!!"
-
"알겠습니다."
기솔라벨카의 말은 사실 굉장한 특전이었다. 일반 일개 전사가 광전사라는 지고한 위치에 오를려면 엄청난 실력과 경험을 가져야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중위전사,상위전사,전사장을 거쳐야만 광전사로 진급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었다. 세이타르는 상위전사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으니 광전사로의 진급은 말그대로 특진이었다.
기솔라벨카는 묘한 여운을 흘리는 웃음을 지으며 파리나타를 돌려보내었다. 그리곤 거대한 프레제톤타빙산의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보이는것은 구름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 풍경을 매일같이 내려다 보았다. 마음이 편해지면서 또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불멸의 존재가 그녀를 만나고 싶어할지는 알수 없는 일이다. 그가 그녀를 두려워하는지 아니면 그녀를 이용하려하는지 알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종잡을수 없는 여자를 우리수중에 넣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큰 힘이 될 것이다.. 다른 종족을 위협할 힘이!!!'
기솔라벨카는 먼지층사이를 뚫고 내리쬐는 태양빛을 바라보며 나지 막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최상층 곳곳을 메아리쳐 그에게 돌아왔다. 기괴한 웃음 소리였다.
세이타르는 별 말을 하지 않고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그가 답답해보였는지 아니면 걷는게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고 싶어 그랬는지 세느카는 힘없이 말을 걸었다.
"세이타르!! 우리 잠깐 얘기 좀 해요!!"
세느카의 말에 세이타르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천천히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무슨 얘긴지 하십시오. 들어드리겠습니다."
-
"무슨 말을 그렇게 재미 없게 해요?"
"아직 인간어가 서툴러서 그런것같습니다."
- "으휴.. 제 말 뜻은 그런게 아니라 에구구 됐어요 관둬요"
세느카는 세이타르가 굉장히 무뚝뚝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선뜻 말하지 못했다.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고 자신은 납치된 신분이 아닌가.. 기분 되는 대로 떠들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은 잠시 쉬었다가 가자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
"아. 그랬군요. 너무 제 생각만 했군요 당신이 잘 따라오길래 별로 힘들어 하지 않는줄로만 알고.."
"괜찮아요. 그나저나 우린 어디로 가는거죠?"
-
"흠 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 비밀스러운 곳이나 먼 곳은 갈수 없습니다. 신전이나 박물관같은 곳은 갈수 있습니다."
"신전이요? 세이렌들도 신전이 있나요?"
-
"후훗. 어느 종족이든 의지하고 싶은 존재는 있기 마련아닌가요?"
세느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좋아요 신전으로 가요 그곳에 가면 신기한게 많이 있겠죠"
- "가장 가까운 곳을 선택했군요 사실은 그곳으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다른 종족들에 대해 가장 궁금한 점은 그들도 신을 믿고 따랐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했구요"
"네"
세느카는 세이타르란 자가 전사출신이라고 말해 그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만만히 봐서는 안될 녀석이었다.
세이타르가 다시 걷기 시작하자 세느카도 그를 쫓아 걸었다. 다행히 아까보다 걷는 속도가 많이 줄어있었다.
세느카와 세이타르가 한 거대한 건축물 앞에 섰다. 빙산의 지하세계라 그런지 도로 역시 얼음으로 이뤄져 있었고 그 위에 훌러렌을 이용하여 만든 건물들이 들어서있었는데 지금 그들 앞에 놓인 건물은 훌러렌으로 만든것같지는 않았다.
세느카가 훌러렌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금속과 앞에 놓인 건물의 금속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수 있었다.
"우와 이 건물은. 굉장히 오래전에 만들어진것같군요 믿을수 없을정도로"
-
"맞습니다. 우리의 역사와 더불어 태어난 유서깊은 건축물이죠. 이 신전의 이름은 세이렌어로 큐탕 쿠 매지그 파할렘 입니다. 인간어로는 '불멸의 존재가 잠든 곳' 이란 뜻이죠."
"흠. 신의 이름이 불멸의 존재인가보죠?"
세느카의 질문에 세이타르는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불멸의 존재입니다."
- "이름 한 번 되게 우습다. 신이라면 당연히 불멸 아닌가 후훗"
"신을 모욕하는 발언은 삼가해주십시오.. 다른 세이렌들이 보았다면 당신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어도 변명할수 없는 행동입니다."
세느카는 그의 말에 힘이 담겨있다는것을 알고 다소 긴장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세느카를 지켜보던 세이타르가 말없이 웃었다.
