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으카겄네? 이미 떨어진 것.
-큭, 마지막 발악인가?
절망의 군주 에쉬발트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때 마켈그로이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회유와 교언의 마족 마켈그로이언의 이름으로 명한다. 눈앞의 적을 섬멸하라.
똑같은 말을 뱉었다.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마족병들의 얼굴의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그들의 시선이 에쉬발트가 아닌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 변화에 에쉬발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하는 거지?
에쉬발트의 질문에 마켈그로니언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음을 드러내었다.
-계약을 이행하는 중이지.
-계약?
순간 에쉬발트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마족들에게 있어 계약은 신성시 된다.
강제력이 물리적으로 표현되는 세상이다.
물론 그 강제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고위 마족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마켈그로이언의 힘이 뒤늦게 떠올렸다.
알려지지 않았던 강함. 그 정도라면 계약의 강제력도 예상 이상일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이런…….
순간 에쉬발트는 자신이 뿌려 놓은 절망의 힘을 거두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마켈그로이언의 입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나 회유와 교언의 마족 마켈그로이언의 이름으로 명한다. 눈앞의 적을 섬멸하라!
-빌어먹을.
마켈그로이언이 세 번째 외침을 터트렸음에도 마족병들은 그저 몸을 움찔거리는 것이 다였다.
당연했다.
절망의 힘.
그건 피식자들에게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물론 그 힘은 지금과 같이 몰린 상황에서 발휘된다는 것이 아쉽지만 말이다.
문제는 그 힘이 너무 훌륭했기에 아무도 그에게 덤벼들지를 못했다.
그 결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마족병들이 절규하고 있었다.
몸들이 부서져 내리며 보랏빛 연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연기는 마켈그로이언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 보랏빛 연기를 빨아들이며 마켈그로이언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이런. 애석하게도 계약은 깨졌군.
그렇게 말을 뱉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대답을 할 수 있는 마족병들은 없었다. 고위급이라 말할 수 있는 마족들도 병사들도 모두 하나같이 몸이 먼지처럼 부스러져 갔다.
그나마 일부 고위급이라 분류될 만한 마족들이 안간힘을 쓰며 마켈그로이언에게 매달렸다.
-기, 기회를…….
-기회를 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대들과 나와의 계약은 신성한 것이니까.
-아아…….
탄식을 마지막으로 고위급 마족들이 한줌의 재로 변해 휘날렸다.
보랏빛 기운을 빨아들이는 마켈그로이언의 몸뚱이에 에쉬발트가 새겨 놓았던 상처들이 하나둘씩 지워져 나갔다.
거기까지면 다행이었다.
마켈그로이언의 몸뚱이가 한눈에 보기에도 부쩍 커지기 시작했다. 비대해지는 것도 아니다.
단단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그 범위를 넓혀 가고 있었다.
꽈자작!
그것을 증명하듯 마켈그로이언이 몸에 걸치고 있던 갑주가 뜯겨져 나가며 흘러 내렸다.
커져 가는 신체를 이겨 내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몸을 부풀리던 마켈그로이언이 에쉬발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 발악이 어떤가? 절망의 군주여.
마켈그로이언의 질문을 받은 에쉬발트가 몸에 마기를 잔뜩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재미있군. 군주의 자리를 노리는 자답다고 해 주지.
마기를 끌어올리던 절망의 군주 에쉬발트 역시 몸에 흐르던 피와 상처가 어느 정도 복구되어 있었다.
마족병들이 흘리던 절망의 감정이 그에게 회복할 힘을 만들어 주었으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에쉬발트의 얼굴은 어두웠다.
힘으로 따지면 집어삼킨 양이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굳은 얼굴의 에쉬발트를 향해 마켈그로이언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내 마지막 발악을 한번 보시겠는가?
마켈그로이언이 한줄기 빛으로 화하며 에쉬발트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크어어엉!
에쉬발트는 대답 대신 포효를 터트리며 화답했다.
* * *
쩌어억!
거대한 광구가을지부루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카르탈마니어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아군과 어우러져 있는 상황에 이런 기습은 상대도 예상 못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이 일격을 위해 병사들을 내보내고는 전장의 뒤에서 한껏 힘을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직이라고?
상대가 소멸되었다면 군주의 권능이 자신에게 스며들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기운은 없었다.
그때였다.
자신이 쏘아 보낸 광구가 갑자기 팽창하기 시작했다. 마치 최후를 맞이한 행성의 모습처럼.
-설마?
그 빛나던 광구의 한가운데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걸?
카르탈마니어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갈라진 광구는 이내 사방으로 빛을 뿜으며 번져나갔다. 그 빛에에 순간 눈이 부실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카르탈마니어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쏘아 보낸 힘을 가르며 쏘아져 오는 부루의 모습을 말이다. 그 뒤에 거대한 그림자가 서리고 있었다.
실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똑똑히 보였다.
마치 새의 형상처럼 느껴졌다. 발이 세 개 달린 뭔가 기묘한 새의 형상으로 수많은 기마들이 내 달려오는 느낌.
-크윽!
카르탈마니어는 순간 자신의 양 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그의 손에 거대한 창이 만들어지며 하나가 되었다. 그 순간 커다란 울림이 퍼져 나왔다.
쩌어어엉!
자신이 쏘아낸 광구를 쪼개 낸 그의 대부가 자신이 만들어 낸 창의 중앙을 강하게 내려쳐 왔던 것이다.
땅!
이어서 울리는 청명한 소리.
-크윽!
한 자루였던 그의 창이 두 개로 나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카르탈마니어가 뒤로 몸을 빼내었다.
이대로 버티다간 자신의 창대를 잘라낸 저 대부가 가슴팍에 꽂힐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서걱!
