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없다.
문을 연 구 박사는 그대로 얼어 붙었다.
정확히 코앞에서 마주친 부루의 시선.
하체가 이전의 기억을 되살려서 모든 것을 놓아 버리려는 순간 부루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리면 떼 버리갔어.”
기적이 일어났다.
나오려던 소변이 들어갔다.
타인의 의지에 의해 생리현상이 저절로 멈추어 버린 것이다.
구 박사는 재빨리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허리를 숙였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식사 어데 있네.”
“저, 저기.”
구 박사는 재빨리 식탁으로 부루를 안내했다.
하지만, 그사이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별건 없었다.
활짝 열린 창문 아래에 작은 밥상이 있었다. 그 위에 물그릇이 하나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거대한 도끼가 잘 손질되어 있을 뿐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식탁에는 수저 움직이는 소리만 울려 왔다.
을지부루는 말없이 식사를 해 나갔다. 마찬가지로 나머지 세 사람도 그의 눈치를 보며 식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 뭐하셨어요?”
고빈이 입을 열자 강문호 대위와 구은태 박사가 그를 보며 이를 갈았다.
눈치를 보다 때려 친, 빈의 인내 심에 대한 분노다.
“기냥 있었디.”
“아무것도 안 하고요?”
“기래. 기냥 있었디.”
부루의 말에 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밥을 비운 부루가 옆을 바라보니 물이 가득 담긴 사발이 있었다.
그 안의 물을 보니 이틀간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부루는 작은 밥상 위에 물그릇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에 치성이라도 드리듯, 물 그릇 하나를 밥상 위에 올려 놓고 정좌를 한 채로 앉아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에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지나온 세월이 스쳤다.
개문산성에서 숨을 거둔 이후 하루하루 전투의 나날이었다.
이게 업보이겠거니 생각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후회 없이 나타나는 마물들을 베고 또 베며 시간을 보내었다.
마치 하나라도 더 베어야 뒤따라올 이들이 편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세월도 시간도 흐름도 잊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이 나타났다.
쉬어도 봤다.
신기한 것도 봤다.
원 없이 먹어도 봤다. 신기한 음식이 많아 좋았다.
나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가 익숙한 게 들려왔다.
을지문덕…….
그때부터 고민은 시작되었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세상이 과연 어디인가 하는 고민.
물론 묻고 싶지만 묻지 않았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은 그들이 떠나온 곳이자, 되돌아가고자 했던 곳이라는 걸 말이다.
그런데 망했다고 했다.
가우리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부루는 고개를 저었다.
가우리는 있다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홀로 앞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는 싸우고 지키는 이였으니까.
나아갈 방향을 일러 주는 고진천은 이제 없다.
때론 그 방향에 무엇이 있을지 귀띔해 주는 연휘가람도 없었다.
함께 짐을 나누어 들던 형제 을지우루도 없고, 타박을 받기는 하지만 든든했던 계웅삼도 없다.
잔소리를 달고 사는 대무덕도 없다.
딸처럼 강하게 키웠던 을지도…….
죽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올랐던 얼굴인 그의 반쪽 사라도…….
없었다.
뒤늦게 밀려왔다.
그래서 이곳에 오기 전이 더 천국처럼 느껴졌다. 그냥 싸우고 또 싸우면 되었으니.
육신의 휴식이 정신의 고통이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던 것이다.
타악.
물 그릇이 놓이는 소리에 세 사람이 조심스럽게 부루를 바라보았다.
“가우리가 언제 망한 거이간.”
부루의 질문에 세 사람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가 읊었던 말 때문이었다.
‘망하디 않았어야.’
물론 구 박사는 자신이 또 실수를 할까 봐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말이다.
“괜찮으니까네. 말해 보라우.”
“그게 거진 천사백 년 전의 일입니다.”
“지랄맞구만.”
천 년도 전의 일이라는 말에 부루가 인상을 확 구겼다.
그 옆에서 구 박사가 조심스럽게 연도와 당시 사건을 간략하게 덧붙였다.
그러자 부루가 중얼거렸다.
“서로 지 잘났다고 싸운 아새끼들이 결국 나라를 팔아먹은 거이군. 휘가람 형님이 그 꼴 안 봐서 다행이구만 기래.”
부루의 중얼거림에 구 박사는 잔뜩 들뜬 표정을 지었다.
“기럼 여기는 어디쯤 되는 거이간?”
“아리수 인근입니다.”
“음.”
한강의 지명은 각국에서 달리 불렀지만, 고구려에서는 아리수라고 했다는 기억에 구 박사는 재빨리 답을 했다.
“당은 어케된 거이간?”
“그때의 모든 나라는 모두 새로운 나라로 바뀌었습니다.”
이게 위로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구 박사는 서둘러 답했다.
“그런데 말이디.”
“예.”
“이 세상은 와 이렇게 된 거이네?”
부루의 말에 구 박사가 입을 다물었다.
“니보라. 이 일을 잘 아는 녕감 아이었네?”
“그, 맞습니다만…….”
뭔가 캐내기 위해 이곳에 와 있던 구 박사로서는 뭔가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침식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지만 아직까지도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시원한 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테라포밍의 한 종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침식지가 일종의 전초기지일지 모른다는…….”
구은태의 말에 빈이 놀란 눈을 했다.
물론 방금 말한 음모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외계의 침공이니 뭐니 말이다.
“테라포밍?”
“그 일종의 살기 편한 환경으로 미리 만들어 놓는 행위를 그렇게 말합니다.”
“기렇군.”
그때 부루가 다시 물었다.
