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1화 죽으신 거에요?
고진천이 왔다.
그 하나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든든해졌다.
“등장은 멋지구리하게 하셔놓고선 첫 대사로 뼈를 후려치시네…….”
광호가 풉하니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왠지 그 말투가 더 고진천 답다 생각했다.
그런 진천의 말에 제이가 달려들며 땡강을 부렸다.
“오래비! 저 새끼! 저 새끼가 그랬어!”
“맞아! 저 새끼랑 저 새끼가 끌고 온 새끼들이 그랬어!”
레이니까지 달려들어 손가락질하며 꼰지르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을 모조리 뽑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줄줄 흘리며 말이다.
그 와중에 전창걸 대표는 절룩거리며 다가와 주변을 불안한 시선으로 둘러보며 그녀들을 말렸다.
“얘, 얘들아. 니들 아이돌이야. 말조심해야지.”
이 와중에도 이미지를 챙기는 전 대표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어이없어 웃음들을 흘렸다.
그 역시 프로는 프로다.
엔터의 프로.
심지어 세인과 송가은 작가까지 합류해 손가락질해 대기 시작했다.
마치 동네에서 맞고 들어온 여동생들이 큰오빠에게 이르듯 말이다.
그 손가락질의 끝에는 오기원이 있었다.
“이, 무슨…….”
오기원은 당황했다.
지금 이 상황도 당황스러웠고, 갑자기 이곳에 몰려든 최상급 마족들의 살기에 눌려 숨도 쉬기 힘들었다.
아직도 얼떨떨 하지만 나타난 존재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서, 서울 테러?”
십여 년 전의 전 세계적인 유명한 사건.
미국에선 코드명 아이언맨으로도 불렀던 사내.
바로 고진천이었다.
을지부루가 그때 코드명 호크아이라 분류된 이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기도 했다.
그래서 잠시 다시 한번 그의 존재가 회자 되기도 했다.
그의 등장 이후 세상에 존재하던 모든 유명한 테러범들은 고개도 내밀지 못할 정도의 유명인이었으니까.
그가 모를 수는 없었다.
그래 봐야 당시에 보였던 괴력은 지금 세상에선 별것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그 당시 그와 동일시할 수 없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예로 지금 그의 주변에 모여들고 있는 최상급 마족들을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나, 난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어!”
오기원은 자신도 모르게 변명을 내비쳤다.
“웃기지 마! 그런 새끼가 세인이 배때기에다가 창을 찔러서 들어 올리고 그랬냐!”
“어, 언니 배때기는 좀…….”
제이가 악을 쓰며 대꾸하자 세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흐렸다.
“저건 을사오적보다 더한 새끼야!”
“맞아! 매국노!”
그녀들이 다시 쫑알거리며 험담을 했다. 그러나 고진천은 딱히 와닿지 않는지 미간만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남건 남생보다 더한 놈입니다!”
그 외침에 진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당에 항복해서 오히려 선봉에 선 이와 그 와중에 권력을 탐하려 했던 이.
진천에게 이보다 딱 맞는 비유는 없었다.
그는 씹어먹을 것 같은 눈빛을 하고 기원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예!”
진천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외침의 주인공인 전신 길드장인 임병화는 흥분된 얼굴로 다시 한마디 외쳤다.
“평소 팬이었습니다!”
“아…… 아재요. 그말은 하지 말지.”
옆에 있던 구도원이 눈을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병화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진천이 말했다.
“나중에 사진이나 한 방 찍어주지.”
“영광입니다!”
“…….”
도원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
짧은 기간이지만 진천 역시 서울물을 먹었던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을 보던 도원은 살짝 걱정이 일었다.
그가 해놓은 역사적인 업적(?)을 모르는 건 아니다.
게다가 인제 와서 그에게 공권력이 다가설 수 있을지도 무의미한 상황이다.
