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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를 잡는 방법 (106)화 (106/106)

106화

반면 크라투스의 상처는 조금도 재생되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할 때마다 공허에 먹히고, 생명력도 급격히 빠져나갔다.

사결은 그제야 크라투스가 수척해 보였던 이유를 알게 됐다. 아무 일도 없던 자신과 달리 그는 공허를 찢고 나올 때까지 계속 전투를 치렀으리라. 사방에 산재한 공허가 빙룡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미 색이 바랬다가 이젠 아예 잿빛이 된 비늘은 이전처럼 얼음을 튕겨내지 못했다.

콰직.

오래된 석고판이 부서지듯 비늘이 깨졌다. 그 틈새로 말뚝 같은 얼음이 박혔다. 가슴팍에 얼음기둥이 꽂힌 크라투스는 비명을 지르지도 신음하지도 않았다. 기이할 만큼 조용히 심장 부근에 꽂힌 얼음을 뽑아냈다.

피가 쏟아졌다. 공허는 그 피마저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크라투스가 뒤늦게 숨을 헐떡였다. 그는 어딘가 혼이 나가 보였다. 

이리 나와. 날 죽이겠다면 적어도 모습은 보여!

옆에 있던 사결이 순간적으로 그의 앞에 나서고 싶어질 만큼, 강한 힘이 담긴 명령이었다. 하지만 공허는 고요했다. 종속의 계약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게 뭘 의미하는가. 이 순간만큼은 빙룡과 사결의 마음이 합치했다.

‘이 세계 자체가 됐다’는 의미가 뒤늦게 피부로 와 닿았다.

눈에 핏발이 선 사결이 만들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얼음 창을 만들어 빙룡을 겨냥했다. 크라투스도 그냥 당하지 않았다. 그가 거대한 꼬리로 사결이 있는 자리를 내려쳤다. 꼬리는 중간에 튀어나온 공허에 휘감겼다.

공허는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며 어떻게든 사결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모든 증거가 여원의 소실을 가리켰다. 그가 이 공간에 동화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욱.”

그만둬. 생각하지 마.

“으…아.”

이를 악문 사결이 핏발선 눈을 들어 크라투스를 봤다.

“으아아아!”

그가 빙룡을 향해 뛰어오른 것과 거대한 입에 브레스가 모이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그가 뛰어오른 자리로 다시금 빛 입자가 모였다. 그건 수해용 드론 같기도 했고, 그가 한때 열중했던 광부의 새 같기도 했다.

콰앙!

여러 개의 빛 고리가 파문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콰지직!

콰작!

브레스를 삼킨 고리가 튕겨 나가 공허를 할퀴었다. 미처 다 흡수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힘에 처음으로 공허가 상처를 입었다. 그게 벌어진 자리가 사람의 몸에 난 자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한 사결이 허리를 꺾으며 피를 토했다.

바닥에 쏟아진 피는 흡수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다만 이리 고였다 저리 고였다 하며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여원이 제 피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다고 하면, 너무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걸까. 사결은 낯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들썩이던 어깨는 곧 울음으로 변했다.

크라투스는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에는 두 개의 얼음기둥이 정확히 박혔다. 이번엔 두 개 모두 확실하게 심장을 관통했다.

“…예니스.”

그 메마르고 공허한 부름이 빙룡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거대한 몸체가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무수히 빛나는 얼음조각이 된 크라투스의 잔해는 바닥을 구르다 두 개의 상처 중 큰 상처를 향해 눈가루처럼 날아갔다.

사결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따라갔다. 다시금 무수히 모여든 빛 입자를 몸에 매달고, 그는 상처를 향해 움직였다. 아득하게 멀어 보였는데 저곳에 가겠다고 움직이기 무섭게 바로 앞에 당도했다.

보랏빛 상처 너머를 들여다봤다. 까마득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야였다.

그곳은 사결이 모르는 세상이었다. 보랏빛 하늘과 우중충한 땅, 독이 흐르는 늪지대가 보였다. 수해를 닮은 숲에선 온갖 마물이 꿈틀거렸다. 그곳의 정체를 알아차린 사결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뒤로 물렸을 때, 입자가 상처를 넘어갔다. 귀소본능에 충실한 세포와 같이.

공허에선 평범한 구슬 같았던 것들이 빛나는 유성우가 되어 쏟아졌다. 숲 곳곳에서 게이트가 열렸고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렸다. 

사결은 저도 모르게 한 입자의 끄트머리를 움켜쥐었다. 사로잡힌 입자들이 도마뱀 꼬리처럼 손안에서 꿈틀거렸다. 왜 잡았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놓지도 못한 채 창백하게 굳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다른 상처를 향했다. 이번엔 고개를 돌리자마자 상처 앞이었다.

손아귀에서 꿈틀거리던 것들의 방향이 확연히 바뀌었다. 그것들은 이번엔 이쪽 상처로 들어가려 애썼다. 어느 구멍이든 넘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듯이. 도마뱀 꼬리보단 자석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결의 시선이 상처 너머를 향했다. 그곳도 하늘이 보랏빛이었다. 보이는 풍경도 비슷했다. 다만 저쪽과 선명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여…원?”

여원이 있었다. 그러나 사결이 아는 여원은 아니었다.

