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8화 짧은 해후
-역시 마음에 안 드는 군.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함께 무너진 포위망 주변에 남아있던 병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치열하던 전장이 덩그러니 비워졌다.
-그래도 뭐 해후는 시켜주지.
말은 그리했지만, 이쪽도 정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기세라고나 할까.
그런 부분에서도 밀리는 모습이 있었으니까.
-대군주시어. 어, 어찌하여…….
-조금의 시간을 더 주시면 반드시…….
파괴의 군주 크로드이언과 공포의 군주 크리팔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진땀을 흘리며 항변 아닌 항변을 해대었다.
그런 그들의 뒤에 마켈그로이언이 뒤늦게 날아와 시립했다.
-정비가 좀 필요하겠어.
그의 말에 최상급 마족들이 그들의 뒤에 시립했고, 연이어 상급 마족들도 도열했다.
-흠.
그들을 본 기오르그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때 마켈그로이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잠시 병력을 물리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옵니다. 저것들의 시간이 길지는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정확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별의 찌꺼기라 불리는 기운들이 발현하는 것은 보통 이삼일이 전부였다.
물론 이번 경우에는 다른 세상까지 이어지기는 했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 두 세계가 이어진 촉매 역할을 한 것이 처음 발현된 별의 잔재였기 때문이다.
-피하라? 내가?
-결코 그런 의미는 아니옵니다. 다만 두 세상이 이어진 만큼 변수가 생겼으니 그에 맞게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 되어 드린 말씀일 뿐입니다.
기오르그의 얼굴 위로 냉랭함이 흐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은은하게 노기마져 비추어졌다.
‘실수로군.’
노기를 띄워가는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의 표정에 마켈그로이언이 고개를 숙이며 자책했다.
자신의 판단으로는 이게 맞았다.
잠깐의 경험으로 판단하기에는 상대방의 힘이 지나치게 강했다.
물론 기오르그를 못 믿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지금 이곳의 군주 셋이 반기를 든다 해도 그를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니까.
대군주란 그런 존재다.
만약 저기 있는 을지부루만 아니었으면 마계의 왕이 되었을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병력의 소모가 얼마나 더 될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거기까지.
-용서해 주셔서 감사드리옵니다.
기오르그는 가타부타 없이 한마디만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마켈그로이언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여기까지가 자신의 선임을 알 수 있었다.
넓은 평원에 난전을 벌이고 있던 천유화와 이젠 백 여명 남짓 남은 병력은 한껏 고양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구덩이에 서 있던 을지부루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왔다.
그런 그를 향해 대무덕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갔다.
그리고는 양 팔을 벌려 그를 안았다.
꽈악!
중앙에서 만난 두 사람이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말도 없었다.
그저 강하게 안고 있을 뿐.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잠시 떨어진 무덕이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늦지 않아 다행이구나.”
“기러게 말입네다.”
부루의 웃음섞인 말에 무덕은 즐거움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모습 그대로구나.”
“기러는 호위장께선 제법 늙으셨습네다.”
“그런가? 그렇겠지. 꽤 시간이 지나고 많은 일들도 있었으니까.”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발걸음이 빠르게 다가왔다.
이내 또다시 강렬하게 안았다.
누가 봐도 쌍둥이.
을지우루와 부루가 다시금 부둥켜 안고 마치 어화둥둥 하듯 좌우로 뒤뚱였다.
그렇게 얼싸안았던 그들이 떨어지며 입을 열었다.
“모자란 새끼래. 여기서 보는구만!”
“다른 놈은 몰라도 네놈이 모자라다 하면 기분이 더럽디!”
우루의 말에 부루가 화답했다.
그리고 이어 부루가 우루를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젠 얼굴 보고 햇갈리디는 않겠다야. 폭싹 늙었으니까네.”
“닥치라! 내래 동안이야!”
그때 누군가가 피식하니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산 사람보다 얼굴이 왜 더 좋아?”
“구라쟁이 주둥이 닥치라.”
계웅삼이 그를 바라보며 웃음짓고 있자, 부루가 타박하듯 말을 뱉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때 우루와 부루의 어깨에 손이 얹어졌다.
“그러게 인제 보니 구분이 더 쉬워졌군.”
“길티요?”
부루가 연휘가람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런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준 휘가람이 천천히 몸을 옆으로 옮겼다.
“아바이.”
그곳에 알아보지 못할 만큼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
“수호간?”
“아바이!”
누가봐도 자신의 핏줄이라 느낄 수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는 외형에 부루는 달려오는 을지수호를 얼싸안았다.
“아바디! 아바디! 어억!”
몸뚱이는 다 컸지만, 마치 지금 이 순간은 어린시절로 돌아간 듯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우는 두 부자들에게로 터걱 터걱하는 울려왔다.
터걱, 터걱, 터걱.
말굽 소리와 함께 고진천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이내 그 앞에서 멈춘 그는 말 위에서 천천히 내려섰다.
터억.
이내 그의 걸음은 천유화와 아직까지 살아남은 이들을 향했다. 그들 앞으로 다가가자 다들 군례를 올렸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라 반갑군.”
“충!”
천유화의 호령에 모두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자 진천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뒤로 몸을 돌렸다.
진천을 향해 서 있는 사내.
