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2화 파기
-이런 미친!
갑자기 벌어진 난장판에 마켈그로이언이 이를 갈았다.
머리가 띵했다.
희미했지만 점점 명확해지는 기오르그의 의지는 바로 군주위의 회수였다.
지금 그는 군주의 자리를 되찾아 가겠다는 의지를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군주라 해서 군주의 자리를 장난감 마냥 주었다가 뺏을 수는 없었다.
크리팔이나 크로드이언은 대군주의 명을 수차례나 이행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반작용으로 군주의 자리를 강탈당한 것이고 말이다.
다시금 전언이 들려왔다.
은총이 거두어지며 그 힘이 강대해졌기 때문인지 아까와 달리 의지가 담긴 음성이 명확하게 들려왔다.
-잠시만 군주의 자리를 되찾아 가야겠다. 전쟁 후에 새롭게 재편하리라.
뭔가 필요한 내용만 뱉어내는 음성이었다.
설명도 양해도 없었다. 물론 그런 걸 한다면 기오르그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잠시만 힘을 거두어 가겠단 말을 했다.
그러나 그 잠시간 거두어진 권능은 되돌아 올 때 즘이면 훨씬 약해질 것이다.
힘으로 눌러서 거두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 그 힘의 손실이 큰 법이었다.
-어서!
마켈그로이언은 쩌렁하게 울려오는 음성에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단호한 음성 속에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내 일그러졌던 입가가 살며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회유와 교언의 군주입니다.
-그래. 그러니…….
-회유와 교언을 통해 끌어내는 것이 무엇인지 잊으셨습니까?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지?
-계약.
-……뭐?
계약이란 말에 순간 기오르그의 목소리가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살짝 높아진 음성.
-저와의 계약을 어기신 것은 대군주십니다. 전 힘을 보태어 마족의 왕에 오르는 데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만. 그 과정에 있어 대가는 군주의 자리였습니다. 그것을 회수한다는 것은 계약의 파기를 의미합니다. 이는 군주간의 맹세 역시 포함.
-미쳤구나. 감히 나와의 맹약관계에서 힘겨루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 이런 빌어먹을!
마켈그로이언의 몸 주변에 보랏빛 기운이 일렁거렸다.
-제 권능은 계약이라는 목적을 위한 회유와 교언. 틀어진 계약에서만큼은 제 권능이 우선시 됩니다. 그게 제 권능이니까요.
-이 전투가 끝나면 네놈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렇긴 한데. 지금 왠지 새로운 도박을 해 보고 싶군요. 어찌 되었든, 계약은 이제 깨졌습니다.
-뭐?
순간 그의 몸에서 보랏빛 기운이 크게 터져 나갔다.
파아아아!
콰자자자!
무언가 사슬이 깨어지는 느낌의 소음이 빛과 함께 울려 퍼졌다.
동시에 마켈그로이언이 살짝 휘청거렸다.
하지만, 잠깐일 뿐이었다.
-역시.
마켈그로이언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계약의 파기. 동시에 대군주로부터 나누어 받던 힘의 연결이 끊어지며 마력의 공백이 일부 있었지만, 생각보다 미미했다.
그와의 계약상 과실은 오히려 기오르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법칙이 마켈그로이언에게 유리하게 흘렀던 것이다.
-이거 조금은 미안하군. 힘을 닥닥 긁어모으는 중일 것인데.
마켈그로이언이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이내 자신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충격을 전달 받은 권 속들을 바라보며 마켈그로이언이 명을 내렸다.
-약한 자는 짓밟아서 힘을 취해라.
그의 명령에 마켈그로이언의 수족들이 눈을 빛내며 주변의 아귀 다툼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마켈그로이언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전쟁에서 빠진다. 계약을 어긴 것은 기오르그. 더는 그를 위해 싸울 이유가 없다.
순간 권능이 끊어진 마족들 중 적지 않은 마족들이 그를 향해 충성을 맹세해 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가장 먼저 마켈그로이언의 권속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그때 마켈그로이언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던 다른 상위마족들에게 제의를 건네었다.
-약속을 어긴 것은 저쪽. 어떤가?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순간 상위 마족들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군주와의 계약을 파기한 마족은 권능만이 아니라 본신의 마력까지 손해를 본다.
