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열제 부루강림기-273화 (273/305)

제273화 구걸해서 된다면

“굳이 역사까지도 갈 것 없이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이렇게 알릴 거다.”

기원이 흰자를 번뜩거리며 폭주하듯 말을 연달아 붙여 나갔다.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저 빌어먹을 부루라는 강림자를 내세워 평화라는 합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기회를 걷어차 버린 놈들로 만들어 주겠다는 거다. 난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중재자고.”

기원의 말에 다들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구도원이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그걸 누가 믿…….”

“걱정하지 마. 믿는 자에겐 먹을 걸 던져주면 되거든.”

“지랄 단세포냐? 그게 통하게?”

“안 믿는 놈들은 가족들 세워놓고 마물 먹이로 하나씩 던져주면 되겠지. 믿을 때까지. 그리고 세상에 희망이 사라지면 그때도 지금처럼 뭉칠 수 있을까?”

기원의 말에 도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솔직히 단순하고 과격한 방법이지만, 왠지 기원의 장담대로 흘러갈 것 같았다.

이 전쟁에서 진다면 말이다.

“다행이네.”

그때 뒤쪽에서 누가 중얼거렸다.

그 태연한 목소리에 도원이 얼굴을 구기며 뒤돌아보았다.

“젠장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역시 잘 터지네. 이 와중에도 말이야.”

태평스러운 말을 뱉은 건 바로 임병화였다. 그는 지금 스마트폰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병화가 피식 웃으며 스마트폰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억울하잖아. 여기까지 와서 죽어 나간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오기원이 어떤 개새끼인지는 잘들 알아야잖아.”

“아재 병화 TV요?”

“그런 건 아니어도 나름 인플루언서니까.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방송 때리는 빈이 옆에 있다 보니 뭐 이 정도는 기본이지.”

“헐?”

“서당개 삼 년이면 라방은 기본 아니겠냐?”

휴대전화기를 천천히 내리며 병화가 허연이를 드러내며 살기를 뿌렸다.

“오기원이. 매국노면 매국노로. 개새끼면 개새끼로 그냥 살아라, 쫌.”

“이……!”

병화의 말에 기원이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는 그런 기원에게 쐐기박듯이 몇 마디 더 남겼다.

“역겹게 사람 흉내 낼 생각 하지 말고.”

“뭐해! 조져!”

기원의 노기에 찬 외침에 마족병들의 물결이 그들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다들 무기를 고쳐잡으며 살짝 후회했다.

“빌어먹을 자극이 너무 컸나?”

“닥치고 있었으면 뭐? 봐줄 거 같기는 하고?”

병화의 후회 섞인 중얼거림에 도원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이후 둘의 표정에는 더는 후회라는 감정은 없었다.

오로지 전의만이 남았다.

콰드드득!

“제엔장!”

피범벅인 채로 대부를 휘두르던 고빈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앞에 있던 마갑주를 입은 군인의 몸뚱이가 좌우로 뜯기며 그 피가 그에게로 훅 뿌려졌다. 뜨듯하면서도 비릿한 냄새.

그리고 미안함.

방금 그 군인은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마물을 대신 막아주었다. 그 댓가로 자신의 생명을 소모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방패를 자처했던 이를 좌우로 나누어 들고 괴성을 내지르는 마족의 머리통에 빈이 자신의 대부를 박아 넣었다.

콰작!

이것으로 복수는 했다지만, 죽은 자는 돌아오지 못한다.

“위험해!”

바바바바!

이번에도 또 누군가가 달려들었다. 빈의 몸뚱이가 거세게 밀려 넘어졌다.

그리고 머리통이 두 쪽이 났던 중급 마족과 자신을 밀어낸 누군가가 있던 자리에는 연신 폭격이라도 맞은 듯 마법이 뿌려지고 있었다.

“뒤로! 뒤로! 대열 갖춰!”

바닥을 뒹굴던 빈의 양어깨를 좌우에서 다가온 이들이 부축하며 들어 올렸다.

