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위기극복이 취미인 곳
[자네의 아이디어가 효과가 좋았더군. 다만 이곳만은 생각보다 빨리 혼란이 가라앉고 있다는 게 아쉽지만.]
마켈그로이언의 말에 대원길드장 오기원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가 고개 숙일 필요는 없지. 다른 곳은 여전히 혼란스러우니까. 다만 이곳은 왜 이럴까 생각을 했을 뿐이지. 그 이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자네겠지?]
마켈그로이언의 질문에 오기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이런 빠른 안정화는 예상 못 했다.
식자재 사재기부터 오만가지 혼란을 예상했었다.
예전 전염병에 의한 판데믹과는 달리 지금의 위협은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마물이 나타나는 위협은 사회의 혈관을 막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었다.
또 그게 맞았다.
실제 여러 나라들은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곳만은 유독 달랐다.
물론 대침식 이후 가장 먼저 경제가 활성화된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사재기.
초기에는 분명 있기는 했는데 이게 또 웃기게 변했다.
동네슈퍼와 민방위들의 합작이 먼저였다.
먼저 움직인 것은 아파트 단지들이었다.
아파트 내에 있는 주민 휴게시설이 하나의 아파트 전용 마트화 돼 버린 것이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위협 때문에 각종 물품들을 한 번에 트럭으로 날라 온 것이다.
그걸 가지고 아파트 내의 민방위 대원과 경계를 나온 예비군들을 중심으로 안전한 배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형태를 취한 것은 상당히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것이다.
바로 고립된 지역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황금마차라 불리는 차량이 민간인 통제구역인 철책인근을 돌아다니면 소초에서는 물자를 대량으로 구매해서 소대단위의 부대 내부에 쟁여 놓는 것이다.
일종의 PX라 불리는 마켓의 소형화다.
원래는 편의성과 여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단체 휴가를 나갔을 때 회식 비용으로 쓰기 위함이었는데 그걸 응용한 것이다.
아파트가 아니면 동네 슈퍼가 그 역할을 해 주었다.
그리고 민방위 대원들이 그곳을 거점으로 배달활동을 대신해 주었다.
물론 불편함이 있기는 해도 정해진 시간과 루트를 타기는 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사재기의 위험은 벗어났다.
발주부터가 대량이었으니까.
기존 마트는 마치 도매상과 같은 중간 거점이 되어버리게 된 것이다.
또 이런 상황에 익숙하다는 건 또 다른 여유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게 가능한 것은 바로 군대 전역자들 덕이기도 했다.
농담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사분지 일의 국민은 총만 들려주면 싸울 수 있는 전문 전투훈련을 받은 이들이었으니까.
마치 전 국토의 병영화 같은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또 이게 가능했던 건 이전 대침식 때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대침식 이후에도 간간이 부정기 균열이 있었기에 이런 시스템과 거점들은 계속 유지되어 왔었다.
그렇기에 혼란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또 한 가지.
전국에 깔린 감시카메라가 위협을 미리 확인할 수 있었다.
진일보된 감시망은 마물의 발생 지점까지 실시간으로 해당 지역으로 기동대를 출동시키는 시간을 단축시켰다.
이 부분은 각 지역 거점 길드에도 연동되는 사실이었으니까.
“예전부터 이 나라는 웃지 못할 농담이 있긴 했습니다.”
[웃지 못할 농담? 흥미롭군. 그게 무엇인가.]
마켈그로이언의 질문에 기원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위기 극복이 취미인 나라…… 입니다.”
[…….]
“군주님?”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마족으로 살아 오면서 가장 신선한 개소리였네.]
질책하는 듯한 음성은 아니었다. 정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는 감정이 담긴 음성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궁금하군 그런 말이 왜 붙었는지.]
이 호기심 많은 군주의 질문에 오기원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잠시 후, 마켈그로이언에게서 감탄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대단하군. 잘만 하면 좋은 마족병이 될 자질이 있어.]
실력 좋은 용병을 끌어 모으는 수집벽이 있는 마켈그로이언에게 있어 이 독특한 기질을 가진 민족은 흥미롭기만 했다.
* * *
대마도의 인구는 사만 명이 조금 못되었던 것으로 알려 졌었다.
그리고, 마지막 철수 작전 때 혼란 속에서 약 삼만여 명의 인구가 빠져 나왔었다.
그중 절반은 부산으로 나머지는 일본 본토로 빠져나갔다.
나머지 일만은 고립되었고, 결국 구출하지 못했다.
배편도 부족했고, 또 당시에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일본은 그곳이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남북으로 커다란 영토가 위기에 빠져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예전에 관광산업이 무너지고 다시 어업이 활성화되면서 배가 많아졌기에 이나마도 가능했던 숫자였다.
하지만 남은 일만여 명의 인구가 살아남았으리라는 희망은 버렸다.
마물을 상대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니까.
그러나 대한민국 군대가 대마도에서의 구출작전을 펼친 지 보름.
아직 마물은 사방에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살아남은 그룹은 거의 다 찾아냈다.
그 인원이 무려 천백여 명에 달했다.
물론 일만여 명의 인원에 비하면 처참한 숫자였지만, 무려 11%의 숫자가 생존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었다.
그 덕에 일본 본토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도시규모로 침식지가 형성된 국가에서도 이제라도 구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한국의 성과는 주목적이었다.
지금까지 침식지의 주변에 장벽을 쌓아 안의 마물들이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전부였던 것과는 정반대의 작전을 펼친 것이다.
오히려 안에 전진기지를 만들어 수복작전을 펼쳐나간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 것은 마물의 보호막을 벗겨낼 수 있는 방법의 발견이 결정적이었지만, 그것 외에도 다양한 아이디어가 빛을 발했던 것이다.
