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신입이요!
-참 특이한 곳이야.
사자의 대공 게르하이오 펜 기오르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을 툭 뱉었다.
-지구라고 하는 곳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지구. 쯧, 지구라는 의미의 별들이 뭐 그리 많은지.
-그래도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이 둥근지 아는 곳은 드물었지 않습니까.
기오르그는 고위 마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드물지. 특히 이토록 물질계가 발전한 곳도 드물고…….
이곳은 물질문명의 극을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의 의지가 떠나간 별이 이토록 귀찮게 굴지 몰랐다는 게 더 놀랍기도 하군. 푸흐흐.
기오르그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신의 의지가 떠난 세상이기에 쉽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어찌 보면 별의 의지가 강했기에 신의 의지가 있을 필요가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옵니다.
-그렇지? 처음으로 별의 의지가 이렇게 까다로울 수 있구나 싶더군.
기오르그가 한 손을 휘저었다.
검은 어둠속에 푸르게 빛나는 행성이 보였다.
바로 지구였다.
-쯧, 그저 별의 몸부림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인데.
-물질문명이 이렇게까지 발전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사옵니다. 신들의 불찰이옵니다.
-불찰은 무슨. 그저 재미있는 경험이라 생각할 뿐.
-하온데 여줄 것이 있나이다.
-이번 균열에 관한 것인가?
-어찌 기회를 주셨는지…….
저번의 실패 이후 이미 점령한 침식지를 안정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 작업 또한 지난했다.
이건 일종의 법칙과 같았다.
점령지를 넓히지 못한다면 특정 이상의 강자가 차원의 균열을 통해 넘어가지 못한다.
이 역시 별의 의지가 개입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곳 역시 질서계라 불리는 곳의 침략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질서계는 흔히 천계라 잘못 알려진 곳이었다.
딱히 마계와 대척점에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호의적인 곳은 아니었다.
마계는 여타 행성들의 음차원적인 마나를 먹잇감 삼는 세상이었다.
그중 제일은 생명체의 소멸순간에서 오는 음차원 마나였다.
문제는 이런 음차원 마나가 팽창하면서 균형이 조금씩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때론 차원계 하나가 무너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 균형이 중요했다.
그렇다 보니 마계의 지나친 침공은 균형을 과도하게 무너트린다.
그런 경우에는 질서계라 불리는 이들이 이곳을 침공하게 된다.
물론 그들 역시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비슷한 제약이 있다. 그러나 그 제약은 이곳의 힘이 줄어든 만큼 풀어지게 된다.
그렇기에 마계에 종속된 마물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줄어들게 되면 틈이 점점 크게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걸 알게 되면 이곳은 불필요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불필요하다는 의미는 질서계의 존재는 이곳 존재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음차원의 마나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마계의 힘이 줄어들게 되면 그들의 힘 역시 일부가 스스로 소멸에 접어든다.
흔히 말하는 자살과 같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에 대한 의식이 없다.
그저 창조주였을 것이라 예상되는 존재가 만들어 낸 법칙을 유지하는 개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이 모르는 사이 이곳의 힘과 질을 높이는 것.
그리고 나중에는 질서계를 무너트리는 것이 목표였다.
만찬을 위해 말이다.
물론 한번 무너트린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들은 아니다.
괜히 창조주가 만들어 낸 법칙이라는 것이 아니다.
어디서고 다시 씨앗이 커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미 한번 무너트린 다음에는 그 씨앗을 찾아 파헤치는 것이 어려울 리 없었다.
그때는 반대로 이곳이 새로운 질서의 위에 서게 된다.
그걸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리하게 되면…….
그 사이 이들의 힘이 극대화되게 되면, 새로운 창조주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 길에 다가가려는 이들은 모두 일곱.
그러나 그중에 셋만이 앞서 나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때에 기오르그는 그 기회를 소외된 나머지 넷에게 준 것이다.
-일단. 내 힘이 너무 강하다는 게 문제지.
세 대공 중에서도 그의 힘이 가장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차원균 열을 열고 수하들을 내보내는 일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용병을 받아들였겠는가. 단지 수하의 힘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영향력을 받은 마족 자체가 문제였다.
-하오나, 그들이 성공하게 되면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겠사옵니까?
-성공하면 그렇겠지.
-그럼 그들이 실패하리라는 것입니까?
도태되어가는 대공이라지만, 엄연히 칠대공의 일원들이다.
그중 하나는 직접 뛰어든 상황이었다. 물론 가장 한미한 영향력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 것 같던가?
기오르그의 질문에 고위마족은 섣불리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차원의 법칙은 필연의 연속. 우연이라 부르는 것들은 그저 그 원인을 모르기에 우연이라 평할 뿐.
간혹 대륙의 영웅이라는 존재들로부터 군단장급이 당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번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심지어 연이어서 말이다.
물론 두 번째는 쓰러졌다기보단 후퇴를 한 것이지만.
-때론 잠시 쉬어 갈 필요도 있지. 그리고 어차피 이쪽이 제대로 병력을 밀어 넣으려면 영역을 더 넓혀야 하니까.
-대공의 뜻대로 행하여질 것이옵니다.
고위마족이 고개를 조아렸다.
기오르그가 그런 고위마족을 바라보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뭐 반쯤은 유희라 봐도 좋지 않은가? 프흐하하하하!
기오르그의 웃음소리가 대공성을 뒤흔들었다.
* * *
미국쪽 인원들은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이는 맷 할러데이 중장이었다.
소환자이지만 강림자가 없는 맷 중장이었다면 사실 이들을 이끌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바로 며칠 전 맷 중장도 드디어 강림자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강림자는 인디언이었다.
