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보랏빛 광원이 향한 곳
콰콰콰콰!
“아…….”
솟구친 보랏빛 기둥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던 광호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보랏빛 기둥이 솟구쳐 오른 하늘위에 드리웠던 짙은 먹구름에 구멍이 생겨나 햇빛이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겪어 본 것이 아니기에 그 위력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후폭풍에 주변으로 밀려난 강림자들과 하늘의 구름이 뚫린 것만으로도 그 위력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보랏빛 기둥이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본 광경은 쿠리울의 발 아래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던 부루의 모습.
“대장군!”
유화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후폭풍에 여기저기 흩뿌려지듯 날아갔던 가우리 병사들 역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갑주는 어디로 온데간데 없이 상처뿐인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부루가 대부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려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탓에 몸에 그나마 걸쳐져 있던 갑주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갔다.
“야, 이거 꼴 사납구나야.”
부루의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핏물은 이내 기화되어 연기처럼 흩뿌려졌다.
그때 빈이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걱정 말라우.”
그때 쿠리울이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부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의 기억이 존재하는 행성은 숱하게 보았지.
“기거이 뭔데 자꾸 그러는 거이야?”
-대항자, 전투의지조차 사라진 자. 육체가 나약해진 자들에게 남은 희망. 신이 떠나간 세상에 남은 별의 마지막 몸부림이지.
쿠리울이 부루의 질문에 답했다.
“됴은건 아닌가 보구만. 기런데 이상한거이 이쪽 아새끼들이래 싸울 줄 모르는 아들은 아니디. 방법만 다를 뿐이야.”
-그래. 그런 것 같군. 다만 물질 문명이 지나치게 발전하다 보니 우리와 같은 존재에 대항하는 법을 잃어버린 건 마찬가지.
“몸땡이로 싸워야만 되는 거이간? 기러면 무기도 들디 말아야디. 개소리디 그건.”
부루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자 쿠리울이 어깨를 들썩였다. 웃고 있었다.
-자만했어.
“데질뻔 했어야. 자만이라고 하면 내래 섭하디 않겠어?”
-그래 인정하지. 실력이라는 걸.
그때 쿠리울의 머리끝에서 사타구니까지 보랏빛 운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래야디.”
부루가 다시 대부를 지팡이 삼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때 쿠리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마계의 대공이지만 난 내 세력과 힘을 잃은 상태라 이 꼴이 되었다. 하지만, 이곳을 노리는 존재들은 나와 다를 거야.
“그건 그때 가 봐야 알디 않갔어?”
부루의 말에 쿠리울이 크게 웃었다.
-호호호호! 나는 자만했으나 그대는 자만하지 말라…….
“시답잖은 소리 말라.”
-잊지 마라. 그들은 나 따위는 한손으로 짓이길 수 있는 존재란 것을 말이야.
“기건 또 골아프구만.”
쿠리울의 몸의 중간에서 흩뿌려지던 보랏빛 기운이 점차 흩어지며 그의 몸도 천천히 힘을 잃고 양옆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쩌억 갈라지는 쿠리울의 몸이 양단되어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그 몸뚱이들은 보랏빛 기운으로 변해 사방으로 뿌려졌다.
그 몸뚱이가 사라지고 보랏빛 광원만이 남았다.
그 광원에서 마지막 음성이 울려왔다.
-축하한다.
“응?”
부루가 빛에서 새어나오는 음성을 들으며 신기하듯 쳐다볼 때 꺼져 가는 마지막 음성이 힘없이 울려 퍼졌다.
-새로운 마계의 대공이여.
화아악!
“이, 이거이 뭐이간!”
순간 놀란 부루가 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주먹만 한 보랏빛 광원이 순식간에 부루의 심장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거이 무슨…….”
부루는 다시 엉덩방아를 찧은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마수 하나가 다가왔다.
“이 짐승새끼래 간덩이가 부었구만.”
부루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우리 병사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구경난 거이간? 저 마물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싹 다, 잡아 죽여야 끝이 나는 거이야 아직 전투는 끝이…….”
부루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커허어엉!
