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세치 혀로 모습을 숨겨 왔다.
“우왁!”
빈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다행히 부루에 의해 뒷덜미를 잡히며 땅바닥에 안착했다.
이미 그 공격을 눈치챈 부루가 몸을 날렸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뒤에서 다가오던 이들 역시 눈치껏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기동대원들을 태운 마수들은 알아서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균형을 다잡았고, 뒤늦게 합류한 다른 강림자들의 경우는 말과 함께 뒹굴었지만, 이내 몸을 일으켰다.
피해는 거의 없었다. 문제는 돌파가 저지되었다는 점이었다.
아직도 일렁임은 남았지만, 그 사이 마족병들이 그들을 포위해 나가기 시작했다.
적절한 일격이었던 것이다.
“땅바닥이면 좀 나을 줄 아는 거간?”
부루가 히죽 웃으며 대부를 단단히 그러쥐었다.
“지랄 말라. 기거야말로 경기도 오산이야!”
“그런 건 어디서 배운…….”
“내래 요단강 구경들 하게 해 주갔어!”
나름 신식 언어를 내뱉으며 부루가 적진을 향해 제일 먼저 파고들었다.
대부가 바람을 일으키며 적들을 휩쓸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질세라 묵갑귀마대원들이 환두대도를 뽑아들고 난전에 돌입해 나갔다.
마족병 하나가 양손에 보랏빛 마기를 두르고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부루는 그 주먹을 그대로 붙잡아 꺾으며 대부로 상체를 대부로 갈라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족병이 휘두른 무기를 마치 수숫대마냥 잘라 버린 묵갑귀마대원이 그대로 환두대도를 이리저리 내치며 도륙해 나갔다.
어떤 묵갑귀마대원은 마족병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방패로 활용한 뒤에 동료를 베고 당황한 마족병의 죄책감을 죽음으로 갚게 해 주었다.
손에 잡히는 건 비틀고 꺾었으며 환두대도는 거침없이 모든 것을 자르고 지나갔다.
간혹 중급 마족이 달려들었지만, 그 순간 일부 가우리 병사들이 주변의 마족병들을 밀어붙였고, 순간 작은 포위망이 만들어지며 두셋씩 붙은 묵갑귀마대원들이 온몸을 난도질한 뒤에 사라졌다.
혼전 속에서도 마치 잘 짜여진 합격진 같았다.
기마돌격이 모든 것을 꿰뚫어 가며 돌파하는 느낌이라면, 이건 마치 송충이가 야금야금 이파리를 먹어 가는 것마냥 주변을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송충이가 지나간 곳에는 텅 빈 공간만 남지만,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절단 난 시체들만 남는다는 점이었다.
그 모습에 카르탈마니어가 눈을 빛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야지. 마수의 군주를 잡은 존재가 쉬울 리는 없지.
당황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눈앞에서 사지가 찢겨 나가고 피가 튀는 모습에 투기가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탑에서 본성과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메시지 마법으로 전해진 내용이 귓가를 울려왔다.
평소 전투 중에는 전령을 이용한다. 상황이 어떠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전투에 집중 중이라면 이 한마디로 빈틈을 내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메시지 마법은 전투중인 상황에서 쓰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그 불문율을 깼다는 것은 상황이 심각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본성이? 아까의 그 공격 여파가 큰 것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추가 지원 병력의 게이트가 끊어져서…….
그 말에 카르탈마니어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물들의 숫자는 크게 줄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 예로 적들은 지금 정신없이 뒤로 전선을 물리며 후퇴에 여념이 없었다.
모자라다면 마족병단이 아직 일차 병력 정도뿐이라는 것. 주변을 살피던 카르탈마니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뭐, 상관은 없겠지.
[예?]
-최대한 연결을 시도하고 남은 병력까지 투입해라.
[내부에서는 일단 수성을 하다가…….]
-나 말고 총사령관이 따로 있는가?
카르탈마니어가 으르렁거리며 묻자 마법 메시지를 보낸 마법병단 소속의 마족이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죄, 죄송합니다.]
-지금이 아니면 마수의 군주를 취하지 못할 수 있다. 저 버러지들이 꽁무니를 빼고 되돌아가면? 그렇게 되어 사자의 대공 따위가 또 하나의 군주 위를 차지하면?
카르탈마니어의 말에 마법 메시지를 보내던 마족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최대한 복구토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카르탈마니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부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더는 보고 말라. 명령이다.
카르탈마니어의 명령에 짧은 답변이 되돌아왔다.
[예.]
메시지를 끝낸 카르탈마니어가 양손에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양손이 보랏빛 섬광에 휩싸이기 시작하며 그를 중심으로 땅거죽이 바즈락거리며 부서져 떠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놀란 마족병들이 그의 주변에서 빠르게 이탈했다.
그의 힘에 휩쓸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카르탈마니어가 양손을 가운데로 모으며 중얼거렸다.
순간 거대한 광구가 부루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콰광! 콰쾅!
“크윽!”
에덤 소장은 방벽이 흔들리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신음성을 흘렸다.
최후의 방벽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물론 임시로 지은 것이기에 분명 한계가 있다고 판단은 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버텨 줄 거라고도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으로서는 제대로 버티기 힘들다는 생각뿐이었다.
“무립니다!”
“먼저 이탈하셔야 합니다!”
구워어어!
덩치가 십여 미터에 달하는 외눈박이 괴물이 온몸으로 방벽에 부딪쳐 올 때마다 방벽이 비명을 내질렀다.
일부 운 없는 군인들은 방벽 아래로 비명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그 마물에게는 전차포도 레이저 병기도 의미가 없었다.
약간 움찔하는 정도.
그리고 똑똑히 보았다.
