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달콤한 음성
* * *
고빈은 지나가던 길에 비춰지는 영상을 보며 혀를 찼다.
“와, 이젠 질린다.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은 얼굴인데.”
“왜? 원탑 놓쳐서?”
“네.”
“…….”
서준모 경위는 빈의 솔직한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보통은 아니라고 하지 않냐?”
“지금 맘 같아선 다이다이 까서 내가 원탑이라고 인증하고 싶거든요?”
“그래. 넌 솔직한 게 장점이지. 단점도 그거고.”
서 경위는 빈의 대답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왜 단점이에요!”
“너한테 단점이야. 매를 벌잖아.”
“아하!”
솔직한 덕에 을지부루에게 종종 쥐 잡듯 맞던 기억이 떠오른 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함께 있던 이들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어찌 되었든 최악의 상황은 벗어났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건 그렇죠. 대원길드가 영웅시 되는 건 꼴사납지만, 현 상황에서는 다행이긴 합니다.”
서 경위의 말에 김창진이 안도의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아직 의구심이 남았는지 강문호 중령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일단 지원화기가 제대로 먹힌다는 거니까, 다행 아닌가. 얼굴 펴게나.”
“그렇긴 합니다만, 현장에 나타났다는 조합이 영 신경 쓰입니다. 마족병들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저런 조합도 있을 수 있다지 않은가. 나름 효율적이기도 하고.”
구은태 박사가 강 중령에게 대답했다. 카르탈마니어의 설명에 의하면 분명 북쪽에 나타났던 초대형 마물은 사령관급에 어울리는 괴수라는 대답을 받았다.
심지어 효율이 좋아서 운용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머리가 나빠 효율적이라니.”
효율적이라는 말에 자료사진을 보며 쓴웃음들을 지었다.
마족들처럼 작전능력은 약하지만, 그 가진 바 힘이 강하기에 전초기지를 만들기 전에 풀어 놓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지성체인 마족이 침식지에 소환되는 건 꽤 많은 코스트를 차지 하는 데 반해 마물은 그게 적었다.
그렇기에 초대형 마물임에도 실제 고위 마족을 내보내는 것보다 부담이 덜 든다는 설명이었다.
머리가 나쁜 게 이럴 땐 효율적이라는 말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쏟아진 마물의 수가 적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 연구원의 질문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다.
“사전에 잡혀서 그럴지도.”
그 이유는 아무도 속 시원하게 내놓지는 못했다.
“그런데 오기원이 저 정도의 과감성과 실력을 갖췄다는 건 솔직히 영상이 아니었으면 믿지 못할 뻔 했습니다.”
강 중령의 말에 다들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요!”
“쯧, 넌 언제부터 오기원을 알아 봤다고 그러냐?”
빈이 격하게 공감을 하자 서 경 위가 혀를 차며 구박을 했다.
“딱 보면 알죠! 거기다가 대원길드가 언제부터 모험을 했다고.”
“딱 보면 안다는 말은 공감 못 하지만, 일단 그럴 만한 상황이기는 했습니다.”
창진의 말에 다들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의 위험경고를 오기원이 계속 묵살했었다고 합니다. 결국 인편으로 부대를 보내서 그 사실을 알리자 저렇게…….”
“개새끼! 시간 끌고 있었구나!”
구 박사가 욕설을 뱉어내며 부르르 떨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지금 그들의 귀국은 오기원의 활약으로 인해 싹 묻혀 버렸다.
다행인 건 악영향을 끼치던 기사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싹 내려갔고 말이다.
어차피 팩트가 밝혀지면, 좀 나아지겠지만, 찌라시의 충격에 비해 정정보도라는 건 힘을 못 쓰기 마련이다.
아니 팩트에 입각한 보도 역시 색안경을 끼고 받아들일 가능성도 컸고 말이다.
“여하간 똥줄 타서 한 거라고 해도, 한 건 하긴 했네.”
서 경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 덕였다. 꼴 보기 싫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 * *
“길드장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우렁차게 들려오는 인사소리에 대원길드장 오기원은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자신의 방에 도착한 기원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후우. 젠장…….”
그날 이후로 사람들의 반응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사기가 오른 길드원의 눈길은 둘째치고 하루가 머다 하고, 취재를 요청하는 기자들도 부담이었다.
마케팅 팀이야 지금이 기회라는 듯 온갖 소재를 쏟아 부어 가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기원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
‘빌어먹을 나도 모르게…….’
그날 그의 전투는 의지와 다르게 행한 것이 맞았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던 그 길을 밟기까지의 행동은 의지가 맞았다.
물론 그 순간까지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급박했던 상황에 더불어 무언가 큰일이 나지는 않겠지 하는 안이함 때문이었는지 평소와 달리 그 보랏빛 기운이 만들어 내는 길에 발을 올렸다.
그 다음부터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조종하는 것마냥 몸이 딸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멈추려 하려고 하니 몸이 멈추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 급박한 상황에서 멈춘다면 오히려 목숨이 위험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 결과 그 거대했던 초대형 마물을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있었다.
그 덕에 나중에 정신 차리고 방송에 반복되어 흘러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그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타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영웅이 되었고, 정부는 그에게 지휘권을 회수한다든지의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론 때문이다.
‘여기까지다. 여기까지.’
기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정신적 피로가 깊었는지 그는 곧바로 잠에 빠져 들었다.