그때 뒤늦은 절삭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카르탈마니어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크롸아아아!
고통에 찬 포효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롸아아아!
빛이 사라지며 울려 퍼진 포효 소리에 힘의 폭발로 인해 사방으로 뿌려지듯 튕겨져 나갔던 묵갑귀마대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함께 뒤엉켜 나자빠졌던 마족병들도 놀란 얼굴이었다.
“와씨! 저건 정말 아니지…….”
그때 한쪽에 나뒹굴고 있던 고빈이 넋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야? 봤어?”
묵갑귀마대원 하나가 질문을 던져오자 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언제 썼는지 모를 썬그라스가 걸려 있었다. 방송용으로 썼던 나름의 아이템이 이럴 때 빛을 발했던 것이다.
“어헉! 이리로 굴러온다!”
그때 빈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튕겼다.
그 순간 무언가가 통통 튀며 굴러왔다. 마치 어른 머리통만 한 둥근 것이었다.
그걸 본 마족병들은 물론이고 묵갑귀마대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무슨 머리통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냥 둥글었다.
“야, 이게 무슨…….”
질문을 하려던 묵갑귀마대원이 빈을 보는 순간 말끝을 흐렸다.
빈이 양 다리를 오므리고 질린 얼굴로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사적으로 다들 시선을 비명을 내지르는 마룡족 군단장인 카르탈마니어에게로 향했다.
누군가 탄성을 터트렸다.
“어우 야…….”
끔찍하다는 감정이 섞인 탄성이었다.
“기, 기러니 몸으로 때웠음 이래 되디 않디 않아.”
일을 저지른 부루마저도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앞에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면서도 한손으로 사타구니를 잡고 있는 카르탈마니어의 처절한 모습이 보였다.
-크롸아아악!
여전히 고통에 찬 울부짖음.
그런 카르탈마니어를 향해 부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으카겄네? 이미 떨어진걸. 내래 들어보니 하나 정도는 없어도 된다고 들었…….”
-죽여 버리겠다아아!
분노에 찬 카르탈마니어가 한손으로 반 토막 난 창대를 내려치자 그걸 피해 내며 부루가 버럭 소릴 내질렀다.
“기럼 피하디 말디 그랬네! 기럼 가슴팍 좀 쪼개지고 말디!”
그의 항변이 더욱 분노를 불러 일으켰는지 카르탈마니어가 단창을 연신 휘둘러 왔다.
“어이쿠!”
부루는 그 공격을 이리저리 펄쩍 펄쩍 거리며 피해 내었다.
사실 부루도 멀쩡한 상황은 아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광구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뒤의 수하들과 빈이 위험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생각은 맞았다.
파편에 휩쓸린 정도였지만, 다들 비실거리는 것이 꽤나 타격들을 입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부루 역시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다.
온몸을 두르던 갑주는 죄다 뜯겨 나갔고, 그나마 남은 일부는 거의 녹아내리듯 피부에 들러붙어 있었다.
온몸의 살은 마치 방금 불구덩이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벌겋게 익어 있어, 설익게 구운 고기의 냄새마저 온몸에서 풍기고 있었다.
“몸이 홀랑 타 버릴 뻔…….”
몸을 피하며 중얼거리던 부루가 순간 뭔가가 떠올랐는지 말을 멈추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부스스.
만지는 순간 코와 입 주변에 있던 것들이 바스라지며 떨어져 내렸다.
“이, 이거이?”
순간 더듬던 손이 머리를 향했다. 그리고 결과는 같았다.
바스스스!
마찬가지로 닿는 순간 바스라지며 허연 재만이 손에 남았다.
“아, 아니디?”
부루가 지독한 상실감에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대부 날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반짝이고 있었다.
부루의 머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크허어어엉!”
카르탈마니어의 포효와 비슷한 것이 부루에게서도 뿜어져 나왔다.
순간 부루의 삐걱이던 온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죠져 버리갔어!”
-네놈도 똑같이 만들어 주겠드아아아!
둘은 그렇게 분노의 외침을 터트리며 서로를 향해 맞부딪혀 나갔다.
중요도는 좀 다르지만 똑같은 상실감은 담은 두 상처 입은 괴수들의 충돌이었다.
콰콰콰콰쾅!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려 퍼지며 두 괴물들의 충돌에 다들 놀라 뒤로 연신 물러섰다.
그 와중에도 뒤늦게 대열에 합류해서 부상당한 아군들을 뒤로 빼내던 천유화가 혀를 내둘렀다.
“저게 뭔 지랄이래?”
“뭔가 처절하긴 한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오는지…….”
부축을 받으며 뒤로 나오던 빈이 연신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슬퍼서 나오는 눈물은 아니었다.
웃음을 참을 때 짜내어지는 눈물이었다.
* * *
절망의 군주 트라가 듀 에쉬발트를 내려다보는 마켈그로이언이 웃으며 물었다.
-어떤가. 본인이 느끼는 절망은?
-더럽군. 내가 느끼는 절망이란.
에쉬발트의 하체는 짓이겨진 채 한쪽에 뒹굴고 있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마켈그로이언의 발밑에 머리통이 놓여 있는 모습은 굴욕 그 자체였다.
물론 마켈그로이언도 멀쩡하지는 못했다.
왼쪽 팔뚝 아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고, 오른쪽은 그나마도 없었다.
그럼에도 에쉬발트보다는 나았다. 하체뿐 아니라 두 팔마저 짓이겨져서 채찍처럼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온몸의 상처에서는 보랏빛 마기가 베어 나와 마켈그로이언에게로 조금씩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승부가 결정되었다.
-크흐흐흐.
이 상황이 기가 막혔는지 엎어져 있던 에쉬발트가 몸을 들썩이며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