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민폐는 사절
을지부루의 몸을 속박한 공포의 군주 크리팔이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콰아악!
창하나가 그의 몸을 스치며 날아갔다.
“젠장.”
콰앙! 그에게 창을 날린 천유화가 용병군단의 마족에게 맞아 옆으로 처박혔다.
-쯧.
하지만 그 짧은 방해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는지 부루가 자신의 몸을 옭아매던 핏빛의 손들을 대부로 잘라내며 몸을 날렸다.
-어딜!
크리팔이 그를 향해 손을 뻗자 핏빛 방패가 만들어졌다.
콰앙! 쾅! 쾅!
그 방패를 부루가 대부로 연신 깨며 나아갔다.
거침이 없었다.
그의 나아감에 크리팔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때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크로드이언이 부루를 옆에서부터 치고 들어왔다.
콰쾅!
부루의 얼굴에 그의 머리통보다도 큰 주먹이 틀어박혔다.
으득!
그러나 부루는 마치 얼굴로 주먹을 막기로도 한 것인 양 버티며 크로드이언의 팔을 잡아 매쳤다.
부와아악!
거칠게 한 바퀴 맴돈 크로드이언의 몸뚱이가 땅에 처박혔다.
콰아앙!
땅거죽이 푹 패이며 크로드이언의 몸뚱이가 다시 처박혔다. 그 사이 부루의 온몸으로 붉은 화살들이 삐죽삐죽 솟구쳤다.
정확히는 날아와 박혔다.
“옌장!”
부루가 성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크리팔이 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어 부루의 발등 위로 또다시 핏빛의 화살이 박혀 들었다.
마치 곤충을 잡아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표본처럼 바늘을 박아 넣듯이 말이다.
“으와아아압!”
그러나 부루가 힘을 주자 발등이 터져나가며 그의 발이 쑥 하니 뽑혀 올려졌다.
-미친!
그 괴력에 놀란 크리팔이 양손을 뻗으며 이를 악물었다.
조금 아까 그의 몸을 사로잡으려 했던 핏빛 손길들이 다시금 솟구쳐 오르며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괴력을 발휘하며 나서던 그의 몸뚱이가 다시금 붙들리는 순간이었다.
-쳇.
그 모습에 몸을 일으키던 크로드이언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크리팔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모양이었다.
-자, 이제부터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볼 것이다.
-젠장! 이건 무효라고!
공포의 권능을 발휘하는 그를 보며 크로드이언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하지만, 부루의 온몸을 뒤덮은 핏빛은 맹렬하게 휘감아 돌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부루의 몸에서 빠져나오더니 무언가 형상을 연 달아 만들기 시작했다.
그걸 보던 크리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포의 권능을 통해 부루가 가장 두려워하는 형상이 그의 앞에 만들어져야 했다.
보통은 그러면 그것과 싸우다가 정신이 천천히 뭉개지게 된다.
그런데 공포의 대상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대신 수많은 이들의 형상이 만들어졌다가 흐드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내 기묘한 성체의 모습이 만들어졌다가 또다시 여러 사람의 형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푸하하하! 공포의 권능도 별 의미 없는 것 아니더냐?
크로드이언이 웃겨 죽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크리팔은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푸흣! 그거였나? 그것이야? 정말 그거라고?
그래도 수확이 있었는지 크리팔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한 거간?”
부루가 불쾌한 얼굴로 몸에서 빠져나간 뒤에 그의 앞에서 춤을 추듯 꿀렁이는 핏빛의 물줄기와 크리팔을 번갈아 보았다.
그때 크리팔이 입을 열었다.
-하긴. 지 목숨 버리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주변이 다치는 것은 극도로 두려워하는 종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 다만 이 정도로 강렬한 건 드물지만.
크리팔의 중얼거림에 부루의 눈동자에 불똥이 튀었다.
“지금 뭐한 거인지 묻디 않네.”
-네놈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지.
“…….”
