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전투 그 후
* * *
수풀에 감돌던 보랏빛이 사라져 갔다. 마치 초목이 원래의 빛을 찾듯.
누구나 반길 만한 상황이었지만, 그 대지에 살아가던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많은 마족들이 그 땅에서 이탈을 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남은 것들은 마수들뿐.
마치 이 넓은 마계에서 그곳만이 다른 세상인 것처럼 변해 있었다.
-마, 마수의 대공이!
-소란 떨지 말라.
사자의 대공 게르하이오 펜 기오르그는 창백한 얼굴로 달려들어온 고위 마족에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제야 조금 진정을 했는지 입을 다물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알고 계셨나이까.
-내 군단장은 아니었으나, 차원의 틈새가 다시 닫혔고, 돌아온 것은 없으니까.
-소멸된 듯하옵니다.
-맞아. 놀라운 일이지.
놀랍다고 말을 했지만, 사자의 대공 기오르그의 표정은 딱히 놀란 것 같지 않았다.
이전처럼 평온할 뿐이었다.
-재미있지 않은가? 확실히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지.
기오르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예상을 벗어난 일이라는 말에 고위 마족은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을 했다.
-예상을 벗어났다 하심은?
-그저 적당히 순혈을 뿌려 주리라 생각은 했지만…….
순혈이라는 말에 고위 마족의 얼굴이 밝아졌다.
-확실히 나쁜 일만은 아니군요. 허나 새로운 마계대공이 탄생은 변수가 아니겠습니까?
-쿠리울은 일곱 군주 중에서도 말석. 그 힘을 얻었다 해도 추종자 없는 힘일 뿐. 내가 걱정해야 하는 건가?
기오르그의 말에 고위 마족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어찌 되었든 고위 마족들의 순혈이 아닌 대공의 순혈이 흘러나갔으니, 우리에겐 좋은 일이지.
기오르그의 미소가 점점 짙어져 갔다.
* * *
방송은 하루 종일 침식균열을 막아 낸 일로 도배되어 있었다.
뉴스를 비롯해 각종 예능까지도 소환자와 침식균열에 관한 내용뿐이었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은 바로 마물이었으니까.
그 중에서도 침식균열은 이제는 상처가 겨우 아물어 가는 대침식을 떠오르는 대사건이었다.
불과 몇 달 만에 연이어 벌어진 일이었고, 또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동시에 세 곳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연히 이슈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인사로 떠오른 것은 바로 고빈과 을지부루였다.
특히 빈의 경우 이번에는 대놓고 작정하고 영상을 촬영했기에 방송국에서 송출할 만한 자료들이 넘쳐났다.
심지어 군주급이 아닌 대공급이라 명명된 이번 쿠리울과의 전투에서 소환자로서는 유일하게 전투 범위에서 싸웠기에 그 유명세는 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전신길드와 신컨길드도 덩달아 이번 침식균열 사태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물론 전신길드야 빈이 소속된 곳이기도 했지만, 그와 별개로 나머지 두 개의 침식균열을 막아 낸 공로를 얻은 것이다.
아군들의 지원이 오기 전까지 끝까지 버텨 낸 그 필사적인 장면들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기에 충분했다.
반면에 역풍을 맞은 곳도 있었다. 바로 대원길드였다.
대원그룹에서는 침식균열사태가 끝나자마자 자체 촬영한 영상으로 공익광고 형태를 빌어 선제 방송을 했다.
마물과 싸우는 대원길드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이전 대원그룹 관련 이슈를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정부쪽에서 촬영한 영상이 튀어나오면서 시작되었다.
언제 찍었는지 항공 촬영 영상에는 확연하게 몸을 사리는 그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무리 대원그룹 쪽에서 영화와 같은 기법으로 영상 효과를 집어넣어 편집했다 해도 진실을 덮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쯤 되니 영웅이 될 이들과 질타를 받을 이들이 명확하게 나누어졌다.
심지어 이쪽이 침식균열을 막은 지 이틀이 지났음에도 다른 국가들은 아직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사실이 여론이 뜨겁게 달아오를 수 있는 원인이었다.
즉 소위 국뽕에 취했다는 말이 각지에서 흔하게 들려올 정도였다. 침식균열의 소멸은 세계 유일이라는 말.
아직까지도 다른 국가들은 소멸이 아닌 버티기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침식장벽과 대마물 전술기지의 형태를 벤치마킹한 여타 나라들은 그저 마물들의 확산을 최대한 억제하며 버티는 것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그중에 백미는 바로 마수들의 서울 질주였다.
경찰과 기동대들이 일제히 출발하며 도로의 갓길로 호위하듯 달리고, 그 중앙을 마물이 아닌 마수라 명명된 존재들이 몰려가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적일 때는 그 무엇보다 두려웠던 존재들이 같은 편이 되었다니 사람들은 두려움과 든든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문제제기가 없지는 않았다. 이번 침식균열이 기존의 균열과 다른 점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죽겠네.”
“내 말이.”
전투가 끝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거의 잠자는 시간만 빼고 회의의 연속이었기에 연구원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건장한 체구의 중년 남성이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고생들 하시네요.”
“아, 예.”
“감독님도 고생 많으십니다.”
“뭐, 그래도 요즘 속은 편합니다.”
“하하하! 하긴요, 여기가 가장 안전한 곳일 테니까요.”
그렇게 연구원들과 말을 주고 받고 사라져 가는 남자를 보며 이번에 이곳으로 오게 된 연구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굽니까? 분위기가 군인은 아닌 거 같은데. 소환잡니까?”
