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댓가 없는 평화는 없다.
그때였다.
“부루 그만.”
“…….”
순간 부루의 얼굴이 덜컥하니 굳어졌다. 빈의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떠오른 생각은 ‘이놈이 죽을 때가 됐구나.’였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며 잔뜩 긴장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자각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일반적인 강림자인 척.
그래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알갔습네다.”
그렇게 대답한 부루가 천천히 빈에게 다가갔다.
그가 한걸음씩 다가갈수록 빈의 얼굴에 걸렸던 인자한 미소가 파르르 떨렸다.
“부루 그만.”
“…….”
부루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보았다.
파르르 떨리던 입술이 안정을 되찾는 동시에 빈의 두 눈구멍 끝이 동시에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말이다.
“즐거워 보이십네다.”
“응. 고마워.”
부루가 완벽한 통제에 따라 준다는 것에 안심을 한 것인지 빈이 절룩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그는 오히려 부루를 향해 다가갔다.
대담한 모습이었다.
다들 조마조마한 가운데 부루의 옆으로 다가간 빈이 기자들을 보며 웃었다.
“이그. 심했네.”
빈의 시선은 오줌을 지린 기자를 향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자가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기동대원이 다가와 눈에 익은 운동복 바지를 건네었다.
“빤쓰는 없고. 이거라도.”
“아, 그, 감사합니다.”
기자는 재빨리 운동복 하의를 낚아채고는 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그때 구 박사가 입을 열었다.
“보셨습니까. 아직도 쑈 같습니까?”
그때 부루가 천천히 몸을 돌려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언제든 바라면 말하라우. 저 아새끼 기분이 어떤디 친히 알려줄 터이니까네.”
“쓰읍! 부루 앉아.”
“…….”
부루의 협박에 빈이 인상을 쓰며 명령했다. 찰나의 망설임은 있었지만, 부루는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런 부루의 머리 위에 빈의 손이 올라갔다.
터억.
이어서 양옆으로 왕복 운동하는 빈의 손바닥.
“참 말도 잘 듣습니다. 여러분 안 물어요. 걱정 마세요. 흐흐흐흐.”
잠시 다시 얼어붙었던 기자들에게 구 박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이런 강림자가 대로변을 돌아다닌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하아아.”
“후우.”
여기저기서 탄식과 한숨이 쏟아졌다. 직접 경험하고 나니 상황이 그냥 가볍게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기업의 이윤을 국가가 침해한다는 생각 따위는 싹 사라졌다.
공공의 안위.
지금 대침식 이후의 세계는 그 어떤 논리보다 앞서 있는 대명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저렇게 순한 양 같은 강림자가 조금 전만 해도 어땠습니까?”
기자들의 시선이 다시 부루를 향했다. 그러자 빈이 히죽 웃으며 쓰다듬던 손으로 부루의 머리통을 찰싹찰싹 두드렸다.
“어때요? 지금은 괜찮죠?”
그때 구 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지금처럼 평범했어도 아까와 같은 모드로 바꾸면.”
구 박사가 아까 빈과 부루가 대련 시작 전에 했던 것 마냥 리모컨 같은 걸 그들을 향해 내밀며 눌렀다.
“어?”
순간 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빠악! 콰콰콰쾅!
“…….”
“해, 해제!”
순식간이었다.
지금이라면 뭔가 뇌리에 남길 만한 장면이 나오겠다 싶어서 신호를 보냈던 것인데 마치 말리기도 전에 일이 벌어졌다.
기자들은 입이 떡 벌어진 채 한쪽 건물에 난 구멍을 바라보았다.
철근이 안쪽으로 뜯겨지듯 휘어져 있었다.
포탄도 저렇게 깔끔하게 구멍을 내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만화도 아니고…….”
딱 봐도 사람 머리와 팔다리 같은 형상으로 구멍이 나 있었다.
물론 맞는 소리만 들렸다.
그랬더니 부루의 머리통에 손을 올렸던 빈이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물론 어디에 있는지는 구멍 뒤를 찾아보면 될 거라는 판단은 여기 있는 누구나 할 수 있었다.
그 구멍으로 다시 의료진이 뛰었다.
그때 기자들 중 하나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그럼 여기 오면서 보았던 그 많은 구멍들이 매워져 있는 흔적들이…….”
“여, 연구의 부작용이 나타났던 흔적입니다!”
더는 불신을 가진 기자들 따위는 없었다.
“여러분들이 잘 판단해 주시고…….”
“이런 위험한 훈련을 계속하는 이유가 뭡니까?”
“반인류적인 사태라 볼 수 있습니다. 범죄집단들이 활용하게 되면 어찌 되겠습니까!”
기자들은 등줄기에 소름이 쫘악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결코 아름답지 못한 일들이 연이을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어도 테러리스트는 존재했다.
오히려 하늘의 심판이라며 더욱 기승을 부리기도 했다.
“알아야 막습니다. 그것을 연구 중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강해질 수 있단 겁니다.”
“아구구!”
그때 의료진의 처치를 받은 빈이 구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불사신과 같은 모습에 다들 탄성을 흘렸다.
“일반 소환자가 저걸 버틸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구 박사의 말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시겠지만, 지금 빈 군은 유명 스트리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두위치, 너튜브, 파프리카 티비 등에서…….”
순간 구 박사가 멈칫하며 빈을 바라보았다. 빈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치 계속하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듯.
구 박사가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나갔다.
“BJ비니라는 이름으로 방송채널을 개설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이미 우리는 연구의 일부를 증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에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논란거리는 남았다.
그때 구 박사의 말이 이어졌다.