그리고 뒤늦게 잠시 밀려났던 묵갑귀마대원과 가우리 병사들이 빈의 주변으로 되돌아왔다.

“젠장! 제엔장!”

“정신 차려!”

욕설을 뱉는 빈에게 강문호 중령이 고함을 쳤다.

“후욱! 훅!”

“정신 못 차릴 거면 차라리 후방으로 가던가!”

“여기에 후방이 어딨어요!”

“그럼 정신 차려!”

잠시 흥분했단 것을 모르지는 않았는지 빈은 심호흡하며 조금이나마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 사이에도 마법과 칼과 창, 그리고 어디선가 집어 들고 던져낸 파괴된 차체들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그나마 가우리 병사들과 묵갑귀마대원이 나서서 막아주어 조금 전처럼 급박한 상황은 살짝 피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주변에는 아군보다 적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뒤에서는 아직도 아군이 쏘아대는 총소리 등이 울려 퍼지고는 있었지만, 아까보다 조금 더 거리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나마 적진을 향해 계속 밀고 나갈 때는 이러지 않았다.

그러나 을지부루가 멈추어 서는 순간 상황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마치 검투사들의 생사가 결정되는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처럼 마족병들이 몸뚱이로 장벽을 쌓아 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들은 그 안에서 고립되고 있었다.

“으아아아!”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여기저기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총 끝에 대마물 용 코팅이 된 대검을 매달고 찌르고 방아쇠를 당기는 군인부터 총은 어디에 뒀는지 보이지 않고 양손에 야삽을 휘두르는 이도 있었다.

전투복에 환도를 들고 휘두르기도 하고, 누구는 부월수들에게 지급된 것과 같은 도끼를 휘두르기도 했다.

퍼퍼퍼퍼퍼펑!

“뒈져라! 쫌!”

한쪽에서는 멈춰선, 차량을 방패 삼아 거치된 40mm 마물탄을 연신 쏘아대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가스! 가스 없어?”

“여분 없습니다!”

“젠장!”

결국 그들도 대검을 뽑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쏟아내던 탄이 하나둘씩 침묵하자 삽시간에 몰려든 마족병들에게 하나둘씩 난도질을 당하며 쓰러져 나갔다.

그런 군인들의 희생이 안타까운지 푸르른 운무가 일렁이다가 흩어져버렸다.

희망이 꺾이는 순간 인간은 무력해지는 법이라고 했다.

그 어떤 때에도 나아가던 을지부루의 발걸음이 멈춘 순간 희망은 점점 희미해졌다.

특히 저 시체로 만들어진 탑 위에 올라앉아 무료한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의 당당함이 더한 절망을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간간히 그를 향해 포탄이 날아오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도 가지 못하고 수십 미터 위에서 터져나가기만 했다.

그뿐 아니라 누군가가 악을 쓰고 대마물용탄을 쏟아부어도 봤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허공에 총질이라도 한 듯 어느 하나도 그의 몸에 도달하는 것이 없었다.

아니 몸은 둘째치고 탑 주변을 통과조차 하지 못했다.

대신 그렇게 화력을 쏟아낸 방향으로 마법사들과 원거리 무기를 투사하는 마족병들로 인해 우선적으로 제거되었다.

폭음이 울리고 군인들과 차량들이 바닥에서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면 찾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마치 니 들끼리 놀라는 듯.

그렇다고 부루를 도울 수도 없었다.

강림자들이 뭉쳐서 전진해 나갔지만, 그 주변에조차 도달하지 못했다.

마치 문지기처럼 나타난 마족들이 강림자들을 쓸어버렸다.

그게 아니더라도 부루와 군주들의 전투에서 튀어나온 파편들에 의해 그대로 빛으로 변해 버렸다.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만의 싸움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와아아아!

아직도 뒤에선 함성과 함께 몰려오는 군인들의 목소리가 울려오고 있었다.

마치 고립된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인 듯 용맹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마치 오지 말라는 듯.

