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격이 맞는 상대
* * *
-오기를 잘했군. 재미 있어.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가 웃으며 조변을 둘러 보았다. 그러자 다들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동작조차 여유로움이 넘쳐 보였다. 반면에 을지부루 쪽은 사생결단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니보라. 왔으면 손을 섞어야 하디 않갔어? 둘이 마무리 짓디.”
부루가 먼저 도발 어린 말을 뱉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반응은 서늘했다.
마치 감히?
그런 시선이었다. 하지만, 부루는 오직 기오르그를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기오르그가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끔 재주를 부렸으니…….
말 끝을 줄인 기오르그가 자신의 뒤쪽을 향해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팔이 마치 자석이라도 된 듯 주변의 사물들이 일제히 그가 손을 뻗은 방향으로 빨려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바닥에 깔린 수 많은 시체들.
시체들이 데구르르 구르며 그 손이 향한 곳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진공청소기에 빨려오는 쓰레기와도 같았다.
그러나 움직이는 시체들은 쓰레기들이 아니었다.
죽음이 가까운 길임을 알고 웃으며 떠나왔던 이들이다.
하나라도 더 죽여 보겠다고 쓰러진 가운데에도 총질을 하고 버티던 이들이다.
조금 전까지 이 세상 이렇게 버릴 수는 없다고 함께 싸우던 전우들이다.
그들의 시신들이 끌려오고 굴러오며 그의 뒤에 작은 언덕 마냥 쌓였다.
이어서 울려오는 기괴한 파열음.
우두둑! 두둑!
시체의 언덕이 뭉쳐지는 소리와 함께 뼈와 육신이 부러지고 뒤틀어지며 쥐여 짜지는 소리가 울려왔다.
진득한 핏물이 터져나오며 주변으로 번져 나갔다.
작은 시체의 언덕 위로 육신으로 만든 계단이 생기고, 그 위에 또 뼈가 뭉쳐진 의자가 만들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보기 좋군.
기오르그가 웃음을 흘리는 순간 부루의 손에서 대부가 날았다.
부와아아악!
그렇게 날아간 대부를 회유와 교언의 군주 마켈그로이언이 잡아챘다.
터어억!
-예의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웃으며 대부를 쥔 손에 보랏빛 불을 피워 올렸다.
그러자 마치 질 좋은 땔감처럼 대부 자루에 불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타오르던 대부가 먼지처럼 사라지며 다시 부루의 손에 되돌아와 있었다.
그 사이 기오르그는 계단을 올랐다.
한걸음, 다시 한걸음.
그렇게 한 걸음씩 오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좋구나. 특히 표정들이 좋아. 육체 자체의 내구도는 허약하기만 하지만, 표정들이 좋구나. 좋은 재료가 되겠어.
그는 자신이 만든 시체의 산을 오르며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는 얼굴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얼굴이 마지막에 지은 표정들이었다.
일부는 공포.
일부는 처절한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부는 비통함을 간직하고 있었고, 일부는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끝까지 싸웠던 이들이었는지 이를 악물고 무언가를 바라보던 모습 그대로 굳은 표정도 존재했다.
기오르그는 그 모든 감정의 흔적이 흡족한 모양이다.
그러더니 천천히 뼈와 살로 만들어진 의자 앞에 멈추어 서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지배자처럼.
대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릅뜬 을지부루의 두 동공에는 오로지 시체의 산 위에 여유롭게 앉아있는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부루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질문을 던졌다.
“거기가 네 묘자리간? 나쁘디는 않구나야. 희생당한 친구들을 위한 재물로 말이디.”
그리 높지 않은 목소리로 던진 말이었지만, 분노로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쯤은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그 어투에는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재물? 그럼 집행은 그대가 하는 건가?
기오르그가 빙긋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의 질문에 부루가 대부를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길티. 이걸로 모가질 잘라주디. 이쁘게 말이야.”
부루의 말에 기오르그가 답했다.
-역시 즐거워. 그런데 모든 지배자에게는 격이라는 게 존재하지.
그렇게 말을 하며 손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그러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마족들이 허리를 굽혔다.