"이 신전을 우린 줄여서 '파할렘'이라고 부릅니다. 잠든 곳이란 뜻입니다. 파할렘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웃어서는 안됩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금기사항이죠. 그것을 지켜줄수 있다면 안도 구경할수 있습니다."
세느카는 세이타르처럼 무뚝뚝한 자와 같이 있으면서 웃을일이 뭐가 있을까 싶어 쉬이 승낙했다. 그리하여 둘은 파할렘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큐탕 쿠 매지그 파할렘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믿지 못할 노릇이지만 세이렌들의 선조들은 그들의 신을 모시기 위해 얼음을 깨고 그것으로 이 신전을 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 얼음과는 약간 다른 변종 얼음이었다.
섭씨 0도에서 어는 물과는 달리 어는 점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계절의 영향을 받는 프레제톤타빙산 안에서도 절대 녹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 할수 있었던 것이다. 여름이 되면 아무리 프레제톤타라해도 태양의 뜨거운 직사광선에 의해 온도가 상승하곤 했다.
다른 계절에는 대륙에서 이어진 듯 보이는 프레일리아섬이었지만 여름에는 얼음이 녹는 해빙현상 때문에 해수면이 높아져 대륙으로 걸어서 이동할 수가 없었다.
세이렌들의 선조들이 얼마나 똑똑했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그것을 미리 예상하고 신전을 건축한 것이었다. 어쨌든 훌러렌의 짙은 푸른색과는 약간 다른 붉은빛이 감도는 투명한 건물이었다.
두 개의 거대한 얼음기둥을 사이에 두고 신전입구가 있었다. 입구의 모양이 특이하게도 가로는 보통 세이렌 한 개체가 통과할 너비인데 비해 세로는 그 몇배는 족히 되어보였다.
고개를 뒤로 젖혀 입구의 꼭대기를 바라보던 세느카는 세이렌들의 건축 양식이 독특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엄청난 빛이 세느카의 시각 반사작용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천천히 눈을 뜬 세느카는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려오는 이 빛이 따스한 태양빛이라는 것에 굉장히 놀랐다.
"어째서 빛이 이 신전 내부를 비추고 있는거죠? 분명 이곳은 지하세계라고 했잖아요?"
-
"흠. 그것은."
세이타르는 말해줘도 되는지에 대해 잠시 고민하다가 마음을 굳혔는지 대답했다.
"우리 종족은 어둡고 음습한 고위도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엄청난 추위속에서 생활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추위를 좋아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도 태양빛을 받으면 정신도 맑아지고 기분도 좋아집니다. 하지만 어쩔수 없이 이런 곳에서 살게 된 우리는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지하세계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지하세계의 음침한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이 지하세계에는 렘노스라는 상상도 못할 높이의 탑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 역시 고대 선조들의 유물이고 프레제톤타의 정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탑의 정상에는 태양빛을 모을수 있는 장치가 설치되어있고 그렇게 해서 모인 태양빛은 탑을 통해 여러곳으로 분산되어 보내집니다. 이 신전도 예외는 아니어서 분산되어 흘러나오는 태양빛을 받아 신전내부를 비추는 것입니다."
-
"우와.. 굉장하군요.."
"이 신전을 눈으로 보아도 알수 있듯이 얼음으로 지어져있습니다.
하지만 태양빛에도 녹지 않게 설계되어있습니다. 선조들의 문명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결코 지금보다 뒤떨어졌다고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세느카는 세이타르가 말하는 모습을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선조들을 기리며 그들의 업적에 감탄하는 고고학자를 보는듯했다.
자신도 유적탐사를 매니아적으로 좋아하는게 사실이어서 세이타르의 설명은 와닿는게 많았다. 이 신전을 구경하는 것 자체도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몰랐다. 다른 종족의 유적을 살펴볼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세느카의 눈이 빛에 서서히 적응하자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고 말았다. 밖에서 보았던 신전은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안으로 들어와보니 정말 엄청나게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는게 아닌가 사실 얼음으로 지어진 벽은 안쪽이 보일법도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얼음의 투영비조절로 인한 굴절률의 변화로 상당히 작아보였던 것이다. 그걸 안으로 들어와서야 눈치챈 세느카는 아름다운 얼음집을 연상케 하는 신전내부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특히 빛이 쏟아져내려와 반짝거리는 얼음조각들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거대한 내부의 안쪽으로 들어가던 세느카는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이 안쪽의 모습을 보면 생긴것과는 다르게 엄청난 미적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걸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
"흠. 그렇게 자신의 기준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죠?"
-
"당신이 볼 때 우리의 모습이 추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관점에선 당신들의 모습이 꼴불견이란 말입니다."
