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9화 또 다른 색의 빛이 의미하는 것.
마계에서 오랜 세월 간 존재해 왔던 기오르그조차 의문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그 빛의 선 들을 주시하던 마켈그로이언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눈치챈 기오르그가 질문을 던졌다.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가?
-예…… 익숙한 기운입니다. 허나 이곳과는 관련이 없던 기운이기도 합니다.
마켈그로이언의 대답에 기오르그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마켈그로이언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저 포식자, 아니 군주 을지부루라는 이가 이끄는 이들 중에 제가 용병으로 계약해서 부리던 이들이 있다는 것은 아실 것이옵니다.
-알지. 그들을 끌고 내려왔다가 모두 빼앗기기까지 한 것은 꽤 재미있는 일이었으니까.
기오르그는 재미있는 일이었지만, 마켈그로이언 입장에서는 참담한 일이었다.
마계에서 한동안 놀림감이 될 정도였으니까.
마켈그로이언은 애써 담담한 음성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바로 그들이 처음 마계에 뿌려졌을 때의 기운이 바로 저것이었습니다.
-으음?
모든 영혼이 마계로 오는 것은 아니었다.
마룡족과 같이 작정하고 오는 상황을 제외한다면 간혹 갈 곳을 잃은 영혼들이 오기도 하는데, 바로 저들이 그 경우였다.
그 과정이야 워낙 경우의 수가 많았고, 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출신에 대해서는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는 법이었다.
마켈그로이언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것은 그때 느꼈다는 것은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저들이 연관된 세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미다.
-마계야 그럴 수 있다지만, 대체 왜?
문제는 이거다.
마계는 여러 차원에서 흘러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여기는 아니다.
마계조차 신의 힘이 멀어진 곳을 고르고 골라서 선택해서 침공한다.
그 과정에서 한 번에 큰 영향력을 투사할 수 없기에 겨우 길만 열어서 마수들을 먼저 투입한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침식지를 통해 영향력을 넓혀 나가다 무르 익었을 때, 최상급 마족도 투입하고 한다.
그만큼 차원을 타고 넘는 데에는 제약이 많았다.
그런데 다른 차원의 힘을 담은 개체가 이렇게 몰려온다는 게 이해가 갈 리가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어우러져서.
-그러고 보니 저들?
-이곳에 존재했던 이들이 어떤 힘으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 갔던 모양입니다.
-그래. 그러면 설명이 되기는 하는데.
따지면 그쪽 차원에서도 이들은 이질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생을 마무리할 때 해당 차원의 영혼이 아니었기에 마계로 흘러들었던 것이고 말이다.
마계는 일종의 영혼계와 실물계의 중간이었다.
영혼이라 하지만 마계로 오는 순간 일종의 재탄생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맞게 된다.
영혼이되 실체를 가지게 되는.
그 과정을 거친 것이 바로 저들이었다.
비슷한 개념으로는 천계라는 지역이 있었다.
-그래봐야 하위 개념이겠지.
마켈그로이언의 도움으로 상황을 정리한 기오르그가 냉소를 머금었다.
결국 하위 개념일 것이라는 것.
2차 강림 자체가 하위 개념이었다. 을지부루보다도 하위의 영향력을 가진 존재들을 불러온 것이라는 점.
-허나 기운으로 봐선 심상치 않습니다. 점점 커지고 있고…….
-뭐, 변수가 좋은 것은 아니긴 하지.
마켈그로이언의 걱정어린 말에 기오르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제야 마켈그로이언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기오르그는 때론 이렇게 유흥을 즐기기도 하지만, 이기지 못할 싸움에 승부를 거는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군주 자체가 왕이라는 패권을 위해 존재하는 만큼, 냉정함이라는 감정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다.
그 덕에 오랫동안 마계가 통일하지 못하고 일곱 군주의 시대를 이어온 것이고 말이다.
즉 변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 하는가?
기오르그가 고개를 돌려 마켈그로이언을 바라보았다.
-예?
