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그 말만은 하지 말지
* * *
콰아아앙!
-흠?
파괴의 군주 크로드이언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공교롭게도 같은 무기를 쓴다.
자신도 도끼.
저쪽도 도끼.
그럼에도 자신은 있었다. 마계에서 파괴력만큼은 최고로 치는 군주다.
물론 그 이전에야 마룡의 군자가 힘과 마법 양쪽으로 강력함을 자랑했기에 가려진 바가 있었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 자리는 그에게 기회였다.
-마수의 군주를 꺾었다고 하더니 힘은 좋구나.
“내래 힘은 어디 가서 안 빠지디.”
이 자리가 기회인 이유는 바로 그의 위치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균형이 무너진 순간 그는 기오르그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군주 간에 힘겨루기하던 균형은 무너져 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대군주가 탄생하고 세력에 변동이 생기게 되니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기오르그와 함께 최강의 반열에 있던 마룡의 군주가 사멸했고, 이 땅에서 마수의 군주도 사멸되었다.
이어서 대군주 휘하의 최상급 마족 둘이 새롭게 기존의 군주를 꺾고 새롭게 그 자리를 차지했다.
즉 마계의 일곱 군주 중 넷이 사멸했다.
대군주가 된 기오르그를 제외하면 기존에 남은 군주는 파괴의 군주인 그와 함께 이 자리에 온 공포의 군주다.
어떻게 보면 기회다.
왕의 자리는 결정이 되었으니 그 아래에 새로운 대군주의 위치를 차지할 기회였다.
최소한 새롭게 군주 위에 오른 마족들에 비해 뒤처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때 공포의 군주인 크리팔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지금 을지부루가 이끄는 무리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었다.
평소라면 우습다 할 수 있었다.
겨우 상대 군주의 수하 따위와 손을 섞는 것 자체가 웃음거리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꽤 까다로워 보였다.
이백 여에 달하는 무리가 마치 한 몸처럼 진퇴를 하며 훼방을 놓고 있었다.
-이런 겁대가리 없는 놈들!
이내 공포의 군주 크리팔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가 내뱉은 분노 섞인 외침에 크로드이언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풉!
겁대가리가 없는 놈들이란 말을 왜 했는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공포의 군주가 가진 권능중 하나가 바로 공포 그 자체다.
비등한 격을 가진 이들에게는 의미 없지만, 격이 떨어지는 이들에게는 좋은 권능이었다.
그 권능에 당하는 순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는 모가지만 수확하면 된다. 즉 압도적인 약자 능멸의 권능이다.
그런데 저 정도 반응이라면 이빨조차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웃지 마라!
신경질적인 외침에 크로드이언이 무어라 대답하려는 순간 볼따구가 강렬하게 울렸다.
빠아악!
사 미터가 훌쩍 넘는 크로드이언의 볼때기가 돌아갔다.
그의 볼때기에는 을지부루의 머리통이 틀어박혀 있었다.
“쌈하다 어디 딴청이간?”
그 말에 순간 열이 치솟았다.
-힘만 쓸 줄 아는 머저리 같은 놈.
공포의 군주 크리팔은 크로드이언을 보며 냉소를 던졌다. 하지만 그의 불편한 심기는 변하지 않았다.
“조져!”
“던져!”
“다리부터 자근자근 잘라! 높이 좀 낮추자!”
자신의 주변을 오가며 성질을 닥닥 긁고 있는 무리 때문이었다.
공포의 권능을 썼음에도 이 모양이다. 즉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보통 저런 게 안 먹히는 집단이라면 말 그대로 겁이란 걸 모르는 무감정한 무리라던지, 아니면 광신도와 같은 정신 무장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광신도는 아닌 것으로 보아 겁이 없는 존재라 보아야 하는데 생물체라면 본래 가진 공포의 감정이 없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이들의 격이 자신 혹은 최상급 마족의 반열에 올라 있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나하나가 상급 마족에 달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감을 가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콰콰콰!
