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새로운 관계
“그건 그들이 감수하겠다고 했으니 문제가 없습니다.”
박 총리의 과단성 있는 말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동맹인데 그렇게 해도 돼요?”
“동맹이니까요. 그들의 판단에 존중은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동력 뭔가를 취하는 거야…….”
슬며시 주변을 돌아보며 박 총리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모르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가 은은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와, 우리 총리 아저씨 일 잘하시네! 다음 총선 나오면 내가 찍어 드릴게!”
빈이 환하게 웃으며 외치자 박 총리가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당부의 말을 이었다.
“일단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인 것으로 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걸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눈 가리고 아웅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기럼 기케 하자우.”
“그럼 공동 연구도 포기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구 박사도 결단을 내렸다.
사실 인력을 모조리 흡수한 상황에서 탑을 연구한다는 건 굳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실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있지만 굳이 남 좋은 일을 해 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뭐, 알아서 행복회로 돌리라고 하죠. 대신 뭐 좀 뜯어내야 하지 않아요? 막말로 용병일 한 건데.”
빈의 말에 박 총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 부분은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일단은 탑에 대한 논란을 최대한 끌면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편이 유리할 듯하군요.”
“그럼 전 최대한 저쪽의 정보를 수집해야겠지요. 뭐 선공은 저쪽에서 했으니까…… 그리고 우리 쪽은 좋은 정보 수집수단이 있으니까요.”
창진이 한쪽을 바라보며 웃자 그의 시선을 받은 마족 마법사 헤게루이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과학으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학문. 마법이라는 것이 이들에게 새로운 눈이 되어 줄 것이다.
* * *
“쯧.”
버튼 보좌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정보가 차단이 된 상황이 아쉬운 것이다.
아마도 저쪽에서도 이쪽의 반응이 바뀐 것을 보고 정보차단에 더욱 힘을 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버튼 보좌관의 표정은 밝았다. 닉 레너드 대통령이 미국의 대통령다운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최근 대한민국의 도움을 받으면서 과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퍼주었던 모습과 달리 이번만큼은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 걸맞는 선택을 했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아든 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위험이요?”
[맞네. 잔존 위협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나왔네.]
탑에 관한 이야기였다.
대한민국 측에서 그 탑이 위험할 수 있기에 회수에 협조를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나온 것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존 버튼 보좌관이 입을 열었다.
“그때는 왜 그런 이야기가 없었다고 합니까?”
통화 상대는 바로 레너드 대통령이었다.
[이번에 추가로 확인 되었다고 하네만. 일단 정보국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파악을 하고는 있지만…….]
“이런 때일수록 흔들리시면 안 됩니다.”
버튼 보좌관이 재차 입을 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전화를 끊은 버튼 보좌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차단된 상황도 참 공교롭군.”
갑자기 정보가 차단된 것이 왠지 의도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존 버튼 보좌관이 회의실에 들어서자 이미 먼저 온 이들이 그를 향해 목례를 했다.
반대편에는 대한민국의 박용우 총리를 비롯한 이들이 자리를 먼저 잡고 있었다.
‘빌어먹을 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그 옆에는 구은태 박사가 함께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을지부루와 빈이 함께했다.
잠시 부루와 눈이 마주친 버튼 보좌관이 잠시 몸을 움찔했다.
“큼.”
자신의 행동이 무안했는지 헛기침을 내뱉은 버튼 보좌관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닉 레너드 대통령이 들어왔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레너드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일단 통화를 통해 이야기를 들었지만, 좀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레너드 대통령의 말에 구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해당 탑은 다시 침공 루트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구 박사의 설명이 끝이 났지만, 아직 주변에는 침묵뿐이었다.
“마계의 군주들은 모두가 경쟁자인데 그런 일이 쉽게 벌어지겠습니까?”
침묵을 뚫고 나온 질문은 레너드 대통령의 것이었다.
“그 부분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 일처럼 말입니다.”
대답은 박 총리가 했다.
그때 구 박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탑과 더불어 십년 전에 서울 테러 사건 당시 가져간 것들을 회수해야 하겠습니다.”
그 말에 버튼 보좌관은 물론이고 일부 대통령과 스미스 국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 연구진이 내린 결론 중 하나가 해당 물품 중 하나가 지금의 대침공 사태를 불러온 원인으로 파악했습니다.”
순간 국무위원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들의 시선이 대통령과 스미스 국장을 향했다.
“내 임기는 아직 사 년밖에 지나지 않았소. 그리고 대통령이라 해도 모든 사안을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말에 스미스 국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를 믿고 연구자료를 함부로 내줄 수 없는 법입니다.”
스미스 국장의 말에 국무위원들은 무언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다들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꺼낼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잘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런 희박한 상황을 잔존 위협으로 보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어서 말문을 연 것은 버튼 보좌관이었다.
