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0화 그가 다시 이 세상에 왔다.
그때 지금과 달리 붉은 선들이 이리저리 뭉치더니 붉은빛으로 된 인형들이 주변에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응?”
그들을 본 도원이 얼빠진 얼굴을 했다.
대체 붉은 빛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에도 마치 뭐든 벼락을 다 빨아들일 기세로 맞던 존재에게서 백열하는 뇌전이 뿜어져 나갔다.
꽈르르릉!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그 뇌전 다발을 맞은 중급 마족 하나가 그대로 재도 남기지 못한 채 소멸해 버렸다.
“저, 저거도 아군인가?”
더는 내려치는 벼락은 없었다. 대신 벼락을 외부로 뿜어낸 곳에서 한 존재가 점차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외, 외국 사람인가?”
금발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도무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이였다.
“뇌전의 제라르!”
묵갑귀마대원 중 하나가 그를 아는지 이름을 외쳐 불렀다.
“후아! 이건 또 뭐래?”
제라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도원은 묵갑귀마대원이 아는 얼굴임을 확인하자, 혀를 내둘렀다.
“옛날 고구려 시대 때는 글로벌하게 살았다더니 금발 외국인도 있었나?”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묵갑귀마대원이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저 친구는 저쪽 세상의 인물입니다.”
“뭐, 뭐지?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지?”
그때 제라르가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뭐야! 나 죽은 거야? 저승에 온 거야? 왜이래! 죽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제라르가 갑자기 울분에 찬 외침을 연이어 터트렸다.
그래도 본능적으로 누가 적인지는 느끼고 있는지 사방으로 검에 담긴 뇌전을 뿌리며, 마족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저건 또 뭐야!”
이제 막 생성된 포털로 뇌전이 날아가자 열심히 기어 나오던 마족병들이 전부 숯덩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그 와중에 그가 날뛰는 것을 막기 위해 달려든 상급 마족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온몸이 토막 난 채로 여기저기 몸뚱이를 흐트러트리며 무너져 내렸다.
“하나로 안 되면 다 달라붙기라도 하란 말이야!”
오기원이 악을 쓰듯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상급 마족들이 제라르를 향해 몰려갔다.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인지 삽시간에 적들로 뒤덮였다.
“빨리! 빨리 움직이란 말이야!”
-닥쳐라.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런 기원을 향해 경멸하는 시선을 보내며 최상급 마족인 군단장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순간 그들의 기에 눌린 기원이 뒤로 물러서자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마력을 끌어 모았다.
지금까지는 마치 공을 나눠 먹으려는 듯 전장에 임했다면 지금은 다들 심각해진 얼굴로 빠르게 승부를 종결지으려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상급 마족들이 일제히 달려 나가 제라르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이건 또 뭐야!”
콰르릉! 콰릉!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천둥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 와중에도 붉은 인형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나같이 이국적인 모습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레간자 산맥의 가우리 소속 병사들이라는 점이었다. 그중에 북부 출신 군단병들 역시도 모습을 드러내었다.
경황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적아 구분은 쉬웠다. 누가 봐도 인간이 아닌 이들이 적이니까.
콰콰콰콰!
그런 그들을 향해 대규모 범위 마법이 쏟아져 내렸다.
그 때문에 막 소환되던 이들이 다시 빛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캬아아!
그 사이로 최상급 마족 하나가 마족병들을 이끌고 양손에 검을 들고 누비며 군인들과 불완전 소환 중이던 이들을 썰어갔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검을 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거센 공격에 들뜨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막아!”
군인들은 붉은 빛과 함께 나타나는 이들 역시 아군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마족병들을 향해 몸을 날렸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서준모 경무관과 최후배 경정도 그 사이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오래지 못해 그들은 마족병들의 공격을 채 몇 번 막지 못하고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위기의 순간 광호가 나타나 손을 보태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몰려든 마족병들의 공세에 포위되어 버렸다.
그때였다.
카앙! 캉!
연달아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건?”
마족병들의 검을 막아선 이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모습을 찾아갔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장도를 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구경만 하고 있을 셈이냐!
그때 쌍검을 휘두르는 최상급 마족이 포효를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달려들던 그는 순간 멈칫하며 쌍검을 교차했다.
그리고 동시에 울려지는 소리.
따당! 땅!
-크, 크읏!
땅땅땅땅!
마치 대장장이가 날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쌍검을 교차해서 막았던 최상급 마족은 뒷걸음질을 치면서 연신 공격을 막는 데에만 집중했다.
-네놈은 뭐냐!
붉은 인형이 든 장도 끝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사라지며 그 차가운 도날이 모습을 되찾아갔다.
도의 손잡이를 가볍게 쥔 손 그리고 호리호리한 팔.
다리부터 시작해서 머리끝까지 붉은빛이 사라지며 꽁지머리를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응? 너 광호 아니냐?”
“우, 웅삼 형님?”
광호는 물론이고 서 경무관과 최 경정 역시 그를 알아보았다.
“허억! 그럼 이 사람들 진짜로 되돌아온 거?”
“뭐야? 대장 동생 거둔 적 있소?”
“그러게?”
“동생이라 부르고 호구 잡은 거겠지.”
“그렇지?”
“닥쳐 이것들아!”
계웅삼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거 영 꿈인가 생시인가 구분이 안 가네?”
“이거 진짭니다!”
“몰라. 우린 좀 멍해. 다만 어떤 놈들 좀 조져주면 좋겠다는 부탁 비슷한 게 간질거리며 다가오는데?”