-비교적 단순한 존재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
크리팔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을 늘어놓았다.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부루가 핏빛이 만들어내는 형상 너머의 크리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가리 함부로 나불대디 말라.”
-광신도와 같은 이들도 비슷했지. 뭐 나름 이건 놀랍긴 하지. 불특정 다수를 위한 거니까.
“어차피 죽일 거디만 다시 한번 말하디. 아가리 함부로 열디 말라.”
부루의 얼굴이 점점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같이 타오르는 분노였다.
-그래서? 궁금하군. 지켰나?
그 질문에 부루가 그를 노려보았다.
-왜? 모르는가?
“아니. 똑똑히 기억하디. 내래 분명히 보고까지 했으니까네.”
그날 퇴각하는 적들을 보았고, 그를 향해 달려오던 대무덕을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지킬 수 있었음을 말이다.
캬아악! 캬악!
갑자기 사방에서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리팔의 눈가가 살짝 찡그려졌다. 마치 대화에 방해가 되었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그 비명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천유화와 가우리의 병사들이 마족병들을 학살하는 소리였다.
몸통에 칼과 창이 박히고 마법에 사지 중 하나가 날아가도 오로지 적을 죽이는 데에 몰두들 하고 있었다.
-으음?
의외라는 표정.
모르는 이들이 보았다면 묵갑귀 마대와 가우리의 병사들이 오히려 마족이라 부를 정도로 포악하게 칼을 휘둘렀다.
“니보라. 불난 곳에 기름을 부으면 되간?”
그렇게 미친 듯이 살육을 이어 나가던 그들의 시선이 한 번씩 한 번씩 적들을 죽일 때마다 크리팔을 향했다.
서늘한 살기를 담고.
마치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나는 듯 말이다.
“기래서 장담하는데 말이야. 이번에도 지키갔어.”
그때 핏빛으로 일렁이던 성의 형상이 무너지며 이내 그것은 여성들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지금까지 나왔던 인간들의 형상과는 달랐다.
좀 더 이목구비가 자세한 모습이었고, 복장도 달랐다.
자세한 형상은 아니었지만, 용케 그것을 알아보는 시선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판도라! 판도라입니다!”
그 말은 마켈그로이언의 뒤쪽에서 튀어나왔다.
있는지도 몰랐던 이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다들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오기워어어언!”
고빈의 입에서 튀어나온 외침이었다.
“오기워어어언!”
고빈의 외침에 분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하지만 오기원은 마치 공이라도 세웠다는 듯 마켈그로이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놈에게 가장 큰 절망을 선물해 주고 싶습니다! 판도라를! 그가 아끼는 판도라를 사자의 술로 되살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다급하게 쏟아낸 말.
마켈그로이언이 갑자기 끼어든 오기원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게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의 흥미를 끌었던 모양이었다.
-흐음. 그건 조금 재미있겠군. 보통 지키고자 하는 대상을 잃게 되면 무너지게 마련인데. 과연 어떨까. 더욱 분노해서 강해질까 아니면…… 다들 그렇듯 스스로 무너질까.
기오르그의 말에 마켈그로이언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하시면 풀어야지 않겠습니다? 허나 인제 와서 찾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그때 오기원이 눈을 빛내며 마켈그로이언에 입을 열었다.
“제가 보았습니다. 아까 스치듯 보았습니다. 분명 이곳에 있었습니다.”
마치 신분 상승의 기회라도 얻은 듯 말을 연이었다.
순간 묵갑귀마대원과 병사들은 얼굴을 굳혔다.
그들 뿐이 아니었다.
기동대원들과 마갑주를 입은 군인들 역시 이를 악물었다.
그때 을지부루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해 보라.”
오기원은 그의 말을 듣곤 눈을 빛내며 목소릴 높였다.
“허세입니다. 놈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지키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잖습니까. 아마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길티. 그런데 착각하디 말라. 전장에 나온 순간 그들은 지켜야 할 대상이 아이야. 함께 싸우는 존재인 거디.”