캬우우우우!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마수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동시에 부루에게 다가오던 마수가 옆에 있던 마물의 목을 물어뜯었다.
콰직!
그와 함께 마수들이 일제히 마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미틴 거간?”
부루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마수들을 바라보았다.
* * *
“왜 안 오냐고!”
구도원은 뼈다귀를 휘두르며 외쳤다. 물론 그의 뼈다귀는 아니었다.
방금 전 박살낸 해골의 다리뼈였다.
장벽을 상실하고 밀려난 강림자와 소환자들은 장벽 입구에 친 바리케이트에 의지해서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을 막고 있었다.
그의 뒤쪽에서는 박격포들이 연신 포탄을 쏘아올리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그렇게 한발이라도 쏘아 올려야 허접한 놈들의 숫자라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위위!”
누군가의 외침에 도원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염병할!”
장벽 위에서 뛰어내리는 마물이 눈에 들어왔다.
콰콰콰쾅!
물론 곧바로 쏘아진 유탄세례에 도로 퉁겨져 날아갔지만 말이다.
그러나 뛰어내리는 개체는 하나 둘이 아니었다.
퍼퍼퍽!
다행인 것은 떨어져 내린 것들은 이내 피떡이 되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대체 왜 뛰어내리는 거야!”
그 모습에 도원이 짜증을 부렸지만, 그의 옆에 있던 팀장 하나가 이유를 발견한 듯 답변해 주었다.
“저거, 점점 높아져 갑니다…….”
꾸어엉!
그때 또 다른 마물들이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젤리베어였다.
철퍽! 철퍼덕! 철퍽!
젤리베어 역시 떨어지자마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슬라임마냥 바닥에 쫙 퍼졌다.
문제는 젤리베어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꾸물거리며 다시 형태를 가져가는 그것들의 위로 또 다른 마물들이 떨어져 내렸다.
젤리베어는 다시 형태가 뭉그러졌지만, 위에 떨어져 내린 마물은 마물들의 시체로 만들어진 작은 동산 위에서 굴러내려 왔다.
캬르륵! 그것도 이전의 마물들과 달리 비교적 멀쩡하게 말이다.
“이런 씨부랄 상식도 없는 새끼들! 뒤로 물러!”
도원이 외치며 뒤로 뜀박질을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다시 화력지원이 시작되었다.
최소한 충격력을 이용해 마물들이 뒤쫓지는 못하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전 포반 일제 이탈!”
“이탈!”
“아우씨 지렸네!”
“야! 뛰어 빨리!”
복명복창과 함께 예비군들과 장병들이 일제히 각자의 포진지에서 빠져나와 뛰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최종방어선에 있던 소환자들과 강림자들이 달렸다. 하지만 모두가 빠져 나온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뒤를 막기 위해 배치 되어있던 강림자들의 몸이 마물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졌다.
핏빛안개가 되어 사라지는 강림자들의 희생으로 포진지 뒤편의 마지막 방어선에 도착한 병력들은 이를 악물었다.
“대원길드 이 개새끼들은 어디 있어!”
“그, 그게…… 저쪽에 있습니다.”
팀장의 답변에 도원이 고개를 돌렸다.
뒤쪽에 강림자들의 벽에 쌓인 이들을 볼 수 있었다.
“하아. 이 와중에도?”
그들이 가장 먼저 이탈해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믿을 새끼들이 아니었다. 발암 고구마 같은 새끼들.”
“그러는 길드장님은 사이다고요?”
팀장의 대꾸에 도원이 바닥에 굴러다니던 검 한 자루를 발끝으로 쳐올려 잡으며 답했다.
“여기서 살면.”
“아니 되오! 아니 되오! 물러서야…….”
“부루 장군에게 너 맡겨 버린다.”
순간 떠들어대던 김경징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두두두두두두!
지축을 흔드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병사들의 고개가 뒤를 향했다.
“좆됐네.”
뒤쪽에 마물들이 떼지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서울이 실패한 거?”
