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3화 이번에는 늦지 않으려 하옵니다.>
콰작!
머리통이 쪼개진 마족이 옆으로 거꾸러지는 순간 커다란 방패를 들고 나타난 마족이 부루의 몸통을 들이쳤다.
콰콰쾅!
동시에 부루의 몸뚱이가 옆으로 날아가 넘어가자 때를 노린 마족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리고 가장 선두의 마족부터…….
퍼억! 퍽! 퍽!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백발백중이구나!”
달려들던 마족들이 사이좋게 화살을 맞아 거꾸러지자 부루는 재빠르게 대부를 바닥을 쓸 듯 휘두르며 몸을 일으켰다.
콰작! 콰자작!
연달아 발모가지가 토막이 나며 마족들이 비명과 함께 엎어졌다.
그들에게서 튄 피로 엉망이 되었지만, 부루는 벌떡 일어서 다시 대부를 들고 좌로 우로 연달아 공격을 이어나갔다.
한방에 하나씩. 달려드는 마족들은 부루의 대부를 막지도 못하고 썩어 자빠지는 통나무처럼 이리저리 쓰러져 나갔다.
그런데도 마족들은 멈추지 않고 밀려들었다.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듯.
그들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지금 전장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가 시체의 권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어서 한 손을 뻗자 사방에 쓰러져 있던 시체들에서 뼈다귀들이 투두둑 하며 뜯겨 나오더니 마치 계단처럼 그의 앞에 만들어졌다.
기오르그는 그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전장을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병력이 이쪽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형상으로 보자면 커다랗게 덩어리진 이쪽을 향해 마치 작은 물줄기들이 몰려오는 것 같은 형상이었다.
그러나 그 물줄기들은 점점 가까워져 오면서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기분이 나빠졌군.
기오르그가 인상을 굳혔다.
마치 이 거대한 병력을 이길 수 있다는 듯 망설임 없이 나아오는 그 모습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분이 나쁜 것은 따로 있었다.
그 선두에 말을 몰아오는 가장 큰 존재감을 뿌리는 이.
전의에 불타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말을 몰아오며 주변으로 달려드는 마족들을 귀찮은 듯 이리 쳐내고 저리 쳐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시선이 마주쳤을 때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
무심했다.
분명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바라보면서도 그 시선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하다못해 풍광을 볼 때도 여러 감정이 있을 법한데, 마치 길가의 돌멩이라도 보는 듯한 무심함이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다.
그것이 기분이 나빴음이다.
그래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콰콰콰콰!
동시에 또 다른 시체들에게서 뼈들이 날아 올라와 그의 손 위에 뭉쳐갔다.
뼈가 모이고 모여 거대한 창의 형상을 만들었다.
기오르그는 손 위에 만들어진 거대한 뼈의 창을 그대로 던졌다.
마치 연못에서 멀거니 바라보는 개구리가 영 못마땅한 아이가 의미 없이 돌멩이를 던지듯.
그러나 그것이 날아가는 기세는 전혀 의미 없지 않았다.
쿠콰콰콰콰!
거센 돌풍을 동반하며 쏘아져 나가자 그 아래에서 적들을 향해 달려가던 마족들이 뼈의 창이 만들어내는 돌풍에 휘말려 이리저리 나자빠졌다.
순간 기오르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거대한 힘을 담은 뼈의 창이 날아가는 방향에 있던 무리의 대형이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좌우로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뼈의 창이 바닥에 박히며 땅거죽이 뒤집혔다. 그곳은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그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크레이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그냥 원래 구덩이가 있으니 피해간다는 느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심기 불편해진 기오르그와 그 존재가 다시 눈을 마주쳤다.
뭔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말을 달리던 고진천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지나온 구덩이가 눈에 보였다.
“설마 저걸 막으라고 던진 건가?”
“설마 그러겠습니까. 그럼 맞췄겠지요.”
진천의 중얼거림에 대무덕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렇겠지? 설마 멍청이도 아니고…….”
진천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멀리서도 보였다.
먼지 구덩이에서 검보랏빛이 감도는 피가 튀고 몸뚱이 일부들이 수풀에서 뛰어오르는 메뚜기처럼 솟구치는 모습이 말이다.
그 가운데에 언 듯 언 듯 보이는 얼굴.
“다시 보니 좋군.”
진천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보는군요.”
닮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존재는 분명 오래전 떠나보냈던 을지부루라는 것을 말이다.
그때 대무덕이 말을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만, 이번은 제가 먼저 가야 하겠사옵니다.”
평소 허락 없이 진천의 앞을 달리지 않던 대무덕이었다.
그가 하지 않던 행동을 하자 진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무덕이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날 이후 눈을 감으면 후회가 몰려왔나이다.”
“…….”
진천은 입을 다물 뿐이었다.
그의 침묵에 무덕은 홀로 말을 이어나갔다.
“조금만. 조금만이라도 더 빠르게 도착했다면…….”
“……그런가.”
“예. 그리하였다면 달라졌을 것인데 하는 후회 말이옵니다.”
물론 개문산성을 향하던 무덕과 가우리의 구원병들은 절대로 늦게 달리지 않았다.
각자 말을 여럿 이끌고 달리며 타던 놈이 지치면 다른 놈으로 옮겨 타 가면서 질주했다.
오죽했으면 당시에 오로지 달라다가 죽어 나간 말들의 숫자가 천을 넘어갔겠는가.
무덕의 탓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탓한다.