세이타르의 말에 세느카는 하마터면 웃을뻔했다. 생각해보니 정말 맞는 말이었다. 옆에 있는 세이타르가 비록 험악하게 생기고 괴물같은 것은 사실이지만 세이렌족사이에선 미남일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금기사항을 지키기 위해 세느카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며 고통스러워하자 세이타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세느카가 손을 흔들며 진정했다는 표시를 하자 세이타르가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앞에는 일곱 개의 갈림길이 나왔는데 가장 좌우측에 위치한 길은 지금까지 보았던 신전의 디자인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었고 다음 두 개의 길 역시 비슷한 형태였다. 그 다음으로 나있는 두 개의 길은 그래도 잘 다듬어진 길이었다.
가운데 있던 길은 다른 길들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생겨 심혈을 기울여 만든것같았다. 연분홍색을 띄는 그 길은 세느카를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마녀의 유혹같은 느낌이었다. 세느카가 무언가 질문을 하려했는데 세이타르가 앞서 대답했다.
"이 길들은 신을 알현하는 예배당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오랜 과거에는 그 길의 종착지가 서로 달랐지만 지금은 하나의 길로 개조되어있습니다."
-
"네? 그럼 오래전에는 7명의 신을 섬겼단 말인가요?"
"아.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장자리에 있는 두 개의 길은 하급전사나 레서 소서렌이 출입할수 있는 길이었구요,그 다음 두 개의 길은 중,상급전사나 미드 소서렌이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다음 두 개의 길은 전사장이나 광전사,엘더 소서렌이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중앙으로 보이는 저 아름다운 길은 대사제들만이 출입할수 있는 길이었죠. 물론 지금은 개조되어서 하나의 방으로 이어져있습니다."
-
"어째서. 그런거죠?"
세느카의 질문에 세이타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길이 여러갈래인지 아니면 어째서 개조되어 하나의 방으로 연결되게 되었는지,둘중 어떤게 질문인지 헤깔렸던 것이다.
"어째서 7개의 신을 믿는게 아닌데 신분에 따라 다른 길을 가야했죠?"
-
"그 당시엔 직위가 낮은 자들은 신을 직접 만날 자격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어쨌든 직위가 낮은 자들은 그들보다 신분이 높은 자들 즉,옆에 만들어진 길로 들어가는 자들을 카운셀러로 삼은 것입니다. 그들도 상담이 필요하거나 힘이 필요할땐 자신들보다 안쪽에 나있는 길로 들어간 자들에게 자문을 구했죠. 가운데 나있는 길로 들어가는 자들만이 신을 직접 만나서 경배할수 있던 것입니다."
"아. 신의 대리임무를 하는셈이었군요.. 그럼.. 어째서 개조된것인가요?"
-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불멸의 존재란 신에 의해 직접적인 통치를 받던 우리 세이렌족은 한명의 엄청난 인재를 배출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서로 개개인의 힘이 강해 융화하려 하지 않던 고급사제들이 한 명에 의해 힘이 모아질수 있었던것입니다. 그 이후로 불멸의 존재는 오직 그만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그만이 불멸의 존재를 만나 대화할수 있었죠. 그래서 신전은 더 이상 필요가치를 잃게 되었습니다. 다만 누구나 신을 경배할수 있는 예배당은 필요했기에 모든 길을 하나의 종착지로 연결해버린것입니다."
"정말. 신기하군요. 혹시. 아까 만나야한다는 사람이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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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지금 우리 세계를 이끌고 계신분입니다.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지고한 위치에 있는 분입니다."
"한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 아니, 세이렌이군요."
세느카의 말에 세이타르는 별 표정변화 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아무래도 중앙의 길로 가는 것 같았다. 멀리서 보았을때와 마찬가지로 정말 아름다운 통로였다. 빨려들어갈것같은 보석빛이었다.
세느카는 세이렌족의 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감도 품었지만 말도 안되는 기대였다. 세이타르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예배당에서는 금기를 잘 지키셔야합니다. 신앞에서 웃는 것은 아주 불경스런 짓이기 때문입니다. 신의 모습을 보고 절대 당황하거나 웃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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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알겠어요."
세느카는 세이타르가 다소 긴장한 듯 말하자 대충 대답했다. 사실 신의 형상을 딴 석상정도가 있을텐데 뭐 그리 호들갑이냐는 말투였다.
한 20여미터를 걸어가자 거대한 방이 나왔다. 방안으로 한걸음 들어가자 바로 머리위에서 태양빛이 세느카를 비추고 있었다. 너무도 따스한.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따스함이었다.
