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6화 마지막 회유
* * *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의 표정은 아까와 달리 무심했다.
흥미롭다며 입가에 띄웠던 미소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미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무료함이었다.
-여기까지군.
재미는 있었다.
마계의 군주중 영향력이 가장 바닥이나 마찬가지였던 마수의 군주를 꺾고, 그 자리를 차지한 존재가 조금씩 강해지는 모습이 신선했다.
그 때문에 조금 이나마 생긴 힘의 균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기오르그는 오랜시간 동안 칠 군주 체재로 이어져 온 마계를 거머쥘 수 있었다.
그 마지막 마침점이 바로 눈앞에 마수의 군주의 힘을 얻은 을지부루였다.
이곳을 흡수하여 힘을 키우는 용도 대신 식민화를 선택한 이유도 나름의 보상이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충성을 받아 줄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물론 그랬다면 정말 재미없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저항이 제법 거셌다.
저기 군주의 위를 이은 을지부루 외에도 이곳에 존재하는 이들 모두가 말이다.
심지어 경각에 달할 때나 가끔 보이던 별의 마지막 몸부림이 오히려 지금 이 순간 발생한 것도 재미있었다.
이건 순수한 의지의 발현에 가까운 현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승리를 하려고 달려들었던 의지가 끌어낸 결과다.
거기에 끝내 또 하나의 군주를 꺾어 자신의 힘으로 흡수한 을지부루를 보며 마치 자신의 대관식에 어울리는 광대처럼 보였다.
더 보고 싶었다.
모처럼 즐길 거리를 이대로 버리기는 아까웠다. 그래서 두 군주들에게 기회를 넘겨 주었고 말이다.
셋은 치열했다.
마치 물고 물리듯 싸우는 꼴이 제법 재미있어 보였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시간이 지나며 서로 욕심부리던 두 군주가 타협을 하는 순간 균형이 다시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콰콰쾅!
방금도 크로드이언의 도끼질을 막아내며 반격을 시도하지만, 곧바로 크리팔의 마법이 적중하며 비틀거리다가 결국 날아가 쳐박혔다.
그런 을지부루의 앞을 최상급 마족 둘이 막아섰지만 그들로는 두 군주의 분노를 막기 어려웠다.
순식간에 손발이 어그러지더니 튕겨져 날아갔다.
무투와 마법.
똑같은 조합으로 군주와 최상급 마족의 대결은 보나마나였다.
그러나 그들이 벌어준 시간이 의미가 없지는 않았는 듯 을지부루가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순간 기오르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분노어린 시선.
그 시선을 보며 기오르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이젠 재미가 없구나. 그래도 시간을 낸 보람이 아예 없진 않았으니 실망하지 마라.
을지부루가 기오르그를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만 기다리라우. 내래 그 자리에서 반드시 끌어 내려줄 거이니까네.”
부루의 말에 기오르그가 턱을 괸채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언제든. 난 어디든 움직이지 않을 테니. 아, 이걸 보면 힘이 좀 나려나?
그 말과 함께 기오르그가 한 손을 펼쳤다.
그러자 허공에 영상이 만들어졌다. 순간 부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기원이 세인을 창으로 찍어 들어 올린 장면이었다.
순간 부루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전장에 나선 이상 더는 지킬 대상이 아니라고 말을 해 두었지만, 눈으로 보니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괴로워하는 모습이 영상에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뒤에서 싸우던 이들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군인들에게 판도라는 부대의 깃발과 같은 존재였다.
처음에야 왜 걸그룹이 전장에까지 나서느냐며 불만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녀들을 마치 부대의 상징처럼 생각했다.
결코 그녀들은 겹겹이 둘러싼 호위 안에서 공주 대접을 받지도 않았으며 훈련 때에는 똑같이 바닥을 뒹굴었다.
약통을 나르고 부상자를 챙겼다.
그 와중에 목이 갈라지라 응원하듯 달리는 차량 위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게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들이 저런 상황에 놓였다는 게 참담했다.
-약속은 지킬 것이야. 목숨은 살려줄 거니까. 그 누구도 아닌 마켈그로이언의 계약이니까.
그의 말에 마켈그로이언이 허리를 숙였다.
회유와 교언.
그 중 회유에 의한 계약에만큼은 권능이 발생하는 만큼 지켜야 했다.
-어떤가? 보기는 좋지 않아도 마음이 좀 놓이지 않나?
“…….”
부루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질척이며 떠들어 봐야 의미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못난 자의 아우성일 뿐이다.
부루가 대부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몸에 걸쳐져 있던 넝마와 같은 갑주 부스러기를 뜯어 내었다.
지금까지 계속 다시 생성되던 갑주가 이젠 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힘이 소진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전의는 불타올랐다.
절대 여기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다.
불같이 타오르는 을지부루의 눈동자를 보니 다시금 마음이 움직인 듯 기오르그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찾아왔다.
흥미가 돌아왔는지 이전에 던졌던 제의를 다시 내뱉었다.
-이쯤에서 포기하면 어떤가? 사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난 꽤 그대를 높게 쳐주는데.
순간 곁에 있던 마켈그로이언이 놀란 눈으로 기오르그를 바라보았다.
그 뿐 아니었다.
부루와 함께 싸우다가 잠시 숨을 고르는 크로드이언과 크리팔 역시 놀란 얼굴이었다.
만약 기오르그의 회유를 받아든다면, 부루는 단숨에 이인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부루는 단칼에 거절했다.
“지랄 말라.”
-잘 생각해 보지? 저 여인들이 몸뚱이만 남은 채 짐승 우리에서 살아가는 꼴이 나을까? 내게 충성하면 저들도 멀쩡하게 살 수 있게끔 해 주지. 이 정도면 파격 아닐까?
