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화 고진천의 양보
우지끈!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오르그의 턱이 돌아갔다. 정신적인 타격이나 육체적인 타격이 엄청난 건 아니었다.
그냥 아픈 정도.
거기에 복부에 발길질이 이어지자 본능이 먼저 움직인 것인지 몸을 뒤로 이동시켰다.
그 순간이다.
콰작!
이번에는 고개가 빠르게 숙여졌다. 뒤통수에서 꽤 큰 소리가 울려왔다.
역시나 아팠다.
얼얼한 정도.
순간 기오르그가 마력을 응축시켜서 터트렸다.
무언가 공격을 가하기 위해 터트렸다기보단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비유하자면 마치 신경질을 내듯.
콰콰콰!
그렇게 마력을 터트리고 천천히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앞에 고진천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표정인지 딱히 구별이 안 되는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이거 참. 더러운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기오르그가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아팠다.
그게 끝이었다.
여태 살아오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마룡의 군주와 일전을 벌일 때에도 고통은 있었다. 물론 승리는 자신의 차지.
승리라는 과실이 있기에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기분이 나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전투를 벌이는 중간중간에는 그런 고통쯤은 버티고 넘어가야 하니까. 그게 맞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아팠다.
고통스러울 정도도 아니다.
그런데 기분은 더 더럽다.
공격에서 목숨을 빼앗겠다는 의지라던지 파괴력을 느꼈다면 이런 기분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느꼈다.
그냥 때린 것이다.
맞으라 하고. 승부를 위해 때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한 대 맞아봐라. 이런 느낌?
-장난을 친 댓가는 꼭 치러 주지.
“버르장머리 없는 놈 두어 번 쥐어박았더니. 정신 차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장난이라. 쯧.”
타이르듯 던진 말에 기오르그의 이마에 핏줄이 불툭 튀어나왔다.
화가 날 대로 나 있는 것이었다.
“네놈은 일단 좀 맞는 게 좋겠군. 처음부터 하는 짓이 영 맘에 안 들었어. 예전에 신성제국 황제란 놈도 모가지가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뭐가 뭔지 똥오줌을 못 가리고 있었지, 아마?”
-약속하지. 이곳을 무너트리고, 네놈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직접 찾아가 모두가 네놈을 원망하며 울부짖게 만들어 주마.
“못 지킬 약속은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오르그는 다시 한번 마력을 끌어모았다.
마력이 몰려오며 공기가 바뀌었다.
눅눅하고 끈적한 느낌.
그의 주변에 마력의 밀도가 높아지며 만들어진 현상이었다.
그와 동시에 고진천에게서도 무형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숨을 들이쉬면 기도에 후춧가루라도 뿌려버린 것처럼 따끔따끔했다.
피부도 마찬가지.
마치 가시 밤송이를 굴리는 느 낌이 들었다.
거기에 기오르그가 품은 마력 때문에 그의 주변이 눅눅하고 끈적하다면, 고진천의 주변에는 마치 늪과 같이 무겁고 비릿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살기라…….
순간 기오르그의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살기가 유형화된다든가 하는 것은 하위 마족들도 가끔 기운을 풍기다 보면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농도 짙은 살기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기오르그로써도 사실 처음 보았다.
아니 살기라는 것이 이 정도까지 뭉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 기오르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져왔다.
-이런 멍청한!
크리팔의 비명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팔이 잘려 나간 크리팔이 비틀거리며 쫓기듯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군주라는 것들이 연이어 망신을 당한 것이다. 한 놈은 생식기가 터져 끌려온 데 이어 팔까지 잘려서 온 것이다.
그나마 살아온 게 다행이었다.
만약 미련하게 싸우고 버티다가 죽었다면 그들의 권능이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힘 일부를 빼앗기는 결과를 맞이했을 것이다.
-죄, 죄송하옵니다.
날아온 크리팔의 사죄에 기오르그는 그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네놈들은 기회를 잃었다. 거기에 모자라 자격도 잃었다. 그게 네놈들에게 군주위를 회수하는 이유니라.