“소환자가 강해진다는 건 여러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지금과 달리 소환자의 안전을 더욱 보장할 수 있으며, 보다 더 적극적인 전투에 나설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말을 기자들이 작은 수첩 혹은 폰에 받아 적거나, 노트북 자판을 쳐내려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이를 우리는 소환자 각성훈련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전신길드와 신컨길드가 성과를 올리고 있으며, 미국 측에서도 우리나라에 막대한 지원을 하면서 훈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미국 이야기가 나오자 기자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대침식 이후에는 그 이름이 빛이 바랬다지만, 그래도 미국이다.
그때 다시 구 박사가 말을 이었다.
“이를 대가로 미국 측은 그들의 국방예산 중 일부를 우리나라에 제공하고 있으며, 레일건이나 코일건 등 미국 자국 내에서만 운용 중이던 첨단 침식지 방어무기를 무상 제공하겠다는…….”
“헐, 이거 실화라고?”
“저거 안 그래도 이면 계약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이미 찌라시가 한번 돈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정식으로 확인되자 다들 놀란 것이다.
“이에 한미 양국은 대 마물 공동방위조약을 맺었으며, 여기에 중국 또한 동참을 하기로 한 상황입니다.”
처음과 달리 다들 열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부는 흥분하고 있었고, 일부는 이게 진짠가 하는 표정으로 받아 적고 있었다.
“야…… 운동복 좀 빌려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거 듣다가 지리겠네.”
“이 기사 나가면 기저귀 산업 상타 치겠구나.”
“여기저기 주모 찾을걸?”
기자들마저 점점 흥분하고 있었다. 국뽕에 취한 것이었다.
“지금으로써는 이 훈련을 적용할 수 있는 건 바로 이곳뿐이며 그렇기에 이곳의 보안 등급은 특급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보안 등급이 특급이라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그 중요도 때문에 이곳에 한하여 군법을 적용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아, 그래서…….”
대원길드가 반박한 내용 중 일부와 연관된 내용이었다.
지원서에도 커리큘럼을 받는 시간은 한시적으로 군인의 신분을 부여한다는 문구가 있었다.
이게 다 군법을 기준으로 적용하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또한 다들 이해하는 모습이었다.
대한민국 성인 남자 대다수가 군 복무를 마친다.
그렇기에 위험한 무기 등을 다루는 군인에게 통제가 크게 따른다는 것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오히려 묻고 싶습니다. 대원그룹…… 아니 대원길드는 이러한 위험한 결과물을 어찌하여 외부로 돌리는지 그 저의가 무어냐고 말입니다.”
구 박사의 질문은 더없이 진중했다.
“거기에 나아가 이곳에 대한 오픈을 요구하는지 말입니다. 기업의 사적이득을 취하려 했다는 핑계로 이쪽의 연구결과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까지 합니다.”
구 박사의 말에 분위기는 크게 기울어졌다.
대원길드 쪽의 입김으로 이곳에 들어온 기자들 일부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니 말 다한 것이라 봐야 했다.
“이거 제대로 안 쓰면 역적인데…….”
“기레기 소리 들으면 다행인 거지.”
“후우.”
일부 기자들은 한숨을 내쉬며 내용을 검토하고 있었다.
대원길드와 관련된 이들이었다.
“심지어 지금 군사적 동맹관계가 아닌 일본과도 접촉을 하는 행위는 국가적인 외교 방향과도 맞지 않습니다.”
확실히 동맹은 아니다.
미국이 끼면 여전히 동맹이 형성되지만, 대침식 이전의 경제관련 분쟁이후 서로 몇 년간의 냉각기를 거치다가 대침식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일반인들의 희생을 나몰라라 한 건 아니었다.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수습한 덕에 주변 국가로 원정을 가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전 세계적인 종말론을 막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럼에도 팩트는 구 박사의 말이 많았다.
그의 발언에 다시 기자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하긴. 아직도 좀 말이 있긴 하지.”
“저번 대침식 때 도움을 주고도 아직 정치적인 문제는 풀리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독도 이야기는 안 하잖아.”
“그럴 정신이 있나? 일본은 큰 섬들이 지금 침식지대화 되어 버렸는데.”
“하긴…….”
그때 한 기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러나 침식과 마물에 대해서는 서로 적극적인 대처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침식 이후 동반자적 관계형성에 대해 이야기가 많았으니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우위니까요. 이전에 우리가 우위이지 않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소리는 안 나왔을 겁니다.”
“그럼 앞으로 일본에 관련해서는 어떤 협의도 없다는 겁니까?”
기자의 말에 구 박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일반 국민들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건 우리도 압니다. 다만 그걸 국가 차원에서 진행을 해야지 사기업이 임의로 또 이렇게 위험한 불완전한 연구를 이용한다는 것은 위험도가 높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제야 기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감정이 없을 순 없다. 그러나 대의가 우선시하는 상황에서 외면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럼에도 순서가 있다는 구 박사의 말은 설득력이 충분했다.
“물론 미국에는 막대한 지원을 받은 터라 어느 정도는 상응하는 게 있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이게 또 미묘하다. 사람의 목숨 혹은 미래가 달린 일이니까.
“물론 후불도 가능합니다. 민간인의 안전이 우선이니까요. 이것까지 무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역시 총력전이니 그에 상응하는 건 있어야 우리 국민을 설득할 수 있으니까요.”
그때 한쪽에 있던 부루가 한마디 툭 던졌다.
“날로 먹디 말라우. 댓가 없는 평화는 없는 법이야.”
강림자의 말이지만, 기자들의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기자들을 바라보는 구 박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미 분위기는 이쪽으로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