보통 미국 쪽 강림자들이 그 핏줄에 의해 영국 등 유럽권 강림자들이 주를 이루었던 것과 달랐다.
물론 인디언 강림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강림자는 특별했다.
바로 크레이지 호스라 불린 인디언이었던 것이다.
미국에 의해 최후를 맞이했던 그가 미국을 지키기 위해 다시 섰다는 것이 가장 아이러니한 부분이었다.
“제너럴. 그럼 전 이만 가겠습니다.”
“기래. 서로 말할 시간 없디 않네? 잘 싸우고 보자우.”
을지부루의 화답에 맷 중장은 미소를 머금었다.
가르침을 받던 대상이기도 하지만, 좋은 술친구이기도 한 부루였기 때문이었다.
뒤돌아 선 맷 중장이 완전군장을 갖춘 군인들을 보며 외쳤다.
“뭘 구경하나 이 멍청이들아! 전쟁이다! 무브!”
“옛써!”
맷 중장의 호통소리와 함께 군인들이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움직여야 합니다! 활성화가 얼마 안 남았습니다.”
강문호 대위가 말을 걸자 부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럼. 우리도 가야디.”
부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보니 먼저 뜨기 시작한 미군의 헬기 옆에 또 다른 기체가 있었다.
부루와 그 일행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것들이었다. 다만 그 숫자가 많기에 허공에는 여전히 많은 헬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조심해요!”
고빈의 외침에 임병화는 쓴 웃음을 머금었다.
“걱정마라. 그리고 뭐 이정도면 어디 가서 죽지는 않지 않겠냐?”
병화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곁에 십여 명의 가우리 병사들이 있었다.
동시에 세 곳의 침식균열이 생긴 바람에 가장 강한 전력인 그들은 각각 나뉘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빈과 부루 일행.
다른 하나는 전신길드와 얼마 전 입소하여 기초 훈련을 받던 소환자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신컨 길드와…….
“에이 씨! 똥 밟았네!”
구도원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욕설을 뱉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린 곳에는 대원 길드원들이 있었다.
대원 길드가 주축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때 장웨이가 도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디 가서 눈먼 칼에 뒤지지나 마라.”
“내가 너보다는 쎄거든?”
“그쯤이야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말하던가.”
퉁명스럽게 대꾸한 도원이 헬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다가 스치듯 몇 마디를 남겼다.
“또 보자.”
그 말을 끝으로 도원이 헬기를 향해 내달렸다.
“가셔야 합니다! 공항에 특별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매니저의 외침에 장웨이 역시 준비된 헬기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그래. 또 보든지…….”
왠지 모를 미소가 장웨이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때 문득 그를 응시하는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옆으로 따라 붙고 있던 여포였다. 최근 들어 점점 감정이 풍부해진 터였다.
“왜?”
“음. 남자가 취향이었군.”
“왕빠단!”
“아니면 말고.”
장웨이는 왠지 이전의 여포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하며 헬기를 향해 내달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여포가 다시 중얼거렸다.
“쑥스러웠던 거였군.”
달리던 장웨이가 비틀거렸다.
헬기로터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도 그 말은 제대로 들렸던 모양이었다.
타타타타!
헬기들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판도라 멤버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을까?”
“괜찮겠지.”
세인의 중얼거림에 제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제이를 보며 레이니가 물었다.
“언니는 참 태평하네.”
“뭐, 알잖아. 전에도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녀의 말에 다들 피식하니 웃음을 흘렸다.
그건 팩트다.
역사에 남을 테러리스트로 남았을지언정 그들의 진면목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산증인들이 바로 그녀들이었다.
“그래. 믿어야지.”
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때 빛이 번뜩였다.
“응?”
“뭐지?”
“안쪽인데?”
그녀들이 놀라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이승배가 주저앉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방문했던 광호 역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세인이 묻자 문 안쪽을 바라보며 주저앉아 있던 승배가 울상을 하며 중얼거렸다.
“누가 이거 꿈이라고 좀 해 줘.”
승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세인이 문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
그녀는 눈을 꿈뻑거렸다.
마치 뭔가 잘못 봤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 안에 가우리의 기병이 서 있었다.
“응? 이 아저씨는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뒤따라온 제이가 그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승배가 허탈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럴 거야. 나도 지금 처음 뵙는 분이니까…….”
“…….”
승배의 말에 제이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오빠 소환자였어?”
“아니.”
“그럼?”
“지금부터 된 거 같아.”
승배가 울상을 짓는 이유.
누구나 꿈꾸던 소환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환자가 이곳에서 어떻게 굴려지는지 가장 잘 아는 이가 바로 승배이기도 했다.
“그런데 둘?”
레이니의 중얼거림에 제이가 다시 안쪽을 바라보았다.
한쪽 구석에 짧은 곰방대를 불량하게 물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거한이 보였다.
호피 가죽을 입고 있는 이였다.
누가 봐도 강림자였고…… 아무리 좋게 봐도 산적이었다.
“산적?”
“꺽정이라 불러라.”
“…….”
광호가 울상을 지을 때 제이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아. 누가 조폭 출신 아니랄까 봐.”
“언니. 그건 검계 아니야?”
“그거나 저거나.”
“꺽정이라 불러라.”
“알았다고 아저씨야!”
“꺽정이다.”
연기를 훅 하니 뿜어내는 자칭 꺽정이를 보며 제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바삐 지나가던 구은태 박사가 그 모습을 발견했다.
“응? 자네들?”
잠시 후, 그 둘은 마지막 헬기에 강제로 태워져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