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왕의 유희
* * *
마물의 시체가 말 그대로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런 마물들의 시체를 또 다른 마물이 뛰어넘어오며 달려오다가 쏟아지는 집중사격에 걸레짝이 되어 다시 나뒹굴었다.
지옥에나 볼 법한 장면이었지만, 분위기는 오히려 훈훈했다.
“이거이 장난 아임다!”
“니보라 정신 차리라우!”
한동안 하릴없던 북한 출신 전역자들은 오랜만에 생겨난 일에 흥겨운 목소리를 내었다.
새로 지급받은 병기의 효과에 다들 신이 난 상황이었다.
거기에 나타나는 마물들 역시 쏘면 쏘는 대로 픽픽 나자빠져 주니 사기도 그만큼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대원길드 길드장인 오기원의 옆에 있는 비 서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정부쪽인 듯합니다.”
비서관이 들고 있는 오기원의 스마트폰으로 여기저기서 계속 연락이 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이쪽은 전투 상황임을 들어 계속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이쪽에서 흘린 걸 모를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당장 받아 봐야 좋을 게 없었다. 당장 시간은 이쪽 편이니까.
“줘 봐.”
“예? 받으시게요?”
사무관이 스마트폰을 건네주자 오기원은 그걸 슥 보더니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발로 밟아 버렸다.
콰작!
순간 스마트폰이 박살이 났다.
“기, 길드장님!”
“전투가 너무 치열해서 전화기가 부서졌군.”
“…….”
오기원의 말에 비서관이 할 말을 잃었다.
“침식지 안으로 진입한다.”
“지금 상황에선 언제 균열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침식지 주변에서 이렇게 마물들이 생성되어 나오는 것도 이례적인 상황이라…….”
오기원의 전진 명령에 곁에 있던 연구원 중 하나가 당황한 얼굴로 말려왔다.
“뭐, 문제가 되면 언제든 빠지면 되는 일이니.”
오기원은 지금 나름의 변명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대원길드가 전선을 좁히며 침식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답니다!”
해당지역의 총 책임자인 대원길드장 오기원과의 연락이 아직도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빌어먹을 기삿거리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
비상회의 상황실장의 외침에 연락을 맡은 이가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이미 말했습니다!”
“그럼 전달이라도 해 주라고 해! 그대로!”
“전부 말입니까?”
“그렇게라도 전해 주면 알아서 기어 나오겠지. 그리고 훈련소에 입소해 있던 소환자 모두 집결이 끝나면 바로 이동 준비하고!”
“알겠습니다. 아! 그럼 부대 지휘는 누가 맡습니까? 기존 침식 지도 지금 마물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차준우 소장님이 직접 맡기로 했다. 예비역 기동대원들도 모두 합류하는 중이니까.”
“아!”
전쟁 영웅이었지만, 기동대 창설에 대한 논란으로 인해 스스로 예편의 길을 걸은 이가 바로 차준우였다.
결과적으로 민간부대나 다름없는 기동대 창설은 신의 한 수였지만, 당시에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차준우가 얼마 전에 훈련 소장으로 복귀한 것도 모자라 이번에 지원군단의 사령관으로 복귀한다는 말에 상황실의 지휘관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경험 많은 일선 지휘관들이 전부 기존 침식지에 붙어 있는 지금 그만 한 지휘관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공백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위상은 아직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예? 뭐가 없어져요?”
순간 보고를 받던 상황병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가 커서인지 다들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각 침식지 핫라인을 맡고 있는 상황병들이 각자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들고는 비슷한 감정의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당황.
그리고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표정들.
“무슨 일이야!”
상황실장의 질문에 제일 먼저 연락을 받았던 상황병이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뭐냐니까!”
“치, 침식지가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부산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 침식지도…….”
“뭐?”
기존 침식지에서 마물들이 쏟아지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침식지가 사라지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마치 남은 거 털어 버리고 철수라도 하는 듯 말이다.
하지만, 아직 그 누구도 환호하지 못했다.
이미 사전에 위험경고를 받은 상황이기에 이것이 지금 좋아해야 할 상황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구 박사님께 연락해. 청와…… 아니 비상회의에도 전달하고. 빨리!”
다시 상황병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 *
망망대해.
-생각보다 먼가?
바다를 가로지르며 날아가던 마족마법사인 헤게루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지만, 왠지 육지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군주의 기운도 여전히 가까워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고 말이다.
-끙, 거리감을 모르니 답답하군.
그렇게 헤게루이안은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 * *
사방이 보랏빛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사자의 대공인 게르하이오 폰 기오르그가 만족 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곁에는 새로운 군주 위를 얻은 마족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수의 군주만 남은 거군.
-마계의 왕이시여!
마족들이 일제히 기오르그를 왕으로 칭송했다.
그의 존재감은 그 어떤 때보다도 강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두 군주의 힘을 하나로 뭉치고 또 다른 군주의 충성을 받기 시작하며 이미 균형은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
그런 그에게 남은 세 군주가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모인 순간 기오르그는 다시 칼을 뽑아 들었다.
그 결과 기오르그는 다시 두 군주의 힘을 흡수했으며, 최상위 마족이었던 이들 중 하나가 남은 최약체에 해당하는 군주의 힘을 흡수해 충성을 맹세했다.