그와 함께 기오르그가 손을 뻗자 크로드이언과 크리팔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 그럴 수는!
-등과의 법칙. 난 기회를 주었고 네놈들은 그것을 잃었다.
순간 크리팔과 뒤쪽에 있던 크로드이언의 몸에서 검보랏빛 기운이 마치 구슬처럼 변해 기오르그에게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둘은 마치 탈진이라도 한 듯 풀썩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대군주로써 군주의 권능을 회수해 버린 것이다.
물론 마음대로 주었다 뺏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들 사이에는 충분한 인과가 벌어졌기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들의 힘을 회수했다 해서 기오르그가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충성서약을 맺음으로써 그들의 힘은 기오르그의 힘에 포함 되었으니까.
대신 주변의 마족들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잘 보인다면 새로운 군주의 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싸워서 증명하라.
기오르그의 말에 마족들이 사기가 충만한 외침을 터트렸다.
그 함성을 들으며 기오르그가 고진천을 바라보았다.
-이제 네놈에게 주어진 시간은 없느니라.
기오르그의 온몸에 뼈로 만들어진 갑주들이 하나둘씩 솟아나며 감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모습과 달랐다.
본격적으로 싸우기 위한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한걸음 나섰다.
“기말 됴티 않네? 싸워서 증명하는 거 말이디.”
을지부루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얼마나 많은 마족을 잡았는지 아직 흡수되지 않은 기운들이 그의 몸 주변에 맴돌고 있었다.
계속해서 순서를 기다리듯 빨려 들어가며 말이다.
“응?”
“제가 마무리 하갔습네다.”
을지부루가 모습을 드러내자, 고진천이 갈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재미를 보려 했는데 그것을 빼앗으러 온 것에 불만도 좀 있었다.
“제가 시작한 싸움입네다. 지켜보는 이들 역시 제가 선동했디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기오르그의 마기에 날아갔던 군인들과 소환자, 그리고 강림자들이 다시금 오뚜기처럼 일어서서 모여들어 있었다.
“책임은 져야디 않갔습네까?”
“쯧.”
부루의 말에 진천이 혀를 찼다.
“하고 싶은 게 있었거늘.”
뭔가 중얼거리는 진천의 모습에 부루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진천은 미련 없이 등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도주로 차단하고 지켜본다. 덤비는 놈들은 따로 잡지 말고 죽여라. 잡아봐야 밥만 축낼 놈들이니.”
그렇게 한마디 툭 던지고 뒤돌아 가자, 분노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딜 가느냐!
기오르그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진천은 슬쩍 뒤돌아보며 주먹 감자를 먹이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향해 기오르그가 날린 뼈의 창이 날아들었다.
콰자작!
날아들던 뼈의 창이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대부를 휘둘러 뼈의 창을 박살을 내 버린 부루가 대부를 겨누며 말을 이었다.
“주접떨디 말라. 증명? 기거부터 하라. 기럼 보내줄 터이니까네. 그거 좋아하디 않네? 저기 불알 터진 놈이나 팔 잘린 놈 보낸 것처럼 말이디.”
분노한 기오르그가 부루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기오르그가 날아들자 마치 전투기가 지나가며 만들어진다는 소닉붐과 같은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대에 흩어져 있는 시체들이 터져나갔다.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터져나간 시체들에서 뼈들이 솟구쳐 올라 마치 자석에 달라붙는 쇳조각처럼 기오르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물론 정말 자석처럼 기오르그의 몸뚱이에 날아가 붙지는 않았다.
대신 날아오는 뼈들이 마치 이어 붙더니 수많은 창처럼 변해 을지부루를 향해 쏟아졌다.
부루는 그런 기오르그를 향해 대부를 움켜쥐고 마주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수많은 적병을 향해 홀로 달려 나가는 것처럼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다.
콰콰콰콰콰!
하지만 부루는 부루다.
그는 쏟아지는 뼈들의 창과 화살들을 연이어 부수며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나아갔다.