다들 그를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 각자 영역을 가진 이들 중에 누군가가 압도적 지위를 가진다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돼서 뭐? 마왕? 이거 무슨 판타지도 아니고. 그런 존재가 된다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해리포터가 실제로는 현실에 있는 일이라고 하는 걸 믿겠습니다.”
“이미 세상은 판타집니다만.”
박 총리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 그러자 버튼 보좌관이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우리 연구 물품이 한둘도 아니고. 이 시점에 와서 그걸 원한다? 무언가 새로운 힘이 될 만한 것을 알아내기라도 한 것입니까? 내가 알기로는 마계라는 것과 그것은 연관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말입니다.”
“그건…….”
“동맹으로써 지금 이 상황은 꽤나 불편합니다. 무언가 서로 터놓을 것이 있다면 공유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쪽에서 연구 자료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만 듣고 다 내준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버튼 보좌관이 연이어 쏘아 붙이자 구 박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 총리 역시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였다.
“때려 치라우.”
갑자기 끼어든 음성에 다들 고개를 돌렸다.
부루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믿디 못하면 말라우.”
“하지만…….”
“할 만큼 했디 않네. 우리 동네가 위험하다니 날래 움직이자우. 뭔지 모를 것들을 가지고 실랑이할 시간 없어야.”
부루의 말에 박 총리가 붉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선 그대로 밖으로 나와 복귀했다.
뒤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있었지만, 말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외교적인 결례라는 소리가 나올 만한 행동이었으나 시작은 저쪽이 먼저였다.
결례라는 부분만 따지자면 저쪽이 이미 충분히 차고 넘쳤다.
차량에 함께 타고 있던 고빈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아니 총리님은 왜 그렇게 열을 내세요. 시늉만 하기로 하고.”
“듣다 보니 열 받아서 그러네. 허허. 그냥 메소드 연기 했다 치지 뭐.”
박용우 총리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너스레를 떨자 차 안의 분위기가 조금 밝아졌다.
“하긴 열은 받더구먼.”
이어서 말을 꺼낸 이는 구은태 박사였다.
“어쨌든 알려 줄 건 다 알려 줬으니 뭐 동맹으로써 할 건 다한 거죠?”
“그렇지. 그런데 좀 씁쓸하긴 하더군.”
“우리 이야기를 안 믿어서요?”
빈이 되묻자 박 총리와 구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쩔 수 없죠. 일단 처음 계획대로 가는 거죠 뭐.”
“걱정 말게. 원래 판 깨고 딜 치고 하는 건 이쪽 전공이니까.”
“그건 북쪽 전공 아니에요?”
“통일했으니까, 우리 전공 맞지. 그리고 그걸 진절머리 나게 당하다 보면 배우기 싫어도 배우는 법일세.”
박 총리의 너스레에 다들 웃음을 흘렸다.
* * *
케인 스미스 국장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무 나갔습니다.”
그의 말에 닉 레너드 대통령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요즘 보면 자네가 정보국장이 아니라 버튼 그 친구가 정보국장인 것 같군.”
대체적으로 정보국장들은 오로지 미국의 안위와 이득을 위해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저절로 강경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가 가장 많은 정보를 다루니까요.”
“…….”
스미스 국장의 의미심장한 말에 레너드 대통령은 입가에 매달려 있던 쓴웃음을 지웠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내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건가.”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최대한 보험을 들어 놔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보험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레너드 대통령을 지켜보던 스미스 국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차라리 내줄 것은 내주고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많은 것을 공유 받을 수 있는 포지션이 더 좋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즉 지금의 동맹이 아닌 새로운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관계라.”
새로운 관계라는 말에 레너드 대통령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다시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걸 버튼 안보 보좌관은 불필요한 타협 혹은 출혈이라 생각할 걸세. 그리고 최근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대외적으로 우리 미국이 보여지는 그림에도 타격이 있고.”
“차라리 더 밀접한 공동체를 만들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맹보다 더 나아가서 말입니다.”
스미스 국장의 말에 레너드 대통령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마 그런 길을 간다면 난 탄핵될 걸세. 인종차별이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미국이 그 어떤 나라에도 고개를 숙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으니까.”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닙니다.”
“맞아.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렇게 보인다는 거지. 문제는 그렇게 받아들일 사람이 많다는 점이고.”
레너드 대통령의 말에 스미스 국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 탈이 없길 바라야겠군.”
“공감합니다.”
“그리고 버튼 말일세.”
“예.”
“주시 좀 해 주게.”
존 버튼 보좌관의 행동을 주시하라는 말에 스미스 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이미 어느 정도는 시작했겠지만 말이지.”
그의 말에 스미스 국장은 맞다 틀리다 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 위험하단 말이지.”
레너드 대통령의 중얼거림에 스미스 국장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같은 의견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뭘 내줘야 이 토라진 친구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줄 수 있을지…….”
레너드 대통령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스미스 국장은 그의 머리가 꽤나 아프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