을지부루는 뒤를 돌아볼 생각도 없이 오로지 정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까짓 복수해 주면 되디 않갔어?”
오기원은 당황하면서도 부루를 주시했다.
대부 자루를 쥔 손이 꽉 쥐어져 있었다.
분노하고 있는 것은 맞았다.
“해 보고 아니면 말면 되지. 어차피 흥이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오기원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묻자 마켈그로이언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자신의 권속임에도 나대는 모습이 영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기오르그는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듯, 마켈그로이언에 입을 열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군. 어떤가?
-대령하겠사옵니다.
오기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치 한 건이라도 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 화살이 날아들었다.
“허억!”
파사삭!
하지만, 마켈그로이언이 손을 들어 올리자, 기원을 향해 날아오던 화살은 닿기도 전에 그대로 바스라져 버렸다.
가우리의 병사 중 하나가 쏘아낸 화살이었다.
아쉽다는 표정.
그때 부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착각 말라. 그들을 지키고 싶었던 것은 내가 그리워하던 이들과 유일하게 연결된 이들이었기 때문이야. 할 테면 해 보라.”
도발인지 아니면 정말 그래도 된다는 것인지 던진 말에 마켈그로이언이 웃으며 기원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뭐, 이젠 나도 궁금해졌군.
“어억!”
기원의 머리 위에 올려진 마켈그로이언의 손에서 보랏빛 기운이 안개처럼 퍼져 나왔다.
동시에 기원은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사람마냥 몸을 떨었다.
“끄어어어!”
그렇게 몸을 부르르 떠는 사이 고개를 끄덕인 마켈그로이언이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속삭임이 퍼져나갔다.
-이 얼굴을 가진 존재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자에게는 그 본인과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어떤가? 이건 회유와 교언의 군주인 나 마켈그로이언과의 계약.
그 속삭임이 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그가 미소를 지었다.
-거기군.
마켈그로이언이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곳에 보랏빛 기둥이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순간 모든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찾았다!”
기원의 얼굴이 환해졌다.
판도라 멤버들의 주변으로 보라색 빛의 기둥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어, 어떤 새끼야!”
“누구야!”
그녀들의 주변에 있던 군인들과 소환자들은 당황하며 좌우를 살폈다.
마치 배신자가 누구인지 찾아내겠다는 듯.
그때 보라색 기둥이 내려앉으며 속이 텅 빈 갑주의 형상에 칼과 방패를 든 고스트 계열의 존재들이 주변을 떠돌며 목소리를 흘려내었다.
-계약은 지켜질 것이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걸 본 세인과 판도라 멤버들이 입을 떡 벌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웃긴다고 해야 하나?”
“그러게.”
“이럴 줄 몰랐네.”
세인과 제이 그리고 레이니와 송가은 작가의 머리 위에 그 존재들이 떠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육의찬 액션스쿨 감독과 전창걸 대표가 얼떨떨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지금 이게 뭐, 뭐냐?”
그때 제이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놈이 약속했잖아요. 우리 있는 곳 알리면 목숨 보장한다고요. 이제 보자고요. 어떻게 하나.”
“어차피 도망 다니는 것도 힘들고.”
레이니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인생이 민폐 캐릭터인 것도 취향에 안 맞잖아요. 우리.”
세인도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요즘 그런 캐릭터는 발암이라 천만 안티만 양성하지.”
송 작가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들의 반응에 다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세인이 주변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살아남길 바랄게요. 콘서트 약속했으니까요.”
“대표님 나와요.”
“왜, 왜!”
“노인네는 좀 빠지라고요!”
레이니도 운전석의 전 대표를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전 대표는 이를 악물며 그대로 악셀을 밟았다.
“염병! 내가 니들 소속사 대표인 게 천추의 한이다!”
그녀들을 태운 차량이 앞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주변에 있던 모두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염병! 우리도 간다!”
모두가 그녀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