-방금 그대에게도 기회가 주어졌음을 모르겠는가?
기오르그가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자 마켈그로이언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영광이옵니다.
예를 갖춘 마켈그로이언이 을지부루와 두 군주가 다툼을 벌이고 있는 곳으로 천천히 몸을 띄웠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권속들을 오기원에게도 보내었다.
그 역시 변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삶 자체가 투쟁이었던 그였기에 변수를 허용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는 오기원이 있는 곳에서부터 이 변화가 시작된 것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오로지 을지부루 때문이라면 그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돼야 했을 변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하였기에 이 결정이 최선이었다.
* * *
“맞아요?”
세인은 확인하듯 물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여전히 푸른 빛 덩어리인 그는 답변하지 못했다.
그저 변화가 있다면 그녀와 그 사이로 은은한 붉은 빛이 연결된 채 푸르른 신체를 휘감고 있다는 점이다.
“떡대 보니 딱 진천 오래비네! 내가 오래비 등짝에 물 뿌려 줬잖아!”
세인과 달리 제이는 그 푸른 덩어리가 고진천임을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그 가운데에 비틀거리며 다가온 송가은 작가를 그가 한 손을 뻗어 부축해 주었다. 그 과정에 있어 세인을 살짝 내려놓았지만, 둘을 여전히 보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송가은이 엉망이 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 으…….”
이빨이 죄 부서지고 입술이 뭉개져서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세인은 가은이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은 역시 지금 이 존재가 진천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때 허공에 검은 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콰자자자작!
이어 번개처럼 뇌전이 얽히더니 이내 소용돌이가 그 검은 원 안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다, 단거리 이동마법입니다! 군주 마켈그로이언의 권능 중 하나입니다!
마족 마법사 하나가 질린 얼굴로 외쳤다.
그 마법에 느껴지는 힘으로 마켈그로이언이 펼친 마법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 이동마법을 보고 환호하는 이는 오직 오기원뿐이었다.
“프흐흐흐! 그렇지! 이거야! 이거!”
잠시 기운에 눌려있던 오기원은 이내 하늘에 펼쳐진 마법을 느끼고는 금세 돌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구도원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저 새끼가 저렇게 촐싹 맞은 놈이었나?”
“모르지, 나라 팔아먹는 놈 종특일지도.”
임병화의 대답에 도원이 무기를 고쳐 쥐었다.
“결국 아직도 위기란 거네.”
그나마 이쪽도 아까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여기서부터 생긴 변화가 마치 반격의 서막이라도 된다는 듯 사방에 흩어져 있던 병력이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서준모와 최후배도 있었다.
“홀리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어? 영어 잘하는 아저씨도 살아 있었네?”
“…….”
도원이 반갑다는 듯 말을 하자 잠시 멧 할러데이 중장은 할 말을 잃었다.
그를 대신해서 병화가 도원에게 한마디 했다.
“미국 사람이 영어 못하면 그게 정상이냐?”
“뭐, 그렇다는 거지.”
다행히 미국에서 온 지원군들도 꽤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고르고 고른 인원이니만큼 생존율이 높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저씨는 저쪽에서 싸운다며?”
세상을 구하는 전투에 손을 거든다며 을지부루의 주변에서 줄 곧 달려왔던 멧 중장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곳으로 온 것을 도원이 언급한 것이다.
“세상은 구해도 나는 못 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리고 무엇보다 저기선 스쳐도 주님을 뵐 것 같아서.”
“아저씨 기독교유?”
“그나마 잘 아는 신이 지저스뿐이라. 산타는 믿거든. 알라신 쪽이랑은 총질만 해봐서.”
멧 중장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다들 웃음을 잠시 흘리다가 이내 자세를 고쳐 잡았다.
검은 구멍들이 연신 생겨나며 수를 놓았다.
그 구멍들 사이로 마족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옛날에 본 어벤져스가 생각나네.”
“엔드게임? 왜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가?”
도원의 중얼거림에 멧 중장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러자, 도원이 고개를 내저으며 초를 쳤다.