마켈그로이언과 또 마족들.
-군주에도 격이란 게 있다네. 그대와 나 사이의 높이만 한 차이의 격이.
그 말과 함께 기오르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던 마켈그로이언과 마족들이 몸을 돌렸다.
-그대의 격과 같은 이들이라네. 인사들 하지.
마켈그로이언이 입을 열었다.
-회유와 교언의 군주 마켈그로이언이라 하지.
그 옆의 마족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파괴의 군주 크로드이언이라 한다.
온몸이 바위로 뒤덮인 듯한 모양새가 파괴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공포의 군주 크리팔이니라.
검은 로브의 안쪽은 모습을 알아보기 힘든 어둠으로 가득한 존재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렇게 세 명의 군주가 부루를 향해 탐욕을 드러내었다.
그들의 소개가 끝이 나자 기오르그가 입을 열었다.
-한 친구는 저기 어디? 탑이 있던 곳에 있으니 인사를 시켜주지는 못하겠고. 나머지 하나는 아직 내가 주인을 찾아주지 못했지.
그 말과 함께 한 손을 펼쳤다.
그러자 황금빛과 보랏빛이 소용돌이치는 형태의 구체가 그의 손에서 떠올랐다.
-대신 오늘 공을 세운 친구에게 선물을 하려고. 아마도 그 공은 그대의 머리가 아닐까?
기오르그가 짙은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천천히 턱을 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자,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격을 증명해야 할 걸세. 아, 그런데 뭐, 줄 서서 싸워주리라는 생각은 하지 말게. 지금까지 놀아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어디까지나 난 이곳에 즐기러 왔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의 말이 끝나자 세 명의 군주가 천천히 을지부루를 향해 걸음을 옮겨 나갔다.
고빈이 군주 셋이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염병, 이게 무슨 옛날 만화도 아니고 악당들이 순서대로 기어나오냐.”
“후우.”
빈이 조심스럽게 옆에 와 있는 카르탈마니어와 헤게루이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기 군주가 셋이나 되는데. 탐나진 않아요?”
-그, 그게…….
카르탈마니어가 얼떨떨한 얼굴로 빈을 바라보았다.
“아까 보니까 저쪽 최상급 마족들이 아저씨 잡아다 군주 하겠답시고 신나게 덤비던데. 야망을 품어야죠.”
빈의 말에 카르탈마니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음.
반면에 헤게루이안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일대일의 전투를 생각하시나 봅니다만, 지금부터는 양상이 달라질 겁니다.
“뭐가요? 지금도 충분히 개판인 거 같은데.”
그때 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많은 마족이 천천히 나서기 시작했다.
그걸 본 빈이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일대일 안 해요?”
-방금 대군주가 말했지 않습니까. 놀아주는 것은 여기까지였다고. 전면전입니다.
헤게루이안의 말에 빈이 질린 얼굴로 물었다.
“지, 지금까지는?”
-전초전. 일종의 여흥이었던 것이지요.
“염병……. 이건 만화랑 다르네.”
빈이 허탈한 음성을 내뱉는 순간 사방을 찢는 듯한 함성이 전방에서부터 울려 퍼져왔다.
캬아아아아아!
오로지 살육을 탐하는 이들의 외침이었다.
하지만, 질린 건 빈 뿐이었나 보다. 그들의 뒤쪽에서도 뒤지지 않는 함성이 울려 퍼져왔다.
“가자아아아!”
“조져어어어!”
지금까지 숨을 고르고 있던 이쪽의 병력이 쏟아져 나오는 적들을 향해 함성을 내지르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콰콰콰쾅!
함성이 멀리서 울려 퍼지더니 굉음이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잠시간의 숨 고르기라도 한 듯.
전면에서부터 썰물처럼 밀려오는 적들이 하늘을 솟구치고 땅으로 내려앉으며 자신의 힘을 뽐내기 시작했다.
투투투투퉁!
투투퉁!
이쪽에서도 남은 총탄을 마저 쏟아붓듯 연신 대마물탄을 쏟아 부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푸른 기운을 온몸에 두른 이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휘둘러갔다.
