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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를 잡는 방법 (105)화 (105/106)

105화

아주 간단하다. 이대로 살짝 힘을 써 심장을 얼리면 된다. 그럼 고통도 별로 없이 조용하고 편안한 끝을 얻을 수 있다.

그의 손에 한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여원에 대한 게 스쳤지만, 곧 무시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걷고도 만나지 못했다면 이곳에 없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이곳은 여원이 만든 공간이지 않나.

사결은 눈을 감았다. 꽉 내려감은 눈이 갈등으로 떨렸다. 한기가 진해졌다.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준 그 순간이었다.

이곳에 있을 리 없는 것이 눈꺼풀 위로 느껴졌다.

빛이었다.

사결은 눈을 번쩍 떴다. 

은은하게 빛나는 새 한 마리가 눈앞에서 날고 있었다. 사결은 어지간해선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을 의심하느니, 세상 전체를 틀렸다고 보는 사내였다. 하지만 당장 맞닥뜨린 상황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희망적이라 의심부터 할 수밖에 없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새는 그의 주변을 몇 바퀴 돌더니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사결은 직감했다. 저 새가 가는 곳에 출구가 있을 것이라고.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새를 따라 걸었다.

기댈 대상이 생겨서인지 점차 현실감이 돌아왔다. 머릿속 시계도 더는 삐걱거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활동을 시작한 머리가 오래된 기억을 가져왔다. 분명 이런 장면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갱도를 걷는 꿈.

그때처럼 새는 자신은 인도했다. 등불과 같이.

“…여원?”

사결은 홀린 듯 중얼거렸다.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상황에서 불가능할 건 또 뭐냐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가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새가 훌쩍 멀어졌다.

주춤거리며 내딛던 걸음이 순식간에 달리기로 변했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새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안간힘을 써 닿으려던 노력이 무색하게, 막상 그렇게 내려앉자 사결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더 다가가지 못했다.

“여원. 네가 맞아?”

다만 확인하고자 했다.

확인해서 어쩔 것인가. 거기까진 생각하지도 못했다. 마치 응시하듯 사결을 올려다보던 새는 소리도 없이 녹아내렸다. 놀란 사결이 손을 뻗었다. 그 손길이 닿기 직전, 형체도 없이 허물어진 빛 덩어리가 쭉 늘어나더니 곧 문이 됐다.

사결은 벼락같이 확신했다.

“…너구나.”

그는 뻗은 손을 황급히 거뒀다. 혹시 잘못 건드리면 홀로 이 공간을 빠져나갈까 봐.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나 보고 있는 거지? 왜 나만 내보내려는 거야. 좀 나와봐.”

여전히 대답은 없다. 공허한 공간엔 은은한 빛을 내는 문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사결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의 격랑에 침묵을 택했을 때, 어디선가 불편한 소리가 들렸다.

우드득.

우지직.

뭔가 단단하고 질긴 가죽 같은 게 찢어지는 소리였다. 사결의 시선이 자연히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멀찍이 떨어진 구석 공간이 뒤틀렸다. 짐승의 태막처럼 한 꺼풀 덮여 있던 어둠을 찢고 하얀 거체가 몸을 일으켰다.

“이… 주제도 모르는 벌레 같은 놈…!”

크르르르.

쇠판을 긁듯 음산한 으르렁거림이 뒤를 이었다. 사결의 미간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나오라는 여원은 안 나오고 지금 제일보고 싶지 않은 새끼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어쩐지 상태가 이상했다. 비늘은 색이 바랬고 덩치도 확연히 줄었다. 긴 시간 헤맸어도 몸은 멀쩡한 사결과 달리, 크라투스는 몸도 정신도 지쳐 보였다.

“다 네 놈 때문이다!!”

크라투스는 다짜고짜 사결을 욕하기 시작했다. 빛나는 새와 문 덕분에 이성이 조금 회복된 사결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이게 왜 나 때문이야. 어디 하나씩 따져봐? 원인은 다 너잖아. 이 개새끼야. 아니, 그리고 내가 벌레면 나랑 같은 종족에 비슷한 조건인 여원도 벌레겠네?”

“…….”

“게다가 네 새끼가 좆같이 굴어서 여원이 도망친 걸 뭔 남 탓을 해. 진짜 미친놈인가. 그 정도도 자기 객관화가 안 돼서 무슨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겠다고 지랄이야 지랄이.”

사결은 거대한 용을 말로 두들겨 깠다. 여태 하고 싶은 대로만 살아오고, 기분이 나빠지면 남이 자기 비위를 맞추는데 익숙했던 크라투스는 속된 말로 주둥이 성능이 달렸다.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용이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닥쳐!”

“할 말 없으니까 닥치라네. 이다음에 뭐 할지 맞춰볼까?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겠지.”

“크아아악!”

크라투스가 브레스를 뿜었다. 새하얀 얼음이 온통 까만 공간을 뒤덮었다. 사결은 본능적으로 문 뒤에 가 섰다. 은은하게 빛나는 문은 브레스에도 끄떡없는 좋은 방패가 되어줬다.

사방에 흩어진 얼음은 잠깐 공허를 하얗게 만들었지만 말 그대로 잠깐뿐이었다. 공허는 그것들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마치 이러기만 기다렸다는 느낌마저 받을 만큼 게걸스러웠다.