포기의 심정이 더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 * *

상황실에는 침묵만 감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환호도 외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이들도 다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협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 대상은 양현재 대통령이었다.

승산이라는 것이 점점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미국 쪽 채널 역시 침묵한 지 오래였다.

당연했다.

이들이 보는 장면은 각국으로 송출되고 있었으니까.

“협상이라고요? 지금?”

합참의장이 협상을 언급한 국무위원에게 울분 섞인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다 죽으면 협상도 없습니다. 지금 저기 안 보이십니까?”

합참의장의 울분 섞인 외침에 국무위원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은 작은 도시 하나의 면적을 하늘에서 비추고 있는 위성영상이었다.

전장의 전체상황을 보여주는 화면이었다.

그 안에서 까만 점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이쪽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절반 이하로 줄어 있었다.

그나마도 외부 쪽은 이탈을 시도하고 있었다.

탈주병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욕하는 이들은 없었다.

지휘체계도 무너진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에는 시체뿐.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그 어떤 누구도 목숨을 담보로 전장으로 밀어 넣을 자격은 없었다.

지금까지 싸워준 것만으로도 사실 고마워해야 했다.

후방에서 차량의 행렬이 다시 밀고 올라가는 장면이 눈에 보였다.

보급행렬이었다.

그러나 그 차량이 움직이던 위로 커다란 원이 그려졌다. 빛과 함께 만들어진 원.

“아, 저거…….”

누군가가 힘없는 탄식을 흘렸다.

커다란 원이 사라지고 난 뒤의 장면은 처참했다.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겨나 있었고 그 안에 달리고 있던 차량은 흔적만 남아있었다.

그 뒤로는 폭발의 후폭풍으로 이리저리 뒤집어진 차량이 잔뜩이었다.

뒤쪽에 있던 차량은 방향을 틀어 크레이터를 피해 크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향해 마치 스타크래프트의 저글링과 같은 모습의 마족들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나아가던 차량이 하나둘씩, 개미 떼에게 뒤덮이듯 덥혀가고 있었다.

“지금 저 안쪽에선 칼이나 총을 거꾸로 들고 싸우고 있습니다. 이길 수 있겠습니까?”

“……싸워선 안 됐습니다.”

양현재 대통령은 그들의 절망 어린 말을 들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참담했다.

어쩌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위 최강이라 불리던 나라들 조차 전력을 쪼개 지원을 해 주었다.

마치 영화에서 지구방위대를 결성한 것처럼 말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능성 있는 나라라는 인정에 잠시 가슴이 부풀어 올라 현실을 바라보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후회도 들었다.

“미국 쪽 마지막 전선이 무너졌다 합니다. 남부 쪽 대도시에 소거 명령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중국 쪽은 항쟁을 포기한 모양입니다. 군대가 물러서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에 새로운 침식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유럽 쪽도 다시 대침식때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마치 멸망을 알리듯 각국의 소식이 전달되고 있었다.

잠시나마 사라졌던 침식지들이 상황이 반전되자 다시금 사방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이전의 침식 현상과는 다를 거라는 이야기는 미리 들었다.

이 별을 힘으로 바꾸기 위한 침식 현상은 아니고 그저 마물을 뿌리기 위한 일종의 무작위 포털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힘이 나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전쟁이 균형이 꽤 기운 뒤의 일일 것이라고 마법사인 헤게루이안이 떠나기 전 알려줬던 사실이다

그게 지금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총리님입니다.”

만에 하나 이곳이 무너질 것을 대비해서 다른 곳에 있는 박용우 총리가 연결해온 것이다.

“…….”

화면이 바뀌며 박용우 총리의 초췌한 모습이 비쳤다.

[대통령님.]

“말씀하십시오.”

[더는 의미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양현재 대통령은 무어라 답하지 못했다.

“살려달라 구걸이라도 해야 할까요?”

[해서 된다면요.]

박용우 총리가 덤덤하게 답했다.

“그건 그렇지요.”

양현재 대통령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만약 말이 통했다면 이 전투 자체가 있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닌 것을 알면서도 지금은 답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