화염과 함께 터져나간 현대화기가 그 마물의 몸뚱이에 닿지도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포탄은 튕겨나갔고, 폭음과 함께 뿌려진 화염은 겉 표면에 그을음조차 만들지 못했다.
젤리처럼 몸 주변을 흐르는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레일건에서 쏘아진 포탄이 몸뚱이를 조금이나마 뒤로 밀어낼 정도였다.
그것도 작심하고 버티면 의미 없는 공격이었다.
재미있는 건 다른 공격이었다.
지금 마물의 온몸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물론 큰 타격 같지는 않았다.
온몸에 작은 구멍이 나 있고 그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오는 정도였다.
마물들도 피가 모자라면 언젠가 죽을 수도 있고 빈혈현상이 올 수도 있겠지만, 보기에는 바다에서 물 한 바가지 퍼낸 느낌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피해를 입힌 것은 바로 그 장난감 같은 무기였다.
활과 석궁 공기 소총 등으로 쏘아진 것들이 레일건도 먹히지 않던 마물의 몸뚱이에 미세하지만 상처를 제대로 입히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만 넉넉했어도…….”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하는 안타까움에 에덤 소장이 탄식을 흘렸다.
콰아앙!
다시금 굉음이 울려왔다.
그러자 수많은 이들의 비명이 퍼져 나왔다.
“후우. 퇴각명령을 내리게.”
방벽 한쪽이 반쯤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이쯤 되면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거대한 마물은 물론이고 작은 짐승형태의 마물들이 무너진 곳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무너진 곳은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던 곳이라 이미 일차적으로 병력이 소개되어 인명피해는 없었다.
퇴각외침과 방송이 연이었다. 그러자 군인들이 빠르게 이탈을 시작했다.
“가시지요.”
“알겠네.”
에덤 소장이 전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바다 위에 뜬 섬처럼 탑의 입구 근처에 고립되어 있는 이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부디…….”
그들이 존재하고 안 하고에 대해서는 이미 그 차이가 어마어마 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빠져나간 전장이 급격히 기울고 있다는 것 정도만 봐도 말이다.
다음 전투를 위한 퇴각이 빠르게 이어져나갔다.
* * *
절망의 군주 트라가 듀 에쉬발트의 무릎이 꿇려졌다.
그의 주변으로 수많은 마족들의 주검이 뒹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아직도 많은 숫자의 마족들이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절망의 군주에게 주어진 절망적인 상황이지 않은가?
회유와 교인의 마족 마켈그로이언이 히죽 웃음을 흘렸다. 그의 행색도 그리 좋지는 못했다.
적회색의 갑주는 이미 반쯤은 박살이 나 있었고, 들고 있던 무기는 반 토막이 나 있었다.
물론 나머지 반쪽은 절망의 군주 에쉬발트의 가슴팍에 박혀 있었다.
-입만 산 놈인 줄로만 알았건만.
일그러진 얼굴로 마켈그로이언을 바라보는 에쉬발트의 얼굴에는 경악이 스며 있었다.
-뭐 아무래도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는 회유가 필요하지. 그래서 입만 산 놈이라는 소리를 듣곤 했고 말이야.
-왜 그런 힘을 가지고…….
-이런 힘으로도 이 정도 병력을 모아야 군주를 겨우 잡을 수 있으니까.
-다들 잘못 알고 있군. 마켈그로이언이 어떤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지.
오명이나 다름없는 평을 받으면서도 이리저리 부평초마냥 용병으로 떠돌아다니던 마족이 바로 마켈그로이언이었다.
알려지기로는 달콤한 말로써 전사들을 하나둘씩 끌어 모아 용병짓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붙은 말이 회유. 그리고 교언이었다.
그러나 지금.
마켈그로이언의 본 실력은 결코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의 말마따나 군주급은 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최상급마족들에 모자람은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 그의 손에 목이 떨어져나간 최상급 마족만도 셋이었다.
-교언의 의미를 좁게 생각했던 모양이지.
교언.
교묘하게 꾸며낸 말. 거짓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켈그로이언의 알려진 소문도 어떻게 보면 그 범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
-큭, 그렇군. 교언이군. 이것도 교언이야.
절망의 군주 에쉬발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마족들이 몸을 움찔거리며 물러섰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해도 마계에 유일한 일곱 대공 중 하나다.
그리고 절망이라 불리는 군주다.
그 절망에 침식된 마족들은 천천히 칼을 밀어 넣더라도 반항조차 못한다.
뭘 어찌한다 해도 항거할 수 없는 절망에 침식된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쯧. 돈값을 못하는군.
마켈그로이언이 주변의 마족용병들을 보며 혀를 찼다.
그중에는 마켈그로이언의 휘하에서 군단을 이끌던 상위마족도 있었다.
-맞아. 돈값을 못하는군. 내가 왜 절망이라 불리는지 몰랐던 건가?
위태로워 보이지만, 왠지 무너질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에쉬발트의 모습이었다.
오히려 상처 입은 맹수 같은 모습에 마족병들의 얼굴은 점점 더 하얗게 질려나갔다.
반면에 마켈그로이언은 아직은 여력이 많아 보이지만, 에쉬발트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에쉬발트가 입을 열었다.
-조금 전의 일격도 실패했으니 이제 무엇을 가지고 날 꺾을 셈이지?
에쉬발트의 몸에서 위압감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마족병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다. 더는 포위가 의미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런 마족병들을 보며 마켈그로이언이 입을 열었다.
-나 회유와 교언의 마족 마켈그로이언의 이름으로 명한다. 눈앞의 적을 섬멸하라.
그 말에 움직이는 마족들은 없었다.
아니 일부 몸을 움찔거렸지만 이내 무기를 떨어뜨리며 다시 무너져 내렸다.
마치 맹수를 앞에 둔 초식동물마냥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