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오지고, 지리고, 무지막지하고
* * *
“그럼 영상의 증명과 동시에 왜 당시 상황이 문제가 되었는지 지금부터 검증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구은태 박사의 말에 고빈은 영혼 없는 웃음을 입가에 매달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와……, 이런 게 공개처형인가.”
빈은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며 허탈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런 그를 향해 수십 대는 되어 보이는 카메라가 향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차르르르륵! 차르르륵!
아직 시작도 안 했건만 카메라의 셔터소리는 마치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마냥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영원히 박제되겠구나.”
그런 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를 지켜보는 이들은 눈을 반짝일 뿐이었다.
빈이 다시 억지웃음을 붙잡으며, 서준모 경위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벙긋거린다.
누구처럼 독순술을 배운 건 아니지만, 워낙 짧았기에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웃어.’
빈은 울고 싶었다.
“후우우우.”
빈이 길게 숨을 몰아쉬며 을지부루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저것도 다 연기다.
강림자인 부루가 일반적인 강림자를 연기하는 모습이 가증스러워 보였다.
입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꽤나 참기 힘들어 보였다.
“보시다시피. 소환자는 고빈 군이며 그의 강림자는 여기 보이는 을지부루라는 고구려 말기의 무장입니다.”
그와 함께 부루와 관련된 내용이 한쪽에 준비된 화면에 주르르 올라왔다.
“저거 뭐야?”
인지도 0.00001이라는 숫자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이들도 일부 있는지 덤덤해 보였지만, 전반적으로 놀란 기색이었다.
그걸 보면서 빈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거늘.’
이쯤 되자 빈의 얼굴은 초탈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까의 영상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번 실험은 그것을 증명하는 자리라는 것을 밝힙니다.”
구 박사의 말이 끝나자 한쪽에 있던 강문호 대위가 외쳤다.
“시작하십시오!”
강문호 대위의 외침에 빈이 우물쭈물했다.
마치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빈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구 박사가 입을 벙긋 거렸다.
‘뭐해!’
빈이 벙긋거린다.
‘살고 싶어요.’
다시 구 박사가 벙긋 거렸다.
‘죽이지는 않을 거야.’
빈은 눈물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자, 부루 나를 공격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달려오는 부루였다.
망설임조차 없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평소 하던 대로니까.
부와아악!
그나마 다행인 건, 평소보다는 공격속도가 느리고 공격반경이 더 크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촬영될 영상의 파급력이 더 커지도록 동작을 조절한 것이다. 이곳이 어디던가.
서울액션스쿨이다. 이곳의 특수 관계자이자 동거인 중 하나가 바로 육의찬 감독이고 말이다.
부와아악!
“크아아압!”
부루의 공격을 맞이하는 빈의 입에서 악에 받힌 외침이 터져 나왔다.
콰아앙!
“더헉!”
하지만 용맹스럽게 부루의 공격을 받아낸 빈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뒤로 주르륵 밀려나가며 비틀거렸다. 그러나 비명이나 지르며 비틀거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으헉!”
빈이 옆으로 몸을 날리는 동시에 수직으로 내리꽂힌 대부가 바닥을 쪼갔다.
콰아앙!
바닥이 푹 패이며 사방으로 돌과 흙이 튀었다.
몸을 날린 빈이 바닥을 한 바퀴 구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도끼를 휘둘렀다.
까아아앙!
언제 왔는지 부루가 대부를 휘둘러왔던 것이다. 그러나 막았어도 막은 게 아니었다.
빼어어억!
“꾸웨에에엑!”
부루의 발이 빈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말 그대로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빈이 뒤로 날아갔다.
콰당탕탕!
몸뚱이가 이십여 미터는 날아가 바닥에 패대기 처지면서 두어 바퀴 연이어 굴렀다.
하지만 빈은 그 와중에도 바닥에서 흙을 한줌 모아 뿌리며 다시 몸을 날렸다.
콰앙! 쾅! 쾅! 쾅!
“엇! 억! 헉! 헙!”
바닥을 구르는 빈의 뒤를 따라 대부가 계속 찍어 갔다.
조금이라도 멈추는 순간 몸통이 쪼개질 것 같은 상황이었다.
잘 짜여진 각본이라 보기에는 너무 처절해 보였고, 또 오금지릴 정도로 아슬아슬해 보였다.
“끄아압!”
다시 바닥을 구른 빈이 도끼를 휘두르는 순간 부루의 대부가 그대로 파고 들어왔다.
파캉!
빈의 도끼가 튕기듯 위로 솟구치면서 부루의 대부가 그의 허리춤을 스쳤다.
콰드득!
동시에 빈의 보호복이 찢어지며 피가 튀었다.
“저, 저거 위험한 거 맞아?”
“강림자가 아닌 거 아니야?”
기자들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소환자와 강림자의 대결이라는 희대의 상황을 지켜보며 한마디씩 뱉어내었다.
“넌 조금 전 짜고 하는 거라며?”
“…….”
평소 대원길드나 그룹 쪽에 유리한 기사를 쓰던 기자는 동료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도 정신이 나가 있는 모습이었다.
“헉!”
“꺄아악!”
그 순간 기자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루의 대부가 미처 피하지 못한 빈의 허리를 스친 순간이었다.
질기다는 마물의 외피로 만든 방호복이 그대로 뜯겨져 나가듯 찢어지며 옆구리에서 피가 터져 나온 것이다.
“피! 피다!”
“위, 위험해!”
이제는 기자들이 놀라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때 빈이 눈을 꾹 감으며 외쳤다.
“그, 그마아아안!”
대부의 끝이 복부를 향하는 순간 빈은 눈을 찔끔 감고 외쳤다.
“그, 그마아아안!”
폭!
“니런…….”
