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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열제 부루강림기-262화 (262/305)

제262화 변화의 시작

“염병…….”

메이스가 떨어지는 순간 임병화는 쓴 웃음을 머금었다.

‘여기까지인가 보다.’

아쉽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누구라도 인생에 있어 주인공은 자신이길 원하니까.

전쟁에 끼어든 이상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만, 죽음앞에서 담담하기는 쉬운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후회는 없다.

거창하게 인류를 위한 전쟁이라고도 하지만, 어차피 지면 끝장나는 거다.

패하면 끝장이라는 것을 가지고 누군가는 전쟁을 부르짖는 기득권들의 망상이라고 한다.

지금이라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며 말이다.

하지만, 을지부루의 수족이 된 마족들과 가장 밀착하며 생활해 온 그다.

그들을 통해 들은 것은 살아 있다 하더라도 결론은 하나다.

가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혹은, 저기 마족병과 함께 달려오는 마물들처럼 끊임없는 침식 전에 전위로 설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전장으로 쉬지 않고 내몰리고, 여자는 전장에 나설 병사를 생산하고 그마저 못하게 되면 마물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남은 뼈는 해골병사로써 다시 일어설 것이고…….

알뜰하게 써먹힐 거다.

그걸 아니까 싸울 수밖에 없다.

아니 이곳의 모두는 그걸 안다.

그래서 싸운다.

만에하나 죽더라도 내가 죽는 자리는 스스로 정한다.

거창하지만, 그저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 끝이 바로 지금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병화와 함께 해왔던 이들이 뭐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더없이 느리게만 보였다.

늦었으니 오지 말라고 외치고 싶지만 아마 그 말을 할 시간 따윈 없을 것 같았다.

그간 짱깨니 빵즈니 서로 욕하며 지내던 장웨이마저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게진 동공이 최소한 이순간만큼은 자신을 위해 슬퍼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피하지도 못할 짧은 시간일 것인데 꽤 길게 느껴진다.

이런 게 주마등이라는 거겠지.

눈 앞이 푸르러진다.

이게 다음 세상으로 향하는 길인가 보다.

그 푸르름을 보며 병화는 생각했다.

인생 참 엿 같다고.

출렁.

“…….”

-이 썩어문드러질 별의 찌꺼기가 감히!

“응?”

뭔가 머리 위에서 울렁거리는 느낌에 병화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고개가 움직여진다.

머리가 아직 박살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푸르른 물결이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는 커다란 메이스를 막고 있는 모습이 말이다.

“뭐해! 피해 이 멍청아!”

동시에 병화는 빠르게 몸을 날렸다.

지금까지의 의연함과는 거리가 먼 외침과 표정으로 말이다.

“으와아아!”

거의 구르다 시피 빠져나오는 순간 푸르른 물결과 같은 막이 팍하고 흩어지며 메이스가 병화가 있던 자리에 내리 꽂혔다.

“뭐, 뭐야?”

이후 기다시피 빠져나오며 몸을 일으킨 병화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안개와 같은 것들이 주변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생명이 있는 것들 마냥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이것들이 적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방금전에도 병화를 구해주지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 마법인가?”

그들의 상식선에선 마법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적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말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아니지만, 방금전 병화의 머리를 깨려던 최상급 마족이 화가 치솟은 얼굴로 외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별의 찌꺼기까지!

저들이 강림자를 별의 파편이라 부르는 것은 않다.

별이 기억하는 조각들이 재구성된 것이 바로 강림자라는 존재니까.

그런데 이젠 찌꺼기까지 나왔다.

그때 그들에게 해답을 줄 만한 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이 정도의 흔적은 전에 없던 것인데…….

마족 마법사가 주변에 너울처럼 출렁이는 푸른 안개를 보며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체 알아듣게 설명을 해줘!”

장웨이가 답답함을 지우지 못하고 외쳤다.

-이, 이건 말 그대로 찌꺼기 잔존사념 비슷한 겁니다. 강림자가 되기에는 모자란 흔적들 보통은 전쟁터나 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나 발현되는 것이긴 한데…… 이 정도 규모는 본 적이 없습니다. 흩어지지 않고 이렇게 뭉쳐있을 정도라면 이 땅에 전쟁들이 수도 없이 벌어졌어야 가능합니다.