기오르그가 그렇게 눈앞으로 다가온 부루를 보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날아오던 뼈들이 방향을 바꾸어 그의 손아귀에 모여들었다.
촤라라락!
뼈와 뼈가 이어 붙으며 이내 십수 미터의 채찍처럼 능청이기 시작했다.
화르륵!
그렇게 만들어진 뼈의 채찍 위로 마기로 만들어낸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촤라라락!
기오르그가 그렇게 만들어낸 채찍을 뿌리자 거친 소리와 함께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부루를 향해 날아갔다.
빠우웅!
내리쳐진 채찍이 부루를 향해 두들겨졌다. 그 채찍은 바닥에 마치 뱀과 같은 패임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부루는 마치 단체줄넘기 하는 것처럼 펄쩍 뛰어 피해내고는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집어 날렸다.
쾌쾌쾌!
마치 원반처럼 맹렬하게 돌아가며 날아오는 손도끼를 기오르그는 귀찮다는 듯 다른 한 손으로 퉁겨내며 다시 채찍을 든 손목을 틀었다.
그러자 채찍이 다시 사냥하기 위해 고개를 틀어 올린 뱀처럼 퉁겨 오르더니 부루의 주변으로 휘감아오기 시작했다.
“다 큰 놈이 줄 잡고 노는 거이간?”
하지만 그 역시 부루는 채찍 사이로 몸을 뒤틀어 빼내며 기어이 한마디 해냈다.
-설마?
하지만 기오르그는 이내 퉁겨 올렸던 채찍에 마력을 담아 터트렸다.
콰콰콰콰콰쾅!
동시에 채찍이 비산하며 수많은 뼛조각을 만들어내었다.
그것들은 채찍 사이로 몸을 빼내 오던 부루를 덮쳐 버렸다.
투퍼퍼퍼퍽!
뼛조각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부루를 두들겼다.
갑주가 뜯겨나가고 살이 패였다.
살이 찢어지고 그 사이로 피가 튀었다.
심지어 뼈가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부루는 비명 대신 함성을 내질렀다.
“크아아아!”
쩌렁쩌렁한 울림과 함께 보랏빛 기운이 그의 몸에서 외부로 발산하며, 날아들던 뼛조각들을 일제히 도로 튕겨 내었다.
동시에 그의 몸뚱이에서 뿌려진 마기가 거대한 대부의 형상을 만들더니 기오르그를 향해 날려 버렸다.
-이젠 제법 권능을 쓸 줄 아는구나!
기오르그는 손잡이만 남은 뼈 채찍을 쥔 손 반대편으로 주먹을 쥐어 내밀었다.
동시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시신들이 몰려와 그의 주먹에 뭉쳐 지기 시작했다.
촤촤촤촥!
시체들은 이내 뭉치고 뭉쳐 시뻘겋고 보랏빛이 감도는 피를 뚝뚝 흘리는 방패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곳으로 부루의 권능이 날아와 꽂혔다.
퍼퍼펑!
순간 그의 손에 만들어졌던 시체의 방패가 폭발했다.
-제법이구나?
기오르그는 저릿한 충격에 한쪽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사자의 권능으로 만들어낸 방패를 날려 버리고도 충격이 손아귀에 남게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파괴력 하나만큼은 인정을 해 주지.
“닥치라우. 고딴 인정은 별로 기분 좋디 않으니까네.”
그와 동시에 지근거리까지 달려온 부루가 대부를 휘둘렀다.
콰콰콱!
자루만 남았던 채찍은 어느새 새로이 검의 형태를 만들어서 그의 대부를 막아내었다.
뼛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쾅! 쾅! 쾅!
연이은 부루의 공격에 뼈로 만든 검에서 연신 뼛조각이 튀었다.
기오르느는 방패를 만들어 들었던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육편과 뼛조각이 마치 넝쿨처럼 바닥을 쓸며 다가와 부루의 발목을 붙잡았다.
-허나 그뿐. 단순하기만 하구나.
기오르그가 허연 이를 드러내며 발목을 잡힌 부루를 향해 뼈의 검을 내리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