아직 덜 자란 몸과 미성숙한 전투 능력. 그건 과거의 여원이었다. 사결은 그가 보는 장면이 현실인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았다. 반쯤 달려들 듯 상처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입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시켰던 상처는 사결을 튕겨냈다. 단단한 젤리에 부딪힌 것 같다. 사결은 익숙함을 느꼈다. 수해의 심부에 몸을 밀어 넣으려 시도했을 때와 비슷했다.

손아귀에 사로잡힌 입자의 꿈틀거림이 격해졌다. 상처 너머의 상황은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원은 몬스터 웨이브에 휘말렸고 성난 물소 떼 같은 마물이 그를 목표로 달려들었다.

아직은 잘 버티고 있지만 곧 체력이 떨어져 죽게 될 게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다.

사결은 돌연 깨달았다.

손안에서 꿈틀거리는 입자와 열 살도 못 되어 보이는 여원, 유성우처럼 내린 게이트가 꽃피던 광경이 선명한 선택지를 제시했다.

지금 그의 손안에 있는 건 결국 무수한 게이트였다. 이걸 이대로 쥐고만 있어도 20년 전의 대재난은 오지 않는다.

어느 구석에 박혀 있었는지 모를 이성이 속삭였다. 여원은 이미 공허에 동화됐고 무슨 수를 써도 돌아오지 않는다. 저 자리에서 죽었어야 할 그가 살아 백담으로 간들, 어차피 오늘 죽게 될 운명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전부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는 게 낫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한 사결은 예전에 여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당신을 만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 접점 자체를 없앨 겁니다. 당신이 날 몰랐으면 하니까.’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접점 자체를 없앨 수 있는 순간.

영화처럼 모든 상황이 변할 거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여원은 저기서 죽고 자신은 수해의 심부를 보지 못하며, 그 대신 크라투스의 침공도 없을 그런 미래가 올 거라고.

사결은 픽 웃었다.

“누구 마음대로?”

그의 선택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말했잖아. 우린 결국 만날 거라고.”

그가 쥐고 있던 입자를 놓았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빛가루가 상처를 넘어갔다. 툭 튀어나온 돌부리처럼 어머니가 걸렸으나 그녀라면 분명 손에 쥔 걸 놓으라고 하셨으리라, 사결은 확신했다. 누구보다 자신의 행복을 바라셨던 분이니까.

아무도 모른다곤 하나, 대죄를 범하는 것치곤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겨우 해방된 입자가 차원을 넘었다. 유성우가 마물의 해일 위로 쏟아졌다. 방금과 달리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무수한 게이트가 열렸다. 그리샤에 재앙이 도래하는 순간에도 사결은 여원만을 응시했다.

“나를….”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다. 그는 울면서 웃었다.

“어서 나를 만나러 와. 기다리고 있을게.”

상처가 닫혔다. 다시 사방에 어둠이 들어찼다. 사결은 공허에 혼자 남겨졌다.

빠지직.

희미한 상실감을 느낄 새도 없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빠가각.

뭔가 단단한 것이 깨지는 소리였다. 유리 같기도 하고 얼음 같기도 했지만 사결의 귀엔 꼭 알이 깨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사결이 고개를 들었다. 공허에 하얀 금이 생겼다. 작았던 균열은 이내 공간 전체를 덮었다.

하나의 세계가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잠깐 정신을 잃었던 사결은 전신을 두들기는 바람에 눈을 떴다.

흐린 시야로 거대한 도시와 도시를 둘러싼 격벽, 격벽 너머로 별의 형태를 알게 하는 거대한 수해가 보였다. 완만한 선을 그리는 행성의 가장자리로 빛이 번졌다.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헌터의 몸이 아니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높이였다.

사결은 뒤늦게 자신이 품에 무언가를 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의식이 없을 때부터 으스러져라 안고 있던 것엔 숨소리와 온기가 있었다. 그의 눈이 속절없이 일그러졌다. 낙하하는 몸과 반대로 하늘을 향해 부스러져 올라간 눈물이 손톱보다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

땅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는 몸을 뒤집어 자신이 바닥을 향하게 했다. 적당한 때에 얼음으로 미끄럼틀이라도 만들면 좋겠지만 남은 힘이 없었다. 어머니가 물려준 탄탄한 육신을 믿는 수밖에. 준비를 마친 그가 눈을 감았다.

예견했던 충돌은 오지 않았다. 대신 익숙한 감각이 몸을 휘감았다. 자성에 밀린 듯 중력이 반전되는 느낌.

사결이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비서는 유능해야 한다.

여기저기 깨지고 부서진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한 사결은 여전히 품 안의 것을 놓지 않았다.

헌터들이 뭐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대신 우둘투둘한 상흔도, 종속의 계약도 없이 아주 깨끗해진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의 박동과 나직한 숨소리에 집중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어깨가 들먹거렸을 때, 잘게 떨린 눈꺼풀이 마침내 위로 들렸다.

“…개판이군.”

자신처럼 말하는 여원의 첫마디에 흐느끼던 사결은 울다 말고 웃어버렸다. 아무도 더 다가오지 않고 거리엔 사결의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비스듬히 도시를 비춘 햇살이 둘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머뭇거리던 여원이 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나?”

“없어.”

대답한 사결이 그의 몸을 틈도 없이 끌어안았다. 잃은 줄 알았던 사람이 돌아왔다. 많은 말은 필요치 않았다. 여원은 멈칫했다가 이내 치밀어 오르는 마음으로 연인을 마주 끌어안았다. 길고 소란스러웠던 밤이 끝났다.

고요한 아침이었다.

귀환자를 잡는 방법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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