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하얀 흉갑이 의미하는 것
-마력장 복구 되었습니다.
마법계열 마족의 보고에 카르 탈마니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마침 손님들이 멍청하게 들어와 있군.
-다시 소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휩쓸어 버릴 수 있을 겁니다.
마족의 보고에 카르탈마니어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저 파편조각은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나름 군주의 자격을 가진 놈이니까.
-아! 그럼?
마법계열 마족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카르탈마니어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돌려 접근해 오는 을지부루의 영상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저놈들을 빼면 나머지는 쭉정이일 뿐. 일부는 포위하고 나머지는 우회해서 쓸어버린다. 우리의 군주를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하니까.
카르탈마니어의 말에 마법계열 마족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예!
복창과 함께 마족들이 옛날 영화에서나 나왔을 법한 거대한 둥근 고리에 마력을 주입했다.
동시에 표면이 마치 거울처럼 번들거리며 막이 생겨났다.
그때 그 막에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오자 마자 흥분한 모습을 보이던 그것들은 마족들을 보더니 움찔거렸다.
마물들이 아무리 흉포하다 해도 마족은 상위포식자다.
일부 대형 마물의 경우는 하급 마족도 상대하기 힘든 개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곳은 군주의 탑이다. 대형 마물이라 해도 감히 난동부릴 마물들은 없었다.
심지어 마룡족은 마물 장악력에 강점이 있었다.
마기에 물들었다지만, 존재 자체는 한 세상의 조율자 역할을 하던 드래곤이다.
드래곤이라는 개체 특유의 장악력이 마물에게까지 펼쳐졌던 것이다.
-이게 마지막인가?
-근방의 마물들은 일단 전부 끌어 모았습니다. 아무래도 우리쪽 수는 적은 편이잖습니까.
-빌어먹을 작작좀 먹어치우지.
마물은 그들에게 부릴 수 있는 훌륭한 병사이기도 했지만, 나쁘지 않은 먹잇감이기도 했다.
그 덕에 그들이 거느리는 마물들의 수는 다른 군주들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그들처럼 마물의 숫자가 적은 군주를 꼽자면 마수의 군주 정도다.
마수의 먹잇감 역시 마물이었으니까.
-이럴 땐 사자의 대공이 부럽군.
-그건 그렇습니다. 먹고 나서 재활용도 가능하니까요.
마켈그로이언의 말에 중급마족 카버레이드가 웃으며 대꾸했다.
사자의 대공.
그는 죽은 자의 왕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네크로멘시 계열의 마족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 휘하에는 언데드 계열이 많았다. 언데드 계열이 많다는 것은 먹는 행위가 없거나 제한적이라는 의미다.
당연히 마물이 넘쳐나는 대지이면서 먹어치워도 언데드로 되 살아나기 때문에 효율면에서도 좋았다.
사자의 대공이 마계의 군주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이유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쪽은 운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보다도 더 먼저 많은 영역에 침식균열을 열었음에도 다 실패로 돌아갔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설마하니 마수의 대공까지 잡아먹힐 줄은 아무도 예상 못했으니까. 아무리 만만한 마계군주라 해도 말이지. 이럴 줄 알았다면…….
카르탈마니어가 입맛을 다셨다.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 쉬울 줄 알았다면 자신이 그 자리를 탐했어도 되었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하지만, 카버레이드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군단장께서야 넘치고도 남지요. 다만, 아시잖습니까. 균형이 무너지는 꼴을 볼 이들이 없다는 것.
-쯧.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일곱 군주들은 각자도생하면서도 균형이 어그러지는 순간 바로 서로 손을 잡는다.
실제로 마계 칠군주의 맹약이라는 것이 있다. 그걸 깨는 존재는 나머지 여섯 군주의 공격을 받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강한 군주라 해도 약한 군주를 집어삼키는 일을 하지 못했다.
그저 때를 보며 힘을 키울 뿐이다.
나머지 여섯군주를 상대할 압도적 강함이 생길 때까지.
그런데 마수의 군주가 지금 공석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힘을 계승한 존재가 있지만 엄연히 침략의 대상이었다.
또 새로운 군주는 맹약의 대상이 아니다.
계승되는 맹약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군주 위를 취하실 것이옵니까?
카버레이드의 질문에 카르탈마니어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니 이런 명령을 내렸겠지?
-새로운 군주의 탄생에 함께 할 영광을 주시옵소서.
카버레이드가 부복하며 청하자 카르탈마니어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군주에 오르는 순간 넌 내 권능의 일부를 맛 볼 것이다.
-새로운 군주의 탄생에 마신의 축복이 있길.
카버레이드의 축언에 카르탈마니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아하하하하하!
에덤 소장이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좋아! 이정도만 해도 충분히 막을…….”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탑의 문이 다시 열리며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 아직도?”
“미친…….”
한동안 쏟아지지 않고 있었기에 이제 마물들의 공세가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었다.
실제로 침식 균열이나 대침식 때에도 마물들은 초반에 쏟아지고 끝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이제 끝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다시 또 쏟아져 나온 것이다. 문제는 그 흐름이다.
“제, 제네럴 을지가 포위되고 있습니다!”
“소수 포위병력을 빼고는 나머지 마물들이 일제히 우회하기 시작합니다.”
“빌어먹을……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방패를 활용하질 않나, 초보적이지만 대열을 갖추질 않나…….
심지어 지금의 상황은 포위와 우회기동을 구분하고 있었다.
본능위주로 움직이던 것과는 달랐다.
