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5화 살려주세요
허공에 유영하던 혈룡이 그대로 아래로 하강하며 마족들을 덮쳤다.
사방에서 마력탄이 쏘아졌지만, 결국 혈룡은 그대로 아래로 처박혀 버렸다.
콰콰쾅!
그 와중에 몸을 피한 마족들은 다행이었지만, 끝까지 방어마법을 펼치던 이들은 흔적조차 남지 못하고 사라졌다.
“후우!”
그 장면을 만들어낸 은발의 사내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바로 연휘가람이었다. 그를 향해 말을 달리던 대무덕이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고맙네!”
“별말씀을.”
그렇게 대답하며 휘가람이 시선을 돌렸다.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온 을지부루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좋은걸?”
휘가람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베어 물었다.
은발의 사내를 바라보던 레이니가 입을 떡 벌렸다.
“와…….”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제이 역시 그를 보며 한마디 했다.
“헐, 저 은발 오래비는 누구니? 여기까지 후광이……. 울 남편도 어디 가서 빠지는 얼굴은 아닌데 순식간에 오징어로 만드네. 시집을 너무 빨리 갔나?”
“대체 저 사람들은…….”
그녀들과 달리 전창걸 대표와 육의찬 무술감독 등은 그들의 등장에 감탄했다.
고진천의 등장과 함께 기대심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십여 년 전에 비록 현대의 기준에서는 범죄라 정해진 행동이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무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을 보았으니까.
그런데 상상 이상이었다.
이전까지는 이쪽을 놀리듯 대하던 적들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음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주변의 군인들과 소환자 강림자들 역시 분위기가 바뀌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반전의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남은 병력들이 마치 헤쳐모여 하듯 뭉치면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다 보니 이들이 중심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녀들이 대단해서 혹은 마치 상징처럼 되어서라기보다는 그녀들의 옆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이 때문이었다.
고진천.
그가 있었고 그 주변에 호위처럼 둘러싼 병력의 존재감만으로도 충분히 중심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었다.
“이런 씨팔!”
오기원이 재빠르게 몸을 빼기 시작했다.
오기원의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하던 그들의 앞으로 기마들이 차단 기동을 하며 나아왔다.
콰콰쾅!
길을 만들기 위해 나아가던 마족들이 기마병들의 말발굽 아래에 그대로 짓이겨졌다.
덩치가 크든 작든 상관이 없었다.
기마의 차단 기동 한 번에 그대로 쓸려나갔다.
자연스럽게 갈 길을 잃은 오기원은 이내 마법사들과 함께 몸을 띄웠다.
그러나 그것 역시 실수가 되었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치는 순간 사방에서 쏘아진 화살들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콰자작!
보호 마법들이 수십 겹으로 펼쳐졌지만 쏘아진 화살들은 그것들을 연달아 부수고 나아갔다.
두두두!
기마들이 계속 기동을 하며 후위에서는 하늘로 화살을 쏘아 보냈고, 전면의 기마들은 이리저리 이탈하려는 마족병들을 사냥하듯 베어 넘겼다.
그때 고진천이 넘겨받은 창 하나가 공간을 가르고 날아갔다.
뻐어억!
-크어!
오기원을 보호하며 날아오르며 방어마법까지 연달아 펼치던 마족 마법사의 몸뚱이에 진천이 날린 창이 그대로 틀어박혔다.
“어억!”
동시에 짧은 비명을 터트린 오기원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이어 수십여 미터를 떨어져 내린 오기원의 몸뚱이가 굉음을 내며 바닥에 처박혔다.
“커헉!”
바닥에 내리꽂혔다가 다시 수 미터를 튕겨 올랐던 기원의 몸뚱이가 다시 바닥과 충돌하며 뒹굴었다.
마켈그로이언의 수하가 되면서 받은 은총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벌써 피떡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은 몸도 튼튼해진 덕인지 충격을 빠르게 해소하며 몸을 일으켰다.
다시 정신을 차린 그의 눈앞에는 마치 소용돌이처럼 맴도는 기마대의 행렬이 있었다.
마치 자동화 공정이 이루어진 자동차 공장처럼 그들의 창대와 환두대도가 휘둘러지면 기원을 둘러싸고 있던 마족들이 이리저리 나자빠졌다.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중급 마족이 괴성을 내지르며 마력을 끌어올리는 순간 사방에서 손도끼들이 팔랑개비처럼 날아와 박혔다.
퍼퍽! 퍼퍼퍼퍽!
-크워억!
고통에 찬 외침.
푸푸푸푹!
뒤이어 창대가 몸뚱이에 후두둑 꽂혀 들었다.
가지고 있던 무기 두어 번 휘두르고 마력을 뽑아 마력탄 몇 발을 허공에 날린 것이 마지막 몸부림의 결과물이었다.
-끄어어엉!
괴로운 외침과 함께 마족이 그대로 나자빠졌다.
콰앙!
그렇게 자빠지고는 자지러지듯 몇 번의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더는 고통스러운 비명도 몸부림도 없었다.
“히익!”
기원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십여 명 남짓한 마족병들이 전부였다.
그중에는 상급 마족도 하나 있었지만, 팔 하나는 어디론가 팔아 먹었는지 보이지 않았고, 온몸에는 화살이 이리저리 박혀 있었다.
나머지 마족들의 꼴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나 둘 이상의 화살을 몸에 매달고 있었고, 일부는 큰 검상을 입고 비척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것 외에는 큰 타격을 입지 않은 기원이 제일 멀쩡해 보일 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둥글게 포위한 기마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장창을 겨눈 채 멈추어 서 있었다.
그때 한쪽 대열이 열렸다.
