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한 잔의 술
“내래 가긴 어딜 가갔네?”
“에이. 꼭 가자는 건 아니고요. 상황 봐서 척만 해도 될 수도 있고요.”
빈이 번들거리는 눈알을 들이대며 부루를 설득해 나갔다.
“그냥 제가 하라는 대로만 하시면 되요. 후욱! 훅!”
“숨은 왜 거칠은 거이간?”
“하악! 제, 제가요?”
부루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뒤로 뺐다. 빈의 두 눈은 살짝 충혈되기까지 했다.
“독이 올랐구만 기래.”
“예?”
“돈 독이 올랐어야.”
“쿨럭!”
순간 빈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당황한 얼굴로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그, 무슨 소리세요. 하, 하하하!”
“억억 소리가 나는 걸 내래 모를 줄 알았네?”
순간 빈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부루가 혀를 찼다.
“니보라. 눈깔에 지진 났어야.”
“그, 그게 그러니까…….”
“대우는 제대로 받아야디.”
순간 빈의 동공에 일어나던 지진이 멈추었다.
“그럼요!”
“길티.”
“하하하핫! 괜히 쫄았잖아요! 그러니까…….”
“내래 돈이 그리 필요하디는 않디만, 재물이라는 거이 없는 것보다는 넉넉한 거이 좋으니까네…….”
“그렇…….”
고개를 끄덕이던 빈의 머리가 멈추었다.
“뭣하면 주모들께 드려도 좋디. 안 그래도 궁성 하나 없이 사는 거이 맘에 걸리게도 했고 말이디.”
“자, 잠깐요. 지금 무슨…….”
“내래 우리 비니도 아파트 한 채 정돈 해 주갔어. 너무 감동 말라우.”
“…….”
순간 빈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
“기뿐이 아이야. 소고기도 꽃등심에 살치살 투뿔 한우로다가 쏘갔어! 걱정 말라우.”
“쏘시다니…….”
빈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부루가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을 이었다.
“기럼 쥐뿔도 없는 니 보러 사라고 하갔네? 원래 많이 번 이가 넉넉하게 인심을 푸는 법이야. 기러니 기대하라우.”
“…….”
빈은 부루의 기대하라는 말에 자신의 기대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잠시 잊었다.
부루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다 뺏긴다는 생각에 빈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강림자라서 주민증도 없고, 또 그 은행통장도 만들지 못하시니까…….”
“주민증? 이거 말하는 거이간?”
06361105 -104XXXX
주민증이 맞았다.
심지어 앞자리가 두 개가 더 있는 해괴한 형태였다.
아마도 저 앞자리 두 개는 생년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통장도 문제없다고 하니 걱정 말라. 내래 그런 것도 미리 준비 안 했갔네?”
“이, 이거 누가…….”
“김창진이라는 틴구가 해 왔디.”
“…….”
털썩.
순간 빈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 꼴을 본 부루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갑자기 와 계집애마냥 주저앉는 거이간?”
인어공주처럼 두 다리를 한쪽에 빼고 앉은 모습이 부루에게는 그저 여자들 앉는 모습처럼 보였는가 보다.
하지만, 빈은 그런 부루의 타박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빈 느낌만을 받을 뿐이었다.
* * *
“저…….”
“오! 제네럴 을지!”
“…….”
고빈은 자신의 앞을 매정하게 스쳐 지나가는 멧 할러데이 중장을 야속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 고개를 돌려 보았다.
장웨이의 매니저가 슬쩍 시선을 피하고는 음료수를 까서 을지부루에게 달려갔다.
“따거! 이것 좀 드십시오!”
“…….”
허망한 시선을 보내는 빈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척 하니 올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퀭한 장웨이의 얼굴이 들어왔다.
“네게 강림자의 의미는?”
“…….”
장웨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빈이 바짝 말라 갈라진 입술을 열었다.
“일장춘몽.”
“……그럴 수도.”
“그림의 떡…….”
뭔가를 더 읊는 빈의 어깨를 두어 번 도닥여 준 장웨이가 걸음을 옮겼다.
왠지 이 순간 장웨이와 그는 뭔가가 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넋이 나갔네.”
“나 같아도.”
임병화와 윤치원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넋이 나가 좀비마냥 걸음을 옮기고 있는 빈을 보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돈이 눈앞에서 사라진 거니…….”
“그렇지.”
병화의 말에 치원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벌이도 모자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빈처럼 억이라는 숫자가 그것도 달러 단위로 오갔던 적은 없었다.
“부럽다.”
치원의 중얼거림에 병화가 혀를 찼다.
“저 꼴을 보고도 부럽냐?”
“아니, 우리 장군님이.”
치원의 말에 병화가 고개를 돌렸다.
뒤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달고 걸어 다니는 부루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죽었던 사람이 부럽긴 처음이네.”
김창진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처음에 그가 올린 의견서에 다들 황당해했다.
소환자가 아닌 강림자를 잡는다.
말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말이 되었다.
연구원들도 보증을 했고, 이곳의 상황을 총괄하는 구은태 박사도 인정을 했다.
을지부루는 강림자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봐야 한다는 의견.
심지어 그의 중요성은 설명으로 부족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당장 그의 뒤를 따르는 이백여 병력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장수급 혹은 영웅급 강림자들 중 지휘에 특출 난 존재들은 이차강림을 통해 일부 병력을 불러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 이지가 없는 존재들이 대부분이었다.
뭐랄까.
강림자는 외형상으로 구분이 안 가지만, 그들은 외형상으로도 구분이 갔다.
느낌으로 따지면 무채색이었다.
마치 인형처럼 강림자의 명령에 정해진 데이터만을 내놓는 게임의 NPC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저들은 그것과 달랐다.