전장에서의 죽음이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것이라 수하들에게 가르치며 살아왔지만, 역시 익숙할 수는 없는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 무덕은 한 걸음이라도 더 빠르게 나아가고 싶었다.
“이번에는 늦지 않으려 하옵니다.”
진천이 점점 멀어져 가는 무덕에게 외쳤다.
“허 하노라. 이번에는 반드시 구원하도록.”
두두두! 두두두!
말을 달려 나가던 무덕이 환두 대도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신 대무덕 열제의 명을 받드옵니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울려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뒤로 그날 그 자리에서 전우들을 떠나보낸 기억이 있던 이들이 따라붙었다.
이번에는 늦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
공포의 크리팔과 파괴의 군주 크로드이언은 모멸감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젠장!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둘이서 을지부루 하나를 두고 여태 싸우고 있는 것도 모자라 군주위의 쟁탈전에 다른 마족이 끼어든 지금의 상황 자체가 모욕이었다.
물론 그 명령을 내린 것은 기오르그였다.
또 기회를 주었음에도 살리지 못한 것 역시 그들의 무능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이 모욕적 인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로 누군가가 지나쳐갔다.
회유와 교언의 군주 마켈그로이언이었다.
-빌어먹을…….
처음부터 이 기회를 얻지 못한 그가 지금은 왠지 부러웠다.
최소한 이런 망신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내가 놈의 발목을 잡겠다.
크리팔의 말에 크로드이언이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뭐?
-놈은 공격 마법보다는 행동을 거북하게 하는 종류에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그의 말에 크로드이언이 얼굴에 살짝 놀람이 깃들었다.
-그 말은?
-놈의 힘이 우리 아래는 절대 아님을 알지 않나.
-그래. 그렇지.
-이미 이보다 더한 망신은 없다. 그러니 이번은 양보하지.
크리팔의 말에 크로드이언이 얼굴을 굳혔다.
-고맙군.
-물론 내게도 기회가 생긴다면 틈을 노릴 거다.
-그야 당연한 것.
크로드이언은 흔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지금처럼 서로 일격을 가하기 위한 전투를 하는 것보다는 아예 제대로 된 협공을 짜는 게 더 나은 길이니까.
-그럼…….
크리팔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주변의 마족들을 향해 대부를 휘두르던 을지부루의 모습이 사라졌다.
콰콰콰콰!
정확히는 바닥으로 훅 꺼진 것이다.
-크아아아!
동시에 그곳을 향해 크로드이언이 몸을 날렸다.
와그르르!
마치 지진이 나서 딱이 푹 꺼진 것처럼 바닥이 내려앉았다.
물론 을지부루는 바닥이 꺼지는 상황에서도 대부를 휘둘러 덩치가 제법 있는 마족의 몸뚱이에 박아넣고 몸을 띄웠다.
이어서 어울리지 않게 재빠른 몸놀림으로 구덩이로 굴러떨어지는 마족들의 몸뚱이를 마치 징검다리 밟듯이 밟으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단순히 이것이 크리팔이 펼친 마법의 전부는 아니었다.
끼에에에에!
귀곡성이 울리자 바닥으로 거꾸러지던 마족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캬아아!
-끼에!
동료의 죽음에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던 마족들이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발버둥 치는 것처럼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부루의 갑옷 자락에 손톱을 걸치고 다리를 잡았다.
“이건 또 뭐이간!”
을지부루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부를 휘둘러 자신의 몸을 잡아오는 마족들의 손길을 그대로 훑어내었다.
우두둑하며 손들이 잘려 나갔다.
하지만 그게 그 와중에도 마족들은 마치 부루만이 살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달려왔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가지가지 하는 구나야!”
부루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공포의 권능이 만들어낸 현상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악착같은 몸부림도 잠깐일 뿐이었다.
그러나 부루는 그들의 손길을 막아내는 대신 자신의 대부를 머리 위를 향해 휘두르는 것을 선택했다.
콰앙!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충격파가 사방으로 뿌려지며 부루 주변에 달라붙던 마족들의 몸뚱이를 터트려버렸다.
머리 위에서 내려꽂히는 공격을 막았지만, 부루는 그 댓가로 다시 아래로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으하하!
그런 부루를 쫓아 나아가며 크로드이언이 환희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 아까처럼 덤벼 보아라!
크로드이언이 자신의 도끼를 고쳐 잡으며 다른 한 손을 부루를 향해 뻗었다.
퍼퍼퍼펑!
부루의 몸뚱이에서 연달아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그의 주변에 다시 밀려와 있던 마족들의 몸뚱이가 갈가리 찢기며 핏물로 변했다.
파괴의 권능이 발현된 것이다.
비록 부루의 몸뚱이는 파괴하지 못했지만, 충분히 그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유백색의 촉수들이 부루의 발목을 휘감고 휘두르는 대부를 낚아왔기 때문이었다.
크리팔의 보조 마법이 연달아 펼쳐지고 있었다.
-어디 발버둥 쳐 보아라!
크로드이언의 발이 균형을 잃은 부루의 복부를 밟고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바닥에 고인 마족들의 살 조각과 뼛조각이 고여버린 피 웅덩이에서 다시 솟구쳐 올랐다.
-쯧.
마켈그로이언은 이제야 손을 잡은 둘을 보며 혀를 찼다.
결국 저리될 것을 왜 이제야 그러나 싶은 것이다.
마켈그로이언은 정면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이쪽 역시 맛 좋아 보이는 먹잇감임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모두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렇듯 최대한의 수확을 벌어들여 보려 했다.
그가 허공에 뜬 채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양손을 펼쳤다.
회유의 권능이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