실제로 당시 해당 사건과 가장 밀접하던 서준모 경무관과 최후배 경정 역시 눈을 반짝거리고 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그의 힘이 이곳에서 얼마나 통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살아생전의 무력과 강림자로서의 무력은 다르니까.
인간들이 존재감이라는 수치를 괜히 만들어 강림자들의 순위를 먹인 게 아니다.
하지만, 을지부루도 있다.
존재감은 소수점 아래를 찍었지만 실제로는 강하다.
도원은 자신도 모르게 팔뚝에 찬 소환자용 패드를 들어 진천의 존재감을 측정해 보았다.
삐-!
“…….”
‘0’이다.
“씨바 이젠 이거 버려야겠다.”
이 숫자를 믿을 수도 없고 믿기도 어려웠다.
그냥 그랬다.
* * *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을지부루의 몸에 다시 갑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지쳐 허덕이던 숨결도 가다듬어져 있었다. 마치 새로운 힘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대체 뭐지?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가 질문을 던졌다.
“내가 아까 말했디 않아. 내래 모시는 분이 있다고 말이디.”
-…….
기오르그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군주가 모시는 이가 있을 수는 있다.
마켈그로이언이나 크리팔 그리고 크로드이언등이 모시는 이가 바로 자신이니까.
그러나 이건 법칙의 테두리 한에서 만들어진 주종관계다.
그런데 그것을 벗어난 존재가 생겨났다. 뭔가 꼬인 느낌이다.
마치 족보 꼬이듯.
심지어 그의 몸에 은은히 감도는 빛깔이 맘에 들지 않았다.
진한 보랏빛.
검보랏빛의 마력과 비슷한 색이면서도 더욱 맑은 것이 영 기분이 나빴다.
심지어 아까 들을 수 있었다.
마왕이라는 말.
‘설마 다른 계에도 비슷한 체계가 있는 건가?’
합리적 의심이었다.
그렇다면 이 눈앞에 있는 이질적인 존재도 설명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기오르그가 권좌에 앉아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모조리 섬멸하고 꿇려라. 여흥은 이제 끝났다.
그의 명령에 세상이 진동했다.
마물과 마족들이 일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흉포함을 담고, 말이다.
* * *
“그런데 죽, 죽으신 거에요?”
세인이 입을 틀어막으며 울먹였다. 그녀로서는 그가 이곳에 올 수 있는 이유로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죽어? 누가? 내가?”
고진천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 그럼 저번에 오신 것처럼 소환이…….”
“글쎄. 그건 모르겠고. 자다가 눈떠보니 이 꼴이고…… 느낌상 저놈들을 죽여야 할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고.”
더럽다는 의미는 마치 누군가가 채근하는 듯한 감정 때문에 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래도 꿈이라면 꽤 재미있겠구나. 보고 싶은 얼굴들이 보이는 것을 보니까.”
저 멀리 을지부루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옛날 개문산성으로 떠나기 전에 보였던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싸늘하게 식어서 돌아왔을 때도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지금처럼 생기 있지는 못했으니까.
“그래도 이번엔 늦지 않은 모양이군.”
끼히히힝!
그를 향해 강쇠가 달려왔다.
노쇠한 모습이 아닌 마치 한창 잘나가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그 사이를 대형 마물들이 가로막았지만, 이리 채여 날아가고 저리 채여 날아갔다.
마치 마물 따위가 하는 시선을 보이며 콧김을 뿜어낸 강쇠가 도착하자 진천이 천천히 등을 쓸어 주었다.
“얘가 그 강쇠에요?”
“음.”
진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제이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특정 부위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 그녀의 머리통을 전창걸 대표가 붙잡으며 외쳤다.
“제발 쫌! 이름이 강쇠라잖아! 이름이!”
“아, 그저 어렸을 적 엄마 몰래 훔쳐본 영화의 추억 때문에…….”
“이 미친 언니야! 그런 걸 추억으로 포장하지 마!”
레이니가 바락 소릴 내질렀다.
그사이 진천이 강쇠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천천히 몰아 나왔다.