“…….”

순간 이곳에 있던 이들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것을 떠나 이땅에 수도 없이 벌어졌던 전쟁들.

그 규모도 남달랐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결정짓는 전쟁만 해도 백만 이상이 모인 최대규모의 전쟁이었고, 왜란 역시 그 규모가 남달랐다.

멀리갈 필요도 없었다.

한국전쟁 역시 수많은 피가 흘렀던 대규모 전쟁이었다.

게다가 중부지역은 백마고지도 멀지 않았고, 삼국이 팽팽하던 시기에도 수도 없이 밀고 밀리며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그러면 러시아나 유럽쪽도 가능하겠는데?”

-그게 반드시 벌어지는 상황은 아닙니다. 새로운 피가 흘러야 가능하지요. 보통은 최후까지 밀린 종족들의 마지막 발악 때나 이런 현상이 손에 꼽을 정도로 벌어집니다만…….

그 말에 다들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로운 피…….

“많이 죽었나 보구나.”

그 새로운 피가 성립이 되었나 보다.

그때 중상을 입고 괴로워하던 이들의 몸에 푸르른 기운이 몰려 들어갔다.

“쏘, 쏘지 말아봐!”

“멈춰!”

언데드로 변화하고 있던 아군을 그 전에 쏘려던 이들이 서둘러 물러서며 총구를 돌렸다.

“어? 어?”

그때 기적이 벌어졌다.

중상을 입고 언데드로 변화해 가던 이가 정신을 차린 것이다. 심지어 부상도 빠르게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병화도 변화가 찾아왔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었는데 뭔가 활력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일부 병사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히, 힘이 넘치는데?”

“뭐지?”

그 모습에 병화와 일행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때 마법사가 빠르게 답했다.

-그 존재자체로 강림자가 될 수 없던 존재들이 모여 직접강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래가지는 않지만…….

“귀신이라도 들린 건가?”

장웨이가 살짝 질린다는 얼굴로 중얼거리자 병화가 무기를 고쳐 쥐며 입을 열었다.

“까짓 귀신 좀 들리면 어때. 중요한 건 저놈들 조질 힘을 얻었다는 거잖아.”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족 마법사가 환한 얼굴로 외쳤다.

-중요한 건 지금이 기회라는 겁니다. 이 정도 힘이 몰렸다면 2차 강림도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2차강림!”

드물게 벌어지는 현상 중 하나.

강림자가 살던 시기의 인연들이 주변에 형상화되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그 말에 장웨이가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와…… 저거…….”

장웨이가 입을 떡 벌리고는 말을 채 이어가지 못했다.

여포를 중심으로 푸른 기운이 몰려들더니 천천히 하나둘씩 병사들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포와 함께 전장을 누비던 병사들…….

그중 일부는 그 모습이 선명해졌다.

마치 강림자처럼 말이다.

2차 강림이었다.

그들을 보며 여포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리 보니 좋구나.”

심지어 여포의 몸 주변에도 푸른 빛이 몰려들었다.

마치 힘을 모으는 것처럼 말이다.

방천화극을 다시 고쳐 쥔 여포의 옆에 역소환 되었던 적토마가 다시 울음을 터트리며 서 있었다.

그 위에 훌쩍 올라탄 여포가 몸을 세우며 외쳤다.

“다시는 꺾이지 않으리라!”

반격이 시작되었다.

* * *

“쿨럭…… 젠장.”

신컨길드장 구도원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김경징에게 그의 몸통보다 더 두꺼운 칼이 박혀 있었다.

어깨부터 사선으로 거의 몸통 절반 가까이 가르고 박힌 그 칼은 그의 머리 바로 위에서 멈춰 있었다.

“이 인간아. 왜, 안 하던 짓을 해.”

“그대가 살아야 나도 사는 법이오.”

김경징의 어깨에서 빛이 일렁이며 새 나오고 있었다. 역소환의 징조였다.

“미친. 이 양반아. 당신 없이 내가 무슨 수로 여기서 살아남으라는 거야.”