게다가 그렇게 했을 때 사라지는 마력은 말 그대로 사라진다.
군주에게 돌아가지도 않고 그냥 사라진다.
그만큼의 자신의 마력도 말이다.
힘이 약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도 마켈그로이언은 파기를 종용했다.
그렇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 마족 쿠리오는 새로운 군주로 마켈그로이언님을 모시겠나이다!
기오르그에게 힘을 빼앗기는 것을 버티던 그들은 충성의 파기와 동시에 그 대가로 이루어지는 마켈그로이언과의 계약을 선택했다.
왜냐면 마켈그로이언의 수족들이 이미 군주를 잃은 마족들을 상대로 잔치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회유의 대상이 아닌 모자란 마력을 채워주는 먹잇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켈그로이언과 새롭게 계약한 마족들이 주변의 새로운 먹잇감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럼 이만 미련을 버려야겠지?
마켈그로이언은 속속들이 채워 지는 권능을 느끼며 천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아직 그의 발아래에서는 뒤에서 몰려온 마족과 마물들 그리고 군주를 잃은 마족들이 강림자와 군인들과 드잡이 질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이 시간을 벌어주니 힘을 키우며 물러서기에는 좋은 기회였다.
-이게 또 이렇게 기회가 되는구나.
마켈그로이언이 빠르게 후퇴를 시작했다.
* * *
덜컥!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의 본 브레이커가 멈추어 섰다.
회수한 힘을 바탕으로 을지부루를 밀어붙이던 상황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부루의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그득한 것이 꽤나 분풀이를 하던 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더는 달려들지 못하게 빠르게 마무리를 하고자 힘을 뽑아내던 찰나에 기운이 뭉텅하고 잘려나간 것이다.
-마켈그로이언!
마켈그로이언이 맹약을 깬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
문제는 이 짧은 순간의 빈틈이 다시금 부루에게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콰앙!
-크읍!
본 브레이커가 튕겨 올랐다.
동시에 그것을 쥐고 있던 기오르그의 양 손도 마치 만세라도 부르듯 하늘로 추켜올려졌던 것이다.
이어서 그의 몸이 한쪽으로 훅 꺼졌다.
빠각!
그의 무릎이 안쪽으로 꺾여 들어가 있었다. 부루가 마치 종합격투기 선수처럼 무릎을 옆으로 걷어찬 것이다.
순간 비틀거리는 그의 몸통으로 부루의 대부가 내리 찍혀졌다.
거의 동시에 기오르그의 몸뚱이에서 뼈들이 마치 갑옷처럼 만들어지며 대부를 막아내기 위해 뭉쳐져 나갔다.
연이은 공격은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
그러나 그 순간 다시 한 번 힘의 흐름이 끊어졌다.
덜컥!
그 짧은 순간 휘둘러져온 부루의 대부가 만들어지다가 만 뼈의 갑주사이를 파고들었다.
와그작!
-이 무슨…….
기오르그의 허리춤이 쩍 벌어졌다. 그와 함께 그 위를 덮어가던 뼈들이 마치 힘을 잃은 것처럼 후두두두 떨어져 내렸다.
“갑자기 미친놈처럼 날뛰더니만, 벌써 진이 빠진 거간?”
-왜 갑자기?
부루의 이죽거림에도 기오르그는 대답대신 휘청거리며 뒤로 빠르게 물러섰다.
그러나 부루는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대부를 연달아 휘둘렀다.
위로 두어 번 좌우로 쓸어대자 기오르그가 몸뚱이를 뒤로 누이며 공격을 피해내었다.
그렇지만 부루는 짧은 다리로 바닥을 쓸 듯이 후렸다.
터억!
몸을 뒤로 누였기 때문에 앞으로 빠져있던 기오르그의 발이 부루의 발길질에 채이며 균형을 잃었다.
완전히 나자빠지는 상황이었지만 기오르그의 몸뚱이는 덜컥하고 허공에 멈추었다.
그렇지만 이미 그 몸뚱이를 향 해 좌우로 휘둘러졌던 대부가 다시 위에서 아래로 내리 찍혔다.
콰아작!
