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6화 뒤처지면 죽는다.
축 늘어진 오기원의 몸통을 보며 몇몇은 허탈한 모습을 보였다.
“뭐가 이리 간단해…….”
그의 최후가 너무 쉬웠다는 것이 영 허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누구도 그의 죽음에 티클만큼의 동정도 가지지 않았다.
세인과 그 일행들은 오기원의 최후를 볼 수는 없었다.
“영감님?”
“허허허.”
리셀이 다가와 그들의 시선을 가렸기 때문이었다.
“그다지 좋은 광경은 아니지 않은가.”
“그건 그렇네요.”
리셀의 말에 세인이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런데 어떻게 오신 거예요?”
“글쎄. 나도 그건 모르겠네만, 이리 보니 좋구먼.”
“우리도요!”
리셀의 말에 제이와 레이니가 엉망인 얼굴로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을 함박 머금었다.
“이런, 이런. 다들 상태가 영 아니구먼.”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리셀이 한 손을 들어 올리자 빛무리가 그녀들의 몸을 감쌌다.
그러자 그녀들의 상처가 말끔하게 사라져갔다.
이어서 다시 한번 손을 휘젓자 말라붙어가는 핏물과 피딱지들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와…….”
리셀이 행한 이적에 다들 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강렬한 시선이 그를 따갑게 두드렸다.
“응?”
리셀이 섬뜩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팔에 하얀 띠를 두른 군인이 그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인가?”
“간달프, 아니 영감님 이쪽도 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 그와 비슷한 눈빛을 하는 이들이 잔뜩 있었다.
그들의 눈은 한 가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우리도 좀!’
부상자 한가득.
“하아.”
리셀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예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자신의 마법이 너무 회복마법으로 편중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방에 리셀이 뿌린 빛이 가득 메워졌다.
“저 양반 모시고 종교 하나 만들면, 세상 모든 사이비는 밥그릇 놓게 생겼네?”
“그러게요.”
리셀이 펼친 광범위 회복마법 덕에 자잘한 상처를 입고 있던 서준모 경무관과 최후배 경정도 몸을 털고 일어설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들은 리셀을 보며 반가운 얼굴로 달려갔다.
“아. 자네들은?”
“예, 뭐 종종 기억을 지워주셨잖습니까.”
그들의 말에 리셀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이게 다 뭡니까? 또 이전처럼 오신 겁니까?”
“솔직히 난 이게 생생한 꿈처럼 느껴진다네.”
그의 말에 서 경무관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꿈이 아닙니다.”
그들의 시선에 수없이 파괴된 전차와 적아 할 것 없이 쓰러져 있는 시신들이 펼쳐졌다.
“허나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라서 말일세.”
“이해 안 되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만 부탁드립니다.”
“뭔가?”
“꼭 이겨 주십쇼.”
서 경무관의 부탁에 리셀은 미소를 띤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 부탁은 내게 할 게 아니지 않은가?”
그의 시선에 손에 묻은 피를 오기원의 옷자락에 벅벅 닦고 있는 고진천의 모습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뭐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우리 열제께서는 덤비는 적을 관대하게 대해주신 적이 없으니까.”
“적들은 엄청난 놈들입니다. 현대 병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놈들입니다.”
“그런가? 그런데 내가 왜 이걸 꿈인 듯 하느냐면 그 속에서는 사람의 그릇 크기만큼의 힘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라네.”
“예?”
리셀의 꿈 타령에 서 경무관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릇 하나는 고금을 통틀어 우리 열제님보다 더한 이를 못 보았단 말이지.”
“아…….”
이제야 뭔 뜻인지 얼핏 알 거 같았던 그들은 조심스럽게 반문하듯 입을 열었다.
“그럼?”
“자네는 상상이 가는가?”
“어떤 것 말씀이신지?”
“폐하께서 지는 것 말이네.”
그 말에 둘은 동시에 진천을 바라보았다.
십 년이 넘게 흐른 뒤에 맞이한 그였지만, 여전히 무뚝뚝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지금도 쓰러진 또 다른 마족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환두대도를 닦고 있었다.
그의 손 아래에 옷자락 채로 끌어 올려져 덜렁이는 마족의 시체를 보니 공포영화라기보단 무슨 패러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니 그가 패하는 모습은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그러게요. 상상이 안 되네요.”
“믿게.”
리셀의 미소는 한결같았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 믿으며 살아왔다네. 최소한. 전장에서만큼은 저분은 우리에게 신이니까.”
“예.”
절로 대답이 나왔다.
리셀의 말에 다들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따라오지 마라.”
말에 오르는 고진천의 말에 세인과 판도라 멤버들은 멈칫했다.
“걸리적거린다.”
“히잉!”
“징징거리지 마라.”
제이가 몸을 비틀며 반항 어린 몸짓을 보였지만, 진천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래.”
“금방 오실 거죠?”
세인의 질문에 진천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빨리 오셔야 해요.”
송가은 작가 역시 진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들의 말에 진천은 슬쩍 앞을 바라보았다.
시체들로 쌓은 탑 위에 서 있는 존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오래 걸리진 않겠군.”
그를 주시하며 진천이 답했다.
진천의 말에 그녀들은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 들어도 든든한 목소리다.
진천이 그녀들을 뒤로하고 다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곁으로 기동대원들의 바이크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들 뿐이 아니었다.
몰려든 군인들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 생소함에 진천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기동대원 하나가 얼결에 입을 열었다.
“저, 여, 열심히 투표하고 있습니다!”
“음?”
당연히 뜬금없는 소리다.
하지만, 뒤의 군인 중 일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은 십 년 전의 일을 기억하고 그때 남긴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었다.