주변은 이미 초토화되어 있었다.

“젠장, 부루 그 양반은 이런 괴물들을 여태 무슨 수로 잡아 조진 거야?”

“우워어어어!”

그때 비명이 하늘을 갈랐다.

임꺽정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였다.

“젠장. 맨날 나 잡아보라고 외치면서 덤비기는 왜 덤비는 건지.”

물론 그 덕에 아직까지 숨통이 붙어있는 것이다.

물론 이 숨통이 얼마나 더 붙어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방금전에도 그와 김경징이 반쪽 날 뻔한 것을 임꺽정이 들러붙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이거 뽑으면 괘, 괜찮아지지 않을까?”

“빛가루 뿌려지는 걸 보니 솔직히 쉽지 않아 보인다.”

광호가 김경징의 몸통에 박힌 대검을 양손으로 잡아올렸다.

대검이 뽑히자 빛가루가 더욱 빠르게 뿌려졌다.

“빌어먹을 양반. 답지않게 용감하다 했어. 이러려고 한 거야? 싸우는게 살 길이라며. 젠장 김경징 감 다 죽었나 봐.”

타박하면서도 도원은 김경징을 보듬어 안았다.

“나, 아직 감 안죽었……네.”

“안 죽긴…… 꼴 보니 이 난장판에서 얼마나 더 버틸진 모르겠네.”

그 순간 하늘에서 누군가가 추락했다.

콰콰콰쾅!

“염병 가지가지한다.”

방금 떨어져 내린 이는 불행히도 아군이었다. 을지부루가 거두어들인 마법사 헤게루이안이었다.

또다른 최상급 마족이 등장하자 막아보겠다며 나섰던 그가 결국 한방 제대로 맞은 듯했다.

“괜히 미안하게.”

광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쪽이 밀릴 때면 자신이 얻어맞으면서도 마법을 써서 도와줬었기 때문이었다.

온전히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쾅쾅쾅쾅쾅!

한쪽에선 뇌까지 근육으로 찬 거구의 최상급 마족 둘이 멈춰서서 서로 주먹을 주고 받고 있었다.

마치 피하거나 막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서로 멈춰선 채 말이다.

“미치려면 곱게 미치던가. 젠장. 망조가 들었지.”

도원이 욕설을 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냄새를 맡았는지 꽤 많은 수의 마족병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최후를 선사하려는 듯 말이다.

“저기 처박힌 마법사 양반한테 한번만 더 도와 달라고 하면 안 될까?”

도원이 김경징을 부둥껴 않고 광호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광호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콰콰콰쾅! 번쩍 콰콰쾅!

“오히려 우리가 도와야 할 판 같은데…….”

“무슨 수로.”

굉음이 연달아 터지는 방향을 바라보며 도원이 허탈한 음성을 내뱉었다.

방금 전에 헤게루이안이 떨어져 박힌 곳으로 저렇게 많은 마법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여러 종류의 마법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어쨌든 어떻게든 살아나온다던 유일한 장점도 여기까지구나.”

“아, 아직 아니오. 살고자 싸우면 살 것이오……, 죽고자 싸우면…….”

“무슨 이순신 장군 짝퉁도 아니고 뭔 소리가 그래. 자꾸 말하지 마. 피…… 아니 반짝이 자꾸 떨어지잖아.”

도원이 씁쓸한 얼굴로 김경징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지금까지 함께 싸워온 전우였다.

그리고 그 덕에 자신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말이다.

“어쨌든. 역사에 어찌 적혀있던지 김경징은 끝까지 싸웠다고 내가 증언해줄게.”

도원은 어설피 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지키지 못할 약속이긴 했다. 세상이 망하게 되면 아무 의미없을. 하지만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도원이 광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사서에는 도망만 치다가 꼴사납게 나중에 사사당한 것처럼 나오는데. 사실 이 양반도 역사의 희생자일 수도 있거든. 반대의견도 많고 말이야.”

“그래. 믿어야지.”

광호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쓴 웃음을 머금은 도원이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다시 볼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다시 보게 되면…….”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네던 도원의 고개가 옆으로 틀어졌다.

“이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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