살짝 들려온 소리. 그리고 부루의 어설픈 미소.
빈이 고개를 내려 보았다.
부루의 대부 끄트머리가 방어구를 뜯어낸 복부 쪽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아우씨이이이이이!”
빈이 데구르르 구르더니 배를 움켜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빈에게 부루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빨리 말했어야디…….”
부루의 어색한 사과 아닌 사과는 빈의 귓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빈을 향해 대기하고 있던 의사들이 빠르게 달려왔다.
의사들이 달려와 응급조치를 하는 사이 부루가 고개를 삐죽이 내밀었다.
나름 조금 미안했나 보다.
물론 평소에도 과격하게 한다. 목숨줄이 절벽에 매달려야 실력이 늘어 간다는 그의 지론 때문이었다.
평소와 다른 건 피를 안 보는 것과 보는 것 차이다.
“아, 진짜!”
빈이 버럭하며 울상을 짓자, 고개를 내밀어 보던 부루가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간다.
마치 일반 강림자인 척.
“하아.”
빈이 퐁퐁퐁퐁하며 피가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상처를 보며 의사들에게 말했다.
“기왕이면 흉 안 나게 좀 해 주세요.”
“걱정 마세요. 소환자 신체 회복력은 일반인에 비교할 게 아니니까요.”
“네.”
소환자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 중 하나가 바로 그 튼튼한 내구력과 바로 회복력이다.
그래도 소환자가 피를 보는 건 드문 경우이긴 하다.
빈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피를 본 덕에 조금 덜 당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피만 안 났지 온몸의 뼈가 자근자근 씹히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당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낙에 기술적으로 다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픔도 속병도 길고 깊은 편이었다. 그나마 오늘은 피를 봐서 빨리 끝난 거다.
물론 오줌은 좀 지렸다. 다행히 피가 젖어 내려가 바지가 젖어서 티가 안 날거다.
요건 피가 나서 다행인 점이다.
‘지릴 만하지.’
빈이 한숨을 쉬었다.
평소와 다른 것 또 한 가지.
살기.
물론 이게 진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물과의 전투에도 딱히 살기라고 느껴진 적은 없었다.
이건 다른 강림자와 비슷하다면 비슷한 거다.
다른 강림자도 전투적 의지를 가지고 싸우지만, 살기라 생각되는 기운을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비슷하면서도 좀 달랐다.
좀 의무적인 느낌이다.
물론 상대 마물에 따라 다르긴 하다. 상대 마물이 수가 많거나 수준이 높을 때 비슷한 기운이 펼쳐진다.
투기라고 보면 비슷할 거 같았다.
반면에 부루도 비슷하지만, 다른 건 딱히 그럴 가치를 못 느끼는 것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뭐 이런 걸 가지고 살기씩이나…….’라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런 부루에게서 외부에 보여지기 위한 것이지만, 살기가 느껴졌다.
확실히 저번에 갑사급 강림자를 상대하며 느낀 것과는 달랐다.
확신이었다.
그 강림자는 자신을 마물로 인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
지금 느끼고 나니 그 확신은 더욱 진해졌다.
‘진짜 살기는 어느 정도란 말이야 대체.’
빈은 부루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기자들은 유혈사태를 보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구 박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 보시면 자신의 소환자에게도 망설임 없이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막말로 조작이라서 저 강림자가 빈의 강림자가 아니라는 가정을 해도 말이 안 된다.
그게 지금의 강림자에 대한 정의니까.
“이는 범죄에 악용되면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 부분에서 대원길드의 한 개 팀을 구금했던 이유입니다. 당시 영상을 보면 여기 빈 군이 아니었다면 큰일이 났을 수도 있었습니다.”
자연스러운 설득이었다.
그리고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인지도 0.00001이라면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파괴력은 해당 인지도와 비교했을 때 차이가 큽니다!”
한 기자의 질문에 마물관련 전문기자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구 박사가 입가에 미소를 띄며 말을 이었다.
“그게 대원길드의 연구와 우리 연구의 차이입니다. 강림자가 조금이나마 그 실력이 진보하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건 알고 있었다.
일부는 그것을 성장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레벨 업이라고 한다.
어찌 되었든 성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그건 갑사 이상의 장수급에나 해당되는 강림자들에게서 도드라진다.
소위 스킬이라는 것도 그 위의 계층에서 나타나니 말이다.
“그 결과 인지도는 여전히 적은 숫자지만 그 실력이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얻었습니다.”
부루에 관해서는 거짓이지만, 일부는 그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다.
이는 이곳에서 처음부터 훈련을 시작했던 전신길드원들 사이에서 확인되고 있었다.
“그리고 강림자의 표정과 반응도 자연스러워 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연스럽다는 말에 다들 웅성임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그만큼 복잡 미묘한 명령의 전달도 가능해진다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런 구 박사의 말에 또 다시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방금 강림자의 경우는 조금 다른 듯합니다만. 표정의 변화도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순간 일부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아마도 대원그룹쪽에 가까운 이들일 것이다.
“응?”
반대로 구 박사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자연스러워 강림자가 아닌 거 같은 부루에게 강림자 시늉을 내라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내 표정을 어떤 아새끼가 평가를 하는 거이간?”
그때 들려온 목소리.
무뚝뚝해보이던 부루의 얼굴이 이내 뚱한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이내 걸음을 옮기며 해당 기자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 쪽째비 같이 생긴 아새끼가 내뱉은 거이디?”
부루가 다가오자 홍해의 기적이 펼쳐졌다.
좌우로 쫙 갈라지는 기자들.
동시에 말을 했던 기자가 부루와 시선이 마주쳤다.
“다시 말해 보라우.”
“히익!”
순간 기자가 몸을 떨었다.
이어서 그의 바지춤이 젖어들며 따스한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