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꿈을 꾸면 보인다.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약하지 않아요?”
기동대원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비쳤다. 그러자 다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사실 대침식때는 전초전에 불과했다면서요. 물론 갑작스럽게 마물들이 사방에 나타나며 혼란이 벌어진 것 때문에 피해가 큰 건 알겠지만, 본대가 온 것 치고는 사실 피해가 엄청 적잖아요. 막말로 현대전만 벌어져도 그 피해가 어마어마한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도 천만에 달하는 사망자가 나왔다.
물론 그 중에서도 국가가 붕괴되었던 북쪽에서 칠백만의 인구가 소멸했지만 말이다.
세계대전 때에도 나오지 않았던 피해다.
물론 대륙 자체가 집계가 되지 않는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새발의 피나 마찬가지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옆 나라 중국만 해도 인구의 삼분지 일이 증발했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 시작에 불과하다지만, 그 피해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었다.
“그만큼 준비 했잖아. 막말로 대 마물용 탄환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버티고 설 수 있을 줄 아냐? 거기에 군단장 급 하나만 해도 현대병기 모두 모아도 쓰러트릴 수 없잖아. 핵도 버티는 존잰데.”
그 말에 다들 한쪽에 자빠져 자고 있는 을지부루를 보았다.
뭔가 강림자가 낮잠이라니 영 익숙하지 않은 현상이기는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항상 느끼지만 저런 태평한 모습을 보이는 부루의 중요성을 새삼 다시 느낀 것이다.
핵도 안통하는 마물을 도끼 한 자루로 토막 내버린 게 부루다.
부루가 있는 국가와 없는 국가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미국은 군주 하나가 탑에 강림해 있는 것만으로도 온 나라가 긴장하고 있는 반면, 이쪽은 군주와 대군주까지 내려와 있었다.
물론 긴장도는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부루가 있으니까.
그리고 이쪽이 중요한 것을 알기에 미국도 그런 상황에서 멧 할러데이 중장과 소수지만 정예의 소환자와 강림자를 보낸 것이고 말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인류의 보루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기동대원의 말에 일부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며칠 사이에 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데 이게 피해가 적게 느껴진다니.”
누군가가 한탄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때 마족 마법사인 헤게루이안이 입을 열었다.
-아직 시작도 안 한 것이니까요.
그 말에 빈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처음에 사령관급을 선두에 세웠기는 하지만, 그건 군주가 가기 위한 길을 미리 다진다는 개념이었습니다.
“하아.”
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렇다고 절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보통 길을 다진다는 의미는 원래 이 국가의 끝까지 관통한다는 의미였으니까요.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빈이 답답한 듯 묻자 헤게루이안이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침식 전 중에서 이런 상황자체가 처음이란 의미입니다. 이곳으로 비유하자면 개미떼가 늘어서 있고, 그걸 짓밟으며 가다 보면 그 끝에 늑대쯤 되는 짐승이 기다리는 거지요.
“군주는 사자쯤 되나?”
조심스러운 질문에 헤게루이안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이쪽에 보면 고대에 티렉스라는 마물이 있지 않습니까?
“…….”
늑대 앞의 티렉스를 상상한 이들은 한숨도 내뱉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모르는 일입니다. 마족의 전투는 단순합니다. 길을 열고 그 길을 군주가 갑니다. 그게 마족의 전투방식이지요. 그러니 이길을 막고 우리의 군주가 상대방 군주와의 싸움에서 이기길 빌면 됩니다.
“우린 완전 떨거진가.”
-사실 비관적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일 겁니다. 개미떼에게 최소한 코끼리들이 나자빠진 거니까요.
“동물에 왕국 같은거 자주 보나 봐요. 비유가 찰지네요.”
빈의 말에 헤게루이안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예. 특히 호랑이가 귀엽더군요. 전쟁이 끝나면 한 마리 키워보고 싶을 정돕니다.
“…….”
해맑은 헤게루이안의 표정을 보며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헤게루이안이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이었다.
-다만 언데드가 후방쪽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걸립니다. 저쪽에 오기원이라는 존재가 뭔가 변수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마족의 전투가 아니거든요.
오기원이 언급되자 다들 표정을 구겼다.
“씨팔, 저승에서 이완용이 울겠네. 나라 팔아먹은 걸로 원탑이었던 양반 위로 세상 팔아먹은 놈이 생겼으니.”
기동대원의 한탄스런 목소리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도 부루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그는 잠자며 가끔은 웃고 찡그리고 또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꿈이라도 꾸는 듯 말이다.
* * *
-이해를 할 수 없군.
대군주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의 중얼거림에 군주인 마켈그로이언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재미있긴 합니다만, 가끔 이런 존재들도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가?
-예.
그들의 대화를 보며 오기원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이 보는 것은 일종의 전쟁 영화였다.
흔하디 흔한 장면이다.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왕의 명령을 거부한 군사들이 나서서 목숨을 걸고 지키는 장면.
-단순히 생산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 터.
-백성을 위하는 이들은 어느 세상에서나 존재했습니다.
-그래봐야, 결국은 자기 목숨 부지하기 바쁘지 않았나? 난 왜 그런 이들을 보지 못했지?
-대군주께서 못 보신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전에 모두 죽었으니까요. 지키고자 하던 백성들과 함께 말입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오기원은 그들의 정신세계가 자신과는 완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영화들을 동원해서 그들에게 보여주는 건 단순했다.
그저 흥미다.
