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기억해 주시게
아름다운 빛무리가 허공에 은하수처럼 뿌려지며 어우러지고 있었다.
이 장소가 살육이 벌어지는 곳이 아니라면, 이 모습에 감탄을 뱉을 것이다.
“괜찮소?”
천유화의 질문에 마족병 하나를 갈라 버린 정중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소.”
너무도 담담한 답변.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그대만 한 이를 내가 모를 리 없을 터인데. 어찌 사서에 이름 한 자락 없었을까?”
정중부의 질문에 천유화가 답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났지만, 삶의 뿌리를 박은 곳은 다른 세상이니까.”
“그런가.”
한번 답변을 해 준 천유화가 다시 정중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무인들의 검으로 세상을 지배하였다 들었는데.”
“분기에 차 칼로 세상을 고쳐 쓰려 했으나 결국 다시 칼로 망한 자일 뿐. 갈길 잃은 칼의 말로가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럴 수도.”
“그런데 나를 아는가? 이전 시대의 무인으로 아는데.”
정중부가 덤덤히 답하고 물었다. 그러자 천유화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한동안 드라마라는 것에 빠져 있었으니까. 우리 다음의 세상이 궁금했기도 했고.”
“그랬군. 나도 그런 취미를 좀 가졌으면 좋았으련만.”
아쉽다는 답에 천유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칼이 제대로 쓰이지 못할 때는 무수히 반복되는 일이기도 하지.”
천유화의 말에 정중부가 물었다.
“그대의 칼은 제대로 쓰였는가?”
“다행히. 더 큰 칼이 더욱 큰 길을 밝혀 주었으니까. 후회 없었소. 전장에서 죽기 전에도 지금 이 순간도.”
“그대만 한 무인이 전장에서 죽었다라…….”
정중부가 말끝을 흐리자 천유화가 피식 웃으면서 왼손의 단창을 다시 휘둘렀다.
“그게, 원래 내가 왼손잡이라서. 변명은 아니고. 그렇다는 거요.”
천유화의 답에 덤덤하던 표정만 짓고 있던 정중부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난 내 칼을 제대로 써 줄 이를 만나지 못한 게 불행이군.”
“설마. 지금 그 칼은 제대로 쓰이고 있으니 불행이라 할 필요는 없소.”
그때 커다란 울림이 울려 퍼졌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꽤 재미있구나!
“저것들은 대충 내뱉는 말들이 다 한결같은지.”
그 외침에 천유화가 혀를 찼다.
“못 배워먹어 그런 게 아니겠소?”
“푸하핫!”
정중부의 대답에 천유화가 크게 웃었다.
그사이 다가온 이를 둘이 바라보았다.
“주둥이로 떠들지 말고 덤벼라.”
천유화가 손을 까딱거리자 거대한 체구의 마족이 눈을 희번뜩거리며 거대한 도끼를 내리 그었다.
콰쾅!
땅이 움푹 패여 나갔다. 하지만 둘은 이미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퍼퍼퍼퍽!
천유화의 단창이 간결하게 나아가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마찬가지로 정중부의 칼은 거구의 몸뚱이를 한층 낮게 다리를 잘라내 주었다.
-크어어억!
순식간에 당한 마족이 비명을 내질렀다.
두 다리가 잘리고 몸통에는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보랏빛이 감도는 핏물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 머리를 정중부가 날려 버리며 중얼거렸다.
“시끄럽구나.”
-감히 마계의 전사를!
쓰러지는 거대 마족을 보았는지 뒤쪽에서 격렬한 분노가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미안. 전사인 줄은 몰랐네. 자, 친구 머리 챙겨가라.”
그렇게 답해 준 천유화가 떨어진 머리를 창대로 콕 찍어서 던져 주었다.
그걸 거대한 마족이 받아드는 순간 뒤따라 날아온 거대한 도끼가 그걸 갈랐다.
-크윽!
다행히 한 팔을 들어 막았는지 팔뚝이 절반쯤 잘려나가는 정도로 끝이 났다.