“아니 원래 여기 주인.”
“예?”
“액션스쿨 대표. 무술감독 하는 양반이야.”
이곳에 제법 오래 있었던 연구원의 답변에 젊은 연구원이 눈을 껌뻑거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액션스쿨 대표가 주인은 뭐고…….”
“원래 이 일대가 저 양반이랑 퍼스트 엔터 땅이었거든.”
“예에? 그런데 아직 여기 있어요? 이 연구단지에요? 여기 전부 보안 투성이잖아요!”
젊은 연구원이 놀라 외치자 답변을 해 주던 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조건이 원래 그거였어. 조만산 퍼스트 엔터도 이쪽으로 입주한단다.”
“아니 무슨 민간 사업자가…… 그것도 엔터 사업자가 이곳을 옵니까? 윗사람들이 미치기라도 했답니까?”
놀라 외치는 말에 선임 연구원이 실실 웃으며 답했다.
“그것도 조건이다.”
“땅을 기부라도 한 겁니까?”
“비싸게 팔았다데?”
“아니 그럼 왜!”
“특수 관계자.”
특수 관계자라는 말에 순간 젊은 연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대장군 명이시니 더는 묻지 마라. 있다 보면 안다.”
“대장군은 또…… 아 설마?”
“그래. 을지부루.”
“그, 그럼 예전 그 사건! 아, 판도라!”
판도라라는 말이 저절로 연이었다. 그제야 알아들은 그의 모습에 선임 연구원이 웃으며 답변을 다시 이었다.
“그리고 저 양반 회사 사람 중 둘이 이번에 새로 강림자를 소환해 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꺽정이란다.”
“그 금연 철퇴 맞은?”
“뭐, 그렇지.”
선임 연구원이 쓴 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
툭툭.
임꺽정이 손애 든 것을 툭툭 털어대자 그의 소환자인 광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거 담배 아니다.”
“안다. 버릇이다.”
꺽정이의 손에는 곰방대 대신 막대 사탕이 들려 있었다.
“후우.”
“막대사탕 빨고 뿜지 좀 마! 연기 안…….”
담배 피듯 막대사탕을 입에 물었던 꺽정이 담배연기 뿜듯 입술을 오므리고 훅 불어대었다.
그 꼴을 보고 발끈했던 광호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사탕을 빨고 뿜었음에도 연기가 훅하고 흘러나왔다.
“나온다. 연기.”
입을 떡 벌리고 있던 광호를 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한 꺽정이가 다시 막대사탕을 입에 물어 갔다.
꺽정이에게 내려진 건 바로 금연철퇴였다.
이번에 침식균열 영상을 준비하면서 계속 그가 곰방대를 물고 있는 모습이 나왔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각종 단체에서 항의가 왔던 것이다.
심지어 마물의 머리통이 날아가는 모습을 계속 내보내면서도 꺽정이가 곰방대를 물고 있다 보니 여기저기서 항의가 들어왔던 것이다.
그 조치 결과가 지금 꺽정이가 빨고 있는 막대사탕이었다.
다행인 것은 꺽정이가 그걸 꽤나 즐기게 된 거라는 점이었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광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연구원들이 잰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기존 장벽들을 모두 철거하고 뒤로 물려야 할 판입니다.”
“서울의 경우 침식지대가 장벽을 넘어서진 않았지만, 부산과 인천은 다릅니다. 특히 인천은 배나 늘어난 상황에서 멈추었습니다.”
연구원들의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그때 구은태 박사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서울의 경우 침식지대가 넓어졌다는 내용은 아닙니다. 문제는 조사결과 침식지의 농도가 높아졌습니다.”
구 박사의 말에 다들 의견을 내밀기 시작했다.
“아직은 언론을 활용해서 이목을 끌고는 있지만, 오래가기는 힘들 겁니다.”
“피해가 컸으니…….”
연구원의 답변에 구 박사는 다시 한숨을 띠며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강림자를 비롯해 이번에 희생된 소환자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다들 시체도 제대로 건지지 못할 정도였다. 만약 이런 사실이 더 부각되었다면 대한민국은 더욱 시끄러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언론을 활용해 일단 고빈을 영웅으로 확실하게 포장을 한 것이었다.
약간이나마 시간을 번 것이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서 연구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구 박사의 질문에 담당 연구원이 입을 열었다.
“이번 상대가 대공급이 아니었다면 확실히 알아보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게 말을 하던 연구원이 차트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고전했던 기존 A급으로 분류된 개체들 역시 이와 같은 방법을 활용하니 꽤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흐음. 이거 이 연구소와 훈련소의 가치가 점점 커져 가는군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이곳에서 우리는 철저한 연구를 통해 이 사태를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피곤한 얼굴들이었지만, 다들 활기가 가득했다.
할 수 있다는 것.
그 희망 때문이었다.
그때 그들의 눈동자에 익숙한 사람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더 큰 문제는 이 부분입니다. 강림자인 을지부루가 마왕이 되었다는 것 말입니다.”
마왕이란 말에 다들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놀라서가 아니었다.
이틀간 잠 아껴 가며 회의를 했는데 이제 이 문제가 언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 했지만, 쳐들어왔던 마수라는 존재들이 대공이 무너지자 부루를 선택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작게 한숨을 내쉰 구 박사가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마수들이 인천 공략에도 지대한 공을 세운 만큼 우리의 판단은 신중해야 합니다.”
“인정은 합니다만, 마물이나 마수들은 언제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떠들어대는 연구원들을 보며 구 박사는 이 또한 지나가겠지 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