대군주인 기오르그가 재미있어 보인다며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에 초반에 길 안내를 맡으며 병력을 이끌었던 오기원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책임을 질 만한 이들은 모두 죽어나자빠졌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실제로 지금 언데드들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예. 전부는 아니었지만, 벌써 일부 국가는 행정이 마비되고 자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나 공포에 굴복하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지.
-이런걸 보고 즐긴다는 건가?
“그, 그렇습니다.”
기원이 황급히 대답했다.
-그럴 만도 하군. 힘없는 존재들은 누군가가 구원하기를 바라는 법이지. 그렇기에 이런 걸 만들어 즐기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이야. 비루하구나.
기원은 대군주 기오르그가 한 말을 듣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싶었다.
절대적인 강자의 입장에선 누군가에겐 가슴 뛰는 명장면이 힘없는 자들의 바람을 담은 비루한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걸 보여준 이유가 있어 보이는데.
기오르그가 입가를 주욱 끌어올리며 묻자 기원이 조심스럽게 마켈그로이언을 바라보았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표정이었다.
-답하라. 대군주의 명이시다. 그리고 그대를 내가 거두어 들인 이유이기도 하고.
마켈그로이언의 말에 기원이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이 전쟁을 오래 끌 이유가 있겠습니까?”
기원의 말에 기오르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마계에 대항하기에는 힘이 모자라다 하나 이곳의 전력이라면 향후 새롭게 이어질 다른 세상의 침식에 있어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인정하지.
“그때를 대비해서 빠르게 굴복시키는 방법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기원이 말을 끝내고는 긴장된 표정으로 기오르그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답했다.
-들어볼까?
그가 흥미를 가졌다.
기원은 얼굴에 화색을 표하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 * *
을지부루가 멀거니 포연이 가시지 않은 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 뭐 다들 그리 잠만 자는 거에요.”
고빈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부루뿐 아니라 가우리의 무장들과 병사들 모두가 최근 부쩍 잠이 늘었다.
그 모습에 연구원들은 뭔가 잘못되는 게 아닌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관찰을 했다.
사실 빈에게도 연구원이 조심스럽게 물어보라고 부탁한 것이다. 빈의 질문에 부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꿈을 꿨어야.”
“꿈요? 하긴 강림자는 꿈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찾기도 한다데요. 그런데 아저씨는 그럴 필요 없잖아요.”
강림자의 꿈은 소실 되어 있는 과거의 기억을 찾는 행위로 학계에서는 분석하고 있었다.
실제로 꿈을 꾼 이후로 강림자의 격이 올라간다던지 혹은 그 과거의 기억 일부를 떠올린다던지 하는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을지부루는 딱히 기억에 문제가 없었다.
빈의 말에 부루는 멀거니 벌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볼 수는 있디.”
“예?”
“그리운 얼굴 말이디.”
“아……. 생전에 함께 하신 분들요?”
빈의 질문에 부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시선을 벌판으로 돌렸다. 그러자 흥미가 생겼는지 빈이 조용히 질문을 던져왔다.
“그, 고진천이란 분이랑 계웅삼이란 사람도 봤어요?”
“봤디. 그리고 사라도…….”
“사라? 그건 누군대요?”
“내 부인.”
“아…….”
“아들도 봤디. 나를 닮아 건장하게 큰 모습이었어야.”
을지부루의 말에 빈은 말문을 닫았다. 꿈을 꾸고 난 뒤의 여운이라도 느끼는 듯한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부루가 빈을 슬쩍 보며 입을 열었다.
“장가 가라우.”
“예?”
“이 전쟁이 끝나면 말이디.”
“결혼은 지옥이라던데요.”
빈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부루가 히죽 웃으며 답했다.
“기러니까네 하는 말이디.”
“…….”
“나만 해서 되갔어?”
“끙. 하지 말란 말이잖아요!”
“클클클클!”
농담임을 알자 빈이 바락 하고 대들었다. 그러자 부루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앞쪽에서 진동음이 울려오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네요. 오늘도 간만 보고 가려나?”
“상관있간? 다 때려잡음 되는 거디.”
“하긴. 그건 그렇네요.”
부루의 말에 빈이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는 진영으로 돌아가며 외쳤다.
“손님옵니다아아!”
빈이 말해주지 않아도 군인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매일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듯 몰려오는 마물들을 상대하기 위해 한결 익숙해진 모습으로 말이다.
* * *
닉 레너드 대통령은 오늘도 어김없이 압도적인 전투를 벌인 을지부루와 대한민국 군대들의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누가 이 모습을 보면 미 합중국 대통령이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인 줄 알겠습니다.”
케인 스미스 국장의 말에 레너드 대통령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딴 소리 하지 말게. 지금은 미국 대통령하는 것보다 대한민국 대통령 하는게 더 속편해 보이니까.”
“적들의 거의 모든 전력이 저기에 모여 있는데도 그런 소리가 나오십니까?”
스미스 국장의 핀잔에 레너드 대통령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저기엔 그들을 막을 수 있는 힘도 존재하잖나.”
“그나마 다행이지요.”
“거기에 땅덩이도 좁고 말이야.”
그의 말에 스미스 국장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내저어야만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땅덩이가 넓은 게 약점이기도 했다.
지켜야 할 곳은 많고 병력은 항상 모자라니까.
사실 미국이 세계의 경찰역할을 하고 있다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국을 지키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전력이었다.
첨단 병기는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지키기는 쉬운 게 아니었다.
결국 머릿수가 중요한데 육군의 숫자는 주방위군과 예비군을 포함해도 백만이 안된다.
“빌어먹을 일이지.”
레너드 대통령이 한숨을 내쉬는 순간 상황실 근무자가 창백한 얼굴로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무슨 일이야!”
순간 모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는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