-흠.
내질러오는 창을 본 크리팔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위에 보랏빛으로 반투명한 원이 서너 겹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쩌저정!
제법 위력적인 창이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아까 기오르그와 함께 본 전장의 장면에서 최상급 마족과 일대일로 붙어 쓰러트린 존재였다.
확실히 강하긴 하지만, 군주의 위를 노릴 정도는 아니라 판단이 되었다.
그런데도 곤란한 것은 지금 잡다한 것들이 함께 뭉쳐 자신을 견제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네놈들에게는 나는 과분한 상대니라.
그러나 군주라 함은 무리를 이끄는 자를 의미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수족들이 그들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저 공포에 물들게 한 뒤에 손쉽게 몰살시켜서 새로운 저 군주의 이목을 끌려고 했던 계획은 잠시 접어두어야 할 듯했다.
“어디가! 쫄았냐!”
-…….
공포의 군주에게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었다.
-네놈 두고 보자.
“엿이나 먹어라! 두고 보잔 새끼가 제일 안 무섭더라!”
크리팔은 다시 한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창질하는 놈만큼은 반드시 내 손으로…….’
크리팔은 제대로 체면을 구긴 샘이 되었다.
회유와 교언의 군주인 마켈그로이언은 저 쟁탈전에서 한걸음 빠졌다.
이곳의 상황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자신의 권능은 직접적인 전투에는 손색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 주변의 잡다하게 몰린 것들을 상대하기에는 별문제 없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꽤 고생들 했군. 내 그대들에게 기회를 주지. 목숨을 담보로 새로운 삶을 사는 기회. 그대들의 목숨으로 보증을 거는 계약인 거지. 어떤가?
단순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권능은 단순하지 않았다.
혼란을 일으키고 설득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동료에게 칼을 돌리게끔 만드는 그런 강력한 정신계 마법에 가까웠다.
우우우웅!
제의를 하듯 한 손을 펼치자 강력한 파장이 군인들과 소환자들에게로 번져 나갔다.
그때였다.
“뭐라 씨부리쌌노?”
“지금 쏴! 만화처럼 변신 다 할 때까지 기다릴래!”
타타타타타타!
순식간에 공격이 쏟아졌다.
-이 무슨…….
순간 마켈그로이언은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이게 뭔가 싶었다.
물론 회유가 모두 먹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일부만이라도 먹히는 순간 서로를 향해 칼을 뿌리고 그러다가 보면 정신의 벽이 무너진다.
회유는 그렇게 마치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게 된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반응이 이상했다.
그때 누군가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미친놈, 말을 잘 골랐어야지. 아파트 담보도 다 못 갚았는데.”
“씨바 대한민국에서 보증 잘못 서면 삼대가 망하는 거 몰라!”
오히려 담보와 보증이란 말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
마켈그로이언은 뭔가 자신이 단어 선택을 잘못했구나 싶었다.
한바탕 시원하게 욕설을 뱉어낸 광호를 보며 옆에 있던 강문호 중령이 웃으며 질문했다.
“누구 집안에 보증 잘못 선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아버지요.”
“아…….”
“집도 담보 잡고요. 씨바.”
“…….”
강 중령은 그의 분노를 이해했다. 솔직히 조금 전 뭔가 저쪽에서 수를 쓴 것은 느꼈다.
약간 나른해지면서 그의 제의를 귀담아듣게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다만 그 집중이 깨어진 단어가 바로 담보랑 보증이었다.
담보 소리를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대출금이 떠올랐고, 짜증이 났다.
그러면서 정신이 되돌아왔다.
보증도 마찬가지.
“씨바, 신원보증 통과 안 돼서 대출도 나가리가 됐었는데!”
옆에서 중위 하나가 열을 올리며 대마물 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역효과가 제대로였다.
전쟁터에서까지 담보와 보증 이야기를 들으니 더 열받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그 이상한 수법이 통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다.