현대전과는 거리가 멀어진 전쟁이었다.
조금 전까지 하늘을 날아다니던 포탄과 미사일 대신 아포칼립스물에서나 볼 법한 칼 창, 도끼들이 휘둘러지고 화살이 하늘을 갈랐다.
강림자고 군인들이고 소환자고…… 구분도 없었다.
그 옛날 최후의 전쟁이라 불렸던 아마겟돈이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언니…….”
“그래.”
“이길 수 있어.”
판도라 멤버와 송 작가등은 차량 위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이 전투의 끝을 함께 하겠다는 듯. 못 박힌 채 서서 전투를 하나 하나 눈에 담았다.
* * *
콰아아앙!
“대니!”
맷 할러데이 중장이 피를 뿌리며 날아가는 수하를 부르짖었다. 하지만, 날아가는 그 순간 사지가 꺾인 것을 보아 회생하기 힘들다는 것쯤은 직감할 수 있었다.
“뎀! 죽여버려!”
멧 중장이 대검을 들고 수하를 날려버린 적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의 강림자도 주인의 뜻을 알았는지 함께 내달렸다.
거대한 마족이 달려드는 군인들을 마치 개미 떨구듯 떨구며 연신 찢어발기고 밟아버렸다.
하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다리에 무기를 박아넣고 마치 등산을 하듯 기어오르는가 하면, 누구는 마치 영화의 히어로처럼 날아올라 등짝에 칼을 박은 채 쭈욱 내리그었다.
-캬아악!
이내 다리가 풀리고 주저앉자 수많은 도살자가 칼날을 온몸에 박아 넣었다.
살을 저미고 피를 뿌렸다.
어느 쪽이 마족인지 이제는 구별도 되지 않았다.
“커헝!”
역사라도 되는 양 어느 강림자는 밟아오는 마족의 거대한 발바닥을 그대로 잡고 버텼다.
그리고는 물리법칙을 무시라도 하듯 발바닥을 잡아 옆으로 틀자 거대한 덩치가 자신들의 수하를 깔아뭉개며 나자빠졌다.
마찬가지로 그 위를 군인들과 강림자들이 어우러지며 난도질을 시작했다.
또 다른 강림자들은 각자 무기를 들고 길을 열었다.
어떤 강림자는 창술의 대가였는지 전후좌우로 창을 내지르며, 마족병들을 쓰러트렸다.
그렇게 열어놓은 길을 따라 별이 주는 힘을 받아들인 군인들이 푸르른 기운을 몸에 담은 채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적들을 상대 해 나갔다.
다들 총이나 들었을 법한 군인들이었지만, 이 순간 그들은 옛날 이 땅에 살았던 전사먀낭 각자 칼과 창 몽둥이 그리고 푸르른 기운으로 만들어진 화살등을 날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쏟아지는 적들의 힘과 숫자는 너무도 차이가 컸다.
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진실이었다.
구도원도 그중에 하나였다.
“가!”
마족병을 베어 넘기며 외쳤다.
“무슨 의미요!”
“가라고!”
김경징이 도원을 바라보았다.
“이런 잡놈들 상대하지 말고 가라고! 못 알아들어?”
도원이 도끼로 마족병의 몸통을 쪼갠 뒤 씩씩거리며 앞쪽을 바라보았다.
시체의 산이 솟구쳐 있는 곳.
빛과 굉음이 번쩍일 때마다 수십은 되는 몸뚱이들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대가릴 조져야 이 싸움 끝나는 거잖아!”
“…….”
“왜? 죽으러 가라는 거 같아서 그래!”
도원이 씨근덕거리며 다시 외쳤다. 그런 그에게 김경징이 입을 열었다.
“죽을지도 모르오.”
김경징은 오로지 도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김경징의 말에 도원이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재수 없는 소리만 하고 자빠졌네. 가라고! 자꾸 사망 테크 타게 만들지 말고!”
도원이 복장을 터트리며 외쳤다.
그러자 김경징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꼭 살아남으시오.”
“그런 말 하지 말라고오오오!”
도원은 진심으로 짜증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