“내 아는 양반이 도끼를 기가 막히게 다루는데. 어때? 곁에서 눈으로 좀 배웠는데?”
천유화가 이죽거리며 다시 나서려 했다. 그때 굵직한 팔이 그를 가로막았다.
“응?”
천유화가 고개를 돌려보니 정중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말했지 않나?”
“무얼 말이오?”
“지금 내 칼이 제대로 쓰이고 있다고.”
정중부의 물음에 천유화가 담담히 답했다.
“그렇소.”
“그럼 그거 하나쯤은 기억해 줄 이가 있으면 좋겠소.”
“…….”
“버려진 칼로 세상을 흐리게 만들었던 이가 다시 산 세상에서는 제대로 칼을 휘둘렀다고 말이오.”
정중부의 말에 천유화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 또한 무인이 꿈꾸던 끝 아니겠소?”
그의 말에 천유화가 피식 웃어 보였다.
“뭐, 충분히 이해가 가오. 나 때도 꽤 재미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이번에는 내게 양보해 주시오.”
그의 말에 천유화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나름 손쉽게 죽인 듯했으나 거대한 체구의 마족들은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마족병들과는 다른 상대였으니까.
이 넓은 길을 그가 홀로 막아내기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때였다.
그의 몸에서 뿌려지는 빛무리가 하늘이 아니라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점점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놀란 것은 정중부였다.
“네녀석들?”
그는 그 인간의 형상들을 알아보는 듯 했다.
다만 천유화가 보기에는 그저 흐릿한 인간의 그림자들이 무기를 쥔 것 같았다.
“이들이 보이오?”
“못난 나를 기억하던 이들이오. 반가운 얼굴들이구나.”
그들 간에 어떠한 대화가 오가는지 천유화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렇게 생겨난 그림자들이 정중부를 향해 군례를 올리는 듯했다.
“우리를 기억해 주구려. 어차피 내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런 기회 또한 복 아니겠소.”
그렇게 말하며 정중부가 자신의 검을 쥔 손을 들어 보였다.
약간 희미해지기 시작한 팔이 보였다.
그의 팔을 본 천유화가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담담히 창대를 내리며 답했다.
“기억하리다.”
“고맙소. 그러고 보니 그대는 내 이름을 아는데 나는 그대 이름을 모르오.”
정중부의 질문에 천유화가 천천히 주먹을 가슴께에 올리며 군례를 올렸다.
그리고는 답했다.
“대 가우리의 무장. 천유화요.”
“그렇구려. 나 고려의 무장 정중부요. 내 청을 들어주어 고맙고, 또 함께 싸워 영광이었소.”
“나 역시.”
천유화는 그렇게 정중부를 기억에 담으며 물러섰다.
“어? 저거!”
후미에서 행렬을 보호하며 물러서던 최후배 경정이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사람의 모습을 한 인형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고 있었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이 또한 2차 강림 현상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도 보고 있다.”
“혹시? 천유화 그 양반이?”
최 경정이 마치 희망에 찬 듯 말을 하였지만, 곁에 있던 서 경무관이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닌 거 같다.”
“아.”
물러서고 있는 천유화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는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전장을 향 하고 있었다.
마치 연인이 해어지기 싫어 시선을 놓지 못하는 것마냥 말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서 경무관이 천유화에게 묻자 그가 덤덤히 답했다.
“기억에 새기는 중이다.”
“예?”
“그의 마지막 부탁이니까.”
그 말에 서 경무관은 왠지 숙연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 천유화가 계속 시선을 놓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거기 군인 친구. 부탁 좀 하자.”
“예? 어떤 겁니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던진 부탁이었지만, 그걸 탓하는 이는 없었다. 그에게 부탁이란 말을 들은 중위는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그거 날파리 같은 거 떠 있더냐?”
“예. 있습니다. 다행히 아직 이쪽에선 전자기기 운용이 가능해서…….”
“하나도…….”
“예?”
“하나도 빠짐없이 남겨줘.”