그 홀로 모든 군주의 힘을 흡수하면 좋겠지만, 당장은 기존에 흡수한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충성 맹세를 통해 힘을 전달 받아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힘을 하나로 하는 순간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다시 새로운 칠군주를 명할 자격이 생긴다.
그게 마계의 법칙이니까.
그 순간 진정한 왕이 되는 것이다.
다만 그 과정을 살짝 비틀어 미리 휘하의 군주를 만든 것뿐이다.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강림.
침식지의 탑을 이용한다 해도 강대한 마력을 지닌 존재가 강림 하는 건 쉽지가 않았다.
마룡의 군주 오르페우스 역시 수하들을 내보내서 탑의 마력을 더 보충하고 나서 강림하기 위해 기다렸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네 군주의 힘을 하나로 흡수한 기오르그라면 더 막대한 마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오로지 그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마력들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가능한 것은 더는 그를 견제할 군주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군주는 자신의 권속이나 마찬가지니 더 문제가 없었고 말이다.
그 결과 기존 침식지들이 빠르게 힘을 잃어 가고 있었지만, 그건 상관이 없었다.
-탑의 건설은?
-준비 중에 있습니다. 목표로 한 곳에 강제로 침식지를 넓히는 동시에 기존 침식지의 힘을 그곳으로 몰고 있습니다.
-기존의 탑 잔재가 남았다지?
-그러하옵니다. 그곳을 다시 살리고 남은 후보지 한 곳에 다시 탑을 만든 후에 최종적으로 지금 목표로 한 곳에 탑을 만들 예정입니다.
-마력의 확보는 가능한 것이겠지?
기오르그의 질문에 탑의 건설을 맡은 마족이 고개를 조아렸다.
-최대한도로 계산 중에 있사옵니다. 다행히 저들이 탑을 완전히 회수하지 않아 그대로 활용한다면 시간적인 여유를 더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새로운 군주의 자리를 획득한 투쟁의 마족 쿠오칸이 나서며 외쳤다.
-어찌 왕께서 직접 나서려 하십니까! 이 쿠오칸, 저 보잘 것 없는 별의 파편 따위 모조리 지워 버리고 마수의 군주를 왕께 잡아다 대령하겠나이다!
-투쟁의 마족. 아니지, 이젠 투쟁의 군주라 불러야겠군.
-이 영광은 모두 왕께 있사옵니다!
기오르그의 말에 쿠오칸이 서둘러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마지막 마계의 왕에 오르는 일이지. 그 마지막 과실을 따는 두근거림을 다른 손에 맡기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기오르그가 입가를 올리며 말하자 쿠오칸이 고개를 더 숙이며 외쳤다.
-왕의 즐거움을 빼앗을 뻔한 이 우둔한 놈을 용서하시옵소서!
기오르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답했다.
-용서는 무슨. 충성이라 생각할 뿐이다.
기오르그는 궁금했다.
탑의 도움이 없어도 될 정도로 힘이 아무리 작다 해도 군주는 군주다.
심지어 권속을 최소로 끌고 갔기에 강림이 가능했던 마수의 군주였지만, 그를 꺾고 힘을 흡수한 별의 파편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가 알기로는 별의 역사에 일정 이상의 위명을 펼친 존재는 파편으로 소환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 영혼의 크기가 별이 불러올 수 있는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마계를 거쳤다 해도 이상하긴 하지. 아니 마계를 거친 존재가 왜 그쪽에서 나타났는지도 재미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영혼이 태어난 세상의 끈이 끊어진 존재가 가끔 마계로 오기는 한다.
마족에게 영혼을 판 존재라든지 신이 떠나가고도 모자라 별마저 의지를 다한 멸망한 세상이라든지.
흥미로운 존재였다.
결국 진짜 이유는 그의 궁금증을 풀어 줄 유희였다.
* * *
존 버튼 안보 보좌관은 인터넷의 기사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군.”
대한민국으로 되돌아가는 병력들이 아직 하늘에 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인터넷상에서는 난리가 나 있었다.
물론 버튼 보좌관 입장에선 나쁘지 않았다.
반대로 보면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선방했다는 홍보가 가능했으니까.
“그나저나 대체 연구소에서 벌어진 일은 무엇이지. 두 가지가 갑자기 변화를 가져온 게 걸리기는 하는데.”
애써 지킨 것이 갑자기 형태가 변화해 버렸다. 그 결과 연구원들은 반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연구의 진척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고, 무슨 큰 문제가 생긴 것 아닌가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반면에 지금 벌어지는 상황과 맞춰 변화가 생긴 건 아닌가 추 론하는 이들도 있었다.
“끙.”
여전히 머리는 아프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을 봤을 때 대한민국 쪽에서 무언가 이 일로 목소리를 내는 건 어려워 보였다.
반면 이쪽은 나쁘지 않은 것이 그들이 말한 대로 기존 침식지들이 빠르게 원상태로 회복되어 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단 내륙이 모두 회복만 되어도 경기가 크게 되살아나는 건 문제도 아니지.”
버튼 보좌관은 미소를 지었다.
알게 모르게 이번 일에 그가 많이 관여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이건 그의 정치생활에 있어 희소식이 될 수도 있었다.
“대통령이라.”
지금의 대통령과 크고 작은 일로 부딪침은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그의 입지는 꽤 나쁘지 않게 되었다.
다음 대선 주자로서의 가능성도 커졌다고 판단이 되었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좋은 기분을 만끽하는 그의 귓가로 전화가 울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