침식 균열이 아닌 일반적인 균열사태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마물들의 숫자가 뒤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저건 좀 희한하게 생겼네요? 호피 옷을 입은 게 꼭 사람 같…….”
“꺽정이라 불러라아아!”
머리가 두 개 달린 늑대 위에 올라타 있던 호피 옷을 입은 이가 내지르는 소리에 도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들의 시선에 기묘한 것에 보였다.
도원이 물었다.
애애애애애앵! 애애앵!
“요즘은 마물들을 싸이카들이 호위하냐?”
“아뇨…….”
몰려오는 마물들 양 사이드로 대통령 차량 경호할 때나 보이던 바이크가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호위하듯 말이다.
“아군이야! 아군!”
그때 화약에 찌든 얼굴의 장벽 책임자인 주영우 준장이 밝은 얼굴로 나타나 말했다.
“아군? 요즘 강림자는 짐승도 있습디까?”
“몰라! 나도 위에서 받은 명령이야! 나머지는 마무리 하는 대로 헬기로 출발한다더군!”
“오, 저쪽은 좀 만만했나 봐요?”
주 준장의 말에 도원이 반색하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답했다.
“아니. 그쪽은 마계의 대공이 직접 왔었다더군.”
“……대공?”
“어찌 되었든 전투중이라 연락이 두절되었었는데 인편으로 알려 왔네.”
뒤쪽에서는 몰려드는 마물들을 향해 무기를 들어 올리는 이들에게 아군이라고 쏘지 말라는 말이 반복되었다.
“대체 뭐가 뭔지…….”
하지만, 이미 뒤쪽에는 전달된 내용이 있었는지 길을 열고 있었다.
“우리도 길을 열자.”
도원의 명령에 방어선으로 몰려오는 마물들을 보면서도 길을 열었다.
그 순간 순식간에 내달려온 마물들이 스쳐지나갔다.
“우하하하! 나 잡아 보아라아아!”
“꺽정이면 진짜 임꺽정인가?”
호피옷을 입은 이가 지나가고 그 뒤로…….
“아아악!”
낯익은 얼굴의 배우 하나가 머리 둘 달린 늑대위에서 비명을 내지르며 지나갔다.
“이름이 광호랬나?”
“그쵸?”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마물들이 최후 방어선으로 달려들던 또 다른 마물들을 덮쳐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심 없이 길을 잘도 열어 줍니다.”
“경보기가 조용하니까.”
도원의 말에 팀장들의 시선이 김경징을 향했다.
그때 김경징이 환도를 뽑아들며 외쳤다.
“적을 주살하라!”
그렇게 외치며 말을 달려 나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도원이 중얼거렸다.
“씨파, 내 강림자는 왜 볼 때마 다 쪽팔리지.”
“도, 돌격!”
도원의 자조 섞인 음성에 팀장들은 알아서 모른 척하며 강림자들과 함께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뒤로 도시를 날아 온 헬기들이 하나둘씩 내려앉기 시작했다.
진짜 지원군들이다.
* * *
콰작!
끝까지 버티던 군주급 마물의 머리통이 부루의 대부에 박살이 나는 순간 마물들이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강림자들이 쫓기 시작했다.
“쉴 틈이 없구만 기래.”
대부를 어깨에 둘러맨 부루가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때 전신 길드장 임병화가 피곤에 쩔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욕 봤구만 기래.”
“그래도 버틸 만은 했습니다.”
부루의 말에 병화가 힘없이 웃음을 입에 매달았다.
장벽의 절반이 무너져 있었다.
아직 마물들이 일소되지 않았음에도 차량들이 들어와 부상병들을 옮기고 있었다.
군주급을 처리해서인지 위쪽으로는 드론들이 다시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 정말 이제는 때려 죽여도 못하겠네. 헬기는 원 없이 탔구나. 인천에 부산까지…….”
옆에는 고빈이 그대로 벌렁 나자빠졌다.
온몸에 마물들의 피와 살점으로 범벅인 것만 보아도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내 말이.”
그 옆에는 구도원도 주저앉아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병화도 그대로 드러누웠다.
“하아아. 이제 좀 쉬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