기오르그의 말에 순간 눈이 마주친 마켈그로이언이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파격이시옵니다.
“…….”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이들을 바라보는 군인들은 약간 허탈한 얼굴로 부루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들을 기오르그는 한 눈에 담으며 더욱 미소를 짙게 머금었다.
“여기까진가 봐.”
“염병.”
하나둘 마음에서 전의라는 것을 놓고 있었다.
군인들 누구 하나 저 처참한 모습을 보며 끝까지 가자고 강요하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까지 죽어 나간 이들이 그저 개죽음을 당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반대하지 못했다.
힘도 빠졌고, 저 처참한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다.
그때 부루가 입을 열었다.
“내래…….”
모두의 귓가로 부루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먼 거리였지만, 마치 마법처럼 귓가에 그의 이야기가 들려온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가 이 장면을 마치 중계라도 하듯 마법을 썼을 수도 있었다.
잠시 흐려졌던 부루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모시는 분이 있디.”
-이미 끊어진 연 아닌가? 새로운 삶에서 다시 새로운 군주를 모신다 해서 누가 손가락질할까?
기오르그가 부루의 말에 추임새를 넣듯 말을 이었다. 그러자 부루는 천천히 몸을 피며 뒤를 돌아보았다.
반쯤은 타서 넝마처럼 된 붉은 깃발을 마치 망토처럼 두르고 있는 고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붉은 넝마 한 켠에 언 듯 언 듯 검은 새 문양이 보였다.
“내 전생에 죽으며 아쉬움이 있다면 끝까지 함께 달리지 못했다는 것 하나디.”
대부를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기래서 눈을 감기 전에 다짐을 했디…….”
분노에 타오르던 눈동자가 차분하게 변해 있었다.
흔들림 없는 동공.
가슴을 턱 하니 편 채 마지막 말을 이었다.
“후생이 있어도 다시 뫼시겠다고 말이디.”
-지금 여기서 사라지면 후생 따위는 없지. 그건 약속하지.
희망을 지려 밟는 기오르그의 확신어린 답변.
-우리에게 죽은 자의 영혼은 양분이 되고 힘의 원천이 되니까. 그건 내가 확실하다고 답해주지.
그러자 부루가 더욱 밝게 웃었다.
“기것 또한 나쁘지 않디. 결국…….”
우둑! 둑!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목 근육을 풀 듯이 비틀고선, 말을 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화가 났을 때 하던 행동처럼.
“처음이자 마지막 주군이 같으니까네. 영광 아니간?”
부루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쥐고 있는 대부를 휘두르고 싶은 모양이었다.
-쯧. 하찮은 것에 관심을 쓰면 대단한 줄 아는군.
자존심이 상한 듯 미소가 사라지며 짜증이 찾아왔다.
변덕이 죽 끓듯 이랬다 저랬다…….
기오르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부루의 얼굴이 굳어지며 몸통이 뒤로 틀어졌다.
그리고 시선이 뒤로 향한 순간 부루는 고빈이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튕겨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악!”
순간적으로 빈을 몸으로 감쌌던 묵갑귀마대원의 몸통에 주먹 하나는 충분히 들락거릴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희생에도 빈이 입은 소울아머가 박살이 나며 피가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마법에 의해 하늘로 퉁겨져 올라갔다.
피를 뿌리며 날아오른 빈의 몸통을 부여잡은 것은 하늘에서 유유히 날아다니던 거대한 본 드래곤이었다.
-어차피 저것 없이는 존재하지도 못할 것이 오만하구나. 의지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이들에게나 허락된 것.
부루는 다시 기오르그를 바라보며 목소릴 높였다.
“이럴 거면 고추 떼라우! 쫄리는 거간!”
-쯧. 그걸 도발이라고……. 먼지 같은 버러지가 던지는 도발에 누가 성을 낼까?
기오르그는 다시 손을 뻗었다.
진보랏빛 기운이 그의 손에서 쏘아져 빈의 몸통에 가서 닿았다.
“끄아아아아아아!”
순간 본 드래곤의 발톱에 잡혀 있던 빈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이어 핏줄이 툭툭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의 피부는 끝에서부터 무채색으로 천천히 물들기 시작했다.
-뭐, 저항은 있지만, 이정도야 별것 아니지. 산 채로 언데드를 만드는 건 꽤나 재미있는 과정이지. 특히 저항하면 할수록 제법 좋은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니까.
-크아아아!
그때 아래에서 위로 마룡족 카르탈마니어가 솟구쳐 올랐다.
그토록 투닥거리던 빈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마켈그로이언이 그를 향해 손을 뻗자 폭발과 함께 그의 몸뚱이가 뒤로 날아갔다.
마찬가지로 시간 차로 솟구쳐 오른 헤게루이안 역시 마켈그로이언의 마법에 맞아 도로 추락해 버렸다.
그때 기오르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마켈그로이언 역시 얼굴을 굳히고 주변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표정과 행동을 이 자리에 있던 모든 마족들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경계의 시선과 일그러진 표정들.
-허?
기오르그의 입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푸른 기운이 사방에서 파도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계속 거슬렸던 기운이었다.
찝찝하고 끈적한. 그런데 그것들이 요동치기 시작 한 것이다.
그리고는 마치 거미줄처럼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이어진 곳은 바로 을지부루였다.
“아!”
누군가가 비명처럼 놀란 음성을 터트렸다.
이 상황을 넋놓고 바라보던 군인들과 소환자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기오르그가 한쪽에 커다랗게 띄워놓은 영상쪽에 닿아 있었다.
세인이 무언가에 떠받혀 있었다.
마치 인간의 형태를 한 푸른 뭉텅이에 구함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이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 영상을 향할 때 기오르그의 시선은 저 멀리 세인이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