무엇을 남겨달라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바로 저 장면이었다.
정중부란, 옛날 옛적 역사서에서나 혹은 교과서에서나 서술되던 이의 마지막일지 모르는 전투.
“알겠습니다.”
“저런 모습을 나만 안다면 그 또한 아쉽지 않겠나?”
수십으로 불어난 그림자들이 정중부와 함께 거대한 마족전사들을 향해 내달려가고 있었다.
“다 알아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 이 싸움에 피 흘린 이들의 가치를 후손들이 기억하길 바라는 것뿐이야. 그게…….”
그제야 천유화가 중위와 주변 이들을 바라보며 잠시 끊어졌던 말을 이었다.
“저들이나 우리나, 그리고 또 이곳에 함께하지 못한 병사들이 원하는 것일 거다.”
순간 중위는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까 두려워 이를 악물고 버렸던 것이다.
천유화가 하는 말에 가슴이 메어져왔다.
기억.
오랜 시간 전쟁의 역사에서 알려지지 모든 이들이 원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다.
특히 나라와 국민을 위해 싸운 군인에게는 더더욱 영예로운 일이다.
자신들이 지킨 이들의 기억에 남는 것.
“꼭. 하나도 빠짐없이 담아 두겠습니다.”
“그래. 귀한 시간을 벌어 주는데 하나라도 더 살려 가지 못하면 언젠가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날 때 볼 낯이 없다.”
“예!”
천유화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더는 흘리는 이들 없이. 모조리 다 끌고 간다.”
“예!”
중위는 그대로 천유화를 향해 경례를 올렸다. 그런 중위에게 천유화는 어색하게나마 경례를 맞춰 주었다.
뒤돌아 뛰는 중위의 발걸음은 그 어떤 때보다도 힘차게 보였다.
* * *
약간 위축된 모습의 대원길드원들과 달리 대원길드장 오기원은 서늘한 얼굴로 수많은 마족들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적들을 추적해야 할 마족들의 행렬이 마치 명절 도로의 정체현상 마냥 멈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미치겠군.”
그가 분노하는 이유.
그건 바로 이 길을 막고 있는 존재가 바로 그와의 연결이 끊어져 가고 있는 정중부라는 존재 때문이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점점 빨라지는 걸음걸이 하나하나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분노가 담겨져 있었다.
퍼억!
거대 마족. 즉 마족전사라 불리는 이들의 무기가 그림자를 갈랐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무기가 마족전사의 몸통을 후볐다.
-크어어엉!
또 하나의 마족전사가 비명을 내지르며 옆으로 엎어졌다.
하늘에서 내리 꽂히는 마법을 본 그림자들이 일제히 쓰러져 있는 거대 마물과 마족전사를 들어 올려 방패를 삼았다.
퍼퍼퍽!
피륙이 터져나갔다.
그럼에도 그림자들은 익숙한 듯 다시 전투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분전도 점점 약해져 갔다.
정중부의 몸에서 흐르는 빛무리처럼 그들의 몸을 구성하는 것들도 점점 흐려져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탓인지 휘두르던 칼이 중간에 사라지는 이도 있었고, 달리다가 발목 아래가 사라져 엎어지는 존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존재도 전투를 멈추지는 않았다.
매달리고 후벼 팠다.
때론 정중부를 노리는 칼을 막는 방패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주변은 땅바닥보다는 거대한 마족들과 마물들의 시체들이 더 많았다.
어찌나 많은지 그들은 뒤로 조금씩 물러서며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의 앞에는 그들이 만들어 낸 시체들의 언덕들이 듬성듬성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 먼저 가 있거라.”
정중부는 자신의 앞에서 흐려져 사라지는 그림자 형상의 존재에게 웃으며 작별인사를 해 주었다.
그렇게 하나둘씩 인사를 주고받으며 싸우기를 얼마나 했을까.
이제는 곁을 지키던 이 하나 없이 홀로 남았다.
“후우우우.”
정중부의 입에서 뜻 모를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