잠시 후, 파리 한 마리가 조용히 날아들어 그의 어깨 위에 내리 앉았다.
파리의 눈은 보랏빛으로 은은하게 물들어 있었다.
“어헉!”
오기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깼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길드장님 괜찮으십니까?”
“아, 아니. 개꿈을 꾼 모양이야.”
기원의 말에 그의 비명을 듣고 달려들어 왔던 길드원들이 안도의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쉬십시오.”
안으로 들어섰던 이들이 다시 밖으로 나가자 기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뭐 이런 꿈을…….”
기원은 허탈한 음성을 내뱉었다.
꿈속에서는 수많은 세상들이 멸망하고 메말라 가는 모습들의 연속이었다.
그중에는 꽤 발달된 문명도 보였다. 판타지와 같은 풍경도 있었고, 마치 SF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근 미래의 배경도 있었다.
처음에는 맹렬하게 저항하고 승리를 거두는 모습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무너져 가는 모습들은 그가 꿈에서 본 세상들의 공통점이었다.
결국 모든 것이 스러져 버렸고, 보이는 건 보랏빛으로 물들어 버린 대지뿐이었다.
-꿈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때 다시 기원의 귓가로 울려오는 음성.
“흡!”
순간 기원이 벌떡 일어서며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때 뭔가 생각이 난 듯 그의 몸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자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파리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네놈…….”
-목소리가 좀 크지 않나?
순간 흠칫한 기원이 속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에는 어떻게 들어왔지?
날이 선 음성.
-한번 해 봐서 그런가? 말을 거는 게 자연스럽군.
-닥쳐라. 무슨 짓을 한 거지?
-선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꽤 고마워할 줄 알았는데. 그리고 긴장하진 말게. 이런 저급한 생물로는 말을 거는 것도 겨우 할 뿐이니까.
파리가 포르르 날아 그의 손등 위에 앉았다.
-목이 아프겠군. 이러면 좀 대화하기가 편한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기원의 질문에 파리가 대답했다.
-우리가 친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빌어먹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기원이 으르렁거리며 말을 하자 파리가 손을 비비며 대답했다.
-그건 차차 고민해 보고. 난 그저 우리가 정복해 왔던 수많은 세상들을 보여 줬을 뿐이야.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파리의 질문에 기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먹잇감을 고를 때에는 아무거나 고르지 않는다네.
-먹잇감?
기원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뭐, 통역이 이상하게 되나? 여하간 비슷한 거니 이해하게. 어찌 되었든 버려진 세상만을 탐하지.
-버려진 세상?
-법칙에 의해 버려진 세상. 뭐 신이라고도 하지.
-신? 신이 있나?
-뭐 있을 수도 없을 수도. 다만 어떤 세상이든 그 형태에 따라 달리 불리지만 법칙이 존재하지.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나 자립을 할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하게 되면 신의 관심, 혹은 법칙에서 제외되지.
-그럼…….
-맞아. 친구의 세상도 같아.
-하지만, 소환자와 강림자는…….
-별의 파편을 강림자라 부르더군.
-별의 파편?
별의 파편이라는 말에 기원이 반문했다. 그러자 친절한 음성이 이어져 나왔다.
-그래. 별의 파편 혹은 별의 기억이라 하지. 그대들 세상에 영향력을 끼쳤던 영웅들의 복제판.
그 이후로 설명이 쭉 이어졌다. 강림자라 불리는 것들의 실체에 대해.
그 기억이 불완전한 이유에 대해서도.
기원은 계속 그 설명을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중간에 멈추기는 어려웠다.
무언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다들 이렇게 생각할 거야. 이쯤 되면 더 유명한 세상의 영웅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고 말이지. 그러나 그 희망은 접으라고 하고 싶군.
방금 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기원이기에 그 말에 더욱 귀가 솔깃했다.
-이유가 있나?
-오 이제야 반응을 하는 건가?
-닥치고 설명이나 해 보지?
-미안하군. 예를 들면…… 그래 이 세상보다 더 발달된 문명도 있었지?
있었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문명이.
-그 세상이 가장 쉬웠어. 왜? 별의 기억이 흐려지다 못해 사라진 세상이었으니까. 물질이 발돨될수록 정신문명은 흐려지는 법이거든. 모든 게 발달된 문명이 대체하니까.
-그게 무슨 의미지?
-결국 별의 기억이라는 건 세상 사람들의 기억과도 같다는 말이야. 과거의 존재들이 세상에 끼친 영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지. 이렇게 되면 역설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영웅이 나타나야 하지만, 법칙이 떠나간 세상에서는 별의 힘도 약해지지.
기원은 묵묵히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연구진들도 비슷한 가설을 세운 적도 있기 때문이었다.
강림자는 모종의 정화작용 중 하나일 수 있다고.
마치 옛 그림자를 불러오는 것 같은…….
-별의 힘이 약해지기에 조각조각밖에 불러올 수 없는 거라네. 큰 힘을 가진 완전체를 불러올 수 없고 말이야.
그 말을 듣던 기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그의 설명과 맞지 않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꼭 맞는 것 같지는 않군.
-포식자를 말하는 거군? 아니지 그뿐 아니라 내가 데리고 있던 용병들도 있었고.
-포식자?
-을지부루. 그리고 천유화와 그 일당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