아무리 강림자가 강하다 해도 숫자만 따지면 막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기초적인 전술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 이쪽의 우위는 없다고 봐야 했다.
강림자가 소수이면서도 마물들을 압도할 수 있던 것은 그래도 이쪽은 전술을 바탕으로 전투를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전장이 크게 어그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
다른 방향에서 뛰어 나갔던 강림자들이 마물들의 파도에 그대로 휩쓸려 나갔다.
일부 강림자들은 서로 뭉쳐 후퇴를 시작했다. 하지만, 깊게 들어가서 타격을 시도하던 강림자들은 어김없이 휩쓸리고 있었다.
생존 자체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역소환되었으리라 충분히 예상되었다.
“아차!”
그때 에덤 소장이 멧 할러데이를 찾았다. 그러나 곧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멧 중장과 미국 소속의 소환자와 강림자들이 부루가 이끄는 병력의 후미에 합류를 했던 것이다.
그들뿐 아니었다.
한국의 기동대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물론 기동대의 경우 아직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상황이라 반신반의 하지만, 나름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포위를 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방어선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에덤소장에게 다가온 참모진 중 하나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의 웨이브를 막기 위해 물러난 방어선이 다섯 개였다.
지금 쏟아지는 숫자를 보니 처음에 계속 쏟아지던 숫자보다는 적었지만, 그렇다고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거기에 아직 침식지에는 몸을 일으키고 있는 마물들이 있어 최소한 초반 웨이브 숫자의 삼분지 이 정도는 회복될 것으로 보였다.
“최대한 버티는 수밖에…….”
에덤 소장의 얼굴은 더없이 착잡했다.
“와……씨.”
고빈은 멍한 얼굴로 주변을 메워가고 있는 마물들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돌파해서 적들의 탑에 진입을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탑에서 다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뻑적지근 한데.”
숨도 좀 거칠어져 있고, 온몸의 근육도 뻐근했다.
전투를 하고 마물을 죽일수록 마치 게임의 캐릭터처럼 강해지는 재미에 전장에 점차 적극적이었던 빈이었지만, 눈앞의 숫자에는 질릴 수밖에 없었다.
“거미새끼떼 같구만 그래.”
“그러게요? 그런데 이러면 일단 뒤로 물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길킨 하디…….”
부루가 뒤를 돌아보았다.
앞뒤로 꽉 틀어막힌 마물들이 보였다. 하지만, 충분히 뚫을 수 있어 보였다.
그때였다.
-다시 만났구나! 마수의 군주여!
어디선가 귀청을 찢는 듯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부루가 고개를 돌려보니 탑의 문에서 거대한 체구의 마족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저거이 저번에 튄 아새끼 맞디?”
부루가 눈을 꿈뻑이며 묻자 천유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네요? 그런데 그 뒤에…….”
그 존제의 뒤로 마물과는 달리 정예처럼 보이는 이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저거 마족병인데요?”
천유화의 말에 빈의 얼굴이 헤쓱해졌다.
“저것들이요?”
“어. 저쪽 세상에서 좀 싸워봐서 알아. 그냥 힘 쎈 병사라 보면 될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했지만, 유화를 비롯해 가우리 병사들의 표정은 아까와 달랐다.
각자 무기를 재확인하고 명령이 없어도 대열을 다시 갖추는 모습만 보아도 상대가 말처럼 쉬운 이들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물론 이미 마족들의 정예에 대해 들은 바는 있었다.
“저, 전 슬 빠질까요?”
빈이 조심스럽게 묻자 유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새끼 빠져가지고. 묵갑귀마대가 어딜 빠져?”
“예?”
“너도 묵갑귀마대다.”
“…….”
그때 유화가 퓨켈의 안장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빈에게 휙하니 집어던졌다.
반사적으로 그걸 받아 든 빈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장군께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셨던 거다. 보니 지금 줘도 되겠네.”
“쓸데없는 소리 말라.”
부루는 앞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있었다.
빈은 그런 부루를 한번 보고는 다시 손에 들린 것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흉갑이었다.
처음에는 이들이 전부 묵갑귀마대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 중에서도 묵갑귀마대라 불리는 이들은 오십명이었다.
물론 그게 계급은 아니었다.
다른 건 역할이었다.
전투에 나설 때 가장 선두에 섰다. 포위를 뚫을 때에도 그들이 가장 먼저 나섰다.
퇴각하며 후위를 막아설 때에도 그들이 그 자리를 지켰다.
가장 위험한 곳에만 존재하는 이들.
개마무사들 중에서도 선택된 이들이라 했다. 역사에는 없는 존재들.
떠돌이라 불린 이들의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했다.
“이거 빼박이네. 도망도 못 치게 만드는 거잖아요 이거.”
빈은 말과 다르게 빈의 입가는 찢어질 듯 벌어져 있었다.
“지랄 말라. 시간도 없는데 떠들디 말라우.”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다가온 부루가 빈의 손에 있던 흉갑을 빼앗아 그의 가슴에 채워 주며 입을 열었다.
“사지가 떨어져도 온몸에 화살이랑 칼이 박혀도 심장이 뛰는 한 싸움을 멈추지 않는 법이야. 기래야 묵갑 귀마대라 할 수 있는 거이디.”
다 채워준 부루가 처음으로 눈을 마주했다.
“살아가는 시대는 다르디만, 이 순간만큼은 전우란 말이디. 알간?”
“예. 아저…… 아니 장군님.”
“됴아. 한번 날뛰어 보자우.”
부루가 빈의 어깨를 툭 하고 두들겨 준 뒤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