당시 전신 카페의 대문에 맴돌던 문구는 투표할 때만 되면 너튜브등을 통해 다시금 회자 되었었으니까.
-전쟁은 누군가 한 명이 하는 게 아니다. 하나하나의 병사가 모여 군세를 이루는 것에서 시작한다.
현실 또한 전쟁이다. 창칼을 휘둘러야 전쟁이 아니다. 이 세상만의 전쟁이 있음을 알자.
우리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우리의 무기는 바로 숫자 하나로 기억될 투표다.
물론 진천이 직접 투표하라 하지는 않았지만, 남은 이들은 그들이 세상과 싸울 무기로 삼은 게 그것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진천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처음부터 안 하면 모를까, 낙오하면 죽는다.”
마치 그들의 의지를 시험 삼는 듯한 진천의 말에 다들 외쳤다.
“절대 낙오하지 않습니다!”
“중간에 튀어도 죽는다.”
“튀지 않습니다!”
군인들과 소환자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신기하게도 진천의 말은 뒤에까지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천은 한쪽으로 시선을 보내었다.
진천의 시선이 닿자 그쪽에 있던 가우리의 병사들이 군례를 올리더니 빙 돌아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군인들의 꽁무니 쪽이다.
“죽어도 원망하지 마라.”
스르릉!
병사들이 일제히 환두대도를 뽑아 들었다.
그 모습에 다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도, 독전대 그런 건가?”
“모, 몰라.”
단순하게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하는 소리인 줄 알았던 군인들의 얼굴은 어느새 창백해졌다.
“가자.”
그들을 뒤로하고 진천이 강쇠와 함께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쪽에서 살기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빨리 안 뛰나! 우리 보다 쳐지면 묻어버리고 간다!”
“갈라지다 만 궁둥이를 완전히 두 쪽 내주지!”
“싸우다 죽을래 튀다 뒤질래!”
병사들의 험악한 외침에 군인들은 순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리는 이들 중에는 서 경무관과 최 경정도 있었다.
“씨, 씨바 진짜일까요?”
“넌 저 양반이 농담하는 거 봤냐?”
서 경무관의 말에 최 경정이 맹렬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씨바, 이건 실화야!”
서 경무관이 질린 얼굴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인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표정은 전사의 것으로 바뀌었다.
“잡아조지는 거야!”
“한 놈당 모가지 두 개씩 가져오면 잠깐 쉬게는 해 주마!”
“달려!”
“으하하하!”
마치 양치기 개처럼 군인들을 몰아가는 가우리군의 병사들이 하는 말들이 하나같이 든든하게 들려왔다.
긴장은 어느새 용기로 바뀌었다.
그들과 함께하면 이길 수 있다는 희망으로 변했다.
그리고 다들 알았다.
지금이 아니면 반전의 기회는 없다는 것을.
하늘이 내린 기회라는 것을 말이다.
“우아아아아!”
누군가 시작한 외침이 전염되듯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와아아아!
영화에서나 볼 법한 외침이 천지를 울려 나갔다.
와아아아아!
전방에서 마족들과 드잡이질을 하던 맷 할러데이 중령과 미국의 소환자들 강림자들은 뒤에서 울려오는 함성에 빙긋 웃으면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적들의 공세도 갑자기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기세 자체가 달랐다.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마족들에 의해 강림자들이 하나둘씩 역 소환되어 나갔다.
아무리을지부루에 의해 강해졌다지만 그들의 육신이 내는 힘은 한계가 있었다.
콰앙!
“커억!”
그 와중에 마력탄을 쳐내다가 그 반탄에 의해 맷 할러데이 중장이 뒤로 날아가 나자빠졌다.
그의 마갑주의 빛도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담긴 힘이 다해가는 모양이었다.
“중장님!”
맷 중장은 몸을 일으키다가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지친 얼굴로 혀를 찼다.
“이런…….”
여기저기서 자신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하체가 마족의 몸뚱이에 깔려 있었고, 지금 저 공격을 막을 무기가 지금 그의 손에는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족 하나가 커다란 도를 머리 위로 쳐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군.”
두렵다기보단 아쉬웠다.
이 전쟁의 끝을 함께 보지 못함이 말이다.
그때 그의 눈앞에 화염이 일었다.
퍼어엉! 펑!
“윽!”
순간 맷 중장이 눈가를 가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화끈한 열기에 팔뚝의 털과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헤이! 일어나라고!”
처음 듣는 목소리.
다만 그 말은 자신의 모국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
강철의 갑주를 입은 거구의 사내가 그의 앞에 서서 손을 뻗고 있었다.
그를 방금 쪼개려 하던 마족은 시커멓게 숯덩이가 되어 한쪽에 나자빠져 있었고 말이다.
“아, 아이언맨?”
“아이언 메지션이라 불러주쇼.”
그때 사내가 갑주의 얼굴 부분을 열었다.
“트, 트렌든? 챔피언 트렌든?”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고진천과 함께 사라졌다던 격투기 챔피언 트랜든이었던 것이다.
“오! 날 아나 보네?”
“패, 팬이었으니까. 헛!”
그렇게 말을 하던 맷 중장이 놀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뒤로 마족들이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아악!
그 순간 트렌든의 양손에 화염구가 맺혔다.
그와 동시에 몸을 돌리며 화염구를 집어던졌다.
콰아앙!
화염이 폭발하며 달려오던 마족들이 불에 휩싸였다.
그 화염을 뚫고 달려오던 또 다른 마족을 본 트렌든은 그대로 반대편 손에 맺힌 화염덩이로 면상을 후려쳤다.
“헤드 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