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진화 혹은 변화
“…….”
여포는 비어 있는 사발을 바라보았다.
“비었으면 줘야디 않네.”
부루의 채근에 여포가 빈 사발을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한쪽에 있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기래.”
부루가 피식 웃으며 사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여포는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
“풉!”
“큭!”
빈 사발을 들어 올리고 있던 부루의 멍한 모습과 달리 주변에선 억누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병 하나를 마시고 난 여포가 상황을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새로운 술병을 들어 잔에 채웠다.
“이, 익숙지 않다.”
“술잔으로 소박맞는 건 나도 익숙티 않아.”
“미, 미안하군.”
하지만 부루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받은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옆의 자리를 팡팡 두들기며 말했다.
“앉으라. 그것만 먹고 갈 거이간?”
“…….”
부루의 말에 여포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맛이 어떻네.”
부루의 질문에 여포가 자신의 앞에 새로이 놓인 사발을 바라보았다.
그걸 말없이 들이키더니 턱을 타고 흐르는 술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리운 맛.”
여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이 일렁였다. 수많은 병사들이 보였다.
승리에 환호하며 술을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고기를 뜯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환상은 금방 사라졌다.
멍한 표정을 지었던 여포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즐거웠던 기억이 났군.”
과거를 생각하면 단편적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주입해 주었던 기억을 떠올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오늘 비로소 처음으로 다른 기억을 할 수 있었다.
감정이라는 것이 새로이 박혀 들었다.
여포는 고기를 집었다.
“쌈장 찍어 먹으라우. 기거이 기가 막히디.”
부루의 말에 여포는 고기를 쌈장에 푹 찍었다. 그리고는 입에 넣었다.
우물, 우물.
처음 한번 씹을 때 약간의 주저함이 점점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턱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맛이 있군…….”
여포가 진정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말없이 술과 고기를 먹었다.
한 잔, 그리고 한 입.
커다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음미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잘만 먹는 구만기래. 여태 안 먹고 뭐한 거이간?”
부루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여포가 멈칫했다.
이어서 술잔과 고기를 내려다보았다.
“알 수 없소.”
왜 안 먹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여포의 눈이 침울해졌다.
“처먹다 울상 지으면 밥맛 떨어지는 법이디.”
“그렇소?”
“기래. 좋디 않네?”
“좋소.”
“기럼 된 거 아이간?”
부루의 말에 여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좀 더 열심히 먹었다. 아까와 달리 게걸스럽게까지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부루와 일행들을 닮아 가고 있었다.
부루가 외쳤다.
“니보라!”
취사병들이 내달려왔다.
“예!”
“소 한 마리 잡자우!”
“소, 소요?”
“길코 와 구경하고 앉았네?”
“예?”
취사병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고기를 가져와 구웠으면 먹어야 하디 않갔어?”
부루의 말에 취사병들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저녁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지랄 말라우. 여기서 먹던 짜장을 시켜 먹던 하면 되는 거 아이간? 병사 관리가 뭐 이래 개판이네?”
부루가 버럭 소릴 내지르자 주변에 있던 장교들이 움찔했다.
“먹으라. 음식 만들고 못 먹는 거 만치 서러운 거 없는 거디. 하더라도 같이 먹고 즐겨야디.”
그러자 취사병들이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부루가 그 시선을 따라갔다.
“멧!”
“써!”
부루의 부름에 멧 중장이 내달려왔다.
마치 신병과 같은 빠릿한 모습이었다.
“거기 미국인가도 이러네?”
“원하신다면 다 바꾸겠습니다. 써.”
“기래?”
그렇게 답하고 부루가 시선을 돌리자 장교들이 버럭 소릴 질렀다.
“뭐해! 음식 식잖아!”
“예!”
순간 취사병들이 합류했다.
일부는 가우리 병사들과 소고기를 통으로 들고 나왔다.
소 한 마리가 그대로 해체되었다. 그때 부름을 받고 왔던 멧 중장이 주변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부루가 그에게 사발을 건넸다.
“한잔 하라우.”
“감사합니다!”
멧 중장은 아직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제대로 된 조력이라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당연히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소환자인 고빈을 포섭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한번 죽은 이를 뭘로 포섭한단 말인가.
거기에 부루의 행동을 분석해 본 결과 건드리는 것보다는 친해지는 쪽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한 가지.
함께 행동하며 싸우는 이들에게 호의적이라는 것 역시 이 선택의 이유였다.
지금은 내 것이 아니면 부숴 버려도 되는 세상이 아니다.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인 것이다. 그렇게 노선을 바꾼 미국은 한국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일단 미국 내에만 설치되어 있던 레일건의 수출이었다.
대 마물 공동방위조약을 맺고 즉시 레일건을 설치해 준 것이다.
최선은 아니지만, 레일건이 있으면 차선은 되었다.
물론 이건 쉽게 쏠 수 있는 병기가 아니다.
잘못해서 빗나가거나 관통하게 되면 장벽 따위는 우습게 무너트리고 날아간다.
아파트 한두 채 무너지는 건 우스운 일이 된다.
사람을 지키기 위한 무기로 팀 킬을 이루게 된다.
그 때문에 레일건은 일정 공간에만 설치가 되고 또 사격 각도 역시 하늘을 향하게끔 해 놓았다.
그리고 레일건의 탄속을 막을 만한 방책을 주변에 다시 쌓는 작업도 필요했다.