“아니. 타노스 쪽 이름 없는 병사 1이 된 느낌이야. 봐봐. 그때 엔드게임에선 까만 구멍에서 아군이 나왔잖아.”
“Shit…….”
도원의 말에 멧 중장이 얼굴을 구겼다.
병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필 말을 해도 재수 없는 소리만…….”
“어차피 내 인생의 상당수는 빌런취급이라 뭐 이게 익숙하기도 해서.”
“승부조작 게이머 새끼.”
“씨바……. 할 말 없음.”
도원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리 이유가 있다 해도 자신은 과거가 떨어지지 않는다.
도원은 별다른 변명 없이 말을 이었다.
“이런 말이 있잖아. 과는 공으로 덮는 거라고. 이걸로 대박 터트리면 최소한 대놓고 욕하진 않겠지.”
도원의 말에 병화가 환두대도를 들어 올리며 동조했다.
“맞아. 기왕이면 오기원이 목이라도 따오면 아마 더 좋을 거다.”
“그렇지? 승부 조작꾼보단 나라를 판 새끼가 더 빌런이니까.”
“그래.”
그들은 웃음기를 지우고 다시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강하하기 시작한 마족들을 향해 화살들과 얼마 안 남은 대 마물탄들이 일제히 쏘아 올려졌다.
투투투퉁!
그중에는 석전꾼이 던진 돌들도 있었다.
허공에서 원반들이 연이어 만들어졌다.
마법 방어막이었다.
마치 방패처럼 여기저기 형성된 그것들은 이쪽이 쏘아 보낸 것들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캬악!
하지만 모두가 막을 수는 없었는지 하나둘씩 고꾸라져 떨어져 내렸다.
그 와중에 지상에 만들어진 포탈에서 마족병들이 우루루 몰려 나왔다.
그 앞을 살아남은 군인들이 방패로 스크럼을 짰다.
“전경 애들이 확실히 막는 건 잘하네.”
누가 봐도 전경인 듯한 복장을 한 이들이 방패를 들고 듬성듬성 모여 있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방패진을 형성한 모양이었다.
그 뒤로 긴 창을 든 군인들과 강림자들이 바짝 붙으며 격돌을 시작했다.
콰쾅!
간간이 울리던 마물탄 소리도 이제는 더 나지 않았다.
마치 과거로 되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좀비가 튀어나오는 아포칼립스 세상을 묘사한 영화처럼 방패와 칼창을 들고 달려드는 마족병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병화와 전신 길드원의 강림자들 역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도원과 김경징 그리고 광호와 임꺽정의 구월산 패거리 등…… 또 멧 중장과 그의 강림자인 인디언 전사들도 모두 어우러져 달려 나갔다.
콰콰콰쾅!
서로를 향해 마력탄과 투척 무기가 날아들었다.
칼과 창을 맞은 마족병이나 이쪽의 군인들이나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입을 떡 벌리는 것이 비명을 지르는 것같이 보였다.
하지만,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워낙에 컸던 탓에 그들의 비명은 그대로 묻혀질 뿐이었다.
번쩍!
그때 하늘에서 뇌전이 내리꽂혔다.
콰콰콰콰콰콰!
“으어어어어어!”
일부 군인들이 연달아 감전되며 어 하는 소리 혹은 아무런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몸이 뻣뻣해진 채로 그대로 썩은 고목처럼 넘어갔다.
“마법사! 마법사들 뭐해!”
여기저기서 아군 마법사들을 찾았다.
하지만 있는 마법사라 해봐야 극히 소수.
그나마 일부는 먼저 집중 공격을 당해 숯덩이가 되어 먼저 쓰러졌다.
“염병!”
그때 그 뇌전을 담은 마법들이 한쪽으로 연달아 떨어져 내렸다.
콰르릉! 꽈릉! 꽈르르릉!
“누, 누구야!”
병화가 화들짝 놀라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잔인하게 벼락이 오로지 한 명만을 향해 내리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