-끅끅끅끅끅!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가 의자의 팔걸이를 두들기며 배를 잡고 웃었다.
-이거 이거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재미있구나. 역시 오길 잘했어!
힘의 차이는 있었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자신과 각을 세우기도 했던 군주들이다.
그런 그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꽤나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황은 잠시 군주는 군주였다.
그들이 마음을 제대로 먹자 대항하는 이들은 덧없이 스러져갔다. 용기가 아무리 높다 해도 가진 힘의 차이는 극복하기 힘든 법이었다.
회유와 교언의 군주가 뻗어내는 손짓에 대항자들은 수십 이상씩 쓸려나갔다.
그의 용병군단이 끼어들자 지금까지 버텨왔던 것이 허무할 정도로 뒤로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쓸려나가면서도 꾸역꾸역 앞으로 밀고 나왔다.
마치 을지부루와 묵갑귀마대를 중심으로 한 핵심 병력이 고립되면 끝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악다구니를 쓰는 모습이 꽤 즐거웠다.
다만 그 역시 다른 군주들과 같이 불쾌한 점 하나는 있었다.
-역시 안되는군.
그가 한쪽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향해 손을 뻗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별의 찌꺼기가 만들어내는 이적이 이 정도로 저항이 큰 것은 처음이군.
사자의 권능이 발동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을 막는 것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푸른 빛 때문이었다.
그들이 별의 찌꺼기라 부르는 별의 마지막 힘.
사실 그가 이렇게 직접 행차를 했던 이유도 바로 이 현상이 꽤 신기했던 점도 있었다.
-뭐 상관은 없겠지.
콰아앙!
그때 한쪽에서 또다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공포의 군주인 크리팔이 땅바닥에 처박히며 만들어낸 소리였다.
물론 그를 그렇게 처박아버린 을지부루 역시 멀쩡하진 않았다.
콰콰쾈!
그를 바닥에 처박은 대신 파괴의 군주 크로드이언의 발에 채여 땅바닥을 파고들었다.
이내 크로드이언이 손을 뻗자 마력탄이 연달아 그의 몸을 두들겨 대었다.
마력탄이라고 해도 다 같은 게 아니다.
군주의 권능에 따라 성질이 다 달랐다.
지금 크로드이언의 마력탄은 오로지 물질의 파괴를 담은 힘이 실려있었다.
그 때문인지 다시 생성되었던 부루의 갑주가 이리저리 튀기 시작했다.
몸을 두르던 찰갑의 철편들이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사방으로 뿌려져 나았다.
역시나 둘은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음. 조금 아쉬운데.
내심 이 계단 위로 올라서는 것을 잠깐이나마 상상했었나 보다.
이런 모습에 실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지만 이내 기오르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호!
마력탄을 가르고 날아든 대부가 크로드이언의 어깨를 찍은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잠시 주춤하는 사이 구덩이에서 튀어나온 을지부루가 허리춤에서 환두대도를 뽑아 그대로 다리를 찍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감히 내 몸에 생채기를 내다니!
분노한 크로드이언이 자신의 도끼를 내질렀지만, 을지부르는 몸을 슬쩍 틀어 피하면서 오히려 도끼를 쥔 그의 손목을 두 팔로 감쌌다.
이어서 몸을 맴돌리자 세배에 가까운 덩치의 크로드이언의 몸뚱이가 붕 떠버렸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공포의 마왕인 크리팔이 날린 핏빛의 창이 허공에서 반 바퀴 돌아 떨어지는 크로드이언의 등짝에 작렬했다.
퍼어엉!
-꾸억!
콰아앙!
기괴한 비명과 동시에 크로드이언이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사이를 뚫고 을지부루가 대부를 쥔 채 마법을 날린 크리팔을 향해 쏘아져 갔다.
하지만 크리팔도 군주다.
심지어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존재.
크리팔이 땅바닥을 향해 손을 뻗자 핏빛의 손이 솟구쳐 올라 을지부루의 몸통 여기저기를 잡아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