“투척!”
가우리의 병사가 외치자 군인들이 일제히 자신의 손에 들린 단창을 던졌다.
그러자 창날들이 날아가 벽에 박혔다.
창끝에는 마물들의 사체와 은의 합금이 코팅되어 있는 창날이 달려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구출작전을 펼치면서 군인들의 복장도 변화가 생겼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봉이 달린 야삽이 다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땅을 파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야삽으로 착각할 형태지만 날이 서 있어 무기로 간주해야 했다.
그건 바로 백병전용 야삽이었던 것이다.
마물이 근접해 왔을 때에 총검술보다는 이게 더 대응하기가 수월하다는 의견 때문에 보조무기를 지급된 것이다.
일종의 접이식 도끼와 같은 용도였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차량에는 군인들이 투척을 하던 단창들이 빼곡하게 세워져 있었고 그 중심에는 대형 석궁이 놓여 있었다.
현대식으로 구현한 천보노였던 것이다.
대형 마물을 상대하기 위한 물건이었다. 저지력에 우선을 둔 무기였다.
아무래도 공기총 등은 저지력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단창은 던지고 쏘는 것 이외에도 최후의 순간에 집단으로 뭉쳐 간단한 창진을 형성할 수도 있어 유용했다.
거기에 일부 병사들의 허리에는 새총도 있었다.
이 역시 파괴력과 저지력에 중점을 둔 것이다.
무엇보다 진영 주변에는 해자가 있었다.
그 해자에는 마치 옛날 중세 영화에서나 볼 법한 목창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 끝에는 예의 그 특수 창날이 코팅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열려진 입구의 위에는 대형통나무가 잔뜩 끌어올려져 있었다.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함정처럼 튼튼한 줄에 묶여 뒤로 당겨져 올라가 있었다.
이곳으로 대형 마물이 진입하려 할 때 이것을 작동시키면 원심력으로 날아가 타격하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끝에는 특수금속이 씌워져 있었다.
장벽 위도 마찬가지였다.
양 끝이 줄로 묶인 통나무 몸통에 고슴도치처럼 철침들을 박아 놨다.
혹여 기어 올라오는 마물들이 있으면 던져서 타격을 입히기 위함이었다.
이 모든 아이디어는 을지부루에게서 나온 것이다.
고대의 방식을 재현한 것이다.
실제로 효과도 좋았고, 이러한 고대 병기는 상당한 잇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자전을 펼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실전을 통해 효과가 입증된 것들은 실시간으로 본토에서 활용되기 시작했다.
물론 굳이 과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도 나오기는 했지만, 소수였다.
전쟁 준비는 과해도 항상 모자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통일을 했다지만, 이 땅에서 가장 익숙한 행위는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니 말이다.
* * *
대군주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가 입을 열었다.
[교언의 군주여.]
[하명하소서.]
마켈그로이언이 고개를 숙였다.
[꽤나 재미난 준비를 했더군.]
[일시적이나마 강림을 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나이다.]
[그 준비 덕에 이 땅에 마물의 씨가 마르고 있는 건 아는가?]
[허나 그 마물을 활용해서 영역을 다툴 적도 존재하지 아니하옵니다.]
마켈그로이언의 말에 기오르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여전히 우리 영역은 재미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더구나.]
[꽤나 시달림을 자주 받아왔던 곳이면서도 항상 살아남아왔던 자들이 있는 곳이라 하더이다.]
[질긴 자들이군. 하긴 어느 세상이든 그런 자들이 끝까지 골을 아프게 만들기는 했지. 게다가 마수의 군주까지 있는 땅이니.]
기오르그는 수긍한다는 듯 대답했다.
[이번에 종속시킨 반마족이 알려 준 정보인가?]
[그러 하옵니다.]
[그대의 방식은 꽤나 재미있어. 다른 군주들과는 달리 말이야. 비겁하다는 소릴 듣겠지만 말이야.]
[비겁하다는 오명은 저에게 칭찬이옵니다. 그 오명으로써 대군주의 길을 밝힐 수 있다면 이 또한 축복 아니겠나이까?]
마켈그로이언의 대답에 기오르그가 크게 웃었다.
[혀에 꿀을 발라 놓은 것 같구나. 교언의 군주라는 것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군.]
[가장 강한 저항을 하고 있는 곳이니만큼 이곳에 성전을 짓는다면 그 세상에는 더없는 충격일 것이옵니다.]
[상처 난 내 자존심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아무리 다른 군주들을 잡아먹기 위해 약한 모습을 보였다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피해가 컸다.
그것을 언급한 것이다.
[기대가 크군.]
[기대에 맞게 최선을 다해 준비를…….]
[아니. 그것 말고.]
[하오시면?]
마켈그로이언이 의문에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기오르그가 입을 열었다.
[마수의 군주를 직접 보기를 고대하고 있지.]
기오르그의 말에 마켈그로이언이 작게 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
[그날을 위해 모든 준비를 더욱 빠르게 맞춰 나가겠나이다.]
마켈그로이언의 대답에 기오르그가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기대하지. 나의 지낭이여.]
기오르그의 대답에 마켈그로이언이 고개를 다시 조아렸다.
* * *
멧 할러데이 중장이 피곤한 얼굴로 탑을 올려다보았다.
“도무지 모르겠군. 대체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말이야.”
탑은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느껴지는 건 그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각지에서 마물들이 게릴라처럼 튀어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신경을 쓰는 것은 그와 이곳의 방어부대들이 전부였다.
그때 탑의 빛이 다시 진해졌다.
그것은 예전에 목격했던 것과 비슷했다.
탑에서 마물이 쏟아져 나오던 때와 말이다.
“시작인가?”
멧 중장의 얼굴이 살짝 구겨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