물론 합류 자체가 2차 소환을 통한 강림이 아니다.
그렇기에 같은 기준으로써의 비교는 어렵다.
하지만 달리 설명이나 비교를 할 게 없었다.
그 하나하나의 위력 또한 남달랐다.
심지어 검모잠과 동수를 이룬 존재들도 여럿 존재했다.
심지어 일부는 돌아다니는 여포를 보며 살점이 튼실하게 붙은 뼈다귀를 쳐다보는 개마냥 침을 흘렸다.
왜 그러냐는 질문에 한번 붙어 보고 싶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제야 알았다.
이들은 말 그대로 야만적이라는 정의가 잘 어울리는 전투 집단이라는 것을 말이다.
거기에 이번에 회유공작으로 인해 눈 밖에 나긴 했지만, 멧 중장의 경우만 봐도, 부루의 존재는 빛이 날 수밖에 없었다.
멧 중장 역시 그 신체능력과 전투력이 올랐던 것이다.
물론 차이는 존재했다.
멧 중장은 예비 소환자다.
강림자를 보유하지 못한 소환자라는 의미였다.
그 때문인지 다른 이들에 비하면 훈련 효율이 절반에 가까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의 신체를 스캔해 본 결과 확실히 그 실력의 상승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일부 신체적 능력은 낮지만, 특유의 형태성질 때문에 화기가 안 먹히는 마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로써 강림자를 소유하지 않은 예비 소환자의 실력도 상승시킬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구는 계속 되고 있었지만, 또 다른 변화 역시 포착되었다.
처음은 검모잠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전신길드의 강림자들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변화라는 건 바로 의사표현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바로, 의견의 개진이었다.
이는 우연히 발견된 변화였다.
훈련 중인 자신의 소환자의 자세를 강림자가 잡아 준 것이었다.
요청을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니 요청은 생각도 못했는데 자세를 잡아 주고 그 자세가 의미하는 바까지 가르쳐 준 것이었다.
마치 사범이 제자를 가르치듯 말이다.
물론 일부 강림자들을 통해 실전된 무술이나 검술 창술 등을 복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전부 소환자가 관여를 했다.
명령을 하고 그것을 행한다.
그게 강림자의 행동 양식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창끝이 흔들리면 의미 없는 법이라네. 창대를 잡은 뒤의 손도 중요하지만, 앞에 잡고 있는 손의 역할 역시 중요한 법이라네.”
지금도 한 강림자가 지켜보다가 자세를 잡아 주고 있었다.
“어, 예.”
그러다 보니 소환자들의 반응 역시 달라졌다.
예전에는 막 대함이 있었는데 이 변화가 찾아온 뒤로는 그런 행동을 하는 데 있어 위화감이 생긴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대함에 있어 상대방에게 인격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봐야 했다.
“좋군! 방금 같은 자세. 기억하게나.”
강림자의 리엑션에 소환자들이 어색해 하면서도 왠지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표정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아직 제대로 리액션이 나오지도 않는 강림자임에도 농담을 던지기까지 했다.
일부 소환자들은 그조차 일종의 진화 방법처럼 인지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 이 부분은 현실성 있다는 생각에 연구진이 장려하기도 했다.
일부 대침식 초기부터 활동해 왔던 강림자들 중에는 꽤나 많은 발전을 해 온 이들이 있었다.
이차 소환이라는 결과물을 가져온 강림자들도 마찬가지다.
그 공통점이 유대감이었던 것이다.
물론 단순 유대감만으로는 전부 설명이 되지 않지만, 확실히 그것이 기본 전제에 깔려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그 다음으로 변화가 온 것은 바로 여포 봉선이었다.
홀로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항상 소환자의 명령이 없으면 지근거리에서 마치 호위마냥 따라다니는 습성을 가진 것이 강림자다.
혼자 이리저리 쏘다니는 건 부루가 유일했다.
그런데 여포마저 홀로 사색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부루의 주변에 얼쩡거리기까지 했다.
이는 장웨이로서도 의외의 상황이었다.
다만 패배 이후 묵시적으로 적극 협조를 하게 된 덕에 이를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장웨이로서도 이 변화가 여포가 강해질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애써 외면하는 척하면서도 관찰의 시선을 놓지 않고 있었다.
지글지글.
훈련장 한쪽에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와…… 저 양반들 앉은 자리에서 마리 단위로 돼지를 먹어치우네.”
식사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음식을 나르면서 혀를 찼다.
그들이 말하는 이들은 바로 을지부루와 그 수하들이었다.
그야말로 지독하게 먹어 대었다.
심지어 술도 원수라도 만난 것마냥 해치워 대었다.
그때 그들의 시선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여포네?”
“그러게. 요즘 부쩍 자주 보이는데.”
여포를 슬쩍슬쩍 바라보던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 놓고 이동했다.
그때였다.
“한잔 하라우.”
한쪽에 앉아 있던 부루가 사발을 들이밀었다.
“술…… 인가.”
“길티. 이런 날에는 한잔 하는 것도 좋디.”
부루의 말에 뭔가를 망설이던 여포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부루가 준 사발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부루가 그 빈 사발에 술을 채웠다.
“이거이 소주라는 거인데. 밍밍하고 떱떱하긴 해도 먹을 만은 하디.”
부루의 말에 여포는 채워진 잔을 바라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표정.
“구경났네? 잔을 채웠으면 비워야 하디 않갔어?”
여포는 부루를 바라보았다.
뚱한 표정.
마치 음식 앞에 두고 뭘 하냐는 듯 바라보는 시선.
여포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사발로 입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기울이기 시작했다.
울대가 움직였다.
꿀렁이는 것이 분명 마시는 행위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들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켜보던 연구원들과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