“기럼, 난 왜 온 거이네.”
“그게…….”
구 박사가 이번에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설명을 이었다.
“솔직히 의문입니다만, 과학적이지 않은 답변은 있습니다.”
“말해 보라우.”
“그저, 일종의 방어기제일지 모른다는 겁니다.”
“죽은 이를 불러오는 거이 방어 어쩌고라는 거이간?”
“일종의 별의 기억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추측입니다. 사실 최근에는 그 부분에 중점을 두고 해석을 하고 있고, 또 인지도라는 에너지 및 기준 측정법도 일치하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구 박사의 설명을 들은 부루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러면 내 시대의 다른 이들도 많이 왔네?”
부루의 질문에 구 박사가 다시 답을 했다.
“오기도 했고, 다시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사라지는 건 또 뭐이간?”
“소환자가 죽고 나서 점점 희미해지더군요.”
그 말에 부루는 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왠지 처음 온 날, 보호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한쪽에 자리 잡은 이유를 알 듯했다.
“흐음.”
“큼!”
빈은 그제야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마치 이 세상 살아가려면 자신을 잘 보호하라는 듯 말이다.
“기렇단 말이디.”
부루는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앞으론 막 던지지 마시고…….”
“내래 사람 만들어 주갔어.”
“……안전하게 보호를…… 네?”
의기양양하게 답하던 빈이 당황한 눈으로 부루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부루가 믿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대하라우.”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러자 빈이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저기요. 전 엄마가 이미 이렇게 잘 만들어 주셨어요!”
“기래. 고마워 하라우. 단련은 내가 시켜줄 거이니 걱뎡은 말고 말이다.”
“저 제 말은 들리세요?”
빈이 물었지만 부루는 이번에는 강 대위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기런데 강림자 말이디.”
“예.”
“저번에 잿가루처럼 휘날리던 아새끼 말이디.”
“예.”
강 대위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른 강림자도 다 그런 거이간?”
“그렇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기분 나빠서 갈라 버리기는 했디만, 궁금해서 말이디. 뭔가 다르게 느껴져서 말이야.”
부루의 말에 강 대위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실 제가 여기로 두 분을 모신 겁니다.”
“다르다?”
부루의 반문에 강 대위가 옆의 구 박사를 가리키며 답을 이었다.
“사실 여기 구 박사님도 그 때문에 와 계신 것이고 말입니다. 아직 우리는 저쪽 침식지대라 부르는 곳에 대해 모르는 게 많으니까요.”
그렇게 대답을 길게 늘어놓은 강 대위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부루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쭙고 싶습니다. 저 마물들. 보신 기억이 있는 게 맞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놀란 구 박사의 시선을 받으며 부루가 묵묵히 닫고 있던 입을 열기 시작했다.
* * *
“착각이겠지?”
전창걸 대표의 질문에 이승배는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 다행이고요. 그런데 만약 그분이시라면, 여길 찾아오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잖아요.”
“우리가 사옥을 지어서 옮긴 걸 모르시는 건 아닌가?”
전 대표가 초조한 얼굴로 왔다 갔다 했다.
“그래도 좀 있으셔서 대충 택시도 탈 줄 알고 그러실 텐데……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러면 그냥 비슷한?”
“강림자라고 했으니…… 기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 강림자랬지? 하지만 방송 보면 옛 기억을 하는 강림자들이 많아서 역사연구가 활발해졌다고 하지 않나?”
전 대표의 질문에 승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게 일부만 그렇답니다. 일종의 영웅급으로 분류되는 강림자 정도 돼야 그게 가능하고 물론 그 아래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승배의 대답에 전 대표의 얼굴 위로 수심이 더 깊게 드리워졌다.
“왜 그러십니까?”
“그분들이 잡졸급으로 보이디?”
“……그건 아닌데.”
일반인들이 아는 강림자는 딱 이 정도였다.
그때 승배가 뭔가 생각이 난 듯 전화를 들었다.
“잠깐만요.”
“왜?”
“그 우리 사진작가님 있잖아요.”
“누구? 한둘이야? 우리 일 해 주는 사람들이.”
전 대표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승배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을 이었다.
“이번에 판도라 작업 펑크 낸 분요.”
“아! 아들내미 죽을 뻔했다던?”
“그 아들이 소환자랍니다. 뭔가 아시는 게 있겠죠?”
승배의 말에 전 대표가 화색을 띠며 말했다.
“어서 전화해 봐!”
잠시 뒤 전화를 걸었던 승배가 금방 통화를 끊었다.
“왜? 모른대?”
전 대표의 질문에 승배가 대답했다.
“아뇨.”
“그럼? 싫대? 막 비밀 그런 거 있는 거냐?”
“아래에 와 계시다네요.”
“오! 이런 우연이!”
순간 전 대표의 표정이 활짝 폈다.
* * *
띵동.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내리려고 발을 내딛던 마지연은 순간 몸이 굳어졌다.
“대표님?”
전창걸 대표가 방긋 웃으며 그녀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옆에는 이승배 실장이 있었고 말이다.
역시나 웃고 있다.
지연은 두 사람의 미소를 맞이하면서 불안감이 증폭되는 것을 느꼈다.
왜냐면 작업 펑크를 낸 건 그녀이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님 오랜만에 뵙네요.”
“아아, 마 작가. 오랜만이야!”
“예, 예예.”
전 대표가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말을 이었다.
“온다는 말에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오랜만에 차나 마실까 하고. 괜찮지?”
전 대표의 말에 지연은 지은 죄가 있어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