부루.
“역시나 좋아.”
그를 본 진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둘 사이가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둘의 걸음이 멈추었을 때 부루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래 여한 없습네다.”
진천이 한쪽 무릎을 꿇은 부루의 양 어깨를 잡아 끌어올렸다.
마치 부축하듯 잡아올린 그는 부루를 내려다 보며 양 볼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그렇게 부루를 내려다 보던 진천이 천천히 자신의 이마를 부루에게 가져다 대었다.
두 사람의 이마가 맞대어졌다.
“좋군.”
부루는 비로소 진천의 입가가 끌어올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직하지만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저도 좋습네다.”
그게 끝이었다.
맞대던 이마를 뗀 진천이 천천히 몸을 뒤로 돌리며 다시 한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다시 이곳에서 만난 이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는 않다만……. 하난 알겠군.”
그의 시선이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를 향해 날아가 꽂혔다.
다시금 날아온 시선에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 역시 노기 띤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네놈은 무엇하는 놈인지 궁금하구나.
기오르그의 음성이 낮게 울려퍼졌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모두에게 똑똑하게 각인이 되어갔다.
숨막힐 듯 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고진천의 입이 열렸다.
“지랄.”
-…….
“곧 죽을 놈이 궁금해 하기는.”
순간 그쪽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기오르그의 얼굴은 보기좋게 구겨져 버렸다.
동시에 고진천을 중심으로 병력이 좌우로 포진하기 시작했다.
진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을지부루와 을지우루가 섰다.
그리고는 또 그 양옆에 대무덕과 연휘가람이 나란히 섰다.
그들의 머리 위로 리셀이 천천히 떠올랐고, 좀 떨어진 한쪽에선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것 같이 몸을 기울인 채로 계웅삼과 검수들이 살짝 튀어나와 자리 잡았다.
반대편으로는 부여기율을 비롯한 삼인방들이 기마들과 함께 반대편 날개를 잡고 섰다.
그리고 그 뒤로 살아남은 군 병력들이 아직도 몰려들고 있었다.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전투에 반드시 조금이라도 거들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절대로 이 전투에서 구경꾼으로 남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들에게 감돌고 있었다.
그때 고진천이 강쇠의 등에 탄 채 앞으로 나왔다.
“언제나 그렇듯.”
진천이 말을 뱉으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길거다.”
그의 말에 다달 당연하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베어물었다.
“질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말을 하며 진천이 을지부루와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렇게 다 모였는데 말이지.”
그의 말에 모두가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대무덕, 연휘가람, 을지부루, 을지우루, 계웅삼, 부여기율, 삼두표, 몽류화…….
처음부터 함께하던 이들.
그리고 사는 세계는 달랐지만, 이제는 가우리의 이름 아래로 뭉친 이들.
리셀, 하일론, 트렌든, 아빌런…….
모두가 같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패배란 단어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던 그들이었다.
비록 쫓기듯 간 세상에서였지만,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간 그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진천을 향했다.
그들은 이 사람 아래에서 패배란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스르릉.
진천의 환두대도가 뽑혀 나왔다.
그가 정면을 향해 겨누며 입을 열었다.
“잔치를 벌이자꾸나.”
함성과 함께 모든 이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두두두! 두두두!
-더는 꼴사나운 모습. 보지 않겠다. 죽이지 못하면 죽어라.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의 명령에 마족들이 일제히 함성과 함께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기오르그가 일갈을 토해내었다.
-우리는 포식자다!
크허어엉!
살아남은 마족과 마물들이 일제히 포효를 터트리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희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알게 해주마.
기오르그가 이변은 없다는 듯 오연히 서서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포식자라 선언하듯 말이다.
고빈은 정신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먼저 달리기 시작한 을지부루와 그 일행들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기분도 멍했다.
마치 이게 현실인가 꿈인가 하는 감정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여기까진가?’라는 생각과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생각에 악에 받혀 있었다.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그를 지키기 위해 한명 두명씩 빛으로 화할 때 마다…… 자괴감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의 구원자인 것처럼 어깨를 으쓱 할 때도 있었지만, 그들의 희생을 보며 현실이 가슴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게 현실이구나.
그러면서도 을지부루라면 무언가 해 주겠지 하는 생각도 마음 한 켠에 있었다.
그라면…….
그런데 지금은 뭔가 기분이 달랐다.
자신이 그렇게 의지하고 우러러 보던 을지부루가…….
전투 할 때마다 모두를 책임지듯 나서던 그가 지금은 흥분된 얼굴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생기가 있었다.
마치 이 순간 그가 존재하고 있음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마음을 그 역시 공유하고 있었다.
존재한다는 것.
전장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데, 지금 그 어떤 때보다도 살아 있음을 강렬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약간의 아쉬움.
저들이 나타나면서 왜인지 자신이 소외된 것 같은 느낌에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때 달려나가던 부루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빈은 몸을 움찔거렸다.
왠지 마음을 들킨 것처럼 창피했다. 그때 부루가 들뜬 얼굴로 입을 열었다.
“뒤떨어지지 말라.”
“예? 예!”
“이거이 우리들 싸움이니까네. 기억하라.”
그 말에 빈은 자기도 모르게 크게 답했다.
“예!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