다행히 이 부분은 마물의 신체를 이용한 발전된 재료학 덕분에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은 한국의 기술이었다.
부루의 지식이 도움이 되어 새롭게 재료공학이 발전하면서 얻어진 부산물이었다.
그때 부루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어르신 이 술 좀 드셔 보시죠?”
곁으로 다가온 이는 김창진이었다. 그의 손에는 자기로 빚은 술병이 있었다.
“이거 안동소주인데, 귀한 술입니다. 명인이 만든 겁니다.”
“기래?”
부루가 반색하며 술을 받았다.
“캬! 이거이 제대로구만!”
“이 양반아 우리는!”
뒤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김창진이 웃으며 외쳤다.
“설마 제가 한두 병 가져왔겠습니까!”
트럭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걸 본 가우리 병사들은 신이 나서 달려갔다.
그게 술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다시 이어진 술판.
멧 중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네럴 을지께서는 병사들을 참 아끼십니다.”
슬쩍 던진 말이다.
“아껴야디. 같이 싸우는 아새끼들 아니간.”
“그런데 옛날에도 훈련이 그리 힘들었습니까?”
멧 중장의 질문에 주변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우습다는 듯.
“지옥을 봐야 지옥을 펼치디 않갔어?”
순간 멧 중장은 할 말을 잃었다.
지옥이라는 말.
훈련이 힘들지만 지옥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연구원들이 영상을 볼 때는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받으니 절묘했다.
한마디로 죽기 직전까지만 굴렸다.
그게 절묘하다는 것이었다.
“니보라.”
“써!”
“멧도 장군이라 하디 않았네?”
“그렇습니다.”
“기럼 욕 처먹는 거이 좋은 거 아이갔네?”
부루의 말에 멧 중장이 이해가 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창진도 마찬가지였다.
“폐하께서 말씀 하셨디. 군을 이끄는 이는 이래저래 욕먹어야 잘하는 거이라고.”
부루의 말에 창진은 저절로 고진천을 떠올릴 수 있었다.
멧 중장 역시 그를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실제 만나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자료는 질리도록 보았다.
“미친 듯이 굴려서 뒤에서 욕을 먹는 만큼 전투 후에 다시 보는 얼굴이 많아지는 법이디.”
“아…….”
부루의 말에 창진도 멧 중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 욕 좀 먹으면 어떠네?”
부루의 말에 멧 중장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군을 지휘하는 입장에서 공감이 되는 말이었다.
“어차피 말이디. 아무리 훈련하고 해도 죽을 아새끼는 죽는 법이디. 희생 없는 전장은 없는 법이야. 기래서 말씀하셨디.”
어느새 사람들의 이목은 이쪽을 향해 있었다.
“군주란 지옥으로 가는 불나방이라고 말이야.”
“그건 무슨 말입니까?”
창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부루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전장이라는 거이, 어차피 죽거나 죽이는 거 아니간? 그 명령을 내리는 건 군주란 말이디. 업보는 군주의 몫이라는 거이야. 그걸 알면서 군주는 전장으로 병사를 내모는 거이디.”
“아…….”
“뭐 그렇단 거이고……멧. 우는 거이네?”
부루가 당황해서 멧 중장을 보았다.
멧 중장은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감동입니다. 명언입니다. 크으흑!”
멧 중장의 과한 반응에 부루는 웃으며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그리고 창진은 나름 뿌듯함을 느꼈다.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이가 존재했고, 또 보았다는 사실에 말이다.
“뭐, 이런 게 국뽕이지.”
창진의 중얼거림에 부루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뭔 뽕타령이네. 어케 되었든 마시라우. 때론 베풀어야디. 지금은 전쟁 중 아니간?”
“……맞군요. 전쟁 중.”
창진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 세상은 전쟁 중이었다.
평화가 공존하기에 종종 잊지만 전쟁 중인 세상이었다.
그걸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 그걸 자주 잊는다.
그런 면에서 부루의 존재가 고마웠다.
그날의 술판은 점점 번져 갔다.
멧 중장이 끼고 나니 미군 소속 소환자들이 끼었다.
전신길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온 구 박사까지 판에 끼어들며 이곳은 잔치가 벌어졌다.
* * *
잔치는 끝나고 다시 훈련은 시작되었다. 그 어떤 때보다도 독하게 굴렸음에도 어느 하나 투덜거리지 않았다.
부루가 전날 한 말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대련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침식지 말입니까? 하긴 강림자들도 합을 맞추긴 하는 게 좋겠지요?”
구은태 박사의 말에 부루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뭔 소리 하는 거이간? 여기서 강림자가 와 나오는 거이네?”
“……그럼?”
“배웠으면 써먹어야디 않갔어?”
“어…… 그렇죠?”
“걱정 말라우. 숨은 붙여서 올 거이니까네.”
부루의 말에 구 박사는 할 말을 잃었다.
소환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각종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빈과 전신길드원들은 창백하다기보다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염병 현실 레이드라니…….”
이미 실전을 거친 덕이었다. 전투를 한번이라도 거치게 되면 정예병이라 부를 만했다.
그런 의미에서 빈과 전신길드원들은 정예에 가까웠다.
그 와중에 구도원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우!”
하지만 그는 옆을 슬쩍 보곤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옆 사람보다는 자신이 낫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도원의 옆에는 장웨이가 있었다.
“나는 왜…….”
그는 아직 체력 훈련만 받았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여포와 같은 모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