환하게 수놓는 태양빛에 반사되어 예배당안은 그 어느곳보다 환했다.
예배당 중앙에 거대한 얼음상이 있었다. 세느카는 그것이 큐탕 쿠 매지그, 즉 불멸의 존재 라는 것을 알았다.
천천히 얼음상에 다가가던 세느카는 조각의 모습에 다소 당황하고 있었다. 세이타르가 경고했지만 그것을 그냥 흘려들은 잘못이 컸던 것 같다.
마치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시키듯 한쪽 무릎에 왼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우스웠다. 하지만 꿋꿋히 웃음을 참는 세느카 그래도 자신이 예를 안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세이타르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웃음을 참아야했다.
잠시 그 조각을 바라보던 세느카는 묘한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조각의 크기가 정말이지 엄청나게 컸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얼음상은 아주 가냘퍼보였다.
"불멸의 존재치고는 상당히 몸매가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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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분을 직접 만나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이 얼음상은 그분의 실제 크기를 그대로 본따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당신하고는 많이 다른것같네요.. 마치. 인간처럼 생겼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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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렇지 않을겁니다. 우리들과 당신들의 외형적 차이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날개가 있고 없고 정도?"
세느카는 세이타르의 괴물같은 몸을 훑어보고는 그렇게 단정짓는게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느끼고 있었다.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듣기만 했다.
"불멸의 존재에 대한 신화를 들어보면 이 얼음상에 날개가 왜 없는지에 대해 알수 있습니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 전설의 새 '신수 하르피아'와 싸우던 불멸의 존재는 자신의 날개를 잘라 미끼로 사용하므로써 하르피아를 잠재울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그 날개는 다시 돋아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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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당신들에게도 신화가 존재했군요.."
"당신의 표정은 마치 신화가 조작이라는 표정이군요?"
- "독심술도 하나보군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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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아뇨 그런 표정이 아니에요 정말 신기해서.."
세느카는 자신의 개그에 넘어가지 않고 심각하게 대꾸하는 세이타르에게 미안한 감을 느꼈다. 어쨌든 재미 있는 설정이었다.
만약 저 얼음상이 정말 처음엔 날개가 있었던 세이렌이었다면 그건 세이렌들에게 엄청난 자긍심이 될 것이다. 반대로 신화가 조작이었고 불멸의 존재가 세이렌족 출신이 아니었다면? 후훗. 아마 그들은 자기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게 되겠지.
"그런데.. 너무 말라보이네요 마치 얼음이 녹아서 저렇게 된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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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나도 몰라요. 하지만 얼음이 녹아서 그런 것은 아닐겁니다. 이 신전을 보면 알수 있듯이 말이죠.."
세이타르의 말에 세느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 동조를 표했다.
이제 신전 구경도 다 한것같았다. 그렇다는 생각이 들자 세느카는 얼음상을 더 구경하고 싶어졌다.
만져보고 싶었지만 세이타르가 화를 낼까봐 그냥 주위를 살피던 세느카는 얼음상 뒤편에 이르러 뭔가 이상한 문자를 발견할수 있었다.
세느카가 그 문자를 가르키며 세이타르에게 물었다.
"이 문자 해석할수 있어요? 세이렌어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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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이 문자는 세이렌어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구요."
"네에.."
세느카는 그 문자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 문자의 모양은 'Giga(s) Slender(n)' 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해석이 되지 않는 문자였다. 고고학을 많이 연구해본 그녀로서도 처음보는 문자였다.
그 문자를 바라보던 세느카는 무슨 이상 야릇한 기분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마치 어디선가 한 번 보았던 것같은 그런 느낌.. 기억의 강 하류로 흘러가버려 다시 상류로 이끌어낼수 없는 오래된 기억같은 기분......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던 세느카는 갑자기 한쪽 머리에 엄청난 통증이 오는 것을 느꼈다. 휘청거리는 세느카를 세이타르가 붙잡아 진정시켰다. 세느카는 깊은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왜 그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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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모르겠어요. 요즘들어 계속 이러네요."
"이제 그만 나갑시다. 다른 곳을 더 구경시켜드리고 싶지만 우선 아까 있던 곳으로 가는게 좋겠습니다."
- "그렇게 해요"
세느카는 걸음걸이가 다소 불안정했지만 그래도 혼자힘으로 걸어서 신전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자신이 분명 어디선가 그 문자를 한 번 봤으며 그것은 분명 잃어버린 기억중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거란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둘은 다시 원래 있던 그 방으로 돌아갔다. 세이타르는 아무래도 파리나타로부터 연락이 올것같은 생각이 들어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