그 사이로 고진천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고, 고진천…….”
그를 알아본 오기원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진천이 창대를 쓱 들어 올렸다.
부와악!
빠악!
뭔가 눈앞에서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눈앞에 불똥이 튀었다.
콰당탕!
“컥!”
순간 오기원은 뺨을 거머쥔 채 나뒹굴었다.
창대로 귀싸대기를 맞은 것이다.
“쿨룩! 쿱!”
마른기침을 하자 피와 침이 튀었다.
중간 중간에 허연 이빨도 여러 개가 튀어나온 것 같았다.
“어으…….”
느닷없이 창대로 싸대기를 얻어맞은 기원이 비척이며 일어섰다.
그때 진천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진천?”
“예?”
“내가 네놈 친구냐?”
무료한 음성.
하지만, 그 음성에는 거절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기원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물론 머리로 생각하고 한 사죄의 말은 아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러면서 슬쩍 눈치를 살폈다.
고진천이 자신의 뺨을 때린 창을 안장에 채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방금 뺨을 얻어맞기 전까지 주변에 남아있던 십여 명의 마족들이 전부 진천의 앞에 쓰러져 있었다.
일부는 머리가 터져 있었고 일부는 그가 타고 있는 말의 발아래에 몸통이 박살이 난 채 부들거리고 있었다.
뺨을 맞고 뒹구는 사이 그 꼴이 된 것이다.
‘제발 구해주십시오! 군주님! 군주님!’
기원은 혼신의 힘을 다해 그의 군주를 부르짖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말에서 내린 진천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 뒤로 세인과 제이 그리고 레이니와 송가은 작가가 함께 따라 붙어 왔다.
“쟤가 막 우릴!”
“아흑! 진천 오래비! 말도마! 저놈이 세인이에게 찝쩍거리다가 안 되니까 그런 거라니까! 심지어 송 작가도 넘봤다고!”
레이니와 제이가 떠벌리며 고자질을 하자 기원은 오히려 당황했다.
절대 그런 적은 없었다.
“아닙니다! 전 절대 그러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명령 때문에 손을 좀 쓰긴 했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 솥뚜껑만 한 손바닥이 다가와 있었다.
쩌억!
창대로 맞은 반대편이었다.
콰앙!
그대로 귀싸대기를 맞고 바닥에 반원을 그리며 거꾸로 처박혔다.
“푸허헉!”
다시 한번 피분수를 내뿜은 그가 바닥에서 기며 뒤로 물러섰다.
“아, 아임다! 그져 며령에 따라쓸 뿌닙니다!”
말이 새는 것을 보니 반대편 이빨도 몽창 나간 모양이었다.
그렇게 외치면서도 기원은 반사적으로 뺨을 맞은 쪽 머리를 매만졌다.
느낌이 없었다. 아파야 하는데 마치 그쪽이 통으로 날아간 것 같은 느낌만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머리통은 날아가지 않았지만, 연신 입가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래. 명령 내린 놈이 나쁜 놈이긴 하지.”
순간 기원의 얼굴이 퍼졌다. 그러나 성큼 다가온 진천의 그의 한쪽 발목을 잡자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자, 자깐! 왜, 왜그러심까! 며, 명령내린 넘이 나쁘다거 하셔짠스니까!”
그의 항변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몸이 빠르게 반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나쁜 놈을 원망해라.”
꽈아아앙!
진천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귀로 들려오는 동시에 그의 몸뚱이가 바닥에 처박혔다.
쾅! 쾅! 쾅! 쾅! 쾅!
마치 그가 세인에게 했던 것처럼 진천이 발목을 잡고 좌우로 휘둘러 바닥에 매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파괴력은 비교 불가능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군주가 한 맹약 때문에 세인을 죽이지 못해서 힘 조절을 했지만, 지금 진천은 그게 아니었다.
그냥 휘둘렀다.
그렇게 십여 번을 휘두르다가 손을 놓자 기원의 몸뚱이가 바람에 굴러가는 휴지처럼 구르다가 널브러졌다.
“꺼으…….”
다리 두 짝이 이리저리 휘어져 있는 게 뼈들이 다 결딴 난 모양이었다.
몸뚱이도 마찬가지.
숨을 쉴 때마다 고통스러운 것이 뼈마디가 다 박살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네 주인에게 전해주마.”
진천의 질문에 오기원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결과를 원한 게 아니었다.
그의 야망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순간 정중부가 떠나가던 최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적어도 그 순간 그는 당당했다.
자신을 외면한 강림자의 배신에 치를 떨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래도 당당해 보였다.
그것마저 꼴사납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부러웠다.
‘난, 당당해질 수 있는가?’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때 구리한 냄새와 뜨듯한 기운이 하체에서 느껴졌다.
똥오줌을 지린 거다.
역시 당당해질 수 없었다.
그는 속으로 외쳤다.
‘군주이시어! 살려주십시오! 제발…… 당신의 종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눈물 콧물이 피와 범벅이 된 얼굴로 진천에게 입을 열었다.
“사, 사여 주십시오…….”
“그래.”
“……!”
짜내듯 한 말에 진천이 덤덤하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순간 기원의 눈이 커졌다.
이 지경이라도 살고는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진천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마치 부축이라도 해 주려는 듯.
그의 몸이 들어 올려지고 진천이 그에게 말을 이었다.
“살려달라고 했다고 전해주지.”
“아, 안…….”
콰아아앙! 진천이 그대로 뒷덜미를 잡은 채 그의 면상을 바닥으로 내려찍어 버렸다.
바닥이 움푹 패며 머리통이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다.
털썩.
뒤이어 그의 몸통이 뒤늦게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