단지 말을 몰고 나섰을 뿐인데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그때 진천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여포 봉선이 적토마를 타고 있었다.
“음?”
진천의 시선을 맞이한 여포가 입을 열었다.
“이, 인중 여포 마중 적토라 불렀…….”
“쓸 만하군.”
“고, 고맙소.”
그 모습을 보던 장웨이가 입을 떡 벌렸다. 비록 처맞기는 했지만 을지부루에게도 덤볐던 여포가 칭찬받았다고 좋아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헐.”
“그냥 이해하려 하지 마. 저분은 규격 외다.”
임병화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그의 눈빛과 비슷한 이들이 주변으로 몰려와 있었다.
수는 줄었지만, 전의는 아직 불타고 있는 이들.
바로 전신 길드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강림자들 역시, 마치 잘 정돈된 기마처럼 도열했다.
그때 그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이가 있었다.
“뒤로 가서 줄을 서라. 눈먼 창에 맞아 죽기 싫으면.”
“뉘, 뉘신지…….”
노장 하나가 다가와 명을 내리자 다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대무덕. 열제의 검이자 창이며 방패이니라.”
“허, 자다가 이게 웬 봉창인지.”
무장을 갖춘 장 노인이 한 손에는 환두대도를 다른 한 손에는 망치를 든 채 서 있었다.
“스, 스승님?”
“이, 이게 뭡니까?”
“일단 자세 잡아! 온다!”
그 곁에는 화인스톤 머윈스톤 갈링스톤이 얼떨떨한 얼굴로 쌍날 도끼를 들고 서 있었다.
“저기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으니 가자꾸나.”
장 노인의 시선 끝에 마물과 마족들에 둘러싸인 을지부루가 있었다.
“히익! 마, 마족들?”
“진짜 마족?”
그들을 본 이들은 정체를 알고는 창백해졌다.
“그래서? 두렵느냐?”
장 노인의 질문에 그들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긴 했다.
그런데 왠지 생각만큼 가슴이 떨리지는 않았다.
얼핏 봐도 가우리의 정예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그것도 한때 신성제국을 무너트릴 때 함께 하던 이들이 말이다.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고 마음은 차분해졌다.
“이! 첫 마족 슬레이어 드워프는 나다!”
화인스톤이 자신감을 보이자 갈링스톤과 머윈스톤이 자신감을 가졌다.
그런데 그들보다 먼저 달려 나가는 존재들이 있었다.
“뀌이이이이!”
녹색으로 이루어진 집단.
왠지 이쪽보다는 마족 쪽에 붙어 있어야 어울릴 법한 녹색의 군단이 물결처럼 몰려나갔다.
그 가운데에는 들것에 앉아 당당하게 나아가는 이가 있었다. 바로 오크로드 우중만이었다.
“허허, 늦겠구나.”
장 노인의 중얼거림에 이곳에 집결해 있던 모든 병사가 일제히 튀어 나갔다.
쿠쿠쿠쿠쿠!
몰려오는 적들을 보던 마족병들은 당황했다.
-대체 무슨 병력 구성이 이렇게 잡다한 거지?
-아니 대체 먹이로도 쓰지 않을 오크들은 왜 우리에게 칼을…….
마계에도 오크는 있었다.
하위 종으로 분류되며 먹잇감 취급을 받거나 일꾼 취급을 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태생이 그러했으니까.
본능적으로 마계의 종족에게 칼을 들이밀 수 없는 존재들이 그들인데 마치 잡아먹을 듯이 달려오고 있는 것 아닌가.
심지어 오크의 왕을 상징하는 곳에는 인간으로 보이는 이가 앉아 있었고 말이다.
거기에 일부 드워프도 눈에 들어왔다. 뭔가 뒤죽박죽인 느낌.
문제는 그들을 경시할 정도의 기세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웅장하게까지 느껴지는 발걸음은 절로 몸을 위축하게끔 했다.
그 선두로 누군가가 말을 타고 달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