이번엔 가슴팍에 커다란 도끼자국과 함께 잠시나마 허공에 멈추었던 몸뚱이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콰콰쾅!
이어서 바닥에 처박히던 기오르그의 목덜미에 몸통에 박혀들었던 대부가 타고 오르더니 마치 갈퀴처럼 대부의 끝이 걸려왔다.
터억!
끌어당기는 것보다는 뒤로 물러서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 모양이었다.
대부의 아랫부분으로 목덜미를 걸더니 부루가 대부 자루를 당기며 나아갔다.
콰작!
부루의 무릎 팍이 기오르그의 면상에 박혀 들었다.
동시에 부루의 손이 뒤로 튕겨 나가려던 기오르그의 머리끄덩이를 한 움큼 잡아 당겨왔다.
다시 한 번 무릎으로 찍었다.
콰자악!
그게 두 번 세 번 네 번이 되었다. 다섯 번은 없었다.
와두둑!
머리카락이 통으로 머리거죽과 함께 뜯겨지며 부루의 무릎에 찍인 면상이 뒤로 퉁겨져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콰콰콰콰콰!
기오르그의 몸뚱이가 바닥을 갈며 미끄러졌다.
그런데 그의 몸뚱이가 빠르게 검은 대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치 숨어들기라도 하겠다는 듯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창이 그의 옆구리를 찍었다.
콰투투툭!
-크아아아아악!
기오르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쯧. 끝을 봐야지.”
고진천이 혀를 차며 기오르그를 꼬치에 꿴 고기산적처럼 들어 올렸다가 내던졌다.
그의 몸뚱이라 날아가는 방향으로 그가 부리는 사자들이 일렁이며 몸을 일으켰다.
마치 주인의 몸을 받아 들기라도 하겠다는 듯.
하지만, 그것에도 선객은 있었다.
서걱! 서거걱!
빛과 함께 사자들의 몸뚱이가 잘려나갔다. 그 뿐 아니라 반대편에선 모조리 태우겠다는 듯 뇌전이 일렁이기까지 했다.
계웅삼과 제라르가 좌우로 파고들며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재가 되어 사라지는 곳에 기오르그의 몸뚱이가 떨어졌다.
-크!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그 와중에도 기오르그는 몸을 바닥에 녹이듯 빠져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이미 지척에 달려온 부루가 그의 사타구니 부분을 그대로 올려 찼다.
와작!
녹아들던 그의 몸뚱이가 하체부터 하늘로 다시 뽑혀 올라갔다.
“가긴 어딜 가는 거이야!”
마치 물구나무 선 것처럼 뽑혀진 기오르그의 등판을 향해 부루가 양손에 쥔 대부를 횡으로 휘둘렀다.
부아아앙!
마치 숙련된 나무꾼이 휘두르는 도끼질처럼 깔끔하게 휘둘러졌다.
그 일격에 기오르그가 만들어낸 사자의 대지마저 가르며 나아가는 모양이었다.
대부가 지나치는 궤적을 따라 검은 공간이 갈라지며 아까까지 있던 세상의 빛이 찰나지만 비추어 들었다.
그렇게 나아간 대부가 기오르그의 허리를 찍었다.
투훅!
기오르그의 허리를 찍었나 싶더니 부루의 몸뚱이가 마치 대부를 휘두른 힘을 이기지 못한 것 마냥 빙그르 돌았다.
마치 헛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두어 바퀴를 혼자 돈 부루가 자세를 다시 잡자 기오르그가 바닥에 다시 떨어져 내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캬아아아아!
기오르그가 본능적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부릅뜬 두 눈으로 자신의 하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깔끔하디?”
부루가 균형을 잡고 서서 대부를 어깨위에 턱하니 올렸다.
그리고는 한 손을 때어서 손바닥에 침을 턱 하니 뱉었다.
“이! 이제 시작이야. 아까보니까네 까고 잘라도 계속 몸 땡이를 붙이던데, 어디까지 하나 궁금했거든.”
-크어어억!
기오르그의 입에서 비명이 이어졌다.
그 고통스러운 외침과 함께 잘려진 상체와 하체 사이로 허연 뼈들이 서로를 향해 뻗어갔다.
부루의 말마따나 다시 몸뚱이를 붙이려는 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