응삼이 장도를 휘리릭 휘감으며 한쪽을 바라보았다.
3미터가 넘어가는 거구의 최상급 마족이 자존심이라도 상한 얼굴로 웅삼을 노려보고 있었다.
“뭘 꼬나 보지?”
그때 웅삼의 머리 위로 마법이 내리꽂혔다.
쩌러렁!
쩌렁!
그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기라도 한 듯 마족들이 마법을 집중해서 뿌린 것이었다.
콰콰콰쾅!
연달아 폭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흔적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듯 마법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십여 초 가까이 쏟아지던 마법이 그치자 연무와 함께 웅삼이 있던 곳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곳에는 반원형의 돔이 만들어져 있었다.
웅삼의 옆에는 노인 하나가 하늘로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쏟아만 붙는다고 마법이 강한 건 아니라네.”
가우리의 대 마법사 시아론 리셀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동시에 그의 몸이 천천히 떠오르며 그의 뒤로 마나 에로우가 하나씩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기초적인 마법.
그러나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순식간에 수천 개로 늘어난 마나 에로우가 적들을 향해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거이 꿈은 아이디?”
을지우루는 저 멀리 서 있는 을지부루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때 그를 향해 달려가는 누군가가 있었다.
“아바디!”
을지수호가 창과 도끼를 결합한 창부를 휘두르며 부루를 향해 내달려가고 있었다.
그 뒤를 대부를 든 아빌런이 따랐다.
하일론 역시 병사들을 이끌고 마족병들의 앞에 나서서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이 압도적인 병력 앞에서 마족들이 처음으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 * *
-이게 가능한 일인가?
-두 세계의 선이 연결되었습니다. 두 세상을 어우르는 존재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긴 합니다만…….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의 질문에 마켈그로이언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존재가 그럼 저것이란 것인가?
확연히 나뉘는 기운이었다.
붉은 빛과 푸른 빛.
그런데 그 두 빛이 미친 듯이 맹렬하게 뭉치고 있는 곳이 있었다.
아까 판도라 멤버를 구한 그 푸르른 인형의 몸 주변으로 붉은빛이 휘감기더니 점점 짙은 보랏빛으로 변해 갔다.
마치 그들 마족의 힘을 상징하는 검보라 빛과도 비슷하면서도 더 선명했다.
-이런 존재감이…….
그곳을 바라보는 마켈그로이언이 이를 악물었다.
점점 커져 가는 존재감이 절대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주변의 피를 흡수하기라도 한 듯한 용의 형상이 하늘로 다시 솟구쳐 올랐다.
그 위에는 은발의 사내가 있었다.
그의 존재감만으로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크롸롸롸롸!
“이거야 원 참. 왜 이런 난장판인 거지? 그런데…… 이거 반가운 얼굴들이 많은걸?”
연휘가람은 정령화를 통해 끌어낸 수룡의 머리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수룡의 입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던 비행형 마물들과 마족들이 한 움큼 물려 있었다.
-가, 감사하옵니다!
얼빠진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연 것은 헤게루이안이었다.
“흐음. 뭔가 친근한 느낌인데. 뭐라도 좀 설명이 가능할까?”
휘가람의 질문에 헤게루이안이 그 사이 아래쪽에서 호탕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대열을 갖춰라! 대열을 갖추어라!”
쩌렁쩌렁한 외침에 여기저기에서 중구난방으로 튀어나와 전투를 벌이던 병사들이 마치 익숙한 모습으로 자리를 찾아갔다.
명령을 내리는 이는 바로 대무덕이었다.
뭔가 이해가 가지 않을 만한 상황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병력을 통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명령에 따라 삼인방들과 웅삼 등도 병력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시선은 한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제는 진한 보랏빛이 되어 버린 한 사내.
그 사내의 몸에서 뿔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투구에 세 개 그리고 양 어깨에도 하나씩 뿔들이 생겨났다.
그 모습을 보던 마족들이 온몸을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너무도 압도적인 힘에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 마왕이…….
그 힘을 보며 어떤 마족이 마왕을 언급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한편에 있던 필리언 제라르가 구시렁거렸다.
“마왕 소릴 듣기는 했지. 저 양반이. 그런데 정말 얘들이 마족이라고?”
“예.”
제라르의 말에 그에게 목숨을 구함 받은 군인들이 멍한 얼굴로 대답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저, 정말 마왕이라는 겁니까?”
“뭐, 그거야 상대적인 거 아니겠어? 사정 안 봐주고 줘팰 때는 마왕보다 더한 양반이고. 우리 편일 때야 마왕이 뭐야, 그냥 구세주인 거지.”
제라르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오래 끌었던 강림의 마무리를 바라보았다.
스스스.
보랏빛으로 빛나던 몸뚱이가 천천히 모습을 되찾아갔다.
다리 끝에서부터 천천히 그 형상이 되찾아왔다.
“아…….”
익숙한 갑주.
그리고 체형.
어깨에 뿔이 달린 갑주를 입은 그의 모습은 너무도 익숙해 보이는 이였다.
꾹 다문 입에 짙은 눈썹은 꽤 고집이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살짝 찌푸린 눈가가 오히려 인상적인 얼굴이다.
“진천 님…….”
세인과 송가은 작가 그리고 판도라 멤버들이 울먹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가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처맞은 거지?”
“…….”
무언가 가슴 먹먹하던 분위기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순간이었다.
“쯧.”
이어 혀를 차는 모습까지. 하지만, 그 모습에 다시 한번 그가 이 세상에 왔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