그걸 묘하게 보던 사결은 다시 눈앞에서 미쳐 날뛰는 용에게 집중했다. 그의 손에서 수십 개의 얼음송곳이 솟구쳤다. 하얀 거체에 부딪힌 얼음은 갑주 같은 비늘을 맞고 튕겨 나왔다.

사결이 혀를 찼다. 크라투스는 그제야 여유를 되찾았다.

“넌 내 완벽한 하위호환이다. 네 무엇으로도 날 이길 순 없어. 포기하고 벌레답게 찌그러져 죽어!”

“거참, 벌레 좋아하네.”

사결이 이죽거렸다.

“아. 맞지. 좋아하지.”

이건 양날의 검이었다. 사결은 자기가 말해놓고 기분이 나빠졌다. 저따위 성격 나쁜 사이코패스 새끼가 자신을 벌레 취급한다는 것보다 여원을 좋아한다는 게 더 짜증 났다.

눈이 돌아간 빙룡이 거대한 얼음을 몇 개나 만들어냈다. 빙산에 가까운 크기의 얼음들이 사결을 향해 쏟아졌다.

콰릉.

콰과광!

가장 큰 얼음에 찍히자 문도 사라져버렸다. 순간 철렁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저건 여원이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한 사결이 멈칫했다.

‘잠깐.’

그럼 여원은 대체 어디에 있지?

콰직!

“윽.”

생각이 흩어진 사이, 쇄도한 얼음기둥이 사결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갈비뼈 하나둘쯤은 부서진 느낌이다. 이를 악물며 몸을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동시에 거꾸로 흐르는 폭포처럼 거대한 얼음벽이 솟구쳐 공격을 막았다.

콰직!

쾅! 콰광!

얼음과 얼음의 싸움이었다. 부서지고 깨진 조각들은 여지없이 공허에 삼켜졌다.

“다 네놈 때문이야. 다 네놈 때문이라고!”

발악하는 크라투스의 모습은 광룡 그 자체였다. 사결은 습관적으로 반박하려다 멈칫했다. 크라투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여원이 도망친 건 사결과 만나기 전이었다. 그는 크라투스가 싫어 목숨을 걸고 도망쳤다. 이건 이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크라투스는 그걸 인정하지 못했다.

사결은 비로소 눈앞에 있는 존재의 내면이 딱히 성숙하지 못함을 알아차렸다.

‘그냥 애송이였잖아.’

위압적인 외견에 비해 내면은 이쑤시개보다 가늘고 좀스러웠다.

콰아앙!

“크윽.”

물론 가진 무력과 파괴력은 예사로 볼 게 아니었다. 공격이 날아들 때마다 여원이 그토록 두려워한 이유가 실감이 났다. 스친 것뿐인데도 그때마다 뼈에 금이 가거나 살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갔다.

사결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됐다. 크라투스가 기둥 같은 이를 드러내며 파충류의 얼굴로 웃었다. 일부러 빗맞혔구나. 침음을 삼키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피투성이에 옷도 걸레짝이라 별로 효과적이진 않겠지만 말이다.

“이제 슬슬 질리는군.”

용이 고개를 들며 오만하게 말했다. 

“이만 끝내고 예니스를 찾으러 가겠다. 이 지긋지긋한 공간 어딘가에 있겠지.”

마지막을 암시하는 말에도 사결은 웃었다. 역시 잘못 보지 않았다. 여원은 공허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왜 웃지?”

“글쎄. 영혼까지 옭아맨다는 계약을 하고도 나를 향해 뛰어든 연인이 사랑스러워서?”

크르르르.

크라투스는 더 이상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 새하얀 빛이 모였다. 어마어마한 힘이 압축된 브레스가 사결을 향해 쏘아졌다. 

‘끝인가.’

눈은 감지 않았다. 설원에 온 것처럼 온통 새하얗게 변하는 세상을 보며 여원을 떠올렸다. 그와 다시 한번 눈 내리던 호숫가 별장에 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콰르륵.

마지막은 찾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를 향해 쏟아지던 하얀 죽음이 갑자기 솟구친 검은 공간에 빨려 들어갔다. 잠깐 멍해졌던 사결은 자신의 앞에 거대하게 몸을 펼치고 선 공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뒷면에 손끝이 닿았다. 사결은 그저 넓게 펴진 슬라임 같은 공허의 형체가 어쩐지 흠칫거린 것 같다고 느꼈다. 착각인 듯 아닌 듯, 희미하게 읽히는 감정.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된 목소리가 떨렸다.

“너구나.”

거대하고 폐쇄적인 세계.

“이곳 자체가 너였던 거야.”

이 공간이 바로 여원이었다. 이곳에서 자신이 보고 겪은 거라곤 고독과 공허뿐이었다. 아득해진 사결이 비틀거렸을 때, 바닥에서 반딧불이 같은 하얗고 작은 빛 입자가 솟았다.

한기 어린 힘이 느껴졌다. 공허가 내도록 삼켰던 크라투스의 힘이었다. 그것들은 사결에게 스며들어 그의 상처를 봉합하고 기력을 회복시켰다.

크라투스가 공격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광경이 뜻하는 바를 깨달은 빙룡의 눈이 속절없이 떨렸다.

여원 그 자체인 세계.

그 세계는 사결의 죽음을 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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